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9 己巳年, 潘南 朴, 태보는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직접 작성하여 승정원에 제출했다. 
연합 상소였다. 
오두인은 벼슬이 가장 높았고 상소 대표자가 되었다. 

 상소를 올린지 꽤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는 해질녘 황혼이 깃드는 시각,
숙종은 갑자기 승지 이서우를 불러 상소를 읽게했다.

 상소는 '전 판서 신 오두인~ ' 으로 시작하여 '신 등은 서러워 울며 아뢰옵니다!'로 끝을 맺고 있었다.
상소의 내용은 인현왕후의 남편이 되는 숙종에게 본 처인 인현왕후를 내치지 말아달라는 읍소였다.
즉, 당신의 마누라를 당신께서는 내치지 말아주세요~~ 하는 상소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숙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밀려나는 상징적 사건이기에
서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었고,
자신들을 위한 집단행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중전을 폐서인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태클을 걸기에 그만한 명분이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참고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관한 괴이하고도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말그대로 믿을 것들은 아니다.
폐서인을 해야하거나 사약으로 죽일 작정을 한 마당에 어찌 그들에대한 아름다운 전설들이 남아 있겠는가.
없는 죄도 만들어 덥어 씌워야 그 죄를 물어 단죄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경우에 따라 없는 죄도 있게되고 없던 미담도 생겨나는 법이다. 박태보를 죽이기위해 죄가 만들어진 것 처럼말이다. )

숙종은 11세 되던 해에 혼인을 했는데 부인은 광산 김씨 인경왕후였다. 
김만기의 딸로 숙종에게 시집와 딸을 둘 낳았으나 모두 생존하지 못했다.
 인경왕후는 자신이 천연두를 앓다가 자식없이 일찍 유택에 들었다. 
하여 숙종은 15세에 여흥 민씨 유중의 딸 인현왕후를 맞이했다.
 인현왕후 역시 오래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바로 인동 장씨 희빈이다. 
숙종실록은 희빈 장씨를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라고 쓰고있다. 
실록이 조선의 왕비중 유일하게 외모를 언급한 대상이 희빈 장씨였다. 
그 미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숙종은 여인과 관련하여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숙빈 최씨와의 로맨스는 드라마로 제작될만큼 극적이었다. 
아니, 숙종의 여인들은 거의 극적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숙종은 여러 비와 후궁을 두었으니 권력을 쥔 자의 이점을 마다하지 않은 임금 중 하나였다.
어째거나 남인의 여인인 희빈 장씨와의 로맨스가 달달한 만큼 서인의 여인인 인현왕후와의 서먹함은 깊어갔다.
때마침 장씨 희빈이 회임을 하더니 떡 하니 불알달린 사내를 출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간 서인들의 권력에 염증을 느끼며 이자쉭들을 어떻게 손봐줘야하나 하고 있던 찰나였고 숙종은 옳커니 했다. 
대권주자를 생산한 희빈을 중전으로 들이고 
그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여 서인들의 힘을 싸그리 잘라버려야겠다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정치 권력의 판도를 다시 뒤집어보기로 작심한 숙종은 정실부인을 내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털기로 작정하면 먼지 없는 자가 어디있겠는가. 
중전 민씨는 그렇게 티끌이 쌓여 태산이 되었고 결국 폐서인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바로 그 시점과 사건을 국사교과서는 기사환국이라고 칭한다.

 그 기사 환국의 불씨를 당긴 것이 바로 이 상소였던 것이다. 
죄인을 잡아들일 때는 흔히 야밤에 이루어진다. 
사극을 봐도 야밤에 군졸들이 죄인의 집안에 들이닥친다. 
요즘도 그 습성이 남아있는 것인지 검찰들은 흔히 깊은 야밤에 쳐들어가 구인(拘引)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그날도 깊은 야밤이었던 것이다.

