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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스 1 - 어느 순박한 영혼의 이야기 ㅣ 울림 3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마이너스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11월
평점 :
번역자로서 <킵스>1권은 '성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 작품이었다. 성장에는 종종 아픔, 실수, 오해, 후회가 동반된다. 그리고 웰스는 그러한 '불완전한 성장의 서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려낸 작가였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치열한 경쟁과 계급적 불안,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적 따뜻함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번역을 마치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1866년 노동계급 가정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원 관리인이자 작은 상점의 점원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대저택의 가정부였다. 웰스는 어려운 형편 탓에 여러 공립학교를 옮겨 다녔고, 14살 무렵엔 본격적으로 생계를 위한 도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같은 삶에서 탈피하고자 매일 밤 독서를 하며 스스로 교육탑을 쌓았다. 이후 연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사회비평가로, 과학소설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다양한 장르에서 혁신적인 작품을 남겼다.
소설 <킵스>가 탄생한 20세기 초의 영국 시대상을 먼저 이해하면 독서에 도움이 될 듯하다. 당시 영국의 신분제 경제가 서서히 흔들리던 시기였다. 교육 기회의 확대, 산업 구조의 변화, 중산층의 급성장 등으로 인해 전통적인 귀족 중심 사회에 균열의 틈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보이지 않는 문턱은 여전히 견고한 존재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킵스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삼촌 부부의 손에서 자란다. 삼촌은 뉴 롬니에서 작은 장난감 가게를 꾸려가고 있다. 킵스는 이 가게에서 소위 도제 생활을 훈련받고 있다. 그는 물건을 정리하고, 규율을 암기하고,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가여운 신세였지만 내면엔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꿈이 자라나고 있었다. 작가 웰스 또한 도제 생활을 경험했기에 이를 매우 잘 그려낸 듯하다.
비록 어릴지라도 사랑의 감정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냥 원초적으로 생기는 모양이다. 평소 동네에서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시드 포닉의 여동생 앤을 좋아했다. 그리 긴 교제 기간이 아님에도 키스를 청했다가 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이즈음 그는 새로운 도제처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포크스톤의 상점에서 일하는 샬포드 씨가 삼촌에게 '그 아이를 좀 다듬고 싶다'는 뜻을 전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킵스는 단 한 번 만이라도 앤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핑계거리도 없이 거리를 세 번이나 건넜다. 포닉네 집 창문을 올려다보려고 말이다. 여전히 앤은 숨어 있었다. 때마침 만난 친구 시드에게 "앤에게 좀 물어봐 달라"고 요청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렇게만 전하면 된다고 말했다. 둘 사이에 무슨 약속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킵스가 타고갈 버스가 움직이고 있었다. 문이 쾅 닫히자 그는 목을 빼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분홍색 평상복을 입은 꼬마가 버스를 추격하고 있었다. 앤이었다. 달리는 버스에 나란히 선 그녀는 "아티! 아티! 그것 있잖아! 내가 그거 했어!"라고 외쳤다. '그것'의 의미를 아는 킵스는 버스를 세웠다. 그러자 앤이 버스에 올라타 무언가를 손으로 전달했다. "오늘 아침에 했어"란 말을 하고 다시 버스에서 내렸다. 킵스의 손엔 '반쪽 6펜스 동전'이 있었다. 둘만이 아는 사랑의 증표였다.

