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 - 예술과 예술가들
최완수 외 / 돌베개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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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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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 - 예술과 예술가들
최완수 외 / 돌베개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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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진경시대를 책으로 써서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은 예술을 전공으로하는 이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여타의 분야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분야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하는 분야라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일이야말로 지극히 응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경시대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 놓은 뜻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인 나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점들이 많다. 읽는 도중에 몇 번이고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참고 끝까지 읽었다. 이렇게 말하면 한 성질 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을 읽어본 분과 진지한 논의를 거칠 수도 있는 명분은 있다고 본다.

조선의 국시가 성리학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특히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주자성리학은 그 절정에 이르렀고 율곡의 이기일원론은 주자의 성리학을 한 단계 진일보 시킴으로서 주자의 성리학에서  이제는 새로운 조선의 성리학으로의 진화를 일궈냈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사상이 가진 힘의 근간이었다. 심지어 퇴계의 후학들마저도 율곡의 진일보한 자주적인 성리학의 발전을 묵시적으로 동의했을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율곡의 성리학적 연구는 과거의 성리학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으며 조선만의 성리학을 일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편을 쓴 최완수가 쓴 글을 보면, " ---------------------------
중략...그래서 율곡의 손제자로 율곡학파의 학맥 적전을 이어받아 사람의 영수가 되어 있던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에서는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복수설치를 부르짖으며 국제사회에서 청의 존재를 부정하려 든다.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이 중화문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목 무력으로 중원을 차지해서 변발호복이라는 그들의 풍속을 강요하여 중국대륙 전체를 여진화시켜 놓았지만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중화문화의 적통은 중화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며 싱리학 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명실상부한 중화문화의 주체였던 명의 후계자를 자처하기 위해 우암의 제자들은 만동묘를 지어 명 태조 이하 우리와 관계있는 황제들을 제사지내고 조정에서 대보단을 설치하여 그 제사를 지낸다.

이런 생각은 당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에게 치욕을 당하고 그 힘에 눌려 살아야 한다는 민족적 자괴감을 보상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상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니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사회에 팽배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율곡학파에서는 조선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 고유색을 현양해 오고 있었는데 이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장을 떳떳하게 할 수 있게되었으니 고유문화를 꽃피워내는데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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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좀 풀어보자면 송시열은 명나라를 아버지나 조상만큼 귀한 나라로 여기고 청태조의 사당까지 지어놓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며 모셨고 조선의 국왕으로 하여금 이를 허락하도록 했고 조선의 선비들로 하여금 이에 절하며 숭배하도록 했다. 청나라에게는 두번의 호란을 당했고 인조는 한겨울 꽁꽁 얼어붙었던 땅바닦에 머리를 찌어 이마가 터져 피를 줄줄흐르는 상태에서 청태종에게 고두례를 했던 치욕의 나라인데다가 문화적으로 열등하니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치욕을 갚으려고 북벌을 부르짖었으며 명나라를 깨부수고 중원을 힘으로 장악한 청나라와는 상대도 하기싫으니 조선이 곧 중화라는 기치를 걸고 이미 죽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자는 것이다. 그런 조선의 중화사상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게된 것이 바로 우리 고유의 문화를 꽃피운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려는 것이다.

  저자의 이 대목을 읽다보니 무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여자 코미디언이 늘 하는 멘트인 "기가 막히고 코가막힌다 그죠?"라는 말이 떠오른다. 

송시열이 율곡의 적통을 이른 손제자라는 점은 절대로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율곡의 이름을 등에 업은 소인배에 불과했다는 것을 역사 공부를 좀 한 독자들은 잘 알고있다. 율곡의 학통을 제대로 이은 자 과연 누구였는가? 송시열이 북벌을 부르짖었다고? 지나던 *가 웃을 일이다. 독자를 정말 바보로 알고 있는 저자이다.

