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용의 장구가 주는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조선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흔히 선비라 일컫는 조선의 엘리트들은 유학을 백성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宋代 주희의 그것을 표본으로 하고 이에 한 치의 어긋남이 있는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휴는 중용의 장구를 새롭게 다듬었고 그 해석을 주희의 그것과는 다르게 시도했었다. 윤휴는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와 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의 저술을 남겼고 이는 윤휴 빛나는 최고의 업적 중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희의 해석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였던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갔고 이는 결국 조선 최고의 유학자 중 한사람인 윤휴가 사사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극단적인 예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당대의 풍토가 그러했던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고 주희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철저하게 매장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조선이었다. 같은 시가 중국에서조차 한물간 주희의 학문을 그토록 열열히 신봉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학이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기 때문이었다. 주희의 학문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기득권을 가진 집권세력에게는 참을 수 없는 권력과 재산의 손실을 의미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지배하고 왕을 견제하는 주요 무기로 사용했던 조선의 집권세력들의 유학은 실상 절름발이 학문이었으며 현대인들에게는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겠으나 유학의 순수성은 그 폐해만으로 평가 할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동양 고전의 가르침을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것이 후학들이 해야 할 책무임을 저자 김용옥선생이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중용의 해설을 시도한 김용옥선생이 중용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경전이라고 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용을 좀 읽었다고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교(敎)의 참된 뜻의 깨달음을 줌과 동시에 배움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비단 배우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향하는 중용의 가르침이 또한 지극히 간곡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세 또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르치는 장구 중 한 구절을 리뷰로 대신하고 싶다.



배우는 사람의 자세: 대학과 중용의 가르침 비교


大學에서 발전의 과정을 전하고 있는 8조목은 매우 유명한 문구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이 말을 어른이 아닌 현대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로 재해석한다면 ‘격물치지-공부를 열심히하여 이치를 깨닫고, 성의정심-매사에 정성을 하다며 마음을 똑바로 쓰고, 수신제가-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으며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치국평천하-나라에 쓰일 훌륭한 재목이 될 수 있다.’ 정도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해석은 학생들에게 맞는 버전으로 해석한 것이지 원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이러한 발전의 단계라고 여기는 대학의 8조목과 견줄 수 있는 중용의 장구는 23장이다. 대학의 8조목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른데 그 뜻을 살펴보면 어떤 느낌의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주희의 대학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선비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문구가 친민(親民)이냐 신(新民)이냐이다. 원래는 친민이었던 것을 정자(程子)가 신민으로 바꾸었고 주희가 이를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친민과 신민의 차이는 뜻하는 바가 매우커서 신민으로 이해할 때 백성들은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정치이념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 곳은 다름아닌 조선이었다. 신민이라는 말은 무지한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는데 곧 글을 모르는 조선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백성들은 수신의 자격을 갖지 못하며 결국 치(治)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드는데 일조한 글자가 바로 신민이다.   

 

 

 

중용의 23장은 다음과 같다.

其次致曲

기차치곡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箸, 箸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唯天下至誠 爲能化.

 유천하지성 위능화


다음으로 힘써야 할 것은 치곡(致曲)이다. 치곡(致曲)은 아주 작은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곡진(曲盡)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간곡(懇曲)하다’는 표현에 낮설지 않다. 여기서 간(懇)이라는 말은 ‘정성을 다하여 마음 쓰고 노력을 다한다’는 뜻으로 성(誠)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치곡(致曲)은 바로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는 마음이 모든 곳에 이르도록 힘쓴다’는 뜻이 되겠다. 아마도 대학의 성의(誠意)라는 말은 중용의 曲과 같은 말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점은 대학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대학은 성의 정심에 이어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강력한 의무를 지운다. 조선에서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의 강역를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든 사건이었다.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과 왕자였던 봉림 그리고 척화를 주장했던 대표 인물들을 비롯 약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는 조선의 자존심에 엄청난 수치와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청에서 돌아와 왕위를 물려받은 효종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북벌을 천명했고 이를 강력하게 추친 코자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효종에게 북벌의 덕목으로 수신(修身)을 강조하면서 효종의 손발을 묶어놓았던 것이다. 선비들은 조선의 왕에게 조차 수신이라는 말로 그 뜻을 뭉개버릴 정도였다. 그러니 글자를 모르던 일반인들에게 수신제가란 과연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은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에게 넘을 수 없는 신분의 건널 수 없는 선 그어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용에서는 수신이라는 말로 이어 놓은 것이 아니라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는 말로 잊고 있다. 지극히 곡진하면 성(誠)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하면 誠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곡진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성(誠)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다음은 성즉형(誠則形) 이다. 모양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정성을 다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형체로 구체화된다. 현대적으로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멋진 모습을 갖게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형즉저(形則箸)이다.

