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서생 노상추의 눈물나는 과거합격기 1 - 청년 가장 맹렬서생 노상추의 눈물나는 과거합격기 1
김도희 지음 / 제이에스앤디(JS&D)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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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집 자제라고 하면 얼핏 음풍농월하며 책장이나 넘기고 살았을 것 같지만 실제 그의 삶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극한적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노상추는 다산 정약용이나 퇴계 이황 같은 역사적 스타는 아닐지 몰라도, 삶에 임하는 맹렬한 자세만큼은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 '양반가 청년 선비의 일상을 들여다보다' 중에서


(사진, 책표지)


<맹렬서생 노상추의 눈물나는 과거 합격기>(전 3권)을 쓴 작가 김도희는 대학에서 아동학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 어린이책 저자, 편집자로 유아,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TV 교양, 교육 프로그램을 다수 집필했다. 작가는 소장자 노용순의 '노상추일기'를 근간으로 노상추 가계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을 보여준다.


작품의 주인공 노상추는 영조 22년(1746)에 경상북도 선산의 양반 안강 노씨 집안에서 출생해 무과 시험에 급제하고 무관으로 활동했던 선비였다. 그는 17살 때부터 사망 이틀 전인 84살까지 무려 67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이중 53년 간의 일기가 현재까지 전해져 그 원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다.


이제 그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이 열일곱에 집안 일을 책임져야 하는 청년 가장 노상추의 가계는 부모, 아내, 형수, 조카 둘, 남동생(완복), 여동생(효명)과 노비 식솔 열 등 총 19명이나 된다.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노비들과 함께 논밭 농사를 잘 경영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양반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해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인생 최대 미션이다. 오늘도 공자의 <논어論語>를 펼쳐 소리내어 읽는다. 제1편(학이學而)에 실린 글이다. 그런데, 안강 노씨 가문은 관직 금지령인 '금고禁錮' 처벌을 받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사진, 16쪽)


노상추 일기는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 사회의 생활, 풍속 등에 대해 상세하고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기록 속엔 당시 양반집 가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상, 향촌 사회의 모습, 중앙 및 지방 관료 조직 등에 대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노상추의 새벽 독서는 오늘도 이어진다. 그는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여종이 준비한 세숫물로 세수를 한 후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의관을 갖춰 입고 서안에 앉아 논어論語를 읽기 시작한다. 늘 그러하듯 이는 그의 일상 중 인시寅時(새벽 3~5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자왈 사부모 기간 견지부종 우경불위 노이불원'

子曰 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음력 정월 스무아흐렛날 새벽이니 밖은 어두워 캄캄하고 추운 날씨다. 게으름을 피우기 쉬울 17살 나이임에도 아내까지 둔 어였한 성인인지라 이처럼 대견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 부드럽게 간해야 하니 자기 뜻이 부모를 따르지 않음을 드러내면서도 부모를 공경하여 어기지 않고 힘들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상추는 이 뜻을 새기며 마땅히 실천하는 군자가 되리라 다짐한다. 사실 상추는 셋째 아들임에도 집안 가장 노릇을 한다. 왜냐하면 위로 두 형들은 모두 죽어서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맏이였던 큰형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컸기에 소상小祥(첫 기일 제사)을 며칠 앞두고 노비를 대동하고 삼척으로 가셨다. 장례식 때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분이니 제사상을 보고 싶겠는가.


기일이 지나고 열흘째 되는 날 귀가했다. 사랑채로 들며 모두 따라오라고 했다. 소상 때 하루종일 비가 내려 가족들 모두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 아직 감기가 떨어지지 않은 상추는 콧물을 훌쩍이며 사랑채에 들었다. 운곡으로 이사하자는 제안이었다. 풍양 조씨 집성촌인 운곡은 어머니 친정집이 있는 곳이다.


(사진, 노상추와 친인척 반경 지도)


이사 갈 집은 사돈어른이 사용하다 지금은 비어 있는 27 칸 기와집이라고 했다. 비어 있다곤 하나 수리해야 할 곳도 많을 것 같고 이 많은 살림을 몽땅 운곡으로 옮긴다는 게 영 마음 내키지 않았다. 심지어 친정이 있어 좋아할 법한 어머니조차 별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허나 상추는 아버지가 갑자기 이사를 제안한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현재의 선산 집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잊고 싶은 거다. 큰형과 둘째형의 죽음, 아버지의 첫 아내이자 큰형의 생모인 큰어머니도 이곳에서 죽었으니 모두 잊고 새로 태어나고 싶은 거다. 이에 젊은 가장인 상추는 아버지 제안을 동의했다. 새벽에 읽은 논어 귀절도 떠오르고 말이다.


