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난 모 출판사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하 슬퍼)이란 책을 쓰기로 한다.
삶에서 위협이 되는 미생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그 대부분은 에볼라를 비롯한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원래 쓰기로 한 날짜는 2019년 2월 말이었지만,
게을러 빠진 난 연초 두달을 흘려보냈다.
그래도 4월까지는 쓰지 않겠나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였던 윤지오가 사기꾼으로 밝혀진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인터넷을 통해 그녀의 행적을 알면 알수록
‘어떻게 이런 허술한 사기로 전 국민을 속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 뒤 석달간 난 윤지오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일이 너무도 재미있어서 난 ‘슬퍼’ 집필은 잠시 뒤로 미뤄놓고 거기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난 이 자료들을 가지고 책을 쓸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의 강렬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이 책을 쓰지 않으면 제 명에 못살고 죽을 것 같았다.
2019년 여름부터 집필을 시작했는데
너무 쓰고 싶었던 책이라 그런지 글은 술술 나왔고,
너무 쓰고 싶었던 책이라 그런지 새벽까지도 잠이 오지 않았다.
완성이 될 때쯤 출판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출판사는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고, 난 대략 8번의 거절을 당한다.
결국 뿌리와 이파리라는 출판사가 고맙게도 내 책을 내줬다.
난 사장님한테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고,
그래도 출판사가 약간의 이익이라도 남기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내가 사서 돌린 책만 해도 150권은 넘을 테고,
내가 아는 기자들한테까지 다 책을 보냈지만,
C일보를 제외하곤 중앙언론사 어느 곳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오지 않았는데다,
책의 주요 고객들인 진보 성향의 독자들은 내 책을 불편해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윤지오가 우리나라에 잡혀들어오는 것,
그녀가 귀국해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면 내 책이 좀 팔리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경찰은 윤지오에게 인터폴 적색수배를 때리고 여권을 무효화했지만
윤지오는 그러거나 말거나 캐나다에서 아주 잘 살고 있고
여전히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중이다.
결국 책은 개 망했으니, 난 그 출판사에 큰 빚을 진 셈이다.
2020년 1월말,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집밖에 나가지 않았고, 외출할 땐 꼭 마스크를 썼다.
바이러스의 공포를 책으로 달래려는 사람들은 관련된 책을 찾아헤맸다.
아내는 나를 타박했다.
“야, 너 내가 바이러스 책 쓰랬냐 말랬냐? 왜 쓸데없는 책을 써서 그래?”
내 동창 한 명도 어느날 전화를 걸어 그 얘길 했다.
“너 그때 쓴다고 했던 책 썼으면 이번에 대박 났을 텐데, 왜 윤지오 책을 써가지고.”
해당 출판사에겐 내가 먼저 사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흑흑.”
나 역시 아쉽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과거로 간다면 내가 바이러스 책을 열심히 썼을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답은 ‘아니다’일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 윤지오 책을 쓰지 않았다면, 뭘 해도 즐겁지 않았을 것 같았으니까.
* 그 대신 글 서두에 올려놓은, 데이비드 콰만이 쓴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가 잘 팔리고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써봤자 이 책에 미치지 못했을 터, 이 시기엔 이 책이 잘 팔리는 게 정의다. 내 책은 그냥 평화로운 시대에 출간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