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을 일컬어 흔히 '악성'이라고 한다. 음악으로 일생을 보낸이에게는 아마도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애호가들 중에는 베토벤이 더 훌륭하다느니, 모차르트가 더 훌륭하다느니 서로 입씨름을 곧잘 하곤한다. 그만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고전파의 거두이자 낭만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토벤의 음악은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시키는 그야말로, 진정한 대서사시를 장식한 인물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녹음한 음반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줄잡아 150종 을 넘어서지 않을까...또한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전집으로도 단연 압도적이리라. 여러모로 베토벤의 교향곡은 가장 많은 음반을 가진 곡이면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기도하다. 특히 연말에 국내 교향악단들의 2부 연주 레퍼토리를 대부분 베토벤 교향곡 9번으로 한다. 4악장의 합창이 있어 관객의 입장에서는 연주와 노래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하다.    

'악성 베토벤', 이는 베토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는 교향곡으로 고전주의를 최고조에 올려놓았고, 낭만주의의 태동을 일으킨 장본이이다. 애호가들은 재미삼아 베토벤이 더 위대하느니, 모차르트가 더 위대하다느니 입씨름을 하곤한다. 이는 물론 결론을 내리자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 입씨름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베토벤이 작곡할 당시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일화를 아는 사람들은 애호가 뿐만이 아니다. 베토벤의 곡을 자주 듣는 사람이던 아니던간에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므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에 그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흔히 자신이 구상한 악보를 악기로 확인해가면서 곡을 쓰게 마련이다. 악기로 연주해본 후 필요에따라서 수정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는 모차르트도 그랬을 것이고 쇼팽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베토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들을 수 없는 작곡가의 심정을 과연 누가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사람들은 이제 베토벤도 한물간 사람이라고들 했다. 귀머거리 작곡가가 더이상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려 12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교향곡 9번을 위해 보내게된다. 곡에 대한 구상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었으므로 사실은 12년보다 훨씬 더 긴 나날들을 9번을 위해 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향곡 9번을 완성하는데는 치명적인 청력의 문제도 있었지만 쉴러의 시를 교향곡에 버무려 넣는 것도 큰 어려움 중 하나였다. 애초에 작곡의 구상 자체가 쉴러의 시를 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토벤 이전에는 그 누구도 교향곡에 성악을 삽입한 작곡가는 없었다. 최초로 베토벤은 교향곡에 성악을 버무려 넣겠다는 창조적인 생각을 했고 이를 실행한 인물이었다. '처음'이란 늘 있는 것어온 것이지만 그렇게 힘든 일이기도한 것이다.   

드디어 1824년 빈에서 초연에 이르른다. 그러나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과연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을까?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는 한 여성이 베토벤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돕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설정이다. 초연 당시 극장의 음악감독 미카엘 움라우프는 연주자와 성악가들에게 자신의 지휘를 따르도록 당부해둔다. 베토벤은 베토벤대로 지위를 한다. 좀 보기드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렇게 교향곡 9번의 초연이 시작되었다.  

곡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 곡이던가...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곡이 끝나고 청중들의 기립박수가 터지는 순간에도 그 박수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베토벤은 지휘를 계속하고 있었다..곡의 연주가 이미 끝났는데도 말이다. 베토벤은 연주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곡을 자신이 지휘하고 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그날 베토벤은 5번의 기립박수를 받는 영광을 가진다. (참고로 황제 부부가 공연장에 나타날 때는 세번의 기립박수를 받던 시대였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지휘를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베토벤을 생각하면 너무나 큰 안타까움과 위대한 순간이 오버랩되어 슬프다. 슬프지만 그는 정녕 위대하다.  

 오른쪽의 책은 최근 출판된 베토벤 관련 도서이다. 저자 이덕희씨는 음악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분같다. 불멸의 명 연주가들에관한 책은 물론, 불멸의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악성 베토벤에 관한 서적들을 저술했다. 저서는 베토벤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것이다. 천재 베토벤보다는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은 용기있는 한 인간으로서 베토벤을 바라보고 있다. 이책을 통하여 삶의 의지가 무엇이고 운명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으리라. 베토벤은 불멸의 음악가이다. 천재 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자신이 해야할 음악적 능력에 온 영혼을 불살랐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묘지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에 베토벤은 잠들어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슈베르트도 베토벤의 곁에 함께 누워있다. 평생 베토벤을 존경했지만 너무나도 수줍음이 많았던 슈베르트는 가까이에 살고 있는 베토벤을 찾아뵙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존경하는 베토벤을 문병한다. '자네가 슈베르트로군...' 베토벤은 그렇게 슈베르트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베토벤은 일주일 후에 생을 마감한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은 무려 20,000명의 추모객들이 뒤따랐다. 슈베르트는 장례 행렬 맨 앞에서 횃불을 들고 베토벤을 안내한다.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도 함께였다. 묘비에는 단 한 글자만이 써있었다. '베토벤' 이라고...그 어떤 말로도 '베토벤'이라는 말을 대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중앙 묘지는 모차르트, 브람스, 요한 시트라우스 등도 함께 안치된 곳이다) 

