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풍속사 3 -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개정증보판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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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아보인다. 어쩌면 그러기에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여하튼 혜원이 그 시대에 그린 풍속화들은 스스로를 당시 사회의 아웃 사이더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회의 주류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는 혜원, 그 결과도 혜원은 아주 잘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책을 읽는 내내 가장 궁금한 점이 이것이었다. 

저자는 혜원의 적나나한 성(性)을 주제로한 풍속화를 아주 잘 접근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이 선조대의 임진왜란과 인조대의 2차례에 걸친 호란을 겪은 후, 조선 사회의 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성리학을 국시로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조선의 여성들에게 강제한 성()은 구지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하더라고 매우 가혹했다. 그로인한 조선 여성들의 희생은 너무나 큰것이었다. 더불어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진보주의자 혜원 

아마도 혜원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고 조선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진 진보적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신숙주의 후손이었고 아버지도 화공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활동의 영역을 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양한 인물들과 서책들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혜원 스스로도 도화선의 화원이었다는 점을 잘 알려진 사실이고, 시대는 조선 후기의 정조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라는 점도 기억해두어야 할 일이다. 당시는 청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였으며 연암 박지원을 비롯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아웃 사이더들이 속속 등장하던 시기이다. 흔히 실학파 혹은 북학파가 그들이다.  

북학파 역시 진보주의자들이다. 물론 혜원과 북학파 인물들이 교류를 했다거나 하는 자료등은 찾아 낼 길은 없다. 물론 서로 관련이 없어도 좋다. 각자 청나라에서 흘어들어오는 서책들은 충분히 사회 활동력을 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사문난적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당시에 양명학이나 서학 등 외래학문이 조선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국시인 주자학이라는 두커운 껍질을 뚫고 새로운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문학에서부터 바람이 불기시작했는데 소설로는 서유기, 금병매, 삼국지등이 그들이었다. 상상해보시라 조선의 그 철통같은 권력층의 감시를 비집고 금병매라니...이 얼마나 가당키나 한 말씀? 그렇게 조선 사회는 아래로부터 조용한 변화가 일고있었던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천주교의 박해는 이루 말로다 표현 할 수 없었던 것을...문학과 종교에서도 그러한 변화를 겪고있던 터다. 그렇다면 미술이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지 없지 않은가...신윤복이라는 사람이 비록 북쪽의 바람을 직접타는 붓을 잡아 자신의 화풍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나, 붓끗을 놀리는 그의 생각은 구시대의 정신과는 상당히 다른 시대적 사상을 구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지 않을까... 

시대의 부조리는 문학에서는 호질, 양반전등으로 매우 잘 표현되어있다. 당시의 정약용도 서리들의 부패를 꼬집은 사람 중 하나였다. 겉으로 들어난 후기 조선은 조용했을지 모르지만 내부적으로는 역동적인 변화의 조짐이 일고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한 측면에서 혜원을 이해하는 것은 어떠할까... 

혜원에 대한 자료들이 너무 없어 방증할 길이 없다. 혜원의 스승이 김홍도였으므로 혜원의 그림에서 단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정도이다. 진보주의자 혜원을 증명해낼 길은 영영 닫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하나 새로써도 좋은 사람이 또한 혜원이기도하다. 이렇게 서평을 대신하여 소설을 하나 쓸수 있는 이유도 무자료 인물이 신윤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보주의자 혜원이 밀폐된 조선 여성의 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이 책을 통해서 살펴보시기 바란다. 그 댓가가 지금과 같다는 것을 알고서도 말이다..용기있는 진보주의자  혜원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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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풍속사 2 - 조선 사람들, 풍속으로 남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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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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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풍속사 2 - 조선 사람들, 풍속으로 남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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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풍족한 시대가 절대로 아니었다. 민초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했고 많은 전쟁으로 더욱 황폐했다. 조선 풍속사는 '취병'과 '산수유람'등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조선 백성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소재들로 구성되어있다. 삶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전해주고있는 생업편의 어부, 옹기장이, 짚신, 엿장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가슴이 저미어 온다. 젊은 현대인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한 학습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  

