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페이퍼로 작성한 적이 있는 아래의 연주를 오늘도 이렇게 페이퍼로 쓰는 것은 그리모와 예르비에게서 느끼는 '경지에 다다름' 때문이다. 지금 이시간에도 지구의 그 어디에선가는 연주가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DVD 혹은 Blu-Ray등의 포맷으로 출시되고 있는 연주들을 헤아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내게 수도(修道)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연주는 흔하지 않다. 때로 몰아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연주들은 흔히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는 수도의 경지와는 또 다른 측면의 것이다.

 

동양에는 수도(修道)라는 말과 구도(求道)라는 말이 있다. 구도란 佛法의 용어로 道를 '탐구한다'거나 '구한다'는 말이므로 수도와는 구별되는 용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라는 말을 사용할까 한다.

 

동양의 수도(修道)라는 용어와 상응하는 서양의 용어를 찾기란 용이한 것이 아닌 듯 하다. 물론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겠지만 마땅한 하나의 용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도'라는 말은 명사로 인식될 수 있는 용어이지만 '도를 닦는다'는 의미로 보아 결코 명사라고만 주장 할 수도 없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명사이면서도 명사가 아닌 것들이 흔하다. '자연'이라는 말도 명사이지만 명사가 아니기도 하다. 그 뜻을 풀어보면 '스스로 그러하다'이기 때문이다. 

 

서양에는 수련(training)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그 능력을 고양시켜 끌어 올린다'는 말 쯤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Training을 다른 표현으로는 풀어본다면 '단련, 훈련' 정도가 될 것이다. 피아노를 잘 치기위해서는 그러한 수련, 단련, 훈련 또는 연습(exercise)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반복적인 연습은 어느 한 분야의 경지로 끌어 올리는데 필수적인 과정일 수 밖에 없다. 수많은 형태의 운동은 물론 학교 공부도 일종의 연습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수도(修道)라는 의미가 함의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수련, 단련의 의미와는 확연히 다른 용어이다. 물론 우리들에게 수신(修身)이라는 용어는 매우 익숙하다. 이 수신이라는 말도 수도라는 말에서 사용하는 수(修)를 쓴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렇다면 수(修)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아마도 이 修라는 말이 '닦는다'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修는 '닦는다, 잘 가다듬어 고친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불어 한가지 기어해두어야 할 것은 '닦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즉, 修는 운동의 능력이나 피아노를 치는 등과 같이 후천적인 능력을 강화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동양에서는 자연의 상태를 완벽한 상태로 보았다. 자연의 섭리라는 그 이치를 완벽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완벽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러워지고 어긋나고 치우친 것들 닦아내고 바로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수(修)이다. 그러므로 修를 행하는 길이 곧 修道인 것이다.

 

하여 동양에서는 '수련'이란 '원래대로 되돌아감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수련 혹은 수도의 과정이란 '자기 정화'의 작업이므로 그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보태어 크게 확장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오면서 잘못된 것들을 닦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버리는 과정이 수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수도의 과정을 바르게 거치면 어떻게 될까...물론 나는 수도를 한 사람이 아니라 알 수는 없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아집,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지라 한다. 한마디로 수련이란 무너지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까..생각한다.  내게 그런 깨달음의 경지를 느끼게하는 연주가 바로 그리모와 예르비의 이 연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보고 또 볼수밖에는...

 

 

 

 

 

 

 

그리모의 특별수업은 자서전적 출간물이지만 일대기를 다룬 책이 아니다. 예술인으로서 느끼는 그 어떤 '벽',  혹은 '한계'에 다다르면서 스스로 마주하는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그리모 역시 피아노를 치는 예술가로서 그들이 느끼는 딜레마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이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리모 역시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 수업이라 한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특별한 것이며 타자 개개인들에게 그 스스로의 것들은 모두 특별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것이어서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것이므로 특별하다고 전하는 그리모는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마다 특별한 일상이 있고 고뇌가 있고, 즉 삶이 있다. 그 삶에서 그리모는 어떤 것을 깨닫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모의 깨달음은 우리 모두에게도 아주 필요한 깨달음이라는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불어 과연 그리모가 저렇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제는 알 것도 같다...그리모의 연주는 修를 보여주는 연주라고 느끼는 이유이다...그 얼마나 정갈하고도 그야말로 성스러운 연주인가... 나는 그리모와 예르비의 연주에서 늘 성스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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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련이란 본래 자기 안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해나가는 것이군요.
보태고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능력이 내재돼 있는 걸까요?
우리를 둘러싼 편견 사회적 요구 상처 등등을 걷어내면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자유로운 재능이 펼쳐지겠지요?

