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한국사 2 - 고려의 건국에서 조선 훈구파의 집권까지, 고려- 대륙과 해양에서 세계를 만나다 교양 한국사 2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한국사에 관한 다양한 서적 중에서 단연 최고의 책이라 말하고 싶다. 저자는 한국사의 내용을 인과 관계를 명료하게 부여하여 독자들이 그 흐름을 타며 읽어갈 수 있게한다. 그리하여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손을 뗄 수가 없는 매력을 지녔다.   이러한 한국사의 저술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언젠가부터 한국사는 단순 암기라는 인식을 팽배했다. 교실에서의 수업이 주로 암기식이었기 때문에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는 유일한 목적이요 수단에 불과한 과목이 우리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저술이 여기에 있으니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매우 반가운 일이다. 

특히 고려의 건립 배경과 과정, 그리고 왕건이 나라를 세운 '대의명분'을 분명히 인식시켜주는 이 도서는 교려를 우리가 왜 잘 알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던져준다. 아니 독자 스스로 깨우치도록 한다.  

 역사의 흐름을 이토록 일사 분란하면서도 명료하게 저술한 역사 교양서는 독자들에게 가장 주요한 덕목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가치관의 부여는 독자들의 사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는 흘러 현대에 이르렀지만 그 근간은 흘러간 우리들의 역사속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역사는 흔히 현대의 거울이라고 한다. 역사를 정확하게 바라고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사관을 형성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가져야할 덕묵이기도하다. 이는 다변화하면서도 세계가 함께 서로 상응하는 시대적인 요구속에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왜 그토록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싶어하가? 역사는 미래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방향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설정되었을 때 미래에 끼치는 왜곡의 역사가 그 얼마나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지 깨닫고 있음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잘 알아야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최근 무소속의 아무개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1941년 일본의 징용장이 날아오자 그 동생인 작은 할아버지가 대신 사할린에 강제 징용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00당의 아무개를 이를 반박하면서 그 당시 일본의 강제 징용은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대일 피해조사의기록에 의하면 38년 강제동원이 시작되어 44년까지 조선인에 대한 동원령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소속의 아무개는 강제동원령의 피해자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지 않아 그의 작은 할아버지는 피해자에 등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아무개 후보의 보충역 판정에 의혹을 불러 일으킨 단초가 된다. 보웇역 판정에 대한 주장이 서로 달라 그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현재 알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국민이 역사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 역사는 언제든 왜곡될 수 있다는 점과 역사의 불분명한 인식은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00당의 아무개는 왜 강제 동원령이 없었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일제 식민 사관에 의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는데 진력을 기울인 바 있다. 이른바 조선사 편수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일본은 역사 학자들은 물론 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이 참여한 거대 역사 왜곡 집단이다.  

이 집단을 통해 한국사는 왜곡되어왔고 지금까지 그 왜곡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현재도 한국사 왜곡의 첨병이다. 만약 우리 국민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왜곡된 한국사는 정설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우리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교정해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한 중요 매체가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저자의 이 책은 우리의 역사관을 배로 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우리도 모르고 있는 바른 역사관을 안내하는 책이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라크의 역사 -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의 각축 살림지식총서 269
공일주 지음 / 살림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힘'이라는 강력한 동력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역사의 진실이 중요하기 보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의 진실성을 거의 의심해본 적이 없다. 왜나면 역사는 언제나 진실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역사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사관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흘러들어오는 정도의 대부분은 서구라는 통로를 거친다. 말하자면 이라크에 대한 정보의 출처는 대부분 미국과 그 언론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언론을 통하여 그렇게 중동의 역사를 접해왔다. 서구의 시각은 우리들의 언론을 통해 여과없이 전해졌고, 그 결과 우리들은 중동 역사의 진실을 거의 알고 있지 못하다. 대부분 왜곡된 형태인데도 말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최근 발생한 리비아 사태이다. 리비아 사태의 근원은 미영프라는 거대한 조직이 뒤에 존재한다. 지하에서 움직이는 힘은 중동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바로 미영프의 힘이다. 리비아의 동부에는 거대한 원유 매장의 석유밭이 있다. 세계 9위를 자랑하는 어마어마한 매장량이다. 그러나 현재 그 유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리비아가 그 유전을 돌릴 능력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중동이 언제나 화약고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지하자원이 그 근원이다. 누가 이 에너지의 보고를 차지하여 이용하느냐가 뜨거운 이슈인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미영프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하여 미영프는 종교적인 갈등을 빛고있는 동부와 서부의 세력들을 충돌시킬 필요가 있었다. 카다피의 부정 축재와 독재는 빌미에 불과하다. 핵심은 석유에 있는 것이다. 