불과 1980년대 만해도 버스안에서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이 어머니들이 있었다. 당시만해도 그것이 흉이되지 않았고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젓병있었다면 대신 물리면되었겠지만 젖병이 없다. 있었다해도 분유를 사서먹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분유가 있아해도 버스안에서 그걸 알맞은 온도의 물로 분유를 희석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도 않았다. 버스안에서 여하튼 젖병을 물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젖을 물려야했고 어린 아이는 엄마의 젖을 마음껏 먹고는 젖꼭지를 문채 엄마의 품에서 그렇게 잠이든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이거 변태가 되는 거이 아닌가? '젖 먹이기, 아들 낳은 여인의 특권' 이라는 내용이 많이 와닿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여하튼 조선의 여인들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외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음이 고스란히 화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즘 어디 상상이나 되는 소린가?? 미틴~ 짖이다. 시대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낳고 사고의 변화는 한때 자연스럽던 일을 미틴짖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젖을 물리던 가슴이 삶의 현장에서 사라져가듯이 한국인들의 따듯한 정서도 덩달아 자취를 감추고 있는 현실이 매정하다.

한 때 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인들의 식품 하나가 있었다. 바로 견공. 견공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에대해 외국에서는 물론 국내의 일부 인사들도 매우 마뜩해하지 않는다. 책에 의하면 견공을 식품으로 사용하던 역사는 중국의 진나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복날 개를 잡아 충재를 막는 행사의 하나로 견공을 식품으로 사용했다는 실록이 '사기'에 실려있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정조대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랐다고한다. 견공의 요리는 시시한 요리가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중요한 행사에 사용하던 중요 식품이었다. 옛날에는 地羊湯(지양탕)이라하여 우리 고유의 요리법으로 전해온다. 옛날에는 dog를 땅의 양(地羊지양)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기록은 지양탕은 성균관 유생들의 별미로도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유생들에게 특식으로 매달 1일과 6일이 드는 날에 아침 식사에 대별미로 지양탕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외국의 어느 배우가 한국의 지양탕을 두고 너무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지탄하던 일이 생각난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이자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타국의 음식 문화를 평가절하시키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조선의 성풍속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의 성문화는 지극히 폐쇠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변화하게되는 가족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해도 조선의 혼인 제도는 처가살이혼이었다. 남편이 처가에가서 살고 아이들도 외가에서 탄생하고 양육되던 문화였다. 살질적인 가부장적 권력이 아직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집살이혼으로 변모한다. 자연스럽게 여성이 남성의 지배하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여성들이 집안에 폐쇠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표현에 절대적인 제약을 받게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여성 주도적 성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조선의 여성과 춘화도의 관계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여성 주도적 성의 표현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어보인다. 

신중치 못했거나 신중할 생각이 없거나.. 

이 책에서 한가지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한 점의 춘화도를 소개한다. 여성이, 그것도 상복을 입은 여성이 늦은 밤 촛불에 의지하며 은밀하게 춘화도를 감상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한국의 미술사학자 였던 오주석과의 일화도 함께 소개한다. 

저자가 쓴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를 보고 오주석이 전화를 햇다고한다. 오주석은 저나가 책에서 소개한 신윤복의 그림은 신윤복이 직접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위작이라는 뜻이었던 게다. 오주석이 신윤복의 기법과 어긋나는데가 있다고 주장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오주석을 만나 위작설을 직접 듣고싶었으나 오주석이 작고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쓰면서 신윤복이나 김홍도 같은 조선의 위대한 화가들이 춘화도를 그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고 적고있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오주석이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든다. 오주석이 누구던가. 오주석은 특히 김홍도의 미술연구에 관한한 한국의 지존급이다. 당연히 신윤복의 그림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지금껏 학계가 그림의 주인을 오인하고 있었던 작품의 정확한 주인을 찾아냈는가 하면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예술을 완벽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해낸 유일한 미술사학자였다. 조선의 미술사에 과연 오주석을 능가할 수 있는 학자가 과연 누구던가... 