차트랑 2012-05-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저도 잘 모른답니다 ㅠ.ㅠ
인간이 분명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답니다^^
이것이말로 말씀해주신 재능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고요.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을 데려가는 人 님~
 

'다산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책을 읽었으니 리뷰를 써도 되겠다 싶어서 쓰려고 하니 워낙 널리 알려진 분이라 고민고민하다가....차라리 페이퍼로 작성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렇다면 제목은 또 뭘로하나...갈수록 태산이다... 막상 페이퍼를 써놓고 보니 더 고민스럽다...그러다가 결국은 '호와 당호'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그러다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런 페이퍼가 되고 말았다. ㅠ.ㅠ

 

 

 

'다산'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정약용선생님은 국민의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다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다산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더 붙이는 것을 보면... 더불어 독자로서 '다산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도 하다. 그만큼 '다산선생님'의 일생은 국민과 떨어질 수 없는 생애를 사셨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나는, 선생님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 '다산'이라는 호칭 보다는 '여유당'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개인 경우가 많았다. 아호가 있고, 자가 있고, 호가 있고, 당호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로 '추사'선생님의 당호는 '완당'이다. 그래서 추사 혹은 완당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한다. 그런데 호가 여러개인 분들도 있었다. 완당선생님의 경우는 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호가 10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호가 워낙 많은 분이다보니 백호당 (百號堂) 이라고 불리기가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 완당 선생님의 호는 더합 101개인가?? 어떤 이는 완당의 호가 500개도 더 넘었다고 하니, 정말 호가 많았던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은 세한도를 읽으면서 나의 독서 노트에 기록해둔 추사선생님의 호칭에 대한 설명이다..


 

자와 호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모가 어른들이 지어주는 이름을 아명이라 한다. 성인이 되면 관례를 올릴 때 지어준다는 의미로 관명(冠名)이라고 하는데 보통 그사람의 이름이 된다. 김정희의 정희가 관명인지는 확인 할 길이 없다.

 또한 자字라는 것이 있다. 이 또한 이름과 유사한 형태인데, 친구들은 보통 이 字로 서로를 부른다. 字나 號는 보통 스승님이나 덕망있는 어른들이 지어준다. 그 사람이 성인이 되어 지침이 될 수 있는 의미를 이름에 담는 것이다. 추사의 경우 자가 원춘(元春)인데, 元 도 봄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결국 원춘은 봄의 의미가 담겨있다.

 號는 또다른 의미를 담고있는 별명과 비슷한 것이지만 별명보다는 고급스러운 의미이다. 김정희의 號는 秋史인데 秋자는 字가되는 春자와 짝을 이룬다. 그의 자호에는 春秋 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春秋는 歷史를 의미한다. 추사의 자호로 이런 해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秋史와

추사는 별호이고 완당은 당호이기 때문에 약간 사용이 다를 수 있다. 阮堂書 라고 하면 완당이 썼다는 의미도 되고, 완당에서 썼다는 의미도 된다. 완당은 당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秋史書라는 말은 추사가 썼다는 의미만 담고 있다.

 또 완당의 경우 阮堂老人처럼 다른 글자를 붙여 쓰기도 하고 阮老라고 줄여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사는 다른 늘 단독으로 사용된다. 추사의 동료들이나 친구들은 주로 추사라 했고, 추사의 제자들이나 후학들은 완당이라는 당호를 사용했다. 직접 부르기 보다는 ‘완당에 거처하는 분’ 이란 의미와 함께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다. 추사는 제자들이나 후학들에게는 불경스러운 일로 여길 수가 있어 ‘완당에 거처 하는 분’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개인적으로는 호를 부르기보다는 당호인 '여유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약용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유당은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 역사의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유당께서 워낙 국민들에게 유익한 책들을 저술한 것도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여유당에 대한 저술들도 상대적으로 적인 편은 아니며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온 인물이기때문이다.

 

'다산의 마음'은 여유당의 마음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다. 여유당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산문집이기 때문이다. 마치 알라디너들이 자신의 생각을 페이퍼 작성하여 업로드하듯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 혹은 주변의 사건들을 매개로 쓴 글인 것이다.