이라크와의 전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라크를 제대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내부 갈등의 근원을 알아야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미국의 배후 조정을 알아야 한다. 미국은 왜 그토록 중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동을 이해하는 핵심인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국제적 관계속에서 작동하는 힘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의 하나이다. 만약 대한 민국이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국가였다면 중동과 달라질 바는 없었을 것이다. 석유는 중동에게 재앙을 불러온 장본인이다. 미영프의 힘이 존재하는 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암 송시열
이종호 지음 / 일지사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우암 송시열, 정법함이 마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가 늘 왜곡으로 점철되어왔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이를 뒷바침해주는 표현인 듯 하다. 그러나 역사가 승자만의 것이라면 그 누가 올바른 사관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부인이 직접 저술했다는 이유로 시대의 유익한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동시에 문학사적 평가도 매우 호의적이다. 그러나 한중록을 작성하게된 계기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면 과연 한중록에 대한 평가가 현재와 같을지는 심히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한중록은 혜경궁이 직접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저자는 영조실록의 내용들과 한중록의 내용들을 대조 분석해주고 있다. 같은 시기의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영조실록과 한중록의 차이는 매우 크다. 한중록은 한마디로 자신의 집안과 노론을 비호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을 가진 저술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남편이 뒤주에 갖힌뒤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혜경궁은 한 번도 남편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다만 유일하게 사도세자의 아들만이 아비를 살려달라 애원할 뿐이다. 그 어느 관료들 도 사도세자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는 자가 없었다. 시대는 노론들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사도세자는 그 부인이 전하는대로 '미쳐'서 죽어간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미친 사람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는다는 법이 있었다. 백성 한 사람이라도 법에따라 처결하던 것이 조선 시대였다. 하물며 사조세자는 일국의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던 왕에 버금가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러한 인물을 미쳤다는 이유로 죽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기만이다.  

이 책은 사도 세자가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노론들의 압박속에서 그 얼마나 생존하기위해 고군 분투했으며 결국 그렇게 영조와 노론의 음모에 걸려들어 죽음을 맞게되는 과정을 잘 그려놓았다. 전개의 과정은 시대적 순서이며 영조 실록과 역사 기록물들을 참고하였다. 더불어 혜경궁의 한중록이 그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저술인지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게기를 마련했다.  

역사를 제 아무리 감추고 왜곡하려 한 들, 그 지워진 흔적의 편린들은 정확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권력과 집권이라는 유일한 존재의 이유를 가졌던 기득권의 무서운 집단이기주의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조선시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대의 우리도 조선의 모습에서 예외는 아니다. 국민보다는 당리 당력이 먼저이고, 자신의 표가 먼저이다. 여론은 큰 의미가 없다. 국민들의 생각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조선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시대보다 국민들을 다루기가 훨씬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매체를 이용한 교묘한 프로파간다는 어쩌면 조선시대의 까막눈 백성들보다 다루기가 훨씬 수월해보인다. 현대의 국민들이 식자층이 많으니 그럴리가 없다고 반박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식자층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론과 대상을 정확하게 의도대로 유도해가는 그 솜씨가 과거보다 훨썬 더 발달했고 대중들은 그 술수를 거의 눈치채지 못하거나 눈치챈다 하더라고 별 수가 없다. 

지극히 소수의 국민들만이 이를 직시할 수 있수며 이들의 여론 몰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여론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권력의 중심에 가 있을 때는 이미 전과 같은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인물은 그렇게 변절하고 또 권력을 탐한다. 타협하지 않았던 윤증이나 융휴와 같은 인물이 더이상 존재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다.     