 1654년 태생인 반남 박, 태보는 모든 것이 다 좋았으나 시대를 잘못, 
아니 주군을 잘못 만났다고 할수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소론의 영수이고 뭇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세당이었다. 
세당은 학식이 남달랐으며 절의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 품이 넓었다. 
태보는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그 아버지 못지 않은 절의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태보가 35세가 되던 어느 날, 멀쩡하던 그가 하룻 밤 사이에 운명을 달리하니, 
온 세상이 함께 울었다.
태보의 주군은 숙종, 그 이름이 등골을 서늘하게 하며, 
냉정하고도 혹독하여 신하들도 벌벌떨게 하던 바로 그 임금이었다.
숙종은 환국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정권을 통제했다. 
그야말로 신하들을 생선 굽듯이 앞뒤로 맘대로 잘도 뒤집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인 선대 현종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매가리없고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었던 점을 잊지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송시열은 임금을 생선굽듯 다루었던 것이다. 후에 숙종이 끝내 송시열을 죽인 것을 보면 벼르고 별렀던 일인지도 모른다.) 

 숙종은 일이 이지경이 되는 것을 좌시할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임금이 되기만 해봐라 니들은 다 죽었어!' 뭐 이런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태보가 상소를 올린 시기도 숙종이 또다시 정권을 바꾸려고 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으니, 
또 누군가를 희생시켜야하는 바로 그 시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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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당은 은(訔)의 직계 후손으로 반남을 빛낸 최고의 인물이며, 
정쟁으로인해 두 아들을 앞세운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관직생활을 했으나 세당에 관해서라면 큰 의미는 없다 하겠다. 
그가 얼마나 된사람이었고 
의기가 있었으며 
훌륭한 인물이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당의 학문은 깊고 드높아서 당대 최고봉 중의 하나였다. 
깊고 드높기만 한것이 아니라 폭도 넓었다. 

당시의 학문은 주희에 매몰되어있었고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전진했다. 
그 길은 퇴로도 없고 갈래길도 없었다. 
주희에게로 난 돌아올 수 없는 외길,
그 외통수의 길을 걸었던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었고, 
늘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이던 것이 조선의 학문이었다. (이런 미친...)

마치 눈가리개를 한 당나귀를 똑 닮은 조선의 유학자들에 비하면 
반남 가문의 빛나는 세당은 차원이 달랐다.
세당은 노자를 공부했고 주를 달았다.
장자도 공부했다. 남화경주해산보, 를 썼다. 
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금기였다.

나아가 사서에 관해서는 사변록을 저술했다. 
사변록은 교조화된 조선의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세당의 반항과도 같은 것이었다. 
백성의 아픔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먹는 
조선의 실권자들에게 태클을 거는 바른 학자로서의 시위였다.

사변록은 대입 수능의 본문으로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왜냐? 사변록은 형이상학에 매몰된 관념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의 학문을 
실학이라는 현질적 도구로 승화시키려는 깊은 의도가 숨어 있는, 
그야말로 그 뜻이 갸륵한 세당의 저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는 세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주 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이름은 색경(穡經)이다. 
색경은 농사의 기법은 물론 물고기 기르는 법, 축산, 원예  등 농사 짖는 백성들에게 정말 도움되는 저술인 것이다.
 
무릇 선비라면 백성을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의 냥반들이 손에 호미 한번 들지 않고, 
또한 물한방울 대지 않으면서 가만히 앉아 잘먹고 잘살았던 것은 
오로지 남의 힘을 빌린 탓이 아니던가?

그러니 백성을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거늘 되려 냥반들은 백성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조선 정부는 이를 방관했던 것이다.

조선의 유학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세당은 
자신의 학문으로 뜻있는 식자들을 일깨웠다. 
결과적으로 편고한 학문의 최고봉이자 조선의 주희였던 송시열과 뜻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미워죽겠는 세당을 송시열이 가만 둘리가 없다. 
세당에게 사문난적, 이라는 혐의를 씌우고는 끝내 세당을 죽여버렸다. 
송시열은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기 전까지 셀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저술을 남겼지만 
이 모든 것들은 세당의 '색경' 하나와도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 그토록 입바른 소리를 하면 뭣하나, 
백성들이 환대하는 대동법 시행을 목숨걸고 반대한 장본인이 송시열이 아니던가.
송시열은 대동법 시행을 왜 반대했던가? 
냥반들의 이익을 해치고 백성들의 이익을 늘려주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열은
임금이 자신에게 대동법에관해 묻자
'백성들이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라며 현종에게 거짓을 고했다.
(왕에게까지 거짓말을 고하다니!!!! 
송시열, 정녕 네가 죽고싶은것이더냐? )


색경은 오로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 지은 저술이다. 
뛰어난 아들 둘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세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경을 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백성을 위해 글을 남겼다. 