 

 교향곡 9번  

1악장: Allegro 소나타 형식  

주제가 제시되고 반복은 한 번으로 줄인 후 새로운 모티브를 끌어와 2주제로 연결시켠다. 1주제 보다 2주제가 좀더 밝은 톤이지만 1주제를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교향곡들은 소나타 형식을 취하여 제시부가 좀더 반복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베토벤은 이를 생략했다. 포함시킬 주제가 많았고 베토벤은 주제를 매우 명료하게 표현했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1악장이지만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많고 악기들의 소리가 매우 또렷하면서도 장엄하여 다음에 펼쳐질 악장들을 한껏 기대하게 만드는 명곡이다.  

 

 

 

 

 

 

2악장:  Molto vivace  스케르초 

당대 교향곡들은  2악장이 주로 Adagio 이다. 주로가 아니라 그냥 Adagio molto e cantabile 인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Molto를 2악장에 배치하고  3악장에서 사용하는 Molto vivace 를 2악장으로 끌어온다. 왜냐구? 그건 알수가 없다. 베토벤이 그렇게 순서를 바꾸었고 이유는 말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해보건데 4악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4악장의 장엄, 웅장한 연주와 4악장 후반부의 치열하면서도 뜨거운 환희의 송가를 최대한 끌어 올려 절정으로 치다르려면 강약의 균형을 2악장에서 주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1악장보다 2악장에 좀더 강한 포인트를 주고, 3악장을 아다지오로 바꾸게되면 강약이 조절되면서 4악장에서 피날레를 휘몰아치며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전체적으로 매우 조화로운 균형감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조화란 다른 것과 다른 것의 긍정적 결합이니까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다보니 2악장이 강렬해야하고 결과적으로 팀파니의 속도를 느껴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2악장에서 팀파니의 작렬하는 멋스러짐을 감상하실 수가 있다. 이 팀파니를 꽤나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오로지 팀파니 ㅋ.

3악장:  Adagio molto e cantabile   

3악장을 무척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있다. 2악장에 배치되어야할 아다지오가 3악장으로 간 탓에 그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베토벤을 우리는 3악장에 가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뜻밖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나기라도 한듯, 그렇게 반갑게 애호가의 마음을 녹여버린다. 바이올린과 목관의 상호 교감은 곡의 변주를 따라 주제를 오가며 4악장을 향해 유영한다. 3악장은 정녕 유려함이 반짝반짝 빚나는 곡이다.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이다. 베토벤이 사망한지 하루가 지나서 석고를 뜬 모습이라고 한다. 그가 남긴 교향곡 9번을 완성한 후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평온해보인다.  

그러나 정말 많이 여윈 모습이다. 얼마나 허약하고 병약한 상태였는지...그동안 베토벤이 겪어온 온갖 고통이 데드 마스크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 하다. 데드마스크와 교향곡 9번을 오버랩하니,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토록 고되고 질긴 병을 달고 살면서 그는 오직 교향곡 9번의 완성과 연주만을 생각했을 테니...   

 

4악장: Presto 

애호가들이 예상하고 있듯이 Presto이다. 가장 인기있는 4악장이며 환희의 송가가 포함되어있는 악장인 것이다. 4악장은 송가에 들어가기 전에 우여 곡절을 겪는다. 마치 대화를 나누듯이 악기들의 문답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긴 여정을 상기하기라도 하듯이 1, 2, 3악장의 요소들을 총 동원시키면서 베토벤은 곡의 반복되는 갈등을 만들어 낸다. 갈등이 없는 화합은 없는 것인가... 

베토벤이 살던 시대의 상황은 열악했다. 베토벤 자신도 귀는 귀대로 안들리고, 위장은 위장대로 빵꾸가 나서 육체적으로 매우 지치고 힘들고 병약해진 상태였다. 생활할 돈도 여의치 못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30여년 동안 고뇌하던 곡을 비로소 완성했다. 이 모든 열학한 환경속에서 자신의 꽃을 피워올렸다. 베토벤의 일생은 그렇게 갈등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는 아름다움은 피어나지 못하는가...4악장의 도입부에서 시작하는 악기들의 대화는 이러한 갈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들은 파괴로 가는 갈등이 아니다. 쉴러의 시가 베토벤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베토벤은 온갖 갈등의 고난을 넘어 서서히 화합의 길로 접어든다. 환희의 송가가 시작되는 것이다.     

베토벤의 장례식 장면을 그린 그림

 

오! 벗이여~ .... 

더욱 기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않으련가..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중략...  

즐겁게, 태양들이 빛나는 하늘의 공간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달려라 형제들이여, 그대의 길을. 승리로 향하는 영웅처럼 즐겁게

중략... 