더구나, 지금 당장 이사 준비를 하라는 아버지의 영이 떨어지자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먼저 출발하겠다며 동생 완복과 조카 술증에게 짐을 싸라고 하자 놀란 어머니도 뒤따라 이를 지시했다. 이에 형수는 얼굴이 하예지며 허둥지둥 옷가지와 먹거리를 챙겨 노비를 시켜 말에 싣도록 했다. 동지섣달에 이사란 날벼락을 맞은 노비들 모두 한 마디씩 투덜대자 상추는 불호령을 내렸다.


노상추 식구의 이사 소식에 외가 친척들이 많이 와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이 좋은날에 고모가 크고 높은 사랑방의 큰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구경하려다가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다쳐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죽고 말았다. 빈소를 차리고 초상을 치르게 되었다. 슬픔에 빠진 아버지는 이 변고는 모두 자신 탓이라며 다시 선산으로 가자고 해서 다시 이삿짐을 쌌다.


완연한 봄, 집의 소가 연이어 두 마리가 죽자 농사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소가 쟁기를 끌어야 논밭의 땅갈기가 쉬울텐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운곡의 충격적인 사고 탓인지 아버지는 몸져 누웠다. 선산 부사의 요청을 받아 상추는 금오산에서 거행되는 기우제 헌관으로 참여했다. 6월 첫날, 드디어 비가 왔다. 6일 동안 연속 비가 내려서 이젠 논이 물에 잠길까 걱정될 정도다. 결국 산사인 미봉사로 피난을 갔다.


행여여력 즉이학문

行有餘力 則以學文


9월 새벽, 노상추는 여느 때처럼 인시에 기상해서 의관을 갖추고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서 효孝를 실천하고 밖에 나가면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 학문을 닦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또한 공자의 가르침으로 논어 학이편에 실린 글이다. 즉 자제子弟된 자는 맡은 소임을 다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사진, 50쪽)


우리들은 뭐든 '나중에'라는 말을 자주한다. 또 공부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도 받은 양 공부 외의 다른 일은 뒷전이다. 이는 인생 말년에 큰 후회감이 밀려올 수도 있음을 빨리 깨닫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내 가슴이 떨릴 때 하는 것인데 나이 들어 다리가 흔들거릴 때 하면 되겠는가. '금' 중에서 최고의 금이 뭔지 아는가? 황금, 소금 등 좋다지만 사실 '지금'이 최고다. 이 순간이 최고임을 깨달은 사람은 '나중에'를 외치지 않는다. 공부를 한답시고 정말 행해야 할 도리를 뒷전에 돌린다면 부모님 사망한 후 어떻게 효孝를 행할까?


어머니(44세)가 상추의 동생을 가졌다. 상추(18세)의 아내도 임신을 했다. 한 집에 임산부가 둘이라니. 허리가 아파 미봉사에 계신 아버지에게 새해 인사차 들러 이 사실을 알렸다. 뜻밖의 어머니 임신에 놀라더니 며느리의 손주 잉태 소식엔 파안대소했다. 선산 노상추 집안에 부자가 함께 자식을 보게 될 것이다. 


해지기 전에 선산 집에 도착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노비 덕돌이가 절에서 스님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며 '문경새재를 다녀오던 스님이 산에서 커다란 호랑이 발자국을 보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후 새끼를 죽인 복수를 위해 민가로 내려와 그 당사자 집을 급습하여 모두 죽이고 호랑이 자신도 포수의 총에 사살되는 사건이 정말로 발생했다.


친정에서 몸조리하라고 보냈던 아내가 4월이 되어 선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배는 불러오는 중이다. 기력이 부족해 숨이 차 하고 손발이 부었다. 집안에 임산부가 두 명이라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한다. 여동생과 아내는 곧 태어날 신생아를 위한 옷, 이불, 기저귀까지 준비한다고 바빴다.


상추는 효득 형이 구해온 과거 시험 기출 문제를 놓고 사랑채에서 본격적으로 과거 준비를 시작했다. 생원 시험에 출제된 네 문제 중 한 문제 정도는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아도 나머지 세 문제들은 도무지 깜깜했다.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하면 그 다음 대과 시험을 치르게 된다. 효득 형은 8일 정도 사랑채에 머물며 노상추의 문과 급제를 위한 공부를 도왔다.


