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평전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1
신병주 지음 / 경인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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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문의 배움에서 오는 강직함과 소신을 굽힐 줄 모르고 일생을 살다가 그 타협할 줄 모르는 완고함때문에 지극히 말년의 나이에 죽음을 강제당한 인물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흔히 대쪽같은 선비 혹은 선비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선비들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 죽음을 무릅쓰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결국 소신을 꺽는 선비를 만나기도 한다. 우리들은 선비의 기개에 대해서 배운적이 있다. 정몽주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개를 꺽지 않았다.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소신을 지켜간 조선의 사림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우암 송시열 과 내암 정인홍이 있다.    

우암 송시열과 내암 정인홍의 공통점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사림의 거두였으며 학문적 정치적인 소신을 가지고 일생을 보낸 인물로 숙종에게 사사된다. 내암 정인홍은 남명 조식선생의 적통으로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정치적인 소신으로 일생을 살다가 인조반정때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위 두 사람의 공통점은 참으로 많다. 우선 한국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의 후학으로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송시열은 조광조, 이이, 김장생의 계보를 잊는 화려한 학맥을 가진 인물이었고 정인흥은 조선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남명 조식선생의 자랑스런 적통이다. 둘다 사람의 영수로서 산림에 있으면서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견해 한 마디는 국정을 좌우했고 정치적 결정의 핵심적인 근원이 되었다. 더불어 송시열과 정인홍 모두 학문적, 정치적 소신을 절대로 굽힌 적이 없다.  

 한 예로 현종은 예송 논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정이 불안해지자 조금만 양보해달라며 사정사정하면서 신하인 송시열의 손을 꼭잡고 눈물로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군왕의 이런 눈물어린 호소마저 단칼에 거절한 인물이다. 도대체 그 어떤 임금이 신하의 두 손을 꼭잡으며 눈물로 양보해달라고 간청한 사례가 있었을까... 마치 막내 아우가 큰 형님에게 봐달라고 간청하듯이 말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송시열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반면 정인홍은 군왕의 위엄에 해가된다면 과감하게 숙청을 단행했다. 그 예가 임해군의 강력한 처벌 주장이었다. 물론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문란하여 세자 책봉에서 밀려나 진도로 유배된 상황이었다. 꼭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은 정인홍을 위시한 분명 북인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점에서 성격이 거칠고 과격하여 정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로인하여 얼마 후면 자연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나이에(송시열 83세, 정인홍 89세)에 둘다 강제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학문의 경지가 높고 둘다 사림의 거두로서 사림정치를 하면서 비타협의 외골수등 다양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좀더 가까이 살펴보면 엄청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한 사람은 학자로서 한 사람은 사상가로서 그 차이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송시열과 정인홍의 차이점 