백만의 사람들이여, 껴안아라  

환희여, 신들의 빛이여... 

이러한 내용들이다. 온세상을 비추는 자연과 신 앞에서 형제들은 우리는 함께 서로를 껴안고 사랑하며 화합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베토벤이 쉴러의 시를 음악에 버무린 이유를 우리는 알게된다. 베토벤은 온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원했던 것이다. 베토벤이 더더욱 위대해보이는 대목이며 9번 교햑곡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뜨거운 인류의 형제애를 곰감하면서 뜨겁게 끓어오르며 평화와 화합을 갈망하는 합창은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베토벤은 흔히 괴팍한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만의 벽이 있어 한성질하는 성질 드러운 사람중 하나가 베토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성질은 새발의 피인 사람이 최근에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는 다름아닌 미국의 어느 주지사를 지냈던 아놀드 슈눠제네거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동안 얼마나 멋진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던가...그러던 그가...여하튼 이런 사람이 정말 성질 드러운 사람인 것이다. 베토벤은 그런 치사한 짖은 절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다. 화가나면 화를 냈고 나름대로 이유있는 분노였다. 자신을 믿어주는 그 누군가를 영원한 배신으로 되갚은 그런 사람이 절대로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토록 아름답고 위대한 음악의 유산을 우리들에게 물려주었다....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선호하는 음반들...(2)으로...

                               

                                     수입반                         라이센스반 

     

 

 

 

 

 

 

 

 

 

 

 

 

 

 

 

 

 

 

 

 

 

  

 

 

 

 

 

 

          

 

이상은 많은 애호가들의 손을 곧잘 거치는 음반들이고 특별한 순서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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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나름대로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동서양의 미술에 개의치 않고 이 책 저 책을 두서없이 읽게되었다. 그러던 중 오주석이라는 한국 미술사학자를 알게되었다. 그의 저서를 처음 접하고 느낀 감동은 여전하다. 오주석은 나에게 한국의 미술사학자로서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학자였다. 그의 정열과 마음을 다하여 한국 미술사 연구에 바친 노력과 강인한 책임의식, 바로 오주석은 그런 책임의식을 가진 학자라고 느끼게되었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권이다.  가장 손쉽게 접하여 읽을 수 있는 오주석의 책들이다. 이 책에서 한국화가 그 얼마나 독특하고 한국 스스로의 미술사적 영역을 확보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더불어 서양의 투시도법과 한국화의 투시도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게한다. 미술관에 갈 때는 이정도의 회화적 지식은 가지고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는 오주석의 글에서 배어나오는 진심어린 글에서 얻어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정보들이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기본적인 공통점들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을 학술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미술관에 들르는 관객에게 최고의 눈을 갖게할 것이다. 오주석은 그동안 잘 몰랐던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확연하게 우리 앞에 펼쳐준다. 

오주석은 위의 책에서 소개한 그림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들을 안내한다. 비단 어느 하나의 그림에 만 해당하는 안목이 아니라 배우고 공부한 만큼 더 넓고 깊은 감식안을 독자에게 준다. 이는 오주석이 한국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주는 커다란 축복이자 선물이 될 것이다. 더욱 특기할만한 것은 세상의 그 어느 나라의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주의 섭리를 담은 그림' 을 우리 선조들이 그려냈다는 점이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전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그림은 제 아무리 미술사학에 명성을 가진 서양인인들 이해하 불가능한 그림이다. 동양의 우주관을 투영시켜야하는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역을 어느정도 이해했을 때에만이 정선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그 어떤 서양의 미술사학자가 주역의 괘원리를 이해하고 작품을 평할 것인가...모르고 평한다면 아마도 냉소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오주석의 독화 수필이다. 오주석의 그림과 관련한 수필을 쓴 책인 것이다. 오주석은 우리의 그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자기 독백이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그가 얼마나 한국의 그림을 사랑하고 소중히했는지...진한 감동이 가슴에 울려퍼지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은 한국 미술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 스스로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큰 도움일 얻을 수 있다. 오주석은 자랑스러운 한국 미술사학의 국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미 특강