올해도 날이 가물어 금오산에서 기우제를 위해 야단법석이었다. 유월이 되자 관아에서 여헌 선생(장현광)의 사적事迹을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이에 노상추도 회의에 참석해 여러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일을 도왔다. 작업을 마친 글과 책을 관아에 제출하는 일을 상추가 맡게 되었다. 선산부 읍성에 두창(천연두)가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동헌에 들러 관련 서류를 전하고 서둘러 관아를 빠져 나왔다. 상추는 귀가하지 않고 노비 덕돌이와 함께 미봉사에 들러 이틀 머물다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상추는 모 이앙을 마친 논을 둘러보고 귀가하는 길에 산파와 산바라지를 할 동네의 간난네와 안동댁 집에 들러 부탁 인사를 했다. 저녁 식사 후 안방으로 건너 가 어머님 상태를 살폈다. 이제 출산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설사기가 멈추지 않고 토하고 열까지 있었다. 태아에 좋지 않다며 약을 먹지 않고 버티다 출산이 시작되었다. 딸을 낳았다. 피를 많이 흘리셨다. 이 일로 어머니가 사망할 줄이야.


(사진, 130쪽)


10월, 마침내 상추도 득남을 맞았다. 아내는 출산후 狂症을 보였다. 소식을 들은 장인이 방문해 아내는 회복 중에 있다. 상태가 호전되어 장인은 돌아갔다. 이후 아내는 발작증을 보이며 피가 나도록 긁어댔다. 옆에서 간호하던 여동생 효명도 옷매무새가 흐트려져 있었다.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다. 11월 26일 눈이 펑펑 내렸다. 이틀 후인 28일 아내는 사망했다. 


그런데, 아내의 상태가 이토록 악화되었는데도 몹쓸 말을 아내로부터 들어 화가 난 형수는 이 집에선 더 이상 못살겠다며 눈이 내리는 오후에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야속하고 또 야속했다. 초상을 치른 지 넉달 만에 또 빈소를 차렸다. 땅이 돌처럼 얼어붙어 며칠간 동네 장정들이 도끼로 파낸 끝에 12월 20일 겨우 아내를 매장했다. 이토록 무서운 한 해가 저물어갔다. 


(사진, 뒷표지)


#책추천 #조선시대생활사추천 #역사 #조선시대생활사 #노상추일기 #맹렬서생노상추의눈물나는과거합격기 #제1권 #청년가장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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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22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노상추예요?
한자어겠죠?
내용이 흥미있네요.
생활사를 알수 있기도 하구요

호시우행 2026-01-22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먹는 상추가 아니라 성은 노씨, 이름은 상추입니다.ㅎㅎ
 
경제를 궁리한 조선의 선비들 - 청빈과 이익 사이, 조선 선비들의 머니 스토리
곽재식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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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일곱 명의 선비들의 이야기 속에서 경제와 돈에 관한 여러 주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자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해서 조금 더 가깝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옛 사연을 통해, 오래 고민되어 온 경제와 현실의 문제들을 각자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곽재식은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이자 SF 소설가로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과학 지식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필진과 패널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다수의 저서들과 소설들을 출간, 발표했다. 


총 일곱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혁신의 설계자 정도전, 유동성 개혁론자 하륜, 인간 심리로 부를 해석한 철학자 이지함, 노비해방 사상의 선구자 유형원, 경제 규모혁신의 설계자 유수원, 실용주의 추구한 개혁 이런가 박제가, 과학기술의 거인 정약용 등을 통해 그들의 고민을 살펴볼 수 있다.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말 조정에서 정치가로 활동하다 귀양살이를 거쳐 후학을 양성하다가 조선 창업에 올인했던 실질적인 조선 설계자였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조선 건국 무렵에 <경제문감經濟文鑑>, <경국전經國典>이란 책을 썼다. 당시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책'이란 뜻을 지닌 <경국전>에 경제와 돈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많이 실려 있었다.       


즉, 그는 <경국전>의 ‘경리經理’ 항목에서 고려 말의 겸병兼倂 문제를 다루었다. 겸병이란 남의 땅을 합쳐 가지는 것이다. 즉 세력이 강한 사람이 땅을 겸병해 차지하는 문제가 너무 심각해지다 보니, 땅 부자는 땅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더 많은 땅을 사들여 더욱 부유해지고 부자에게 땅을 조금씩 팔아 치우는 빈자貧者는 더욱 가난해지는 이를테면 고려 말의 '부익부 빈인빈' 현상을 지적했다. 


(사진, 경국전)


또한 경작할 땅이 없어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땅 주인에게 추수한 곡식의 절반을 줘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굉장히 심각한 수준임을 서술했다. 그 외에도 정도전은 땅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일으키는 두 가지 문제를 추가로 지적했다. 


