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 흰 건반 검은 시 활자에 잠긴 시
박시하 지음, 김현정 그림 / 알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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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게시 글이 많이 늦어진 점에 출판사와 관계자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일을 지키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이점 양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지만 말이다. ㅠ.ㅠ. 다시 한 번 더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쇼팽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한마디로 세례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서야 그는 신부님을 모셔달라는 부탁을 한다. 신의 은총이 없는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세례를 받은 후 그는 숨을 거두면서 한마디를 내 뱉는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돼지처럼 죽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라고 쇼팽은 말했다. 선생님의 피아노를 들려드릴까요? 주변인들이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며 혼미한 정신의 쇼팽에게 물었다. 아닐세, 쇼팽은 대답했다,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려주시게나... 그렇게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쇼팽을 추억하며 서평단에 신청한 이유는 단 하나, 필자는 쇼팽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였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인 필자가 느끼는 쇼팽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쇼팽은 고전 음악에 관심이 있고 없고를 이미 떠나버린 인물이지 싶다. 그토록 널리 알려진 쇼팽이지만 그의 음악을 통하지 않는 다면 쇼팽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부인할 방법이 없다. 

박시하의 이 책은 그리하여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먼저 들으면서 시작하게 한다. 음악을 들음으로서 같은 시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독서, 남다른 특징을  가진 독서라고나 할까... 읽을 분량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결코 속도를 낼 수 없다. 이 책에 관한한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자의 한 줄 한 줄이 바로 시어들이기 때문이다. 시만큼이나 아름다운 박시하의 언어들을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속도는 안단테 안단테, 아니 렌토, 아다지오, 안단테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물론 때로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한동안 쳐다봐야 할 때도 있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거쳐야할 곳이 많다. 우선 박시하는 독자에게 쇼팽을 초대한다. 한마디로 독자는 바로 쇼팽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박시하라는 작가의 프리즘으로 쇼팽을 마주하는 것이다. 하여 작가와 그의 시, 쇼팽과 그의 곡을 동시에 만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쇼팽을 관통해버린 박시하의  감성 프리즘이 비추어주는 쇼팽의 삶을 독자가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 인 것이다. 이는 삼자의 대면 같지만 어떻게 보면 작곡가와 그의 음악, 시인과 그의 시어들, 그리고 독자의 감성과 그 해석법이 어우러지는, 6자 대면이면서 서로 하나로 관통한다. 결코 단순하지 않는 하나의 장을 만나는 행위이다. 서로가 자신의 매체로 소통을 시도하는 장 말이다. 이렇게 주절대는 것은 박시하가 안내하는 쇼팽의 음악을 함께 들으며 이 책을 읽었을 때 오는 감동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가슴으로 느끼는 바를 글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것. 그렇게 공감하며 읽어가다가는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다, 전혀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낮선 모습의 나 자신일 것이다. 나의 존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듯 하지만 늘 함께하고 있으며 감각하고 인지하는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박시하의 가이드가 완벽하게 나를 지배했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박시하는 독자를 지배하려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함께 어우러져 감동하는 바로 그 모습을 바램하고 있는 것이다. 쇼팽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쇼팽을 들어보고 싶게하는 책이다.  서평단의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신간인지라 후기를 접할 기회가 없어 출판사가 사전에 제공하는 정보가 유일하는 점, 선택을 앞둔 독자에게는 단점이다. 신간이라도 과거 같으면 책방에 들러 살펴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대분의 책들을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형편이니 편리함을 담보로 후회라는 대가를 치룰 각오는 필수이다. 서평단 이벤트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선 결정 후 대가라는 공식의 성립 가능성이 늘 뒤따른다. 이 경우 일독해야하는 부담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 손에 쥐고 있는 책을 내려 놓아야하니 말이다. 이 책은 나의 책장에 오래도록 한 자리를 차지할 할 것이다. 쇼팽이 있기에 백건우가 존재하듯, 쇼팽이 있고 시인 박시하의 언어들이 은빛 물고기들의 지느러미가 번득이듯 살아 있다. 감동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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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6 0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교양철학 시간이었다. 담당 교수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술을 마신다 - 술 마시는 동물도 있다던 걸?