 한국의 미특강을 읽다보면 감동을 금할 길이 없다. 오주석이 우리의 미술에 바친 열정과 애정이 절절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애 책을 읽다보면 정녕 한국의 미술이 어떠한 것인지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한국 미술을 너무나도 몰라주었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지금에라도 새삼 알게되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하는 안도감이 교차한다. 그만큼 오주석은 독자인 나의 가슴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의 무지함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나에게 우리 그림으로인한 강렬한 자긍심과 뿌듯한 한국 미술의 독보적 가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술의 가치'이다. 예술의 가치는 과연 어느 곳에 존재하는가 였다. 놀랍게도 한국 예술의 가치는 예술 작품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국인들의 의식속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동안 미쳐 생각지 못했던 내게 또다른 충격이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다. 가치를 작품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의 의식속에 자리하고 있다니...그렇다. 한국 예술의 가치는 우리들의 의식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예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될 때, 우리의 예술 작품들은 그 어느곳에서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서구의 예술품인 모나리자를 모르는 한국의 학생들이나 한국의 국민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정작 우리의 예술작품인 '금강산 전도', '수월 관음도', '고사 관수도', '마상 청앵도'를  잘 알고있는 국민을 찾아보기란 또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바로 우리들의 인식 속에 있었던 것이다. 모나리자가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이가 없는 대한 민국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예술품이 가지는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를 작품으로 가진 국민들은 그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국의 국민들은 우리 예술품의 가치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널리 알릴 생각도 많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그러한 우리의 작품들에게 세상의 어느 누가 가치를 부여하려고 할 것인가....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예술품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그 가치를 깨닫고 인식할 때 비로소 세계는 우리 의 것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가치는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들의 인식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국의 예술 작품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치 서구인들이 그래왔고 그 결과 한국의 모든 초등학생들도 모나리자를 알고 있듯이.... 우리의 문화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우리의 손에...우리 후손들의 손에 달려있다. 한마디로 한국 예술의 목숨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우리가 알아주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 이웃 그 누가 우리의 것을 알아주리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다. 오주석은 많은 우리의 그림들을 연구하고 사랑했다. 그중에서 특히 오주석이 애착을 주는 그림들을 책에 소개한 것이다. 오주석의 자긍심이 그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는 우리의 그림들이다. 

오주석의 자긍심은 곧 우리의 지긍심이다. 오주석의 정체성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오주석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였다. 그런 그가 우리의 그림을 연구하고 그 훌륭함을 발견해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발견해낸 우리 그림들의 가치는 그 어느 것의 가치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런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일 수 있는 가슴벅찬 일이다.  오주석의 우리 그림에 대한 설명은 어느 하나 놓치기 아까운 내용들이다.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읽어 우리 그림을 좀더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출간한 책이니 만큼,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도서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어찌 할 뻔 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될 것이다. 그만큼 가치있는 책이다.  

 

 오주석의 역작, 단원 김홍도이다. 왼쪽의 책을 오른 쪽의 책으로 재발행한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오주석이 가장 심여를 기울에 완성한 작품이다. 김홍도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한 권으로 모두 알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김홍도와 관련한 책이 다른 저자에 의하여 저술된 것도 있다. 그 책을 함께 읽는다면 금상 첨화일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오주석은 단원의 환생처럼 느껴진다. 오주석은 스스로 단원과 일체감을 느끼며 이 책을 연구하여 썼다. 오주석이 단원을 그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연구했는지...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덕분에 독자는 단원이라는 걸출한 세계적인 화가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김홍도는 사실상 세계적인 화가였다. 그러나 김홍도를 세계적인 화가라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어색하다고 느끼게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도 단원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화가를 세계적인 화기라고 말한다면 어색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서구의 고흐나. 고갱, 밀레, 달리, 피카소 등등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단원이나 겸재, 강세황, 김정희, 신윤복, 윤두서, 장승업, 김명국, 정선, 최북, 안견, 김득신, 이인문 등등...수많은 조선의 화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실정이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더욱 잘 알지 못한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교로하였기 때문에 주로 탱화들이다. 그 탱화들의 가치가 얼마나 휼륭한 것인지 인식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그다지 많이 않은 편이다.  이 모두가 세계적인 화가들이요 작품들은 세계적인 것들이지만 정작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것을 바로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적인 화가들을 가진 서구인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가치를 깨달을 때, 절대로 모나리자를 부러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과 일맥 상통한다. 오주석은 그 문화가 가지는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그 가치를 알리기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스스로의 건강을 해쳐가면서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게된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었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던가...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살아있는 국보를 잃은 셈이다. 누가 이 일을 대신 할 것인가...우리의 미술사학계에는 분명 오주석과 같은 의식을 바로가진 인물이 더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주기만한다면 우리의 역사 문화는 더더욱 살아 날 것이고 우리의 자긍심과 정체성도 더더욱 드높아질 것이다. 

다음은 이인문의 강산 무진도이다.    