학자 송시열은 율곡의 학통인 김장생의 예학을 고스런히 전수받는다. 송시열이 받들던 주자는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유일 신(God)'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 일생을 주자로 살았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는 김정생으로부터 예학 만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은 김장생이 이어온 학통에는 분명 율곡 이이가 그토록 가슴에 새기고 있던 보국, 보민, 애민, 생민, 휼민의 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서로 전수하지도 전수 받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송시열의 일생에 걸친 노력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율곡선생님의 드높았던 보민, 애민, 생민의 학문적 사상은 김장생과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오간데 없는 예학 중심의 학문으로 변질되었다. 그러한 예학을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거부하고 당파와 기득권의 보수적 이익을 지키는 무기로 사용했다는 점으로보아 절대로 그를 학문의 대가로 인정할 수 없게한다. 송시열 학문의 핵심이 되는 예학은 보국은 물론 백성을 위한 보민과 애민의 정신이 결여된 문제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관료들이 백성들의 고혈로 잇속을 챙겨 발생하는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대미수공법을 반대하는 핵심인물로 나섰을까...방납의 폐단이 그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게했었는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방납은 공물을 낼수 없었던 백성들을 대신하여 공물을 대납하고 그 댓가로 이익을 챙기는 시스템이었다. 겉보기에는 공납의 능력이 없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괜찮은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결정타를 입히게 된다. 우선 백성들이 직접 내는 공물을 관료와 짜고 의도적으로 퇴짜를 놓는다. 결국 대납을 안하면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엄청난 방납의 댓가를 요구하게 된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자신들이 살던 고향에서 야반 도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된다. 한 가구가 도망을 가면 그 친척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를 족징이라 했다. 친척도 도망가면 그 이웃에게 책임을 묻는다. 결국 한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도망을 가야지만 끝이 나는 제도이다. 마을은 순식간에 페허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전국에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런 방납의 폐단에 관련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바로 왕실과 종실, 그리고 중종 때의 반정공신들 때부터 그 폐단은 시작된 것이었다. 반정의 공신들이니 중종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흘러오다가 선조대에 이르러 문제의 해결을 적극 주장한 인물이 바로 율곡 이이였다. 과연 진정한 대 사상가이자 정치인인 율곡의 면모를 볼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율곡 선생님은 돌아가시고  인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흐지부지되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붕당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 선언했던 선조는 붕당이 있다면 "그대의 당에 들고 싶노라"고 까지 말했을까...이이의 정치관을 짐작할만한 장면일 것이다. 율곡의 죽음은 조선에 커다란 손실이었다.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럼 백성들은 어디로 도망을 가버린 것일까...산속 깊은 곳에 숨어 화적떼가 되거나 아니면 관료들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멀리 달아나 타향 어디엔가 정착을 했고 아니면 더 더 먼~무인도...에 정착을 했던 것이다. 요즘 여행을 하다가 보면 저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나...싶은 연유를 이제는 좀 짐작하실런지... 아마도 시골 집이 멀고도 먼...시골 구석도 한참 구석이 고향인 분들이 계실 것이다. 때로는 도대체 우리 조상님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토록 개발의 바람이 불려면 100년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시골도 한참 시골에서 일생을 사셨을까...생각해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방납의 폐단이었던 것이다. 수탈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야반도주하여 가다가 가다가 정착 한 곳...그 곳이 바로 지금 우리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이런 폐해의 심각성을 알고있던 율곡은 평생의 숙원이 방납의 폐단을 없앨 수 있는 대미수공법의 시행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납은 기득권의 수입창출의 창구였다. 그러기에 이원익, 김장생과 김육이 그토록 바랬던 대동법을 송시열은 결연코 반대를 했던 것이다. 사대부의 확실한 수입원을 송시열은 닫아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엄청난 수입원인데 그걸 폐하는 놈이 병신이던가... 이런...

또한 송시열은 효종의 최대 이슈였던 북벌, 주전론에 표면적으로는 동조하는 듯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다. 북벌론은 말 뿐이었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나라를 받들고 주자를 자신의 '신'으로 섬기며 당파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예송 논쟁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방증하는 명백한 증거물이다.  

흔히 실록에 송시열이라는 이름이 삼천번이나 등장하는 훌륭한 인물이며 '송자'라는 칭호까지 있고, 송자대전을 남겨줄 정도로 조선역사 불멸의 인물같아 보이지만 결코 명예롭게 생각할 이유들이 될 수 없다. 정인홍의 북인 계열들이 인조반정으로 제게된 후 서인들이 송시열을 필두로 노론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정부를 쥐락펴락한지 100여년이 흐른 뒤 정조는 하는 수없이 서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송자대전을 만들도록 지시한 것 뿐이다. 정조는 일종의 협상용으로 노론들이 입을 떡 벌어지게 할만한 송자대전을 협상 카드로 내놓게 된 것이다. 이는 군약 신강의 정부에서 왕권이 약했던 탓이지 송시열이 결코 훌륭하고 이뻐서가 아니었다. 정조가 살아있어 이말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분명히...  

  