왕에게 제사를 지내려거든 우리 조선의 왕에게 제사나 지낼 일이지 명나라의 황제의 사당을 모시고 지낸다니...우리 왕통을 뭘보고 하는 행위였단 말인가...송시열은 주자의 제자였고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던 인물이었다. 자신이 주자의 분신인줄로 착각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주자가 빙의할 줄 착각했던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중국의 중화사상을 조선이 잇는다고? 이거 기가 찰 노릇이다. 조선이 곧 중화라는 저자의 이 대목은 뒤로 자빠질 지경이다. 율곡선셍님이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한단계 더 진일보시킨 이유를 송시열은 감도 잡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단적인 대목이 이곳이다. 그러니 송시열을 율곡의 적통이라 말할 수 있는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성리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다다랐던 인물은 퇴계선생님 이셨다. 이를 토대로 율곡선생님은 주자성리학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완전히 변화시킨 일대의 쾌거였다. 그러나 이렇게 발전변화사킨 율곡의 성리학을 과연 송시열은 이어받았는가? 절대로 절대로 이어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예 감도 잡지 않았거나 몰라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를 적통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율곡은 비록 중국의 사상을 기반으로  했지만 분명 이를 자주적인 조선만의 성리학으로 완성시켜놓았다. 그렇다면 진경시대의 정신은 이 위대한 대사상가인 율곡의 후계들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율곡의 사상에 근거하여 조선의 문화를 꽃피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직도 조선 대부분의 사대부들처럼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으며 명나라에 사대를 하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고 청나라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조선의 국력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노출시키려하지 않는다.  
 시대적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국제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국력을 너무 약화시켜버렸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속셈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너무 불편하여 역겨울 지경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진경시대에 일궈온 우리의 문화예술을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도 그러하다. 분명 겸재 정선은 중국의 화풍과 기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 스스로도 해내지 못했던 남북종화의 결합을 이룬 화법을 겸재정신은 성공시켰던 것이다. 이 또한 율곡이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이러한 창의적인 예술과 사상에 포인트를 두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상과 문화의 우리화를 부각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조선에서 배울 수 있는 진정한 조선의 정신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주역과 오행의 원리를 그림에 최초로 적용시킨 우리 그림의 '화성'이이었다. 이 또한 조선의 정신이 아니겠는가...그림을 주역으로 이해해야 하는 정선의 그림...그 얼마나 심오한 그림이겠는가...이것이 바로 조선의 정신이며 우리가 널리 알려야 하는 우리의 진경문화가 아니겠는가...

  추신: 이글에서 언급한 저자는 위의 한 사람입니다.. 공저로 되어있는 나머지 저자분들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저자 최완수의 외골수적인 사관이 너무 안타까워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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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 사상과 문화
최완수 외 / 돌베개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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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중 한 사람인 최완수님의 사관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요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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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 사상과 문화
최완수 외 / 돌베개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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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진경문화를 다룬 서책이라 반가운 마음에 구입하여 읽었다. 그러나 당파의 냄새를 너무 역하게 풍기는 바람에 읽는 내내 기분이 나지 않는다. 예술은 역사와 이분할 수 없다는 점은 잘 안다. 그러나 진경문화를 지나치게 숭배하다보니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기며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를 극심히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냄새가 너무 역해서 코를 찌른다. 어쩌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사관으로 일관 할 수 있을까..이러다가 한국의 미술를 공부하신 분들을 정말 개념없는 사관을 가진 쪼무래기들로 치부하게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평소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인지라 진경시대라는 제목의 책은 매우 매력적인 책이아닐 수 없다. 이미 안내에서 밝혀두고 있듯이 1675년-1720년 숙종대에서 1777년-1800년 정조대에 이르는 125년간의 시기를 진경시대라 구분한다. 숙종 46년과 경종 4년의 50년을 진경문화의 초창기, 영조 재위 51년을 절정기 그리고 정조 24년을 쇠퇴기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꽃을 피운 전경시대의 문화는 그 안에 선비의 정신과 사상을 근간으로 발전했던 우리 예술문화의 절정이라는 점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금방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눈치를 채셨으리라 믿는다. 당쟁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시대라는 것을 감지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당파가 혼란했던 시대에 진경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진경시대 예술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국시 '성리학'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사관의 흐름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당시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인과 노론중심 사관을 밑에 깔고 있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마치 서인들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불가피하게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그 반정의 성공이 있었기에 진경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역사적인 사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반정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성공해서는 안되었을 쿠데타였다.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과 인조는 권력욕을 이기지 못하고 반정을 일으켰던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건이 아니던가. 더구나 반정 후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얼마든지 피해갔을 수도 있었던 정묘호란을 스스로불러 조선에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나 반정세력은 정묘호란으로도 정신을 못차리고 바로 병자호란을 또다시 불러와 조선의 전역을 초토화시켜버리고 만다.  