울고 웃는다 - 나는 소가 울음을 우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개(dog)가 웃더라고 하던데?

등등 당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대답으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교수는 자신의 견해도 밝혔다. 인간은 넥타이를 맨다는 점이 동물과 다르다, 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교수가 의미하는 구별 매개로서의 넥타이는 매우 상징적이며 다양한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구별 조건이 될 수 있다. (넥타이만 매면 뭣하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허다한걸,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ㅠ.ㅠ.) 어째거나 당시 나는 하나의 구별 조건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지속적인 생각을 해왔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최근 움베르토 에코의 부고를 접했다. 소식은 안타깝기 도하고 지구상의 귀한 보물을 잃었구나 싶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에코는 나에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임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준 한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에코는 최고의 기호학자이다. 아니, 기호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호학에 대한 한계를 절감한 인물이었다. 하나 마나한 말이지만 그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스스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또한 널리 알려졌듯이 중세에 관한한 그야말로 〈미로의 도서관〉만큼이나 많은 자료를 지니고 있었던 그였다. 박사학위는 토마스 아귀나스를 주제로 할 만큼 중세에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기호학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해야했고 결국 그는 선언해버렸다, “기호학 이론으로 말 할 수 없는 것은 소설로 써라!” 이 선언은 어찌 보면 자신의 학문에서 딜레마에 봉착했다는 고백적 선언과 다름없는 대 사건이었다.

 

 

에코는 소설이라는 매개물을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선언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듯이 걸출한 물건을 하나 내놓는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장미의 이름>이다. 자신의 선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소설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기호학을 대중에게 선물한 것이다. 아, 에코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이 그 매개였다니...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돌파구가 아니었을까...

 

 

에코가 <장미의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보내는 시그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미로의 도서관을 가진 존재이다. 이 도서관은 평범한 도서관이 아니다. “들어가려는 자에게는 넓지만 나오려는 자에게는 한 없이 좁습니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오는 것은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런 도서관 말이다.

 

에코가 내게 던져준 또 하나의 구별 조건은 바로 종교였다. 인간만이 종교를 가진다는 사실. 도서관지기 호르헤의 신념은 종교에서 비롯한다.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그것이 비록 사람을 해치는 일일지라도…….

호르헤 수도사를 통해 인간의 강력한 자아는 그것이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결코 바르지 않을 수 있음을 에코는 보여주고 있다.

 

 

<금강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고와 집은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한 것이라고 말이다...이것이 바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인 것이다.

 

아, 장미의 이름 속 도서관을 언급하다보니 도서관지기 호르헤를 피해갈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 에코가 그 얼마나 베껴오기의 대가였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알라딘 검색창에서 <호르헤>를 입력하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발견하게 된다. 알라딘에 그의 이름으로 검색되는 도서가 한 두 권이 아니다. 그 중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책이 있다. 에코는 바벨의 도서관을 참고하여 미로의 도서관을 설계했다. 나아가 수도사 호르헤라는 등장인물은 아니나 다를까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자용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믿어도 좋을까? 믿어도 좋다. 작가 호르헤의 눈도 점점 어두워지다가는 결곡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수도사 호르헤도 앞을 볼 수 없는 인물 아니던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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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 흰 건반 검은 시』







시와 그림으로 쓴 산문 ‘활자에잠긴시’

그 첫 번째 이야기 쇼팽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박시하

 

 

▶ 책소개

 

첫 선을 보이는 ‘활자에잠긴시’

시로 쓴 산문.

한 번쯤 시로 쓰고 싶은 산문.

쇼팽, 켄 로치, 올리버 색스!

시인이 평소 동경하는 예술가와 만납니다.

당신의 ‘활자에잠긴시’를 들려주세요.