첫째로 당시의 토지 제도가 복잡했기 때문에 땅에 대한 여러 복잡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조선 초 토지 제도는 '수조권을 나눠준다'라고 명시했기에 말하자면 땅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곡식을 추수했을 때 누구에게 얼마씩 분배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경국전>에서 정도전은 땅 하나에 주인이 7~8명이나 되어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권력자들이 땅을 독점하면 이로써 더 큰 이익을 억으려 부당한 압박을 가하고 나라의 제도를 좌지우지하며 정부와 결탁해서 판결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조종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코자 정도전은 '땅의 국유화'라는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다. 


나라가 주인들로부터 땅을 거두어 새 법령에 따라 농사지을 땅을 백성들에게 다시 나눠준다는 발상은 성공했을까? 피 튀기는 혁명은 부메랑을 맞기 쉽다. 정도전이 말년에 남긴 시 한편(제목 '스스로를 비웃다')을 소개한다. 


(사진, 정도전 시)      


하륜


이성계의 조선 창업 최측근이 정도전이었다면 이방원의 최측근은 하륜이었다. 정도전과는 동문수학 친구였기에 조선 창업에도 참여했지만 나중에 원수 사이가 되고 만다. 관상에 관심이 많았던 하륜은 고려 말의 '영흥군 사건'(1389년)에 얽혀들었다. 영흥군 왕환은 고려 임금의 팔촌쯤 되는 인물로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신돈과 관련된 사건에 휘말려 무릉도로 추방되어 귀양살이하던 그는 한동안 실종된 인물로 여겨졌다. 

이후 19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본인이 왕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로는 어쩌다 보니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며 세월이 흐르는 사이 한국말도 잘하지 못하게 되었고 과거의 기억도 많이 잊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의 외모가 달라져서 다른 사람으로 보였기에 진위 여부가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관상에 특기를 지닌 하륜과 동료들은 '가짜 왕환'이라고 주장했으나 반면 왕환의 부인은 진짜라고 주장함에 따라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이성계가 나서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성계 인맥에 포함될 수 있었던 셈이다. 

정도전이 불도저 스타일의 개혁가였다면 하륜은 유연하게 대처하는 꾀돌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방원에 줄을 대기 위해 장인인 민제 대감에게 사위인 방원이 왕이 될 관상을 지녔다고 넌짓이 말하자 이 말이 방원에 귀에 들어가게 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후 이방원이 국가 운영을 장악하자 하륜은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최고의사 결정 조직인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대신 '의정부'를 만들었다. 이처럼 정도전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 조선 제도들 중엔 하륜의 수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경우가 많았다.      

1401년 '종이로 돈을 만들어 통용하자'는 하륜의 의견은 정부 정책으로 추진되어 지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용어는 ‘저화楮貨’로, 중국에서 사용했던 교초와는 조금 다르다. 저화에서 ‘저’는 닥나무를 뜻하는데, 조선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쓰던 나무다. 그러므로 저화는 지금 쓰는 ‘지폐’라는 말과 거의 동일한 느낌을 준다.


(사진, 조지서 터)

<조선왕조실록> 1415년 음력 7월 25일의 기록을 보면, 지폐를 만드는 기관은 ‘조지서造紙署’였다.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에 가 보면 조지서 터 비석이 있다. 그 근처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돈을 찍어 낸 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지함

우리들 대부분은 이지함을 대하면 맨 먼저 '토정비결'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를 만든 이는 이지함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이지함의 인생은 불운과 고난, 빈곤과 실패로 가득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는 좋은 집안의 차남으로 출생(1517년)한 충청도 사람이며, 좋은 가문으로 장가갔지만 말이다. 

이지함은 상업의 장점을 깨달았다. 그것도 먹고살고자 온몸으로 바닥부터 굴러가며 알아냈다. 그는 노 젓는 일부터 시작해 품삯을 벌고자 땀을 흘리는 와중에 밀물과 썰물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게 절박하게 고민한 덕택에 그는 항해와 상업의 달인이 될 수 있었고, 큰 장사로 많은 재물을 벌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의 부모님 묘지가 바닷가에 있어서 여차하면 물에 잠길 것 같아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으려고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비록 바닷물로부터 부모님의 무덤을 완전히 지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효성에 감동해 하늘이 이지함에게 평생 소중하게 활용할 지식인 밀물과 썰물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줬다고 짐작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조선 선비들