간곡하며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말, 즉 저(箸)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상대방이 성심을 가지고 언행을 하는 것인지는 금방 드러나게 마련이다. 왜냐면 그 사람의 언행은 바른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사과나 감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마음으로 곡진한 마음으로 감사 또는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 눈빛과 태도를 보면 드러나게 마련 아니던가... 그러니 형즉저(形則箸)인 것이다.

  

이어지는 단계는 저(箸)하면 명(明)한다 즉 箸則明이다. 곡진한 마음을 다한 구체적인 개인과 사물의 형태가 드러나면 밝아지기(明) 시작한다. 좋은 일, 보람 있는 일을 한 사람의 얼굴에 밝아 보이는 이치와 같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반대로 나쁜 짖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밝을 리가 없다.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도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밝은 얼굴이 그 얼마나 좋은 기운을 가진 얼굴이던지....


 명(明)하면 동(動)한다 즉 明則動이다. 말하자면 밝은 모습으로 매사에 임하고 친교를 나누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모이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좋은 사람 좋은 것 주변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것들이 모이는 이치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들이 모이면 무엇인가 좋은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동(動)이다.

 

이렇게 動하면 변(變)하게 된다.  동즉변(動則變)인 것이다. 움직이는 힘은 변하게 마련이다. 간곡한 마음과 성실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꾀한다면 아니 될 일이 없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變이다.


마지막으로  變則化이다. 變과 化는 그 뜻하는 바가 다르고 한다. 變은 외형적인 변모를 뜻하고 化란 형질의 바뀜이다. 變을 이루어 내면 비로소 化에 이르게 된다. 化를 이루고나면 현재의 나는 이전까지의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온전하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된다. 보다 더 훌륭하고 보다 더 인간적이며 보다 더 멋진 사람, 化를 이루어 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 즉 化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天下至誠, 오직 천하에 성(誠)만이 있을 뿐이다. 唯天下至誠 爲能化


인간이 이루어내는 化는 자신을 새롭고 훌륭한 한 인간으로서 키워낼 수 있다는 뜻이 되고 나아가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 낸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化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化를 이루어 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曲, 誠이 아니면 불가능 하다는 뜻을 가르치는 고전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것이 공부이든 인격이든 무엇이든 간에 지극한 정성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중용의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大學에서 가르치는 修身齊家와는 전혀 다른 말씀이다. 오직 천하의 至誠만이 化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매사에 마음을 다하여 지극하고 곡진한 정성을 들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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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2-04-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저의 조잡한 리뷰가 부끄러워 집니다.
 

독보적인 바르톨리의 창법

 

 

어떻게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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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스깽 데 프레, 만가 (Deploration)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훌륭한 스승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행운아라 할만하겠다. 스승 없이 제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학창 시절이 더없이 그리워질 때면 변함없이 떠오르는 분은 바로 학교 선생님이고, 여러 선생님들 중 특히 더 기억에 남아 감사드리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선생님이 계신 것은 나 혼자만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내게도 그런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지기도 전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아프고 후회스러웠던지.... 아직도 그 선생님의 모습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다...

   

 조스깽 데 프레(Josquin des Pres) 선생님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콘데(Conde)에서 1440년 태어나 1521년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실 탄생지와 그 연도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씩 달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80세를 넘기신 조스깽선생님은 무척 장수를 누렸다는 점...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고, 그보다 정확히 245년 뒤인 1685년 생의 바흐선생님도 65세를 누리셨다. 역시 장수하신 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조스깽 선생님의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곡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보다는 이 곡이 담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조스캥 선생님에 대한 경의, 즉 애호가로서 존경받을 만한 음악가에게 갖는 일종의 경의의 표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중심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뒤파이(부르고뉴 악파)와 쌍벽을 이루며 플랑드르 악파를 이끌었던 음악의 건축가 요하네스 오케겜은 그의 명성에 걸맞는  조스깽을 제자로 두었는데, 그 조스깽에 대한 의무감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음악적 성과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음악을 한 단계 올려놓는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은 조스깽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중세의 음악이 다소 추상적이었으며 주로 단선율로써 “일정한 선율의 되풀”이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짝선율을 (함부로 붙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선율에 또 다른 선율을 하나 혹은 그 이상 짝지어 놓는 초기 폴리포니(오르가눔)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왼쪽의 음반은 Missa Pange lingua 를 수록하고 있는 음반으로 조스깽 데 프레의 대표적인 음반 이랄 수 있다.

 

조스깽은 전통적인 형식에 혁신적인 자신의 음악을 섞어 지었고, 그 결과 중세의 음악과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 냈다. 자신의 화성이 모테트의 양식을 발전시키며 미사곡과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조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고, 스스로 고안해 낸 형식과 더불어 5, 6성부의 대위법은 또 다른 음악의 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나마 조스캥의 업적을 결론 짖자면 그 후세 음악가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한 아름 가져다 주었다는 점이다.