이 책은 아직 채 읽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 오주석이 애써 발행한 책들은 대부분 모두 읽게된다. 이 외에도 진경시대에 관한 책들이 있지만 공저이고 정말로 사관이 의심스러운 분의 글이 있어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이인문은 인물·영모(翎毛)·포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었던 이루던 화가이다. 가장 뛰어난 분야는 산수화였으며, 특히 송림(松林)을 즐겨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한다. 명암이 엇갈리고 몸이 뒤틀린 모습의 소나무와 단아한 필치의 수목들과 각진 바위들을 특징있게 묘사했던 이인문은 남종화와 북종화에 각 체의 화법을 혼합하여 특유의 산수화풍을 이룩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강산무진도, 누각아집도, 송계한담도, 대부벽준산수도, 단발령망금강도등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오주석은 강산 무진도를 연구하여 책으로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오주석은 한국 미술사학계의 보물이었고 국보급 학자였다. 그가 이룩해낸 연구의 성과들은 독자들에게 한국 미술의 가치를 알리기에 충분하다. 그의 노고와 수고로움에 아낌없는 찬사를 드리고 싶다.  더불어 한 분의 독자라도 오주석의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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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한국의 애호가들에게 애우 잘 알려진 곡이다. 1악장 도입부의 강렬한 피아노 타건이 무척이나 인상적일 뿐더러 협연도 매우 유려하면서도 장쾌하게 시작하는 대표적 피아노 협주곡이다. 비록 처음 듣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선율은 귓가를 맴돌며 떠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한마디로 장쾌하고 아름답고, 유려하면서도 화사한 피아노 협주곡인 셈이다.  

물론 음악계에서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빈번한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인기도를 반영하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곡 자체가 빼어나고 좋은 곡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음반은 다음의 것이다.

                                        

                                                      명연주 명음반

흔히 아르헤리치의 연주나 리히테르의 연주를 애호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음반에 크게 매료되지 않는 듯 보인다. 왜냐면 그 두 음반 만으로도 상당한 만족감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헤리치의 뜨겁고도 열정적인 연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애호가는 없을 것이고,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폭풍이 몰아치는 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 주는 황홀함은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음반들은 아래와 같다. 

          

과연 그 어느 애호가가 위의 음반에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이미 널리 정평이 나있는 음반인지라 음반 평이고 뭐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은 협주곡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화음을 낳을 수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명연이다. 이 둘의 연주는 그야말로 균형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보여주고있다. 서로의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조화로운 협연을 어떻게 이끌어야하는 것인지를 깨닫게해준다. 협연은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색체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위해 연주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구축하는 일이 그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이 둘은 서로 호응한다. 상대방의 부름에 적절히 답한다. 아바도의 이러한 협연은 아르헤리치의 프레이징을 투명하고 맑게 해준다. 더불어 아바도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탄성을 그 안에 함께 버무려 넣는다. 아바도와 아르헤리치의 협연은 그렇게 연주를 달구어 간다. 아르헤리치는 정렬의 화신이 된다. 연주는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던가...세상은 이처럼 상대방의 조화로운 도움을 필요로한다... 나는 이 두사람의 연주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배운다. 이는 이 두사람의 연주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된다. 음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연주를 해낸다는 것이 그 얼마나 장한 일이던가... 

리헤테르와 카라얀의 연주는 온 세상의 애호가들이 갈채를 보내는 명연 중의 명연이다. 둘의 연주는 압력이 매우 높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공격적인 연주로 들릴 수 있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과 매우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연주인 것이다. 리히테르와 카라얀은 연주하는 내내 자신들의 색체를 강하게 주입시킨다. 리히테르는 리히테르대로, 카라얀은 카라얀대로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내려고 힘을 쏟는다. 흔히 불꽂의 연주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장점을 하나의 연주 안에 주입하는 과정에서 빚어내는 개성들은 자칫 협연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는 요인이 될 수가 있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순간 협연는 망가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둘의 연주는 이상하게도 그런 엉뚱한 연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둘의 음악적 능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리히테르와 카라얀이 누구던가. 그들은 각각의 연주에서 내노라하는 최고의 능력자들이다. 이 최고의 능력자들이 협연장에서 만나 자신들이 이루어낼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각자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음악을 망가트릴 정도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곧 폭풍우가 일고 음악이 혼란스러워지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것은 그들이 끝내 연주를 위해 해야하는 자신들의 그 목적을 온전히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치열하면서도 가장 긴장되는 연주를 만들어냈다. 협연의 핵심은 조화를 끝내 고수한 그들의 연주는 그러므로 각자의 개성이 강렬하게 드러나면서도 균형을 유지한 음만으로 남아있게된다. 

명연주를 생략한다면 너무나도 서운해 할 음반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빼어난 연주들이 즐비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싶은 연주가 바로 반 클라이번의 연주인 것이다. 

   

바로 아래의 음반인데 좌측의 음반이 우측의 음반으로 재발매가 되서 그런지 알라딘의 상품에서 이미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검색을 잘 못했나...

      

 여하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애호가라면 꼭 들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은 음반이다. 아르헤리치 여사와 아바도의 협연과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연주에 코드가 연결된 애호가들은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연주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연주에서 듣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색이 클라이번과 콘트라신느의 연주에서는 어느 정도 정제된 느낌을 감지하게된다. 콘트라신느의 협연은 기능성 연주처럼 들린다. 이를 약간 다르게 생각해보면 클라이번의 연주에 콘트라신느의 연주가 온전히 희생되는 느낌이다. 즉, 피아노의 연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콘트라신느의 특색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트라신느의 연주가 아바도나 카라얀의 연주와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선입견을 애호가들이 간과할 수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녹음의 질적 열세는 논외로하더라도 연주의 완성도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할 수 있는 여지는 주로 아르헤리치와 리히테르 덕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클라이번의 피아노는 매우 또렷하다. 협연의 악기들도 매우 돗보인다. 이것이 어쩌면 약점인 듯 보일 수도 있다. 너무나 또렷하게 구별되다보니 협연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3악장에서는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특성을 살려내지 못한 피아노를 들려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기타의 연주와 상대적인 비교를 했을 때의 일이다.  