임진왜란으로 7년간 조선의 인구 3분의 1이상이 죽어가는 비참한 비극을 경험한지 몇년이나 흘렀다고 또 다시 전국을 그토록 비극적인 전쟁으로 몰아갔어야  한단 말인가..어떤이는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조선인 20만 명이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는 이도 있고 60만명이 끌려갔다는 학자도 있다. 과연 진경의 문화와 이들 죄없는 백성들의 삶과 목숨값을 바꾸려한단 말인가... 

저자 최완수의 사관은 오로지 진경산수화만이 보이는 사람인가보다. 예술은 사회와 역사를 반영하기 마련이고 시대적인 사상을 바탕으로하기 마련이다. 다만 손기술로는 문화요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라 볼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너무 편협하고도 불안한 사관을 가지고 진경문화를 연결지으려다보니 참으로 실소를 금할 길이 없는 글을 써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진경시대는 가장 치열하고도 처절했던 당파의 싸움으로 전국이 얼룩졌던 피의 시대였다. 율곡선생님의 후계자들인 우암 송시열, 송준길등의 절대적인 주자신봉자들이 과연 진경문화에 공헌을 했다고는 하지만 주자성리학은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던 율곡선생님의 깊은 사상을 제대로 전수받아 배운 후학이 누가있었던가...김장생이던가, 송시열이던가, 송준길, 송익필이던가...   

서인 중 과연 누가 정녕 율곡선생님의 적통이라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율곡선생님의 애민, 휼민, 보민정신을 과연 그 어느 누가 재대로 이었단 말인가... 오로지 서인의 집권과 당파를 위해 목숨을 던진이들 뿐 아니던가.. 그들의 예술세계가 제 아무리 홀륭하다하나 빈강정이 아닐 수 없는 이유이다. 백성을 위해 일생을 살다간 대 스승님 율곡의 대미수공법을 이들은 모두 반대했던 핵심세력이었다는 점인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러고도 율곡의 학통을 이은 율곡학파라고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백성을 위한 이들은 대동법에 목숨을 걸었던 김육과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있었을 뿐이다... 

백성이 제외된 역사는 역사라  할 수 없다. 비록 진경문화가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앞으로 나오는 진경문화를 다루는 서책들은 당파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대적 국시인 성리학을 배제할 수 없는 점은 인정하지만 부디 당파를 끌어들여 사관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진경문화를 다루어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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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t 2016-09-14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진경시대 예술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국시 `성리학`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사관의 흐름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당시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인과 노론중심 사관을 밑에 깔고 있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는 게 무슨 말인가요? 말 앞뒤가 안 맞네요.진경문화의 산실인 노론의 사상을 이야기 안 하고 진경문화를 논하라는 건가요? 개소리도 이렇게 정성껏 쓰네.

차트랑 2016-09-28 18:29   좋아요 1 | URL
찾는 이가 없어 적적하던 차에 이렇게 왕림해주시니 반갑습니다 님,

비교적 쉬운 용어인 <사관> 과 <사상>을 잠시 착오하신 듯 하니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어 아쉽군요.
물론 실수는 저도 늘 하는 일이니 개의치는 마시기 바랍니다.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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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곰브리치를....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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