 

올겨울, 첫 선을 보이는 알마 ‘활자에잠긴시’는 시와 그림으로 쓴 에세이로 알마 출판사가 오랜 준비 끝에 선보이는 산문 시리즈다. 저자인 시인이 평소 동경하고, 많은 영향을 주는 예술가와 일대일로 만나서 서로 경계를 두지 않고 소통한다. 때로는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관심을 나누고, 무심한 듯 응시하기도 하며 각자의 가슴 속에 담긴 이야기를 시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자유롭게 풀어간다.

 

박시하,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활자에잠긴시’의 첫 번째 이야기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이자 최근 쇼팽 스페셜 리스트로 알려진 피아니스트 임동혁을 통해서 더욱 유명해진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다. 감각적인 문체로 삶의 소소한 기적을 발견하는 시인 박시하가 쇼팽을 만났다.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은 시와 그림으로 쓴 산문인 ‘활자에잠긴시’ 시리즈의 첫 문을 여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에서 시인 박시하는 평소 쇼팽과 그의 음악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각각 ‘만남’, ‘사랑’, ‘이별’, ‘대화’라는 테마 아래서 ‘발견’, ‘불일치’, ‘망각’ 등의 다양한 사유로 기록한다. 저자는 평소 쇼팽을 만나는 삶을 통해서 독자에게 쇼팽의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쇼팽이라는 우주가 가진 빛나는 감정들, 쇼팽과 저자 사이에 오가는 비밀들을 독자에게만 은밀히 보여준다. 







 

 

이벤트 참여하기 

1. 기간 : 2016년 12월 18일 ~2016년 12월 25일

2. 당첨자 발표 : 2016년 12월 26일 

3. 모집인원 : 20

4. 참여방법

필수) 이벤트 페이지를 SNS(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 스크랩하세요.

-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5. 당첨되신 분은 도서 수령 후, 10일 이내에 '알라딘,네이버도서'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미서평시 추후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이벤트 기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인간의 영역 밖, 쇼팽

쇼팽은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음악으로서만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이야기한 사람이다. 그는 15세 때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내놓았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특히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주회를 열었을 때 슈만은 그를 이르러 “여기 천재가 나타났다”며 청중들에게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라고 말한 바 있다. 쇼팽은 음악에 몸과 영혼을 다 바쳤다. 그의 삶은 아픔으로 얼룩졌지만, 그의 음악은 완벽하다. 완벽.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단어인가! 저자는 불가능함에 이른 쇼팽의 음악을 가리켜 “노래가 되었고, 시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쇼팽이 살았던 삶, 슬픔과 고통, 환희와 기쁨을 통해서 저자는 그의 음악을 조금 더 잘 느낄 수 있으며 음악을 통해서 쇼팽 특유의 우유부단하고 서글펐던 몇 번의 사랑을 천천히 추적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만남, 사랑, 이별, 대화

저자는 음악이 곧 만남이고 대화이며 동시에 사랑과 이별을 동반한다고 담담하게 읊조린다. ‘만남’, ‘사랑’, ‘이별’, ‘대화’로 이루어진 이 길지 않은 이야기는 분명 쇼팽에 관한 산문이라는 점에서 다른 에세이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치 책 속의 책처럼, 산문이라는 형태 안에서 ‘쇼팽’과 ‘박시하’라는 예술가가 더욱 밀접하게 교류하는 이야기다. 그것이 여느 산문집과 다른 신선함으로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저자가 하는 이야기는 때론 쇼팽과 무관해서 쇼팽이 한 번쯤 “나를 기다리냐”고 되물으며 책 밖으로 차가운 손을 내밀기도 한다. 경계 너머, 시와 그림으로 쓴 산문 ‘활자에잠긴시’ 그 첫 번째 이야기 손님 쇼팽.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손님 박시하. 이 둘의 활동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책이라는 테이블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만나고, 응시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이별하는 먹먹함을 동시에 선사할 것이다.