기타의 연주와 비교 감상도 좋지만 편견을 버리고 오직 두 사람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보시라...반클라이번과 콘트리신느의 연주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단점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은 장점으로 화하기 시작한다. 연주는 이제 자신들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연주로 변모한다. 내내 희생할 것만 같은 콘트라신느의 연주는 결코 개성을 죽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3악장의 필요한 부분에서 매우 또렷한 힘과 조화로움을 발산 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서야할 때 확실하게 나서주는 협연인 것이다. 두 사람의 협연은 협연으로서 매우 질높은 하나의 궤적을 그려가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 연주로 새로 태어난다.  

 팀파니와 트럼펫의 울림은 매우 명료하게 다가온다. 협연을 잘 살려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음을 직접 귀로 확인해보기를...마지막으로, 클라이번의 연주를 듣다보면 그의 인성을 짐작케하는 부분이 있다. 클라이번은 믿음직한 사람이다. 신뢰를 아는 사람이다. 정직한 사람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된다. 마치 켐페의 연주에서 듣던 그 느낌을 클라이번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켐페의 연주는 정직하다. 그의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과도한 기교스러움에서 오는 화려함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담백한 켐페의 연주를 과연 누가 홀대할 수 있을 것인가...바로 이와 같은 정직함이 클라이번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 둘은 결코 홀대해서도 홀대 할 수도 없는 명연을 합작해냈다.  

왜 클라이번의 연주가 아름답고 콘트라쉰느의 협연이 그리도 고마운지...나는 그들의 정직합과 자신들의 일을 명료하게 해내려는 노력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두 사람의 연주는 비록 아르헤리치 아바도나 리히테르 카라얀의 연주를 고려할 때 그에 버금간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것은 애호가가 음악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 클라이번과 콘트라신느의 연주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연주를 명연주 명음반이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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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안드로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의 은하와 마찬가지로 나선형 은하인 안드로메다의 인력은 우리 은하보다 50%정도 더 크다. 아차 실수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질 수가 있다. 그리고 무려 6천 억 개의 별들이 있다. 인간이 이사해서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이 어느 곳에 있는지 판단하기 위하여 별 수색 작전에 돌입해야 한다. 고성능 광학 망원경과 우주 스캐너로 태양계와 매우 유사한 크기의 별을 골라낸다. 그리고 그들의 행성을 조사한다. 바로 드레이크 방정식이다. 공기가 있을 확률과 생명체가 있을 확률을 정밀 조사한다. 무인 로봇 탐사선을 발사한다. 로봇이 결과를 전송해왔다. 자 출발이다...   

 


 보급용 코스모스

물론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인간에 버금가는 생명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생명체를 만날 수도 있다. 바로 그 행성에 이미 자리를 잡은 생명체의 존재이다. 그들은 과연 우리 지구인들을 환영해줄 것인가. 아니면 적대감을 보여줄 것인가. 그들의 사고는 지구인인 우리의 사고와 비슷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을까. 그들의 가치관과 윤리관이 우리와 닮았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의 가치관, 윤리관, 철학등에 따라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전쟁을 할지...아니면 평화를 유지할지... 지구인들의 생과 사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은 매우 합당한 것에 해당한다. 물론 이사짐 센타들의 이익과도 상당히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삿짐 센타는 현재의 이사짐 센타와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진, 우주선을, 그것도 외부 은하까지 space ship을 띄울 수 있는 기술과 설비및 장비들을 갖춘 최첨단 집단이어야만 할 것이다. 
  

 

좀 비싼 코스모스 

그러면 어떠한 유형의 생명체와 만나게 될까..  여기서 로스트 인 스페이스라는 영화를 간간하게 살펴보면 우리의 상상을 확장시켜 나갈 수가 있다.

흔히 우리는 유기 호흡을 하는 유기적 존재만을 생명체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느 생명체는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그런 종류이다. 무기 호흡을 하고 있는 생명체가 그것이다. 마치 거미처럼 생긴 이 생명체는 강력하기로는 엄청나다. 이 생명체 앞에서 왠만한 쇳덩어리는 종이장에 불과하다. 그 파워를 짐작하시겠지... 그 자체로 엄청난 무기가 되는 에일리언인 것이다. 여하튼 주인공들은 겨우 피해 도망 칠 수 있었다.