위대한 사상가 정인홍은 한마디로 정치적인 패배자였다. 강한 기질과 직선적인 성향의 정인홍은 스승과 맥락을 함께한다. 스승님에 대한 의리를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퇴계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 퇴출을 끈질기게 주장하면서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애초의 의도가 왜곡되어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인조반정의 세력에 의하여 89세의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쳐형되었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며 신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한 기질과 강직함,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결국은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화를 입게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송시열과의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정인홍은 송시열과는 판이하게 다른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라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의 스승 남명 조식은 정통 주자성리학과는 달리 성리학을 실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보민과 애민을 인생의 과제로 삼았던 선비이다. 이에 실천하는 학풍을 추구했으며 이는 수제자인 정인홍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정인홍은 군주의 주권을 중시하고, 붕당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는 보국, 보민, 애민, 휼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식의 제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투쟁을 진두지휘한다.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이대기등은 바로 남명학파의 의병장들이다. 경상 우도의 대부분 의병장들은 남명의 문하생들이라고 볼 수 있다. 풍신수길이 조선침략의 실패 중 하나가 '의병'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의병은 에측불허의 복병이었고 임진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 그 의병 활동의 하나는 그 이름도 찬란하고 장엄하기 이를데 없었던 1,2차 진주성 전투가 이니던가. 이렇듯 남명의 문하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분연히 일어선 것은 남명선생의 '의'를 중시한 사상적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의는 바로 밖으로의 실천을 뜻하는 말이다.

스승인 남명 조식의 가르침을 중히 여긴 정인홍은 수양의 개념인 '경'- 안으로 밝힌다-과 학문을 실천의 행위로 표현하려 노력하는 '의'-밖으로 실천한다-, 두 글자를 인생의 지침으로 살아갔다. 이러한 신념이 그를 임진 왜란때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남명학파는 화담학파와 마찬가지로 싱리학을 실천의 문제로 인식하고 국부에 필요한 것이라면 다양한 학문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학문의 구체적인 실현과 민생 문제의 해결, 이것이 이 두 학파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것이다.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생각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우며 죽음으로 형벌을 가했던 송시열계와는 정 반대로 보국을 위한 수용적태도였다. 이런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정신이 후에 북학파로 계승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특징은 실천 중심의 신분적 개방을 포함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개연성은 없지만 조선 초의 정도전과 그 사상적 맥락을 함께 한다고 볼수있다. 조선초의 삼봉 정도전의 사상이 중기의 정암 조광조를 통해 남명 조식에 이르렀다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남명과 정인홍은 율곡 이이 그리고 서애 유성룡등 과는 당파적, 학문적인 거리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국, 보민, 애민, 휼민의 정신에 있어서는 서로 통함이 있었는데 이는 서경덕과 이지함, 김육과도 사상적 맥락을 함께한다고 볼수있다. 서로 시대적으로 다른 사람과 그리고 학문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분들이 이와같은 사상적인 맥락을 함께하는 이유는 단 하나, 보국, 보민, 애민, 위민, 휼민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 근본적인 정신이 같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대미수공법마저도 반대했던 송시열과는 달리, 정인홍은 상소문에서 광산 채굴, 운송 수단의 개발, 상업의 정려, 시장의 확대등의 정책을 내놓는다. 이는 농업 이외에 시장 상업과 무역등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고자하는 생각에 근간을 두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화의 유통을 통하여 '활여민'의 방책을 연구했음에 틀림없는 방증이라 하겠다.  

조선 중기의 주자성리학은 이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의'와 '리'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성리학자들은 이 둘을 철저하게 분리코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데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기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율배반적인 그들의 딜레마였다. 앞에서는 청렴한척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듯이 말이다. 이에 반하여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의'와 '리'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정인홍의 사상의 근간이 되었고 그의 철학이 되었다. 송시열을 절대로 사상가이며 학자라 칭할수 없으며 남명과 정인홍을 훌륭한 사상가이며  학자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송시열을 송자라 일컫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언어도단이다.  