이밖에도 유형원의 <반계수록>, 유수원의 <우서迂書>, 박제가의 <북학의>,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학자들의 고민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유수원은 스스로의 탐구와 직관으로 중상주의 상업이론을 책에 담고 있다. 특히, 같은 중상주의 실학자인 박제가의 '이사이망以奢而亡 이검이쇠以儉而衰'(사치로써 망하고, 검소로써 쇠약해진다)는 주장은 마치 과거 미국 경제가 '소비는 미덕이다'란 캠페인을 벌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 이슈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역사 #한국사 #조선시대 #경제이야기 #경제를궁리한조선의선비들 #곽재식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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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 자본주의
김창익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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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는 새로운 화폐 시스템을 만들려면 일단 제도권의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다. 비록 이자 지급 등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는 못했지만, 기득권이 일단 굳게 닫힌 문을 열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자는 아니더라도 사용자에게 부가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우회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스테이블 코인은 일단 평화의 메시지로 포장된 트로이 목마인 셈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김창익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25년 동안 <서울경제>를 비롯한 경제 전문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실물경제와 화폐 시스템을 연구해 왔다. 거대한 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넓은 안목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 거시경제가 수요와 공급의 원칙보다 정치적 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트코인이 달러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 중이다. 

총 여섯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빅테크 제국의 침략(1장), 월가와의 전쟁(2장), 규제와의 전쟁(3장), 권력과의 전쟁(4장), 중국과의 전쟁(5장), 빅테크 이후의 세계(6장) 등을 통해 월가가 설계한 경제 체제는 우리들이 선택한 시스템이 아니라서 이를 대체할 대안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들이 지금 정글을 탐험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수십 미터 떨어진 덤불에서 바스락거림이 있을 경우 이를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할까? 호랑이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과연 영리한 판단일까? 특히 생존과 관련된 판단을 할 경우엔 최대한 보수적으로 하는 게 유리하다. 그렇다. 우리들이 살고 잇는 경제하는 세계는 바로 정글이기 때문이다. 

빅테크 제국의 침략(스테이블 코인) 

세계경제를 장악한 빅테크 기업들의 다음 목표는 '금융'이다. 애플, 구글, 아마존, 테슬라 등의 기업은 많은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빅테크 기업들은 이용자의 높은 충성도와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기들 생태계 내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구축하려 한다. 즉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개념의 기축통화인 셈이다. 

메타~ 리브라(스테이블코인)
애플~ 애플페이, 애플카드 
아마존~ 아마존코인 
테슬라~ 비트코인(도지코인)으로 결제 
구글~ 구글페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제 앱은 돈의 흐름을 넘어서, 행동 데이터와 연결된 AI 기반의 개인화 금융시스템으로 진화 중이다. 이는 빅테크가 금융 소비자의 뇌와 지갑을 동시에 장악하려는 시도이므로 단순한 테크 기업이 아니라 데이터, 사용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심지어 화폐까지 장악하려는 거대한 플랫폼 제국이다. 금융은 그 제국의 마지막 퍼즐이다. 비록 리브라가 실패했을지라도 이는 일시적인 좌절일 뿐이다. 지금 그들은 AI를 무기로 새로운 형태의 통화 권력을 구축하는 중이다.

빅테크와 월가와의 전쟁

트럼프는 월가의 논리로 만들어진 자유시장 경제 프레임을 유지하되 그 내용물은 이전과 전혀 다른 것으로 채우겠다는 대안이 바로 '빅테크 자본주의'이다. 즉 월가는 반反세계화란 족쇄를 채워 보호무역주의라는 우리 안에 가두고, 성장 일로를 걷고 있는 매그니피센트 7의 비교우위를 앞세워 자본주의 이후의 자본주의(자본주의 2.0) 체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월가는 빅테크가 가려는 길목을 선점하고 규제란 장벽으로 그들을 가로막는 낡고 비효율적인 구체제의 상징이다. 빅테크는 혁신의 마지막 단계에서 궁극적으로 금융이란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 선점 후 독점이란 빅테크의 성공 루트를 그대로 가다 보면, 지불과 신용 창출이란 금융의 역할을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빅테크의 인공지능 기술이 향하는 종착역은 군수산업이다. 이는 냉전시대를 거쳐 닉슨 쇼크 이후 월가가 지배해온 미국의 패권 산업이다. 빅테크와 월가는 자본주의가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숙명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일종의 패권 전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도 양보할 수 없다.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빅테크가 언제 금융의 핵심 기능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 기능은 지불에서 신용 창출로의 확장이다. 신용 창출이란 '대출을 통한 화폐 발행'을 의미한다. 미국 국방부 예산의 무개 중심이 F-35에서 드론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여기서 F-35란 월가가 투자한 군산복합체의 무기를, 드론은 빅테크 AI 기술로 만들어진 무기를 의미한다. 