 

그리고 세한도와 완당평전, 이 두 권의 책은 우리가 완당을 우리의 선조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긍심을 심어줄 수있는 세계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을 뿐더러 사실은 우리들도 잘 알고있지 못하다는 커다란 아쉬움을 주는 책이다. 우리의 초중고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들의 훌륭한 선조들이 수없이 많건만 제대로 알고 졸업시키는 교과내용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만하다.

 

 물론 외국의 학문과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은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의 것 뿐 아니라 타자의 것들도 배워 알고있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남의 것을 배운들, 제대로 소화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결코 몰라서는 안될 우리 선조들, 그들의 훌륭한 정신과 문화가 참으로 유익한데 우리가 배우지 못하고 있고, 그 아쉬움을 달릴 길이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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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5-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당 이라는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면 그 뜻을 떠나서 말에서 들리는 대로 여유가 와닿는 것 같아 참 좋아요

차트랑 2012-05-06 00:16   좋아요 0 | URL
옳으신 말씀입니다.
항상 조심하는, 여유하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럴려면 여유도 좀 가지고 있어야 할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2-05-0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게,
우리 선조에 대한 지식이 미약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답니다.
변명같지만 내내 IT를 하다가, 이제는 심리학 공부를 하는데 모두 기원은 외국이네요.

어쩐지 저는 뿌리도 없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셔요.

차트랑 2012-05-07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고, 무슨말씀을요 마녀고양이님...
저도 마찬가지 입장인지라
저 스스로 자성하는 의미를 가진 글이라고 생각해주십시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2012-05-07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5-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와 호와, 당호...이런 것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재미있지만,
알라딘 서재의 닉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재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차트랑공'님은요...전혀 미루어 짐작할 수 없다는~--;

2012-05-08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앙콜을 10번도 더 받아주는 키씬,

아르헤리치의 자애로운 눈길에 끄덕도 하지 않는 간큰 키씬,

저렇게 젊은 나이에 카라얀을 협연자로... 간이 부은 키씬

 

쟁쟁한 러시아 선배들을 닮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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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5-0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음악을 감상하네요

2012-05-04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5-05 09:52   좋아요 0 | URL
깜짝 놀랐어요 어디가 아프셔서 입원하신 거여요? 괜찮으신가요?
아프신데 답장을 무슨
저는 알라딘에 오랜 동안 마음을 두고 있어서 항상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답을 안 달아주셨다고 해서 섭섭해 하지 않아요.
그나저나 빨리 쾌차하셔야지요

2012-05-06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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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의 사상가 이윤기선생

 

 

이제 고인이 되신 이윤기선생께는 늘 특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생을 통한 저술과 번역의 범주가 매우 확실한 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카테고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련의 번역들과 저술들은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아우라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이윤기선생의 저서를 처음 접한 것은 뮈토스라는 책이었다. ‘시뷜레가 말하였다’로 시작하는 뮈토스는 그 시뷜레(아폴론의 연인이자 예언자)라는 어감이 주는 묘한 느낌 때문인지 아직도 인상이 깊이 남아 있다. 그 뮈토스에 이어 ‘변신이야기’는 당시 서점가를 강타했던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대출 순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저술활동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 던 중 이윤기 선생께서는 타계하셨다. 그의 역서들과 저서들을 살펴보면서 이윤기라는 인물이 ‘출판계의 사상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그는 분명 출판계의 사상가이다.

 

 

출판계의 사상가, 이윤기, 2개의 카테고리와 그 카르텔


 이윤기 선생의 역서를 대표하는 책들 중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독서력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든다. 그것을 역자도 알 고 있었던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를 따로이 출간했다. 아마도 이 역서들은 이윤기 선생을 악명 높은(?) 저술가 혹은 번역가로 재탄생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가 갑자기 그런 악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 전작들인 뮈토스나 변신이야기는 그 신호탄이나 다름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저서들은 역서와 저술이라는 범주의 일관성을 줄곧 지켜온 인물이다.