  좋은 선물을 주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면 될 일인데, 왠지 나는 조스깽선생님께 의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음악가도 아니고 애청자 일 뿐인데...). 그러나 지금 그 의무감은 감동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의 의무감이 서서히 애호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조스깽에 대한 몇 가지 수식어인 폴리포니의 완성자, 혹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작곡가, 혹은 가사와 멜로디의 개념화등 인데, 나는 이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조스깽은 스승인 오케겜의 죽음에 즈음하여 스승님에 대한 추모곡을 선물로 내 놓는다. “만가(Deploration)”라고 불리는 이 곡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한탄과 슬픔을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스승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건함, 무엇보다 음악의 정갈함을 고스란히 희석시켰다. ‘스승님께 드리는 음악’이라는 특별한 느낌은 이미 나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는 점도 그려하려니와 슬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면서 보여주는 자.제.력.은 그야말로 나를 절제 美學의 地平으로 이끄는 듯하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놓는 듯한 음악은 연주를 듣는 즉시 감동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감동이 반감될 수도 있다. 한동안 듣고 나면 서서히 지루해지고 다른 곡으로 점프를 하고 싶어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고전음악에서 이러한 일은 흔히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다. 고전음악은 같은 곡이라도 그 버전이 매우 다양하여 지루해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의 명곡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청자에게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해준다.


  절제의 美가 신비스러운 영기처럼 서려있는 조스캥의 노래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가 들을수록 가슴에 깊이 패인 상처를 치료하는 노래요, 가슴에 사무친 푸르른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주는 정취는 나의 마음이 된다. 가장 심금을 울리는 추모곡이라고들 하는 조스깽이 스승님께 드리는 “만가”는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함께 할 나의 영가가 될 것이다.

 

  음악을 즐겨 듣는 애청자의 한 사람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배어 들어오는 음악을 선호하고 경우도 매우 흔한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음악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 때의 그 감동은 정말 큰 감동으로 다가오며 특별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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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모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성스러운 연주’라는 생각을 갖곤 한다. 그녀의 연주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 그녀가 ‘특별수업’이라는 책을 냈건만 나는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진정한 팬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발견한 ‘특별수업’,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한 음악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 그 음악가가 쓴 책을 읽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인간문화재인 만신 김금화씨는 ‘하늘과 땅을 인간에게 이어주는 것을 바로 무(巫)’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무(巫)의 존재는 비단 만신만이 아니라고 했다. 만신의 성격을 가지는 존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 음악가도 포함된다고 했다. 음악가가 일종의 만신이라니...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리모의 특별 수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은 바로 ‘음악가는 만신’이라는 김금화씨의 말이었다.


 그리모는 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게되자 극도의 불안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모는 모든 심리적 짐을 떨쳐버리고 그 어느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으로 떠나야 할지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그리모에게는 연주로 성스러움을 느끼게하는 특별함이 있다


 

홍신자와 그리모


 이는 마치 춤꾼인 홍신자씨의 상황과 오버랩 된다. 춤의 예술을 행위하던 홍신자씨도 그리모와 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홍신자나 그리모가 예술가로서 처해있는 상황은 ‘정신적 고갈’을 의미하는 같은 상황이다. 즉, 영적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술인에게 영적 에너지는 절대적인 것이다. 김금자씨가 말하는 만신이라는 의미는 아마도 이러한 맥락 일 것이다. 만신이 신과 인간을 영매하는 존재이듯이 예술인도 청중과 음악을 영매하는 매체인 것이다.


 극도의 영적 에너지의 고갈을 느끼자 춤꾼 홍은 인도로 향한다. 그녀는 라즈니쉬를 만나고 그의 제자가 되어 영적에너지를 재충전한다. 그러나 영적 에너지의 재충전은 단순히 방전된 밧데리를 충전하는 것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밧데리는 같은 질의 내용물로 재충전 하여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재충전 후의 영적 에너지는 그 이전의 것과는 완연하게 다른 성격을 지니고 충전자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성질의 효과를 내게 한다. 밧데리는 성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반면, 영적 에너지의 재충전은 충전자의 질적으로 다른, 그리고 거대한 성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모도 자신의 여정을 떠난다. 떠나기로 한 이상 어디로인가 떠나야 한다. 여정에서 그녀는 스승님과 매우 닮은 교사를 만나고 동경하던 삶을 찾아 성당의 뜰을 관리하며 사고하는 친구를 만나고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또 다른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모의 타자와의 관계

 

 그녀가 말해주는 늑대 센터에 대한 이야기도 이채롭다. 그녀는 늑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늑대에게 물려 큰 상처를 입는다.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를 극복하고 상대방을 진정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 내면의 상처를 인내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의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낼 수도 있음을... 그 상처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도 있음을.... 그러나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그리모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랑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우연하게도 바로 이전에 읽었던 ‘산화의 힘’에서 읽었던 내용과 매우 일치하는 깨달음을 그리모의 특별수업에서 다시 읽게 되다니...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예술가, 영웅, 죽음’이다. 캠벨이 말하는 영웅은 인류에 헌신한다. 예술가는 대중과 문화에 신화를 가져다 줄 수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특별수업에서도 예술가와 영웅은 위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우연의 일치인가...