내암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정치적 전개이다. 그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의리를 의병을 통하여 보여줬고, 군왕에 대한 의리를 광해군을 위해 발휘했으며, 스승과의 의리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지막 스승에 대한 의리에서 그는 급격하고, 과격했으며, 반대 세력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탄력적인 현실 정치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타협할 줄 몰랐던 정인홍은 많은 정적을 만들어냈다. 동문인들의 이탈은 이러한 정인홍의 독선적이며 수용적이지 못했던 정치력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산림에 있으면서 이이첨의 교활한 수법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된다. 정인홍의 뜻과는 달리 이이첨은 모든 정치적 음모를 정인홍의 이름을 도용했던 것이다. 이를 몰랐던 정인홍은 당시 '중앙 정치에 미숙했다'고 이 책의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이첨의 교활하고도 치사한 활약은 광해군의 정부를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갔고 결국 조선 역사에서 절대로 성공해서는 안되었을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게되고 비극적이게도 성공하게 만든다. 이로서 정인홍의 삶은 마감을 하게된다.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정인홍의 정신은 스승 남명의 가르침을 통하여 백성을 중심으로 사고했으며 철학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다같이 자신의 기개와 소신을 지키가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이건만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결코 같은 종류의 장엄한 죽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는 졸열하기 그지없는 고집불통으로 인한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을 강화시켜 백성을 위한 정부를 만들고 노력하다가 급진적 개혁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죽음을 맞이 것이었다. 진정 선비의 기개를 배울 수 있는 분은 바로 내암 정인홍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강직하고 비타협적인 원칙을 고수한 끝에 당파적인 패자가 되었고 신원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송시열과는 질적으로 다른 훌륭한 삶을 살다갔지만 아직도 조명받지 못하고있다. 드높았던 내암의 기개는 조선 천하에 퍼졌고 그의 '의'는 송시열의 그것 과는 확연히 다른 훌륭하며 붉른 꽃과 같은 삶을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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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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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콜럼버스는 금의 행방을 물으며 우리 조상들의 손목을 잘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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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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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출판계는 인물에 대한 많은 수의 어린이 도서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 중에는 어린이용 세계위인전기가 있는데 이 인물 전기의 전집에 실리는 인물들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인'이라는 말은 '위대한 사람' 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존경할만 한'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고 어린이들이 그 인물됨을 보고 배우는 롤 모델 로서의 매우 긍정적이며 좋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위인으로 설정한 인물들을 보면 뜻밖의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예를 들어 위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콜럼버스' 가 대표적인 예이고, 알렉산더, 엘리자베스 1세등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콜럼버스의 일대기는 만화로도 수없이 츨간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콜럼버스의 정체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의 손목을 잘라내면서 금과 은이 어디에 있는지 대라고 말한 장본인이며, 수없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도 모자라 노예 무역을 했다는 사실은 알게되는 순간 우리의 어린이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을 상상해보시라... 

알렉산더는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 타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셀수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 수는 일일이 셀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린이들이 롤모델로 생각해오던 그 위대한 인물의 배신감에서 오는 공허함을 무엇으로 달래 줄 수 있을까... 정복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징기즈칸과 그 후예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보다 2배 이상, 알렉산더보다 8배의 땅을 정복하며 가장 잔인한 드라마를 썼던 그들 단연 금메달감 일 것이다. 알렉산더는 게임도 되지 않는 드넓은 아시아와 유럽을 초토화 시켰던 그들이 아니던가... 유럽인들은 아직도 징기즈칸과 그들의 후예라면 공포에 사로잡힐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을 중심축으로 역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고 무비판적인 수용은 역사에 대한 왜곡 현상을 만들어냈다. 승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서는 유럽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술되었고 그 결과 세계의 문화와 문명은 유럽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그러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셰계사란 인간과 사물이 움직이는 시간적 공간적 영역이다. 어느 한쪽의 영향력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완력이 강했던 유럽중심의 기술은 없던 역사를 발명해내기도 했고 존재했던 역사를 증발시켜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세계의 역사는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기여한 대부분의 사실들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무분별하게 출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어린이용 위인전기에 콜럼버스와 알렉산더가 등장하는 이유 

진실을 알고보면 절대로 롤모델로서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는 인물들이 우리나라의 위인 전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역사 인식에 밝지 않은 점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이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의 역사인식은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서구적 사관 중심이므로 콜럼버스가 정말로 위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아직도 TV에서 콜럼버스의 모험심을 이용한 광고물들 공중파로 싫어 보낼까... 저자들이 이점을 알아차리고 모른척 유명한 인물들을 분별없이 끼워넣는 상업적 의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둘째로는 어린이용 도서를 저술하는 저자들의 역사인식이 부족한 탓을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콜럼버스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린이용 도서들의 대부분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저술되기보다는 어린이용 도서 집필자들에 의하여 기획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결과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러한 판단의 근거이다. 남북미 대륙의 7천만 인구 중 90%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는 서구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백인들의 질병에 의하여 사망했다.  