규제와의 전쟁(EU의 빅테크 규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은 아마존, 애플,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플랫폼 빅5'를 중심으로 데이터, 에너지, 결제, 소프트웨어를 모두 통합한 복합 인프라 권력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유럽은 이같은 흐름에서 기술, 자본, 통화 주권 모두를 점점 잃어가고 잇는 중이다. 유럽의 빅테크 부재는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문화, 자본 흐름, 정책 방향 등 총체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유럽은 미국 빅테크의 정보 독점과 시장 지배가 자국의 민주주의, 주권,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판단하면서, 규제를 더 이상 ‘제약’이 아닌 ‘방패’이자 ‘창’으로 삼게 됐다. 기술 그 자체는 미국이 만들지만, 기술이 작동할 ‘질서’는 유럽이 정한다는 이 새로운 질서는, 단순한 법적 프레임이 아니라 국제 정치경제의 규칙을 새롭게 쓰는 방식이다. 규제는 이제 통행세이자 주권 선언의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유럽은 ‘기준을 만드는 자가 시장을 지배한다’는 원칙 아래, 기술 패권 경쟁에서 법과 윤리를 무기로 내세운 새로운 권력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권력과의 전쟁(트럼프와 손잡은 빅테크)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캠페인 초부터 '반월가, 반엘리트, 반중국'을 기치로 내세워 반세계화 전략을 분명히 했다. 이런 기조는 월가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금융권은 트럼프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도 월가의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조 바이든(카멀라 해리스) 캠프는 여전히 금융권의 신뢰를 얻고 있었으며, 트럼프는 월가의 주류 네트워크에서 비주류 취급을 받고 있었다. 

바이든의 반대편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일런 머스크, 피터 틸 등 '반세계화 빅테크 진영'이 도널드 트럼프의 손을 잡았다. 이들은 기존의 월가-정부-관료-노조로 이어지는 체계가 미국을 비효율과 불균형, 규제 과잉의 늪에 빠뜨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반세계화 진영은 트럼프 재선 캠프와 전략적 동맹을 맺고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그 상징이 바로 '정부효율부DOGE' 프로젝트였다.     

바이든에게 ‘과두寡頭’는 머스크와 실리콘밸리였고, 머스크에게 ‘과두’는 월가와 워싱턴이었다. 이 대립은 단순히 개인 간의 불화나 정당 간 경쟁이 아니라, 세계화 이후의 국가 정체성과 기술 권력의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구조적 전쟁이었다. 

바이든은 기술 재벌의 정치 개입을 민주주의의 파괴로 규정했다. 머스크는 기존 세계화 엘리트를 미국 경제 몰락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두 세계관은 양립 불가능했고, 이념과 이해관계, 권력구조를 둘러싼 거대한 균열 속에서 미국 정치는 새로운 시대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있었다.

중국과의 전쟁(중국의 AI 기술 굴기)

2025년을 기점으로 중국은 인공지능을 중심에 둔 대전환 전략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AI를 '문명사적 도약의 계기'이자 '제2의 문화대혁명'으로 규정하며 이를 국가의 핵심 전략 자산으로 선언했다. 이에 인해전술을 앞세워 AI 중심 산업 국가로의 구조 재편에 착수했다. 말하자면 계란을 한바구니에 모두 담고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감내하겠다는 투자 전략인 셈이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권력이다. 기술 패권의 중심으로 부상한 인공지능을 놓고서 세계 각국이 경쟁을 펼치는 지금, 구조적으로 민주주의는 AI 패권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력 분산과 사회적 가치라는 민주주의 고유의 체계가 AI 개발과 확산에 어떤 제약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첫째,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이 느리다 
둘째, 민주주의는 윤리와 공공성을 우선시한다
셋째, 데이터 접근성과 수집에서 민주주의는 불리하다
넷째, 분권 체제는 중앙집중 추진력을 약화시킨다
다섯째, 민주주의 기업문화가 장애물로 작용한다 

기술 사상가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속도, 집중력, 예측 가능성이라는 AI 시대의 주요 가치들과 충돌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권위주의는 AI를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강화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이 기술을 어떻게든 길들이고 제한하려 한다. 그러나 이 기술의 제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AI는 점차 민주주의의 외곽부터 잠식해 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피터 틸이 “기술은 설득이 아닌 실행으로 세상을 바꾼다”라고 말한 것이나, 일론 머스크가 전통적인 정부를 ‘비효율적 유물’이라 평하며 기술 기반의 직접 민주주의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도 결코 공상이나 과장이 아니다. 그들은 기술이 체제를 대체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던 것이다.