이에 감동했던 것일까?
색경은 또한 한국사 시험에서도 제시되는 자료이다. 
아, 이런 세당의 신념을 이어받은 후세들을 교과서는 실학자 혹은 경세치용학파 라고 칭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청송심씨 온이 죽으면서, 반남 박씨와는 절대로 혼인하지 말라, 며
반남 박씨에대한 적대감 혹은 깊은 원한을 토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송심씨 노승은 '소론 선배 중 박세당을 가장 좋아한다, 고 고백했다. 
심노승은 노론이면서도 소론의 영수였던 세당의 문장과 절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당쟁을 초월하고 원한이 깊은 가문의 후손에게마저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박세당이었던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숙연해오며, 안타깝고 안타까운 사람, 
그리고 사랑스러운 사람, 박세당이다. 
그 이름 만고에 빛나고 또 빛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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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박, 은 (潘南 朴, 訔 )

朴訔(박은)은 박상충의 아들로
고려말 음서로 관직에 올랐고 후에 급제하였다. 
조선 개국 당시 정도전이 실권을 잡자 
외삼촌인 이색이 힘을 잃으며 자연스럽게 지방 한직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중, 두차례 있었던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태종의 신임을 얻었고, 
중앙에 진출, 대사헌, 병조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1422년 사망한다.

요즘 본관을 따지는 일은 아주 고리타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형적인 꼰대의 기질을 발휘하는 일인지라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다.
세상이 어느 때인데 본관을 따지고드냐 이거다.  
꼭 변변치 못한 혈통을 가진 자들이 본관을 따지고 조상을 운운하거늘, 
내가 그짝이 되고 말았다.

물론 지극히 옳은 말이면서도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고, 강아지도 혈통을 따지던데?  
(강아지의 혈통을 따져서가 아니라 반남 박씨가 좋다는 뜻이다.)

어째거나 나는
사적으로 좋아하는 몇몇 본관이 있으니 
바로 덕수 이씨가 첫째요 
반남 박씨가 둘째이고 
달성 서씨가 셋째이다.
차별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왠지 마음이 더 가는 분들이라는 얘기다.

덕수 이씨에게는 마음으로 진 빚이 있다.
바로 이율곡과 이순신이 그 두분께 말이다. 
율곡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했던 관료요 학자였고, 
순신은 다들 아시다시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던 나라를 구했다. 
참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는 이유이다.

달성 서씨는 유대장군이 주는 깊은 인상 때문이다. 
장군께서는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절의가 있었으며
부하들에게는 너그러웠다.
하여 그의 별명은 덕장(德將)이다. 
부하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장군은 요즘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조선시대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위와 권력으로 갑질이나 할줄 알았지 
현대에도 사람 귀한줄은 모르는 시대가 아니던가. 

하물며 조선시대임에랴...조선은 사람을 물건 취급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서유대장군은 달랐다. 
백성이자 부하였던 하급 병졸들을 그는 따듯하게 대했다. 
달성 서씨에 마음이 가는 이유이다.


반남 박씨는 대대로 절의의 대명사였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으며 
소신과 절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 태보이다.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을 이름이다.


박은은 관직에 있을 때, 결코 갑질하지 않은 인물이다. 
죄인을 처벌하라는 명을 받고 박은은 죄인을 조사했으나 혐의가 없었다. 
박은은 무죄를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집정에게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좌의정 하륜이 치부하며 잘못을 저지르자 대사헌 박은은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탐욕스러웠던 하륜과는 달리 박은은 청빈하고 검소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외척을 숙청하고 싶어했다. 
차기 왕이 외척에 휘둘리면 국정을 살피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잘 알고있었던 것이다.
이에 동조한 박은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제거하는데 일조한다.