 

피아노의 시인과 기적의 시인이 만나다

작가는 ‘음악성 그 자체로 이미 시’인 쇼팽의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쇼팽, 그의 음악은 단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닌, 매우 조심스럽고 예민해서 마치 이 세계가 은밀히 품고 있는 비밀 같다. 작가는 시라는 것이 세계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점을 든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서 이 세계가 품은 비밀을 연주하는 ‘피아노의 시인’ 쇼팽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때론 쇼팽을 바라보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때론 쇼팽의 음악을 만나 삶을 확장시키는 주체로서 작가의 따뜻한 응시가 담겨 있는 이 작품은 지금 쇼팽을 기다리는 또 한 명의 독자와 만나려 하고 있다. 

    


 

지은이 박시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다. 2008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았고 2012년 첫 시집 《눈사람의 사회》(문예중앙)와 2016년 두 번째 시집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문학동네)를 냈다. 산문집 《지하철 독서 여행자》(인물과사상사)를 냈으며 독립잡지 《더 멀리》의 디자인을 맡고 있다. 시와 산문을 계속 쓰고 있으며, 소설 읽기와 음악 듣기, 산책하기를 사랑한다. 성차, 성 정체성, 나이와 사회적 지위, 신체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위계와 폭력을 반대한다.

 

그린이 김현정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덕성여자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평면조형을 전공했다. 2008년 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신진예술가 부문에 선정되었고, 기억 속의 장면이 현재와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여 회화의 감각에 집중하는 그림을 그린다. 2009년 《always somewhere》, 2012년 《열망Desire》 등 지금까지 6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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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조선의 영웅이 되어 만고에 빛나는 그 이름을 죽백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스스로 저버렸다.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가토는 숭례문으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는 사실은 수 백 년이 흐른 뒤에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추억으로 남게 된다. 대한 제국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영토나 다름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임나일본부가 우리 땅을 지배했고, 임진란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점령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임나일본부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최근 벌어졌던 학자들의 송사는 일제의 잔재가 그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랄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수 백 년 동안 조선을 탐욕해왔다. 잠시도 그 탐욕을 중단해본 적이 없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시킨 후 온갖 나쁜 짓은 죄다 저질렀는데, 조선의 국보가 될 만한 문화재를 전국 조사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조선 전국이 죄다 문화재이고 국보였다. 조선은 딱히 문화재에 번호를 붙여 관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것이 문화재 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아직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에서 국보급 문화재를 조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의도가 겁나 겁나 불순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기야 일제가 당시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었겠는가. 지들 멋대로 문화재에 번호를 가져다 붙이고 관리했다. 이 관리하는 것이 또 의도가 불순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남대문이고 동대문인 것이다. 조선의 얼과 정신을 담고 있는 물건의 기운을 죽여주어야 조센징들의 기도 죽일 수 있다. 조선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부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왜는 조선을 탐욕했고 조선의 땅과 그 백성들을 그렇게 지배하고 싶어했다. 현재로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조선 땅은 그들의 끝없는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지들 멋대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불렀다. 숭례문, 흥인지문하면 정신과 얼이 살아 있게 되지만 남대문, 동대문 하면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게 된다. 하여튼 일제는 조선을 수 만년 동안 그렇게 약탈하려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숭례문,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은 조선인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것이라는 지극히 장기적인 계획 말이다. 문(門)처럼 일본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귀한 것들에는 이름을 새로 지어 그 격을 떨어뜨렸고, 가져갈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은 일본으로 들고 가벼렸다. 조선은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들고가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일제의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일제의 개인들은 개인대로 밀반출했다. 귀하고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그렇게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죄다 알고 있는 일이다.

 

일제가 조선 땅의 보물들을 탐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히데요시는 왜군들이 조선에서 빼앗아간 보물들을 쳐다보며 기뻐서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조선의 것이  다완(茶碗)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다완에 미쳐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공이란 도공들은 죄다 잡아갔다. 일본이 도자기를 수출하여 돈은 겁나게 벌어들인 것은 임란 때 잡아간 조선의 도공들 덕분이었다.

 

현재 일본의 국보 제 1호는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이다. 학자들은 이를 6세기 경의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고있다. 반가상이 통나무로 제작한 것이고 적송이라는 점, 일본의 초기 불상들은 노송나무를 썼고 부위별로 따로 만들어져 붙였다는 점, 제작 기법이 신라와 같다는 점등을 근거로 들고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입장인 것이다. 아, 진짜...