아니면, 스타 워즈에서 등장하는 수중에서만 살아가는 물고기가 아닌 고도의 지능을 지닌 종족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두 영화에 등장하는 생명체는 일반적인 우리의 사고 범위를 넘어서는 존재들이다. 물론 에일리언 이라는 영화도 같은 맥락의 생명체이다.

인간은 유기호흡을 하는 생명체이다. 즉, 호흡을 할 때 산소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무기 호흡은 산소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무기 호흡의 결과로 발생되는 긍정적인 측면을 흔히 발효라고 하고, 부정적인 측면의 결과를 부패라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산소 호흡을 하는 생명체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그러나 무기 호흡을 하면서 지능이 있고 강력한 힘을 지는 생명체가 과연 존재할 수가 있을까? 에이~ 말도 안되는 소리~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러한 생명체가 우주 그 어디에서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드 넓은 우주의 섭리를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주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다음의 책들도 매우 유용하다.

 

 

 

 

 

 

  

LOST IN SPACE 시높시스

자원의 고갈과 오존층의 파괴로 지구가 더 이상 인간 생활에 적합하지 않게 되면서 알파 프라임이라는 새로운 행성을 탐험할 쥬피터 2호를 우주로 보내게 된다. 쥬피터 2호에는 탐험을 위해 3년 간 훈련 받은 로빈슨 가족과 전쟁 영웅 웨스트 소령, 테러 집단의 스파이 스미스 박사가 탑승한다. 우주선은 발사되자마자 테러 집단에 매수된 스미스 박사가 입력한 프로그램에 의해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비확인 물체와 우주 괴물의 습격을 받는다.

서기 2058년, 최첨단 과학 문명이 세워놓은 미래사회는 대체 에너지의 고갈, 테러 집단의 출몰, 연일 계속되는 전쟁으로 위기를 맞는다. 새로운 행성을 찾지 못하면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극에 달하자 연방 항공우 주국은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은하계 탐사를 결정하고 탐사대를 모집한다.

우주 과학자 존 로빈슨 박사는 자신이 오랫동안 몰두해온 은하계에 대한 연구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탐사대에 지원하고 가족들과 함께 쥬피터 2호의 냉동캡슐에 동승한다. 알파 프라임이라는 새로운 행성을 탐험할 쥬피터 2호를 우주로 보내게 된다. 비확인 물체와 우주 괴물의 습격을 받는다.
그들이 선점하고 있으며 우리와 일전을 불사하는 사태에 직면하게된다면 그야말로 우주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주 전쟁이다.  

  

이 책을 읽으면 파인만의 매우 흥미로운 우주론을 접하게됩니다. 우리 우주가 하나의 역사가 아닌 복수의 역사를 가진다는 우주론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호킹박사는 '허수 우주론' 을 제창하게됩니다. 허수 우주란 우리가 살고 있는 빅뱅 이후의 공간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빅뱅 이 전의 우주가 허수우주인 셈이지요. 이거 책이 정말 흥미 진진하지 않습니까? 

 이 책을 통하여 독자는 'super string', 즉 '초끈 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됩니다. 허수는 빅뱅 이전의 허수 시간대의 공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허수 우주이론의 주창자인 위튼이 1985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이론의 강의를 마쳤을 때, 참가자 그 어느 누구도 이론의 문제점등을 지적할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재해석도 요청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론이 너무 어려웠던 탓이죠. 말이 '초끈 이론 '이지...이거는 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란...초끈이란 '에너지의 선'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 끈은 너무나도 작아서 긁기는 0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끈을 길게 늘여도 긁기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길이에 비례하여 질량은 커져갑니다.  이 초끈 이론은 현대의 중력 이론인 일반 상대성 이론 과 양자 역학을 통합한 이론이라고 합니다. 이 두 이론을 뛰어넘는 이론이라는 이야기인데요 결국 모든 것의 이론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실험적으로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론이 증명되는 날,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아니면 영원한 미제가되는 것인지...어쩌면 그 누군가에의해 증명이 되는 날이 오는 것인지...  분명히 이 책은 흥미 진진한 내용들로 가득한 책이 될 것입니다.

 

외계인과의 만남
별자리를 쳐다보며 외계 생명체의 흔적들을 찾느라고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드레이크처럼 말이다. 스티븐 호킹은 외계인과의 접촉을 경계하는 주장을 했다. 만약 UFO를 탄 우주인들이 지구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뜻은 분명 친화적일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 호킹의 생각인 것이다. 이점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지구처럼 그 어느 별에 지능을 가진 생명이 존재하고 있고 과학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가정해보자. 워프항법이든 그 무엇으로든 우주를 순식간에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생명체라면 그들의 과학 발달의 수준을 짐작키 어려울 정도로 고도의 기술력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구의 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할 것이다. 