심온은 억울했을 것이다.
심온은 죽으면서 후손들에게 뼈저린 유언을 남겼다. 
청송 심씨는 절대로 반남박가와는 혼인하지 말라!!!!!, 라고 말이다.

반남 박에게 불편한 심기를 가진 청송 심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반남 박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청송심씨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다. 
또한 나는 박씨도 이씨도 서씨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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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蛺蝶 협접
 
                                                              罗邺  나업


                  草色花光小院明 (초색화광소원명)
                  이름 모를 화초들이 가득한 따사로운 작은 정원


                   短墻飛過勢便經 (단장비과세편경)
                   나비 한마리 담장을 사뿐히 넘네


                   粉蝶高高別有情 (분접고고별유정)
                   분홍 나비 사뿐사뿐 다정도하다


                   俗說義妻衣化狀 (속설의처의화상)
                   속설로는 절개지킨 여인의 옷이 변하였다 하고


                   書稱傲吏夢彰名 (서칭오리몽창명)
                   책에서는 지체 높은 관리가 표창하였다 하네


                   四時羨爾尋芳去 (사시이이심방거)
                   오래도록 그 여인을 사모하여 찾아다녔는데


                   長傍佳人襟袖行 (장방가인금수행)
                    그 여인이 저 멀리 소매 날리며 날아가네


※ 이 시는 당나라의 시인 나업의 작품인데 희안하게도 중국의 시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우리나라의 시선집에서만 전해온다고 한다.





간혹 남녀간의 러브스토리에  나비가 등장한다. 
男이 나비가 되기도 하고 女가 나비가 되기도 한다. 

국내 가요 중 하나에서는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되어', 뭐 이런 가사가 있다. 여기서 나비는 男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게이샤와 미국인 장교간의 사랑을 주제로한 '나비부인' 이라는 제목의 예술이 탄생했다. 곡을 쓴 냥반은 푸치니라는 서양인이지만 말이다.
서양에서 나비는 '불멸' 혹은 '영혼' 을 상징하고, 동양에서는 '부귀, 장수'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푸치니가 여주인공에게 '나비' 라는 이름을 준것은 아마도 서양의 예술이 가지는 나비의 상징성에 있지 싶다.


어째거나 한국이나 일본의 러브스토리를 얘기 하려던 것이 아니라 듕국의 그것을 이야기하려다가 이지경이 되었다.

듕국에는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 않은, 
어쩌면 훨씬 더 숙성된 러브스토리가 전해온다. 
다른 표현이 영 떠오르질 않아 이렇게 쓰고 만다. 

 
ㅡ 사건 당시 나이
줄리엣 13세, 로미오도 10대
영대씨 19세, 산백씨는 모름
(서로 만난 것은 영대씨가 16세 되던 해)

ㅡ 연애기간 
로미오, 줄리엣, 4박 5일
산백씨, 영대씨,  만 3년

ㅡ 만남의 계기
로미오 줄리엣, 놀러가서
산백씨 영대씨, 공부하러가서

(그러고 보니 성춘향의 나이도 16세 였다. 여기는 몽룡씨와 부부의 연도 맺는다.
전설의 리브스토리는 그러고 보니 요즘으로 치면 죄다 중학생, 고등학생인 셈이다. 
아 글쎄 영주와 현이도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고등학생들이 아니던가?) 


그 주인공들은 양산백과 축영대, 라는 인물들이다.

서극감독이던가? 아마도 그런것 같은데, 
서극은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인 '양축' 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던 것이다. 
아, 이 영화는 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또 어째거나 양산백과 축영대는 일단 서로를 알게된 기간이 3년 인데다가, 
연모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진 스토리다.

스토리가 그러하듯
양산백은 집안이 변변치 못한 탓인지 영대씨에게 청혼을 못했고, 
영대씨가 다른 집으로 시집가게 된 사실을 알고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만다.