(사진, 샬포드 잡화점 69쪽)
킵스는 다른 8명의 젊은 영국인들과 한 방을 사용했다. 혹한기를 제외하곤 자신의 외투, 여분의 속옷, 그리고 몇 장의 신문지를 덮고 자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는 벌금 목록을 외웠고, 소포 묶는 법을 배웠으며, 가게 상품이 어디 있는지를 익혔다. 각종 천을 접고, 재고를 세고, 손님을 맞이하며, 길거리에서 샬포드를 만나면 모자를 벗는 법도 배웠다.
그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에 시작되어 거의 녹초가 되어 발까지 아픈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선암 도제 민턴은 "네가 더 이상 일을 못할 만큼 나이가 들면, 그들은 널 버릴 거야"라고 말했다. 이에 킵스는 한 가지 욕망만이 점점 또렷해졌다. 쏟아지는 잔소리와 모욕의 폭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인내하며 지낸 5년, 킵스의 도제 순위도 이제 2위급과 맞먹는 위치까지 상승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무수한 여성들과의 약혼 경험이었다. 무려 여섯 번이나 되었다. 하지만 잡화점에서의 약혼은 구속력도 거의 없었다. 그저 일종의 유행이었다. 잡화점 아가씨들은 자신들이 하녀처럼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거다.

(사진, 여섯 번 약혼 91쪽)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간 젊은 여성들은 마치 버스 승객과도 같았다. 정해진 길 위에 잠시 나타났다가,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훌쩍 내리고 떠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벼운 연애 놀음은 그에게 끊임없는 흥밋거리였다. 그리고 노예 같은 세월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행복감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삶에 대한 불만은 그에게서 늘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거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의심에 시달렸다. 장갑을 끼고, 문을 열어주고, 길의 ‘바깥쪽’으로 걷는 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완전한 신사가 되기 전, 그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무지의 늪을, 발을 헛디딜 수밖에 없는 불안감의 수렁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같은 성장의 길을 걷던 킵스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부의 상속이었다. 신문에 올라온 유산 상속자 아더 킵스를 찾는 광고로 인해 '1년에 1,200파운드'를 수령하는 우연한 유산이었다. 이후 그는 도제 생활을 청산하고 소년기의 짝사랑인 헬렌 월싱엄과 약혼을 한다. 과연 킵스는 그토록 원하던 영국 신사로 도약할 수 있을까?

(사진, 2권 책표지)
2권은 주인공 아서 킵스가 뜻밖의 유산을 상속받은 뒤, 본격적으로 "신분이 달라진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국면에서 시작되었다. 1권이 "가난한 직공 견습생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이야기"의 쇼크를 다루었다면, 2권은 "부자가 된 뒤의 삶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야기였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킵스는 상류층의 기준에 맞는 '신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예법과 발음, 취향을 새로 익히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자라온 세계(잡화점 기숙사, 뉴 롬니의 초라한 거리, 삼촌 부부의 가게 등)와 점점 멀어지는 걸 느꼈다.
특히, 헬렌과의 약혼 이후 그는 상류 사회의 식사 자리와 모임, 지적인 대화들 속에서 늘 한 템포 늦게 따라가는 사람으로 남았다. 빗나간 농담, 어설픈 단어 선택 등은 자신이 "성공한 사람"으로 대접받을수록 오히려 위축감만 커졌다. 와중에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던 앤과의 재회가 일어난다. '반쪽 6펜스 동전'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풋풋했던 소년 시절로 돌아갔다.
예나 지금이나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졸부'에겐 항상 검은 그림자들이 어슬렁거린다. 킵스는 헬렌의 동생과 주변인들이 권하는 투자에 휘말려 함정에 빠지고 만다. "아무 일도 나와 상의하지 않고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헬렌의 말 앞에선 그는 함정에 빠진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던 것이다. 이후부터 그는 자신이 더 이상 헬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반면에 마음이 앤을 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유산은 점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잘못된 투자 때문이다. 이제 킵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앤과 함께 다시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가서 노동의 기쁨을 즐기는 것이었다. 소설 <킵스2>의 후반부는 두 사람이 작은 가게를 꾸리며, 빚을 갚는 삶을 그린다.
돈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가게는 자리를 지킨다
마지막에 킵스는 "오만 파운드가 있어도 이 가게를 접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의 고백에서 과연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요즘 읽은 책인 성장소설 킵스가 비록 20세기 초 영국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일지라도 진정한 존엄과 인간다움은 이 시대에도 유효한 듯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사진,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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