 

그러 던 중 좀 특이한 현상처럼 보이는 것은 이윤기 선생께서 ‘양들의 침묵’을 번역했다는 점이다. ‘플루타코스 영웅전’이나 199년 7월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인간과 상징’이라면 이윤기선생의 작품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양들의 침묵’은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해서 외도를 하지 말하는 법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기 선생의 작품세계에 뛰어든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윤기선생의 전체적 작품 활동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면 분명 이는 떨쳐버리기 쉽지 않은 의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양들의 침묵’, ‘신화의 힘’, 그리고 ‘신화와 인생’을  읽어보게되면 이윤기선생은 '양들의 침묵'과 '신화의 힘'은 선택했으나 '신화와 인생'은 왜 번역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신화와 인생은 신화의 연구와 저서에 매우 널리 알려진 조셉 캠벨의 작품이기는 하나 내용에 포함된 신화성이 매우 미약하고 인생이라는 포인트에 더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기선생의 저술서들이나 역서들은 분명히 특정 궤적을 만들어 왔다. 하여 ‘뮈토스’, ‘그리스로마 신화’, ‘플루타코스 영웅전’, ‘트로이아 전쟁과 목마’, ‘인간과 상징’,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샤마니즘’, ‘신화의 역사’, ‘헤라클레스’, ‘일리아스 오뒤쎄이아’ 등은 그의 주된 카테고리를 형성해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번역과 저술활동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출판계의 현상은 아니다.


 큰 맥락에서는 그러하지만 좀 더 가까이 살펴본다면 자전적인 에세이인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을 필두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헤밍웨이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 도나타트의 ‘비밀의 계절’등으로 볼 때는 또 다른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윤기선생의 작품들은 이렇게 뚜렷한 특징들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이윤기선생 만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신화와 영웅의 사건들을 보다 현대적이며 인간적 입장에서 해석을 시도한 하나의 카테고리와 심리적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를 가미하면서 초현실주의과 리얼리즘을 서로 관통하는 작품들로의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윤기선생이 출간한 서적들의 범주를 지금과 같이 파악하고 나면, 그 두 개의 카테고리는 이윤기를 ‘독서계의 사상가’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윤기, 즉 ‘출판계의 사상가’라는 카르텔은 두 개의 카테고리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며 내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고대의 신화를 지극히 현대적인 해석과 인류의 정신, 심리적 내면세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신화를 벗어났지만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특정 개인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접근을 시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들의 침묵은 이러한 일련의 내재적 연속성의 일환으로 출간된 작품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빛나는 판도라의 해석)


최근 알라딘에서는 50% off 행사를 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이윤기선생의 그리스로마신화 전 5권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아주 다양한 작가들을 통해서 세상에 아주 잘 알려진 테마이다. 그런데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여타의 저술이나 역서들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차이점은 신화에 대한 이윤기선생의 해석 방식이다. 이윤기선생의 해석을 읽다보면 이것은 이윤기선생의 능력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야말로 참신하다 못해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윤기는 어떻게 신화에 대한 해석에서 그러한 독창성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독창성이 빛을 발하는 하나의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만날 수 있다.

 

 

이윤기의 견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 대목은 판도라를 해석하는 방식을 한 예로 꼽을 수가 있다. 이윤기는 판도라가 인간에게 화를 불러왔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한다. 이윤기의 견해에 따르면, 판도라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제우스인데, 사실은 프로메테우스에게 잘 보여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이윤기의 이 해석에 매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놀라운 것은,  제우스의 수많은 자식 들 중에서 어느 누가 제우스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가는 오직 선각자인 프로메테우스 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중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헤르메스를 수 차례 보내어 그 비밀을 알려주면 죄를 사하겠노라고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하지만 그는 그 절대 회유에 넘어가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스토리이고, 다음은 이윤기만의 독특한 해석이다.)


 이에 똥줄이 타들어 가는 이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바로 제우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을 무지무지 사랑하는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하는 방법으로 여자를 만들어 인간에게 선물함으로서 제우스도 인간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프로메테우스에게 살짝 아부를 떨며 그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판도라를 생각해낸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본다면 판도라를 결국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아우가 차지하기는 했지만,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들게 된 동기로 보건데 결코 악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여타의 올림포스 신들에게 한 가지씩 선물을 상자 안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게 되고,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넣게 되는 것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이 선물의 상자를 안겨주며 '절대로 당대에는 열어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게 되고, 갖가지 신들이 준 선물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얼른 뚜껑을 닫았을 때는 이미 갖가지 좋은 선물들 증발해 버린 뒤였고, 오직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는 해설이다. 만약에 판도라가 당대에 열지만 않았더라만 그의 후세들은 무병장수는 물론, 미의 여신이 준 아름다움과 곡물의 여신이 준 농경법 등 이롭기로는 아주 이로운 선물들을 두루 누렸을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상자 안에 들어있던 온갖 나쁜 질병과 근심, 질투등이 빠져나와 인간세상에 퍼지게 되어 인간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는 것이 이윤기의 설명이다. 그토록 나쁜 선물과 희망이라는 좋은 선물을 같이 버무려서 넣었다고는 이해하기보다는, 애초의 의도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점수를 따려는 의도였다는 점은 감안하면 이윤기의 이런 해석은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동안 미심쩍었던 부분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이런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그 비밀을 제우스에게 털어 놓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모로 보나 판도라는 결코 좋은 선물을 날려버린 것이지, 나쁜 선물을 증발시켜 버린 것이 아니다...