그들의 역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지워졌고 왜곡되어있는 실정이다. 이런 서구인들의 무자비한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과연 컬럼버스나 그와 유사한 인물들을 위인전기에 포함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도서 집필자들의 역사인식의 무지함이 무분별한 출판물을 내놓게 된 원일일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독자의 역사인식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역사적 사료들을 아주 잘 제시해주고 있다. 그토록 서구인들의 입을 달콤하게 해주었던 설탕은 흑인 노예무역과 노예들의 피가 배인 달콤함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그토록 수많은 원주민들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간 서구인들의 맨얼굴을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게 될 것이다. 

세계의 문화와 문명이 유럽에서 출발하여 전세계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은 그들 조상이 숨기고 은폐시켰으며 왜곡시킨 역사를 그대로 인식한 결과이거나, 알고는 있지만 조상들의 잔인하고도 무지했으며 처참했던 역사를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고 무자비했던 조상들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연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콜럼버스가 한반도에 도착하는 일이 발생했더라면 우리의 땅이 신대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노라고...그리고 우리를 인디오라고 불렀을 것이고 금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며 우리 조상들의 손목을 잘라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래도 콜럼버스를 위대한 모험심을 발휘한 위인이라고 부를 것인가... 

 이책을 통하여 많은 한국의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사관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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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김종빈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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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유일한 선민, 유태인에 대한 미시적 개괄서로 유익한 일독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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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김종빈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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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의 상대성을 논외로 할 수 없듯이 유태인에 대한 관점도 그와 다를 바는 없다고 본다. 이 책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갈등의 몸통과 다름이 없었던 유태인의 개괄적인 역사를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가진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유대인 시작과 과거 유대인 고난의 역사를 조명하며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니고 있었던 중심적 사고와 현재 유태인들과의 개연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저자가 의도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하는 글의 핵심적 흐름으로 볼 때 그 목적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의도대로 유태인에 대한 미시적 개괄서라 볼 수 있는 도서이다. 

아랍권과 유태인의 갈등은 미국의 무역센터에 대한 테러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유태인이 왜 갈등의 핵심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일 뿐이다.  나아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어쩌면 미국에게는 물론 전세계의 가장 골치아프도록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4,000년 전 유일신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안하여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땅에서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유태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은 몸종출신의 서자였으므로 쫒겨나 아랍의 조상이되고, 둘째 아들이었지만 이삭은 정실 부인의 아들이므로 적자로서 이스라엘의 후계가 된다. 마치 조선의 적자와 서자의 불평등한 관계식이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그렇게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리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 갈등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마 아브라함도, 모세도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의 전통적 종교의 특성은 독특하기 이를데 없다. 유태인 그들만의 '유일신의 선민'이라는 종교적 터전은 이슬람교과 유대교라는 일란성 쌍둥이를 생산했고 그들은 현재 흰 이를 드러내며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 과연 그들 유일신의 뜻이 이런 것일까...작금의 상황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이다.. 

여하튼, 유대인은 그 후로 수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집트로 이주하여 400년의 세월을 타향살이를 해야했고, 모세를 만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유일신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40여년에 걸쳐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금 로마에게 터전을 강탈당하고 디아스포라의 힘겹고도 인고의 세월을 또다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팔아먹었고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이유로 천대를 받으며 전 유럽에 흩어져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반유대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헸던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딱지는 그들에게 가혹한 시련의 길을 걷도록했다. 디아스포라의 시기에 그토록 처절한 차별 대우를 받게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유일신 사상과 유대인의 상술이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유럽과 아메리카까지 뿔뿔이 훝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주 특기인 눈부신 상술을 발휘했는데 이것이 유럽의 반 유대인 정서의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는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그들의 유일신께서 약속해준 땅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이게된 동력은 바로 그들이 유일신이었으리라...그들에게는 토라와 탈무드가 있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토라와 탈무드를 근거로하므로 이 둘은 그들의 정체성과 다름이 없다. 그들의 유일신은 그들에게 고통도 주었고 다시금 뭉치도록하는 원동력을 주기도했다. 그 결과 21세기의 세계는 어느 분야 하나 유태인의 영향력하에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가장 응집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태인...노벨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토록 수난의 연속이었던 역사속에서 되 살아나 지금은 세계 갈등의 핵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 고통을 받았으면 남의 고통도 이해할만 하지 않을까...이는 두번 째 강력한 의문이다... 