 

 

그리모의 죽음

(그리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 아님)

 

 조셉 캠벨은 죽음으로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캠벨도 이러한 신화적 재탄생의 방식에 공감하는 듯 했다. 특별수업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죽어야하고 그 죽음은 비극이 아닙니다.”라고...


특별수업이 주는 특별한 교훈이 하나 더 있다. ‘자유를 수련하라’는 것이다. 자유를 수련한다는 의미는 영혼의 활동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의미라고 했다. 영혼의 활동을 인식하는 존재는 만신이다. 물론 그리모가 만신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활동인식은 만신적인 요소를 가진 점이라는 뜻일 뿐이다. 자유의 수련은 영혼의 활동을 한다는 뜻이라는 것일 뿐....




그리모, 그리고 달과 6펜스

 

 

적은 분량의 책이면서 그리모가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의 책이라겼기 때문에 그 과정이 궁금했고 그에 대한 기대감만을 가지고 읽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득 아니, 뜻밖의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다시 만난 것이다. . 그리모가 머물렀던 수녀원의 베아트리스라는 등장 인물을 통해서이다.  

 베아트리스는 그리모에게 “인간에게는 원래 속한 어떤 지방, 어떤 기후가 있어 평생 그 곳을 찾아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만난 서머싯 몸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그들은 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nostalgia)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이방인이며,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잎이 우거진 오솔 길, 그들이 놀던 사람이 많은 거리는 그저 그들이 거쳐가는 곳일 뿐이다. 그들로하여금 애착을 가질 지도 모르는 영원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낮선 느낌이다.”


서머싯 몸은 태초부터 그 조상들이 떠나왔던 그 어떤 땅으로 인간을 돌아가도록 재촉하는 격 유전이 피와 함께 우리의 몸을 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서머싯 몸은 달과 9펜스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떠나게된 배경을 독자들에게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서머싯 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그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절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머싯 몸의 이런 소설속의 언어를 특별수업의 베아트리스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이는 나에게 무척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모, 그리고 매트릭스


 그리모가 만난 베아트리스는 정말 특이한 인물이 있다. 베아트리스를 통해서 달과 6펜스를 만나는가하면 영화 매트릭스를 만나기도 한다. 정말 특별한 일이다. 베이트리스는 그리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인간은 신의 암(癌)이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되더군요. 통제를 벗어나 제멋 대로 번식하는 세포들이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는 사로잡힌 모피어스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다. ‘인간은 암과 같은 존재이다.’ 라고... 스미스의 이 말은 당시 충격적이었다. 왜냐면 일면에서 자연의 파괴를 일삼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이 말에 선뜻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그래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모가 만난 사람들

 

그리모는 여정을 통해 몇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 과정에서 그리모는 자신의 슬픔, 즉 자신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정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아닌 타자와의 만남이다. 인간의 슬픔은 인간을 통해서만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을 잘 보여준 그리모의 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한스는 자신의 밖에서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 내부에서 찾으라는 조언을 해준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그만 돌아보아 유리디체를 잃은 것은 그녀가 부활하는지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자신의 내부로 회귀하라는 그런 조언 말이다. 그녀는 마침내 해답을 찾는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슬픔을 떨쳐보리고 자신의 피아노 앞에 새로운 사람으로 서있다. 그리고 그리모는 말한다.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지 말고 그대처럼 길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라."라고...  

 

 

그리모의 특별수업


특별수업이라는 표제어가 특별 수업으로 결정된 단서를 이 책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으로 멋진 대목이다. 그리모는 스승 바르비제가 해준 말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내가 자네에게 요구하는 것은 최고가 되라는 것이 아닐세. 내가 요구하는 것은 특별해지라는 것일세.” 아...나는 이 행간을 읽을 때, 전율을 느낀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비로소 나는 그리모의 연주에서 왜 그토록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유를 수련했고, 그 영적 활동을 통해 특별해져버린 것이다.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자신의 영혼을 피아노의 건반에 실어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영매, 아니 만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이 글은 그녀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와 똑같이 고갈을 경험하며 그 고갈을 새로운 에너지로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녀의 여정은 특별할 것이 없다. 다만 슈타인웨이에 들어가 어느때든지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우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우리도 특별해지려고 한다면 언제든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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