송시열이나 김석주등과 같은 인물들이 훨씬 더 많은 이 시대의 미래는 그러므로 매우 우울하다. 국민에게 밝은 세상은 과연 찾아오려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묘 18현 - 조선 선비의 거울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려를 무너트리고 국정의 질서를 새로 정립하면서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하여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변모케한다.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국권을 찬탈한 조선은 억불하고 숭유를 택함으로서 명나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도 '국왕'이라는 호칭을 결국 인정받지 못하고 귄지 국사라는 칭로로 불리웠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물론 국시 성리학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히 중요한 동양의 시상적 맥락이라는 점을 부인 할 수는 없다. 조선이 멸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 이즘에도 공자는 살아 숨쉬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 문묘의 문화적 가치는 공자가 있음으로 존재한다. 공자와 그 제자들을 근간으로 조선에서는 동국 18현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배향하여 모시게된 것이다. 물론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은 조선의 사상을 이끌어간 핵심이며 현재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는 분들이다. 이는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이며 역사적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문묘의 효시는 통일신라로 왕명에 의하여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그 제자인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 국학에 모신 것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문묘는 조선대에 와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된다.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기 시작하는 광해군대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5현으로 문묘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문묘는 시작된다.  

이어 정치적인 갈등이 율곡 이이와 성혼등을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로 표면화되게 되는데 문묘는 조선의 매우 안전되지 못한 정치적 현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역사는 현재를 만들어온 모체이며 일국의 미래로 이어지는 중요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 중에는 '현'으로 추앙받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이 포함되어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일국의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묘에 배향된 조선의 인물들에 관련한 동서인의 학통과 계보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보를 잇는다)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이언적                   김안국               조광조 

               이황                      조식                    이이  성혼

             유성룡  김성일        정인홍   최영경       김육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로 내려오게된다.  

위의 표에서 불 수 있듯이 조선시대 문묘에 종사된 인물들은 정몽주를 시작으로 정여창,김굉필,이언적,조광조,김인후,이 황, 이 이,성 혼,조 헌,김장생,송시열,김 집,박세채,송준길등이다. 18현으로 배향된 인물들의 업적으로보아 학문적으로나 정치, 사회적으로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인 하는 후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긍정적인 것이었는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율곡 이이는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붕당의 유해함을 인지하고 그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며 일생을 보내게된다. 이기일원론을 주창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반목으로 이어지는 붕당의 문제점들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이는 또한 백성을 위해 살다간 인물이다. 대표적인 정치적  업적 중 하나는 '대미수공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것으로 들 수 있다. 

조선 중후기 조선의 가장 큰 문제 점은 조세제도와 군역이었다. 조세와 군역은 조선사회를 매우 피혜하게 만든 문제의 핵이다. 전세는 수익에 관계없이 호당 일정한 세금을 징수했을 뿐 아니라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은 백성들을 거의 아사시켰고 방납의 폐단으로 마을을 탈출하여 산속으로 깊이 숨어버리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인징과 족징이라는 살벌한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어 들이려고만 했고 이를 두러워한 나머지 한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보리는 국가의 황폐함을 가져왔다.  

이러한 부조리가 나라의 근간이 백성들의 안위를 흔들어 결국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 판단한 율곡 이이는 급기야 대미수공법을 제안하기에 이르른다. 방납의 폐단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을 학문의 바탕으로하고 있는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이를 반대했다. 결국 이이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사망하게된다. 외에도 이원익은 매미수공법에 적극 공감하고 있었다.

그 후 임진란을 겪고 임진란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또다시 비극적인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배고프고 굶주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방납의 폐단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고 급기야 조선은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방납의 폐단을 잘 설명해주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인조 원년 포곡(군포와 곡식)을 횡령한 혐의로 윤수겸이라는 인물이 재산을 몰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수겸은 분호조참판이라는 벼슬을 이용해 미곡 7만여 석, 포 1만 5천 필, 은 9천냥, 소 300두를 횡령했다. 현 시세로 친다면 수백억원 대인 것이다. 윤수겸의 경우는 지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범케이스에 걸려든 것이었다. 부정부패는 전국적으로 일반화된 관행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세의 문제점을 바로잡고자 강력하게 대동법을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광해군 대의 김육이었다. 대동법은 율곡 이이의 대미수공법과 같은 것이다. 김육의 부단한 노력으로 광해군은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를 시작으로 대동법을 실지하게된다. 속종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는데 이는 100년이라는 긴 시간을 필요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매우 납득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