여허튼, 밥그릇은 고사하고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 간 넘들이 아니던가...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인터넷 어디에선가 퍼옴)

 

여러가지 과학적 정황으로 보아,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은 우리의 것이 틀림이 없다. 남들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그런 짓을 대놓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확실히 다르다. 비록 자기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떡하니 지네들 국보 제1호로 지정했다. 이 얼마나 낯 두꺼운 일이던가. 연구를 하면 할 수록 광륭사 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이라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던지 은근 슬쩍 어느 틈엔가 일본은 국보지정 제도를 없애버렸다. 임란때 도적질을 해간 것인지, 아니면 교류를 통해 정상적인 방식으로 넘어간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어째거나 일본은 남의 것이라도 귀한 줄은 안다. 일본 처럼 남의 것을 뻬앗아다가 국보를 지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국민과 우리 국보들이 귀한 줄을 알아야한다.  

 

 

 

 

 

알고 보면 지명이나 학교의 이름에 방향을 나타내는 남서울, 서서울, 동서울 그리고 강서고, 강동고등등 또한 일제의 잔재들이다. 조선은 지명이나 공식 건물에 방위를 붙여 이름 짖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려의 개성에 남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하고, 신라에도 남산이라는 산이 있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서울의 남산도 잘은 모르겠지만 일제식 이름은 아닌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과거 서울의 남산은 지금의 이름이 아니었기에 하는 말이다. 여하튼 그 유래는 알 수는 없지만 애국가에도 남산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우리의 지명을 지들 멋대로 바꾸어 놓은 곳이 전국에 한 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곳이 지금의 대전(大田)이다. 지금의 대전을 우리 조상들은 한밭이라 했고 太田(태전), 드물게는 泰田(태전)이라도 불렀다. 한밭은 太田(태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태(太)는 콩(豆)을 뜻하기도 한다. 콩의 색깔에 따라 황태, 백태, 서리태(검은 콩)라고 불렀다. 태전은 콩이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고 太田은 큰 밭과 콩밭이라는 중의를 아우르는 지명이었던 것이다.

 

 

충청도의 어느 지명은 안면도(安眠島)이다. 그 옛날 일제 강점기 전에는 안민도(安民島)라 부르던 곳이다. 백성(民)을 편안히(安) 한다는 뜻을 가진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지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아니면 정신을 빼놔야겠다 생각했던지 백성 민(民)을 ‘졸린다, 존다, 잠 잔다’ 는 뜻을 가진 면(眠)으로 바꾸었다. 한마디로 지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잠자코, 아무생각하지 말고 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하는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는 개인적인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일제는 조선이 가진 전국의 이름들을 가만 놔둔 것이 별로 없다 (조선 백성들의 이름마저도 개명시킨 넘 들이다 진짜).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은 1962년 국보 제 1호로 남대문을 지정했고, 그 이듬해 보물 제 1호로 동대문을 지정했다. 이는 전 국민이 죄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남대문을 국보 제1호 로, 동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는가 이다.

 

 

1962과 1963년 당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에게 원래 이름도 돌려주지 않았다. 일제는 강점기 당시 숭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다. 그런데 1962년 당시 관계자들은 추호의 반추도 없이 일제가 정해놓은 그대로를 전승,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각각 국보 제 1호, 보물 제1호로 등재했다.

 

일제는 1592년 조선 침략 당시 제 2선봉장 가토와 1선봉장 고니시가 입성했던 그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추억하며 숭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행여 역사를 잘 아는 일본인이 너네 국보 제 1호 남대문은 가토가 입성했던 그 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고, 너네 보물 제 1호는 고니시가 입성 했던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토록 일제에게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관료들이 국사를 돌본다 하다가는 결국 나라가 이모냥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위정자들이 오로지 권력만을 탐하고 이익만을 쫒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행적으로 보건데 진정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없었다.