빅테크 이후의 세계

"악마의 적은 천사가 아니라 또 다른 악마다"

스테이블코인의 세계화는 결국 브레턴우즈 체제의 디지털 확장판이며, 주체만 달라졌을 뿐 권력구조는 그대로인 셈이다. 이러한 구조는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생체 권력, 즉 권력은 더 이상 폭력적 통치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관리와 규칙 설정을 통해 행사된다는 개념과도 맞닿는다. 

빅테크는 플랫폼을 통해 금융, 소비, 노동, 인간관계까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하고 연결하거나 단절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되고, 이는 과거 어느 국가나 은행도 갖지 못했던 초월적 통제력이다. 

권력은 언제나 소수에게 집중되어 왔으며, 달라지는 것은 그것을 행사하는 주체의 형태일 뿐이다. 과거에는 국가였고, 그다음은 월가였으며, 이제는 알고리즘과 플랫폼이 조정자가 되고 있다. 악마의 적은 천사가 아니라 또 다른 악마다. 탈중앙脫中央이 불러온 기술적 혁신은 그 본래의 이상과는 다르게, 다시 새로운 중앙집권의 얼굴을 하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부의 패권을 둘러싼 작용과 반작용
 

빅테크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조용히 화폐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과거 중앙은행과 정부만이 누리던 주조 이익은 이제 플랫폼 기업이 일부 가져가려는 것이다. 이용자는 그저 편리한 결제 수단을 사용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이면에선 특정 기업이 발행한 토큰이 사실상 새로운 종류의 화폐처럼 기능하며 독자권 경제권을 넓혀간다. 월가는 스테이블코인을 떠받치는 안전자산을 장악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월가는 자신들이 익숙한 게임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의 심장을 붙집으려 한다. 

#경제경영 #빅테크자본주의 #김창익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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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1-17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론 머스크, 피터 틸등은 빅테크가 기존의 ‘금융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팔란티어의 두 인물인 피터 틸과 알렉스 카프는 모두 法과 哲學을 전공한 자들로서 미국의 다양성이 남북전쟁이라는 잘못된 단추로부터 출발한다는 사고를 가진 위험한 사람들로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은 파시스트라고 알고 있는데 빅테크의 파시스트를 경험하는 원년이 바로 26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1인 입니다.
이런 점에서 언급해주신 일론 머스크, 피터틸과 알렉스 카프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ㅠ

언젠가는 알렉스 카프나 피터 틸에 대한 글을 저도 쓰게 될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들을 ‘위험한 인물들‘로 바라보며 그들의 발언을 늘 주시하는 편입니다 ㅠ

공감이 가는 글이라 주절거리게 되는군요.
좋은 하루 되십시요~
 
거짓과 왜곡 없는 고종황제 실록
박영규 지음 / 옥당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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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 시대의 이미지는 대부분 식민지 권력이 만들어낸 틀에서 비롯되었다. 고종을 무능하고 나라를 망친 군주로 보는 통념은 일본이 침탈을 정덩화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성한 '정당화 서사'였고, 그 왜곡은 해방 이후까지 거의 검증 없이 반복되었다. - '서문' 중에서



책의 저자 박영규는 밀리언셀러 역사 전문 작가로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한 이후 27년 동안 고려왕조실록에서 일제강점실록까지 '한 권으로 읽는 역사' 시리즈를 펴냈다. 역서사 외에 역사문화, 에세이, 동사양철학사 등 폭넓은 관심 분야만큼 집필 분야도 다양하다.


책은 총 3부(쇄국의 시대, 개방의 시대, 몰락의 시대)에 걸쳐 아홉 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쇄국의 시대는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재위 10년(1873)까지를, 개방의 시대는 고종 재위 11년(1874)부터 재위 24년(1887)까지를, 몰락의 시대는 고종 재위 25년(1888)부터 재위 44년(1910)까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쇄국의 시대


우리들이 학창시절 수업을 통해 배워 알고 있던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조선 문호를 꽁꽁 걸어 닫고 쇄국 정치를 펼침에 따라 근대화가 늦어졌고, 반면에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통해 막부가 물러나고 천황 체제의 신정부를 출범시켜 근대화의 고삐를 당길 수 있었던 그런 시기였다.