이책이 주는 정보는 여기까지이다. 전반적으로 유대인이 어떤 과정의 역사를 통하여 기사회생했는가와 그 기사회생의 기저가 되는 전통 종교적 신념과 토라, 그리고 탈무드는 유일신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각의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을 편협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별은 4개를 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는 남아있는 이야기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유대인들이 이제는 대부분을 차지해버린 땅인 팔레스타인은 어떤 땅이고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이다. 작금의 가장 현실적인 국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 팔레스타인 땅이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나라를 건국한 팔레스타인은 수시로 주인이 바뀌던 곳이다. 기원 전의 주인을 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기원 후의 주인에 대해 논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것이다.  

기원전 15세기 : 이집트의 유태인에 대한 학대에 고통을 받 던 중,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도망친 모세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유대인 이주시킨다 (약속받은 땅이라서..) 

BC 997년 : 다윗왕이 유대인 국가 성립하다 

BC 세기 : 유대인 국가는 외세침략 받고 뿔뿔이 흩어진다

AD 70년 : 유대인 제1차 유대전쟁 로마에 패하여 예루살렘 정복당하고 전 유럽으로 또 다시 흩어진다 

AD 637년 : 아랍인들은 로마를 격파하고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한다

AD 16세기-20세기 : 오스만 제국이 통치를 한다  

1차 세계대전 : 영국이 통치를 한다  

19세기 말 : 전 유럽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약속받은 땅을 찾기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드레프쉬 사건을 알면 그들이 뭉친 계기를 알게된다.  그리고 당시 전체 팔레스타인 땅의 87.5%가 팔레스타인 소유였고 유대인은 6.6%를 소유하고 있었다.

1978년 : 이스라엘 건국, 팔레스타인과 땅 빼앗기 전쟁, 그 후 수차례 팔레스타인과 전쟁을 치루어 땅을 넓혀간다.

현재 :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79%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을 통해 점령한 상태이고  팔레스타인 인구의 75%가 폭탄이 머리위로 떨어지거나 수많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자 피난을 떠나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응은 자신이 차별대우 받으며 살았던 지역에 스스로 설치했던 게토의 장벽을 쳐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키고, 팔레스타인의 재산의 무조건 몰수하거나 파괴한다. 팔레스타인의 무장인은 무조건 사살하고 요인은 암살한다. PLO 죄수들은 가급적 영원히 감금하고 되도록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들을 몰아낸다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쳐 놓은 케토라는 장막 안에 갖혀살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땅을 다 내놓을 때까지 팔레스타인을 죽이거나 압박하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유대인의 파워는 너무나 막강하여 정의롭지 못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조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오히려 지원하는 셈이되어버렸다. 유대인의  힘을 주지시켜주는 상황의 전개이다. 유대인이 믿고있는 유일신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동을 지원해주고 있는 뒷배가되는 셈이다. 신의 이름으로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더욱 조여가고 있다. 신이 약속하신 그들의 땅을 팔레스타인들이 모두 토해낼때까지... 

 약간의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 

땅을 놓고 벌어지는 양측의 대립은 끊임없는 인적.물적 희생을 가져오고 있다. 양측 발표를 더하면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이후 모두 3천4백44명이 죽었다. 고향을 되찾았다는 유대인과 고향을 빼앗겼다는 팔레스타인인들 간에는 지금 '장벽'을 놓고 극도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2004-07-01- 중앙일보  

이스라엘군은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를 기습 침공해 22일 동안 팔레스타인인 1400여 명을 숨지게 했다. 이스라엘군이 2일 가자지구의 남부 라파 지역에서 주행 중이던 차량을 공중 공격해 팔레스타인인 1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했다. 동아일보 

유대인들은 유일신이며 천지만물의 창조자인 야훼을 신봉하면서, 스스로 신의 선민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태인이 아닌 국가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왜 그들의 유일신 야훼는 전 세계의 당을 모두 다 유대인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혹은 팔레스타인들에게 직접 죽음을 내려 멸하지 않으시고 왜 유태인들이 스스로 신성함을 더럽히며 살인을 하도록 부추기는가...이는 나의 마지막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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