 

 

고려 말 비극적이고 처참했던 백성들의 고단함은 제쳐두고라도, 조선 500년 동안 어느 하루라도 백성들에게 편할 날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조선의 백성들은 늘 하대 받았다. 냥반들은 냥반이 아닌 자 누구하나 결코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 온갖 설음을 죄다 겪었고, 국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은 없었으나 국난이 있을 때면 늘 몸으로 총칼을 막아냈다. 그런 백성들이 고맙지 않은가?

 

 

중국의 5경 중 서경의 하서(夏書) 3편에는 「五子之歌오자지가」라는 글이 있다. 「오자지가」 중 워낙 많은 분들이 인용을 하고 있는 구절이 하나가 있는데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民可近”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은 율곡이 성학집요에서도 사용한 글이고, 고문진보에도 등장하는 글이다. 맹자 역시 이 문구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일부의 학자들은 「오자지가」를 본디 「하서」에 있었던 글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가히 본받을 만하기에 적어둔다. 오자지가에 관련한 전설을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에 딱 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 내용인 즉 이러하다.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백성들을 늘 가까이하되 절대로 낮추어 보면 아니 된다

백성이란 그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수 백 년 동안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위정자들은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켜가는 수단일 뿐 이었다. 돌이켜보면 위정자들이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숱한 왜구의 노략질을 겪어야 했다. 임란, 정유란, 병자ㆍ정묘호란 등으로 죽어난 것은 백성들 이었다. 그 불쌍한 백성들은 일제 강점기를 몸으로 겪어야 했다. 위정자들은 그러나 심지어는 나라까지 팔아먹기도 했다. 그들은 나라를 판 돈으로 잘 막고 잘 살았다. 힘없는 국민들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건만 말이다. 불구하고 국민들은 팔려버린 나라를 다시 되찾겠다며 나섰다. 상해 망명정부 이후, 100여년에 걸쳐 국민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죽어갔고 그것도 모자라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또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새파란 젊은이들을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잃어버렸다. 백성들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치욕과 수모를 겪어 만들었다.

 

일제가 저질러 놓은 잘못들을 바로잡지 않았고 되레 동조하며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죄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정치가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국민들이 나섰다. 수험을 앞둔 청춘들마저도 촛불을 들었다. 이제 그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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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김여물의 전략을 듣고는, 우리 병사는 기병이고 왜군은 보병이다, 왜군을 넓은 평야로 유인 한 후 날쌘 기병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이길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선조의 보검을 받은 주장(主將)인 신립의 명이니 어쩌겠는가... 신립이, 군기를 떨어트리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호통을 치며 강행하니 이러다 죄다 죽겠구나 하면서도 김여물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영화들은 대군을 일렬로 죽-늘어서게 한 다음 정면에서 서로 맞짱뜨는 장면들을 곧잘 보여준다. 제갈량식 전투를 서구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병법은 일찍이 동양의 것이었지 싶다. 전쟁의 달인인 제갈량도 게릴라 전을 곧잘 쓰던 인물이었다. 이런 기똥찬 전투 방법을 제안 받았으나, 역사에 길이 남을 김여물의 책략을 신립은 묵살해버린 것이다.

 

 