 

 

 

한국의 번역계에 주는 교훈


이윤기선생의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의 카르텔에 있지 않나 싶다. 범주를 다양하게 넘나드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윤기선생의 범주와 카르텔로보아 그 작품세계가 대단히 넓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이윤기선생의 고집과 일정 카르텔을 집중 연구하고 자신의 역작에 반영하기 위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카테고리와 카르텔을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일정 범주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제력은 그의 번역 실력으로 보건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윤기선생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일관성을 가진 사상가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애초에 뮈토스에서 느낀 바 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필체는 기타 동종의 책들과는 구별되도록 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뮈토스에서 느낀 신화다움의 필체는 여전히 관련 역서 전반에 녹아있다. 뮈토스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윤기만의 독특한 필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축하고 있는 수준있는 역자의 모습은 우리의 번역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얼마전 어느 인물의 전기문의 역서를 두고 일말의 지적사항들이 발생했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역서의 문제점은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부지불식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윤기선생의 고집스런 연구와 그에 걸맞는 카르텔의 형성은 말이 아닌 일생의 노고와 사상으로 남아있고 그 가르침은 오래도록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윤기선생의 저술 혹은 역서들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일생을 거쳐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만의 카테고리를 형성하였고, 특히 이윤기 역의 벌핀치 신화가 벌핀치의 견해와 달리 생각하고 있는 이윤기만의 관점을 보여주는 대목들은 이러한 학구적 일관성의 소산임에 틀림이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윤기라는 인물이 일생을 두고 저술과 역장에 바친 그 자신만의 아우라는 부정할 수 없는 노고의 결정체이다. 이번에 알라딘에서 50% 할인가격으로 내놓은 그리스 로마신화는 이러한 이윤기의 생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역작이다. 저서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해당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도 다수 수록하고 있고, 더욱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이윤기의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고 그의 카르텔이다.


그는 평생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이는 이윤기의 신화를 읽어도 좋은 이유들이다.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주는 그의 통찰력은 그렇게 빛이 난다. 그 누구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이윤기의 글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각도의 해석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윤기의 산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여타의 신화와 이윤기의 신화의 차별하는 힘의 요인들이다. 나아가 이는 이윤기가 신화에 쏟아 부은 애정의 결실일 것이다. 같은 범주의 신화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정열을 기울인 작가도 없을 것이다. 애정이 없는 카르텔은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윤기의 신화론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도 내가 이윤기의 또 다른 신화의 해석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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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사이 2012-03-1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소설가 겸 번역가가 이윤기 선생인데요. 이 선생이 번역가로서 나중에서야 비로소 빛을 보시게 되었지만, 초기 번역가로서 이윤기 선생의 번역은 그래도 문제가 좀 많습니다..ㅎㅎ 제가 읽었던 것들은 그렇더라구요. 그럼에도 이 선생을 흠모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멜빵 바지에 술자리 좌중을 압도하는 구라를 푸시던 선생이 조금 그립기도 하군요..

차트랑 2012-03-15 12:22   좋아요 0 | URL
좋아하시는 작가시라니 다행입니다^^
원래 글을 쓰시는 분들이 구라가 좀 있으십니다 ㅋ
돌아가시고 나니
저도 그립습니다 ㅠ.ㅠ
제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사이님

마녀고양이 2012-03-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라는게 따로 발간되었었군요...
정말이지 장미의이름과 푸코의추는 쉽게 접근한 독자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들죠. ^^

양들의침묵을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걸 몰랐는데,
지금 확인하니 토머스 해리스의 세작품 역자가 각각 다르네요... 음,
양들의침묵은 사실, 기타 스릴러나 추리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게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랍니다. ^^

좋은 글입니다,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네요.
차트랑공님, 즐거운 주말되셔요.

차트랑 2012-03-16 14:29   좋아요 0 | URL
그 당시 양들의 침묵을 보았다는 어느 학생이 와서
묻더군요.
'그런데 왜 양이 나오지 않는거죠??'
재밌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