동양과 서양의 감정 표현기법이 이렇듯 다르다. 
서양의 사랑은 적극적이며 
그야말로 죽음도 두려 워하지 않고, 또 불꽃처럼 타오른다.
반면 동양은 은근한 장작불을 지피듯 하다가는, 
그만 병이들어 죽고마는 식이다.


혼례를 치르러 가던 날, 스토리가 또 그러하듯 영대씨는 하필이면 산백씨의 무덤을 지나게 된다. 황진이도 자신때문에 상사병에 걸려 죽은 사내의 무덤을 지나다가 결심한 바가 있다고 전한다. 


영대씨도 결심하기를 산백씨의 무덤에 뛰어들기로 한것이다. 왜냐면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산백씨의 무덤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영원히 함께하자던 둘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죽은 산백씨에게 다가갔고 둘이는 곧 나비가 되어 세상밖으로 날아가버렸다.


지고한 사랑에 감동을 받았는지 당나라 시인 나업은 이들의 사랑에 관한 시를 남겼던 것이었다. 부디, 다시 태어나거든 부부로 태어나시오....

어쩌면 몇번을 다시 태어나 부부로 만났을 것이다. 
고유의 성별은 장담 못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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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가파르게 무너져가고 있다고 한다. 
급격한 인구절벽, 그 기세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신속하다. 
역시나 대한민국은 뭐든지 빠르다.


결혼도 안하려고 하고(아니 못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혹 혼인을 해도 자녀를 두지 않으려한다. 나의 후손이 나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한다. 일이 이렇다보니 인구의 급격한 절벽현상이 온것이다.


인구절벽의 원인은 다양하겠으나 전문가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소득의 불균형
넘사벽 부동산 가격
너무나 부담스러운 자녀 교육비등 
이 세 가지가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오로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쥔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아왔다. 그 결과 남에게는 덜주고 나는 더 갖으며,  부동산 투기등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온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집단은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양분되었다. 갑오개혁이 이루어 질 때까지 지속해왔던 조선의 양천제(良賤制)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표적인 우리 역사이다. 

良人만이 벼슬길에 올랐고, 나머지(賤)가 권력과 돈을 쥘 수있는 기회를 원천봉쇄, 박탈해왔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자녀조차도 엄마가 良人이 아니면 서자 혹은 얼자로 분류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구축했다. 정말 최악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 위에서 군림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고 부리며 그들을 지배했다.

그들에게 차별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 그리고 부를 획득하는 하나의 필수적 장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죽어서도 서로를 차별했다. 
아니, 자신들을 드높였다.
죽으면 다 같은 줄 알겠지만 알고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천자ㅡ崩 붕
제후ㅡ薨 훙
대부ㅡ卒 졸
선비ㅡ不錄 불록
기타인 즉 庶人ㅡ死 사

이를 死之五等(사지오등) 이라고 한다.


卒(졸)이라는 말을 흔히 쓰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은 대부분의 죽음은 기타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그 죽음은 死였던 것이었다.


동양인들이, 특히 동아시아인들이 죽음 마저도 등급을 이토록 세련되게 매겨놓은 줄을 웬만한 서양인들은 아마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동양좀 보고 배워라 서양아!!)

외계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된다면,
피식~ 하고 웃을지도 모른다.


말만 없어졌지 현대 대한민국에는 양천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현대의 良人이 아닌, 賤에 속하는 대다수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뼈 빠지게 노동을 하고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다수의 젊은 노동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정도의 삶을 살며 겨우 숨만 쉬고있다.

한달 노동의 댓가로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제하고나면 저축도 하기 힘든 노동자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기성세대가 국가를 망쳐놓은 것인가, 인간의 탐욕이 인구절벽을 불러오는 것인가. 

최근 프랑스와 영국의 출산율이 늘어 약 2.0에 가깝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기성세대들이 꼭 알아야두어야할 사실이다.

갑자기 독일의 정치인들이 일구어놓은 '사회적 시장경제' 라는 말이 떠오른다.
독일이 해온 일을 대한민국은 해낼수 없단말인가?

추신ㅡ 책을 읽는 者들이라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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