임란 당시 조선군이 게릴라 전술을 써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역시 자료들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기룡 장군이다. 정기룡장군은 기병을 지휘하며 왜군을 상대로 60전 60승을 올리는 전설을 써내려간 인물이다. 이 전설은 절대로 구라가 아니다. 실록이 전하고 있는 사실이다. 정기룡장군에 대한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나 학위 논문은 11편, 학술기사는 75편 정도가 있음을 확인한바 있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나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음). 정기룡 장군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왜란 당시의 눈부신 공로를 남겼고 후에 그 공로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자리를 제수 받는다. 그는 왜군에게는 최악의 패배를 남겨준 또 다른 인물이었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있었다. 그의 전술은 바로 조선의 날쌘 기병들을 게릴라식으로 운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기룡장군이 조선군의 장점과 왜군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지용을 겸비한 장군이라는 명징한 역사적 정거이다. 여하튼 정기룡장군은 기병을 운용하는 데는 단연 최고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기룡장군배 전국 승마대회」가 있을 정도이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정아무씨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정기룡장군의 리더쉽을 학술지를 참고하여 첨언하자면, 그는 자신이 벤 왜군의 머리를 부하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라고 쓰고 있다. 비록 신분이 노비일지라도 적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는 면천하여 양인의 신분을 주고, 비록 양인의 신분이라도 공이 많은 자(적의 머리를 많이 베어오는 자)에게 벼슬을 주겠노라는 선조의 선언이 있었다. 그리하여 왜적의 머리는 값이 비쌌다. 그 비싼 것을 정기룡장군은 부하 병사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어 공로를 그들에게 돌렸다. 이런 장군의 지휘를 따르지 않을 병사, 그 어디에 있을까... 나를 따르라! 그 공로는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라고 외치며 모범을 보인 장군의 리더쉽!  그러니 연전 연승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물론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지? 하면서 이 면천 제도를 철폐해버렸다. 아, 진짜.... [참고자료,「정기간행물 524호, 정기룡;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인들/ 국방부역사편찬위원회」] 정기룡의 살아있는 전설을 참고한다면, 당시 종사관 김여물이 제안한 기병을 운용한 게릴라 전술이 그 얼마나 왜군을 상대하는데 필요한 것 이었는지는 잘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신립은 이를 묵살해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병서를 읽었고, 또한 화려한 전투 경험을 가진 신립은 하필이면 또 배수진을 고집했다. 사실 조선 병사들의 활솜씨는 천하가 다 인정하는 명궁들이다. 우리 땅의 사람들이 쏘아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은 예로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엉덩짝에 몽고 반점을 가진 족속들의 강력한 장기이다. 말 등짝에 훌쩍 올라타고는 날렵하게 달리면서도 화살은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그런 족속들 말이다. 그것이 화살이든 총포든 구별하지 않는다. 신립은 그런 기병의 기민함과 강력한 활 솜씨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힘을 이미 함경도에서 입증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여타 장수들의 조언에서 언급된 사항만이 아니었다. 우선, 적장은 왜국 본토에서 숱한 전투를 치루며 끝까지 살아남았고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고니시(소서행장)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왜군은 침략 당일 부터 조선군을 상대로 파죽의 연승을 거두어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선 침략을 철저하게 준비해온 왜군은 조총수들을 잘 훈련시켰다. 조선군은 조총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에 너무나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왜군 제1 선봉대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육지의 조선군에게 유리한 점이라고는 날쌘 기병과 정확한 활솜씨가 유일했다. 더구나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였던 제승방략의 문제점은 본진이 무너지면 후방은 속수무책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치명타는 바로 일기(日氣)였다. 하필이면 신립이 필승의 전투를 벌이기로 한 그 전날에 그만 탄금대에 비가 내렸다. 출전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기회는 있었지만 신립은 전술을 바꾸지 않고 밀어 붙인다. 조선군이 필승을 해도 모자랄 판에 탄금대는 조선군에게 최악의 불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전투는 절대로 패해서는 안 되는 전투였다. 패해도 되는 전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할 경우 임금은 한양을 버려야하며, 셀 수도 없는 백성들의 목숨도 풍전등화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립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장수였다. 신립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전 조선군의 사기와 직결되는 전투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패전의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군도 왜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고, 또한 장수는 천하의 명장 신립이 아니던가. 조선의 국운이 이 한 번의 전투에서 갈린다고 볼 수 있는, 대 전환점이 되는 그야말로 절대 절명의 전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탄금대는 전 날 비가 내린 탓에 조선의 쾌도 기마병의 말발굽을 잡고 늘어졌다. 초장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나 싶었다. 초반 전투에 조선 기병들은 활을 쏴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마들이 급속도로 지쳐간다는 것이었다. 말의 발이 진창에 빠져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틈을 노리던 왜의 조총수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어 조선의 기마병들을 쏘아 넘어드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조군의 수십만 대군을 추풍낙엽처럼 베어내며 적진을 뚫고 내달리던 조운이라도 살아남지는 못했으리라. 기마병들이 혼비 백산하는 사이 왜의 창칼 잡이들이 진을 이탈한 조선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8,000∼ 16,000여 장졸들은 기량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패했다. 계백은 죽기로 작정을 하고 결사대를 결성, 황산벌 전투에 임했다지만 신립은 결코 죽음으로 끝내서는 아니 되는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는 점이 계백과는 확연하게 다른 입장이었다,