그런 학자가 마뜩지않다고해서 혜원의 그림을 혜원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을리가 없다. 철저한 필법과 자료를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 성과를 거둔 인물이 오주석이다. 자신의 노력과 명성에 먹칠 할 수도 있는 주장을 할 인사가 아닌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오직 하나. 한국의 미술사를 완벽하게 연구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오주석이 직접 전화를하여 위작여부를 언급했다면 같은 학자로서 바로 달려가 오주석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토론을 거쳤어야한다. 이것이 학자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던가. 학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에 앞서 한점의 의구심을 남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학자가 단서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했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정신이 결여된 태도이다.  

젆화를 받은 시점이 2001년이라고 했다. 오주석님이 타계한 것은 2005년이다. 그렇다면 뜻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찾아가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오주석이 어느 글에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했을 것으로 본다. 저자는 그 글을 찾아볼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오주석은 말로만 미술사학자가 아니다. 전녕 미술사학자가 바로 오주석인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누구였든 간에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없었다는 질타를 들어도 싸다.           

이점을 제외하면 전문가도 아닌 한문학자께서 글을 쓰느라고 애 많이썼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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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반한 우리 미술관 - 풍속화에서 사군자까지 우리 옛 그림 100 한눈에 반한 미술관
장세현 지음 / 거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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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미술세계로 출발해도 좋을 것이다...놀라움과 경외심을 일으키는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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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반한 우리 미술관 - 풍속화에서 사군자까지 우리 옛 그림 100 한눈에 반한 미술관
장세현 지음 / 거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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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한 후로 우리의 미술에 관한 서적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되었다. 왜 진작에 나는 우리의 미술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것일까...하는 아쉬움을 느끼지만 그러나 지금에라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위로로 삼고있다. 

한눈에 반한 우리 미술관은 제목 그대로 우리의 미술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간략한 개략서이다. 그러나 그 간단함 속에서 독자는 많은 것을 발견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 미술의 전시실을 지면에 담아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풍속화, 신수화, 동물화, 민화와 불화, 문인화, 인물화, 사군자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차례대로 우리의 미술을 간단하게나마 감상해가면서 좀더 세부적인 정보를 원하는 독자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미술하면 흔히 서양화를 떠올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술의 개념이 서양화 중심이었고 실기 평가를 목적으로 기리도록하는 실기도 대부분 서양화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미술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양화는 철저히 관찰자 시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스스로를 중심으로하는 투시도법은 점점 소실점을 향하여 멀어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술은 시점이 다양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점, 중앙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는 시점, 심지어 상대방을 시점으로 출발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향하도록 하는 다양한 관점을 부여해서 그린다. 나아가 우주의 이치를 담아내는 주역의 이치를 그림에 표현해내기도한다. 정선의 그림이 대표적인데 이는 주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림을 평가한다는 자체가 무리한 일로 서양의 화가들로서는 절대로 파악하기 어렵게된다. 그러므로 우리 미술을 이해하는 방법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구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물화의 개념도 서구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차이가난다. 조선의 인물화는 특히 매우 발달하여 극사실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산수화의 특징만으로도 서구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차별화된다. 사고의 방식이 다르므로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개성이 우리의 그림속에서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는 우리의 미술을 공부하게된다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고려의 불화는 그 어떠하던가. 일본인들이 도둑질해간 고려의 불화들은 그 누가 뭐래도 세계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일 뿐이다. 우리는 다빈치에 감동하고 모나리자에 감동한다. 그러나 우리 미술을 알고 관찰한다면 모나리자가 부러워지는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왜냐면 우리의 미술들은 모나리자를 능가하는 사상과 예술의 드높은 경지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술들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가슴은 분명 자부심으로 벅차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것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외심을 우리는 잊은지 오래인 듯하다. 외국의 새롭고도 낮선 것들에 대한 경외심만큼 우리의 것에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봐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은 우리의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카피를 기억하게한다. 정녕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 어느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앞으로도 읽고 보고 배워야할 우리의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 중에서 우리의 미술이 포함되어있다. 교육계는 물론 한국의 독서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우리의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감동의 감동을 주는 우리의 미술에게 사랑과 애정을 보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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