스페인에서 귀국하던 날, 집에 온 시각은 오전 열시 가량이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자마자 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보니 저녁 7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일어났냐?”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주말엔 손자랑 얘기도 하고 그러는 게 낙이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심심하셨을까(그래도 전화는 자주 해드렸다).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잠만 자고.
“배 안고프냐?”
“별로 생각이 없는데. 할머닌 배고프세요?”
할머니는 무척 배가 고픈 것처럼 보였다.
“점심을 안먹었더니 배가 좀 고프네. 엄마는 언제 오신다냐? 전화 한번 해봐라,”
사진설명: 모사드 요원이 자기 아이를 보면서 왜 자기를 안닮았냐고 투덜거리고 있다.
저녁때마다 할머니는 엄마가 집에 빨리 오셔서 식사를 챙겨주길 기다린다. 정 배가 고프면 혼자 차려 드시기도 하지만, 반찬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니 김치 하나에다 드신다고 한다. 반찬 문제가 아니더라도 혼자 먹는 식사는 맛이 없어서 더더욱 엄마를 기다리는 것 같다. 하기사 TV 보는 것도 취미가 없으신 할머니가 집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우시겠는가. 하지만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고, 힘들기만 했던 엄마의 지난날은 엄마가 삶을 더 재미있게 사셔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엄마는 벌써 67세, 난 할머니한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곧 오시겠지 뭐. 그때까지 저랑 TV 봐요.”
난 스페인에서 사온 과자를 할머니께 드렸고, 케이블에서 틀어준 <벤허>를 할머니와 봤다.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열심히 설명을 해가면서. 하지만 어머니는 8시가 다 되도록 오시지 않았다. 그제서야 후회가 됐다. 진작 밥 먹으러 갈 걸. 난 할머니와 함께 가장 맛있는 설렁탕을 만드는 모레네 설렁탕으로 갔고, 할머니는 맛있게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엄마, 나 할머니랑 식사 했거든. 천천히 오세요.”
사진설명: 오른쪽 남자가 왼쪽 남자에게 바지를 올려입었다고 핀잔을 주고 있다.
토요일인 오늘, 전날 새벽에 잔 탓에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여전히 피곤했다. 할머니 어깨를 형식적으로 주물러 드리고 나서 난 다시금 방에 들어가 잠을 자버렸다. 다시 깬 시각은 오후 세시, 난 농구를 보면서 러닝머신을 했다. 할머니가 묻는다.
“배 안고프냐? 점심도 안먹고.”
“전 생각 없어요.”
8킬로를 달렸다. 샤워를 하고 나서 할머니한테 말씀드렸다.
“할머니, 저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거든요. 죄송해요.”
“오냐, 잘 다녀 와라.”
그때가 다섯시 가량이었다.
나가면서 엄마가 늦게 오시면 할머니가 어떻게 저녁을 드실까 계속 걱정이 되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차례 쯤 전화를 걸었지만, 수신율이 20%에 못미치는 어머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녀를 만나서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화 <뮌헨>의 예매를 했다. 상영시각은 7시 반, 시간 여유가 약간 있다. 용기를 내서 미녀에게 말했다.
“저 혹시 할머니랑 같이 저녁 먹으면 안되겠니?”
무척이나 부담이 되는 자리임에도 미녀는 흔쾌히 수락해줬다. 정말 고마웠다. 할머니한테 같이 저녁 먹자고 전화를 건 뒤 택시를 탔다.
“할머니, 친구랑 같이 왔어요.”
“아이고, 어서 오세요.”
볶음밥과 우동 등을 시켰고, 식사 후엔 커피도 타서 먹었다 (난 쿠퍼스). 우동을 아주 조금만 드셨지만, 그 한 시간 동안 할머니가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모른다. 7시를 조금 지나 서둘러 극장에 갔고, 그때부터 <뮌헨>을 보았다. 2시간 반의 상영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재미있었다. 만약에 내가 미녀와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난, 할머니 생각에 영화에 집중을 못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뮌헨은 그저그런 영화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흔쾌히 수락해준 미녀 분께 감사드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