 

 

조선의 모든 장졸들은 지휘관의 판단 착오로 그렇게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는데, 불과 한 나절만의 처참한 궤멸이었고 왜란이 발발한지 딱 보름만의 일이었다. 신립의 나이 47, 장수로서는 지용을 겸비할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신립은 지피(知彼)와 지기(知己)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조총의 위력도 잘 알지 못했다. 왜군이 조총수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조종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로 조선의 기병들을 어떻게 운용해야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오직 한가지, 신립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것은 자신감, 나 신립이야!, 하는 그 용맹함이었다. 탄금대 전투에서 전장에 나아가는 장수가 지장이어야 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보여준 이가 바로 신립인 것이다.

 

 

장수가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목숨을 장렬히 강물에 던지는 것으로 할 일은 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목숨을 던져 용서받을 수 있는 전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전투가 있는 것이다. 탄금대의 전투는 목숨을 던졌다고 용서를 바랄 수 있는 성질의 전투가 아니었다. 장수 이일은 졸병들이 목숨으로 전쟁을 치루는 틈을 타 평안도로 내뺐다. 리더들이 이모냥이다. 오늘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이 참극은 왜란이 발발한 지 보름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장수 한 사람의 실책이 가져온 결과도 국운을 좌우할 만한 것인데, 현재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추운 날 수험생들까지 촛불 집회에 나가도록 하는 지도자의 실책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립의 판단 미스로 인한 패배의 소식은 바람보다 먼저 선조의 귀에 당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탄금대의 소식을 보고받은 선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신립이라면 승전 할 것이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했던 선조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 또한 신립의 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피란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신립에 대한 군왕과 백성들의 신뢰를 가히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신립의 판단 착오는 제승방략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후방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다. 군왕은 도망가야했고, 그 많은 백성들은 무참히 참살 당하거나 왜군의 포로 신세가 된다. 신립을 협의의 충신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그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크게 놀란 선조는 장대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날, 부디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라고 목 터지게 외치다가는 쉬어 터진 백성들의 곡소리를 뒤로하고 불야 불야 몽진에 오른다. 애비에게 애원하는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치듯 선조는 온 백성들의 어버이가 되기를 그렇게 거부했다. 과거 이승만이 저 살자고 한강의 다리를 끊어 셀 수도 없는 국민들을 사지로 몰았던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그렇게 임금의 버림을 받은 백성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변했다고 전한다. 도성으로 들어와서는 경복궁을 불살라버렸다, 라고 이 날의 일을 선조수정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촛불 시위는 너무나도 얌전하고 격이 높은 수준이다.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조선의 냥반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패닉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냥반들은 가진 것이 많았기에 지켜야 할 것도 많았던 것이다. 피란은 그 모든 것을 죄다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신립은 그렇게 냥반들의 자존심마저도 산산이 무너뜨렸다.

 

⋇ 당시 경복궁 방화 사건을 「선조실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새로이 추가된 내용인데, 일본의 자료를 살펴본 국내 학자들은 왜군의 실화로 판단하고 있다.

 

 

왜장 선봉 1군의 고니시는 탄금대의 기세를 몰아 단숨에 한양에 당도, 바로 입성했다. 탄금대의 패배는 왜군의 입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왜군 선봉대 2군인 가토 부대는 고니시보다 하루 먼저 성으로 들어왔다. 왜군의 선봉들은 말 그대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선의 궐에 들어선 것이다. 탄금대의 전투가 그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더불어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왜군들이 입성 할 때,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들어왔고, 가토는 숭례문으로 들어왔다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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