 

 

 

 

 

 

그 별이 그토록 엄청난 과학을 발달시키기까지는 수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의 행성을 떠나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행성의 수명은 대략 100억년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성간 가스로 폭발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에 처해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지구는 매우 바람직한 행성이 될 가능성이 있고 지구인들의 문명과 방어력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손쉬운 상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구를 정복하는 일이 남아있다. 이제 지구인과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 지구인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다. 지구 최후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 전투기를 몰고 출전할 때가 온것이다. 물론 그 전투기는 비행을 시작하자마자 에어졸에의해 추락하는 여름의 한국산 모기들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지구의 전투기들을 처치하는 일은 우리가 방안으로 들어온 여름의 모기떼들을 에어졸 한방 뿌려대면 우수수 바닦에 떨어트리는 것 만큼이나 일도 아닐 것이다. 과연 이들은 에어졸 대신 어떤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기를 추락시킬 것인가....아니면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리는 것일까....

위의 가정은 외부의 우주에서 날아온 그들이 지구의 인류에게는 적대적일 것이라는 가정에 의하여 씌여진 시나리오이다. 그렇다면 외계인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뜻과도 같다. 스티븐 호킹이 염려하는 바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과학 문명이 우리의 과학 문명보다 훨씬 더 발달해있겠지만 대화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주를 여행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지구의 문명에 도움을 주고 싶어할지도 모른 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훨씬 더 고도의 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위해서 그 먼 곳에서 이곳 지구까지 일부러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와주게 될 것인가. 그들의 윤리는 과연 타자와 서로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는 가치관을 가진 것일까...행여 도움을 주러 왔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지구의 일부를 나누어 달라는 의도일까? 첨단 기술을 알려줄테니 지구의 한 귀퉁이를 내달라는 뜻일까?  

이렇듯 만약에 하나라도 적대적이라면 지구의 인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기타 유용한 도서들... 

 

 

 

 

 

 

우리가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독서를  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태초우주의 빅뱅으로부터 지금까지 137억년, 우주의 크기는 직경 200억 광년 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과학자들의 합의 결과이다. 우선 우리의 태양계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구의 자전속도는 460m/sec 이고 1.600km/h 이다. 엄청난 자전의 속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혀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이다. 또한 지구는 30km/sec(110,000km/h)의 속도로 공전을 하고 있다. 시간당 십일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공전하며 달리고 있는데 태양을 한바쾨 도는데 꼬박 365일이 걸린다는 것이다. 흔히 이정도의 속도를 염두에 두지만 한가지 추가할 것이 더 있다. 태양계 자체가 우리의 은하 내부 궤도를 돌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타양계 자체가 거대한 궤적을 그리며 우리의 은하를 돌고 있다는 점이다. 태양계가 생성된 이후로 태양계는 그 궤적을 400번 반복했다. 다시말하면 50억년 나누기 400 =12,500,000 년이다. 이 속도는 250km/sec 로 계산된다. 이렇듯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공전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천이백오십년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우리 은하 내부에서 발생하는 속도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은하는 우주 안에서 우리 은하 만의 궤적을 돌며 공전하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가 움직이는 속도를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구의 자전 속도 + 지구의 공전 속도 + 태양계의 공전속도 + 우리 은하의 공전속도 + 알파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중인거야??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현재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우주속을 그 얼마나 빨리 달리고 인지할 수 있다하더라도 우주가 그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양은 태양계의 질량의 99.86%를 차지한다. 그리고 목성과 토성이 나머지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구가 그 얼마나 왜소한 행성인지 짐작 가능한 대목이다. 규모 면에서 지구는 정말로 보잘 것이 없을 정도로 미소하다. 우주의 미립자라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지구에서 살고있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저 멀리 우주로 뻗어나가 인류의 야망을 펼쳐보이는 것도 좋겠지만 우주를 알았으면 겸손할 줄 알고 미약한 존재들인 우리가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이 인류의 덕목이 되는 것은 아닐까...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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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아 뜻대로 상품을 넣을 수가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음악은 사실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작곡가와 음악을 매치시키지 못하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 블로흐이다. 블로흐의 음악이 주는 매력을 글로 다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블로흐의 음악을 듣고 게시판에 썼던 글을 간단하게 적는 정도이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다.
낮게 깔리는 선율이 먼저 가슴을 한 번 깊~게 찌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율은 내내 찔리고 시린 가슴에 통증을 가중시키기라도 하듯이 뜻대로 휘어잡는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고 마는 마법사의 주술에 걸린 듯...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고 만다...

이렇게 글을 적고야 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분이시라면....꼭 들어보셨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1. 연인과 이별을 앞두고 고뇌하는 사람....
2. 이별을 한 후의 아픈 가슴을 아직 감싸지 못한 사람...
3. 한잔의 술을 마시며 한숨을 푹~ 하고 내리쉬게 되시게 되는 사람..
4. 왠지 모르게 "고독의 끝"을 만져보고 싶은 사람...
5. 헤어진 연인의 향기를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람.......

위의 어느 항목 하나라도 해당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들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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