1863~1865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 중 가장 눈에 돋보이는 장면은 뒷방신세였던 조대비의 정계 복귀과 흥선군 이하응의 등장이다. 권력을 되찾고자 절치부심하던 조대비에게 호기好機가 찾아왔다. 후사도 없이 철종이 죽자(1863) 그간 몇 차례의 역모 사건으로 인해 왕손의 씨가 말라버린 상태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아명兒名, 명복)을 양자로 삼아 후임 왕으로 지명하고 수렴청정에 들었다. 


풍양 조씨 가문 출신인 신정왕후 조씨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이 되어 입궁했지만 효명이 세자 신분으로 죽는 바람에 중궁에 오르지 못하고 뒷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는 바로 그 유명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다.


조대비가 어린 명복을 용상에 앉히려는 목적은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자신이 뒤에서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풍양 조씨 천하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또 조대비 입장에선 그간의 기득권이었던 인동 김씨 가문과의 대결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해 줄 유능한 공격수가 필요했는데, 당시 이하응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조대비의 친정엔 김씨 세력에 대항할 마땅한 인물(조카)도 보이지 않았고, 정치 경험이 전무한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이하응은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이 살던 집(雲峴宮)과 궁궐인 창덕궁 내부에 있던 금위영 사이에 문을 만들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조대비의 합의하에 이뤄진 조치였다. 1864년 9월, 조대비는 직접 고종을 대동하고 운현궁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후 고종과 대원군은 이 문을 통해 왕래하면서 만날 수 있었으며, 이는 흥선대원군이 정치 전면에 나섰음을 의미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안동 김씨 세력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안동 김씨 가문의 김흥근이 대원군에게 경고성 발언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또 이를 괘씸하게 여긴 대원군이 당시 북문 밖 삼계동에 김흥근이 소유하던 별장을 빌려 아들 고종과 함께 놀이를 다님으로써 이 별장이 자연스레 운현궁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황현(당시 10살 아이였음)이 들은 소문에 불과할 뿐 실록 어디에도 고종이 삼계동 별장에 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아마도 이 별장은 대원군 소유의 석파정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는데, 김흥근이 석파정을 소유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개방의 시대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백성들은 노동력과 각종 세금으로 고통을 받자 원성이 날로 커져만 갔다. 조선의 위기감이 날로 높아져 가자 고종 10년(1873) 동부승지 최익현이 조정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의 대신, 육조 판서, 삼사, 성균관 유생들을 사그리 비판함으로써 조정을 이끌던 흥선대원군을 겨냥했다. 이에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극찬했다. 같은 해 11월 고종의 지지에 힘을 받은 최익현은 재차 상소를 올려 대원군에게 실정의 책임을 물어 야인으로 물러나도록 하고 고종의 친정을 주장했다. 고종도 이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대원군은 결국 탄핵되어 정치 일선에서 떠나게 된다.


고종 5년(1868) 상소문의 핵심


1.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

2. 백성들의 가혹한 세금인 원납전願納錢을 중지하는 것

3.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는 것

4. 백성들이 한성에 들어올 때 받는 문세門稅를 폐지하는 것


고종 10년(1873) 상소문의 핵심


1. 청전(청나라 돈)을 혁파하는 것

2. 정사를 임금이 직접 챙기라는 것

3. 종친은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


1875년 8월, 일본은 군함을 파견해 강화도를 통해 서울로 진입하려 했다. 이에 강화도의 조선 병력이 포를 쏘며 저지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종도를 침략해 포격을 가함으로써 조선 병영과 민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은 일본이 무력을 사용해 조선을 개항開港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 정벌론'을 내세우며 호사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그동안 걸림돌이었던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사라졌으니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같은 해 5월 불법적으로 부산에 운요호가 입항해 조선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맘대로 조선 영해를 오가며 측량을 감행했다.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함경도 영흥만까지 가기도 했다. 이렇게 동해와 남해를 항해하며 조선의 대응을 간보다가 결국 8월에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인근 난지도에 정박했다. 이후 운요호의 일본군들은 물 보급 명목으로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병사들이 무장한 구식 화포와 화승총으로는 유럽의 신식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의 포격을 맞아 진이 초토화되고 아울러 많은 조선 병사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영종진의 병사들(400명)은 도망치기 급급했다. 이리 되니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무력 시위에 겁을 먹고 결국 개항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바로 강화도 조약 체결(1876)이다.


일본과의 통상 교섭이 진행되자, 최익현은 일본과의 교섭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흑산도에 유배시키고 교섭을 강행했다. 총 12조로 구성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쇄국정책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론 일본의 속셈은 식민주의적 침략의 첫발이었다. 정식 명칭은 '병자수호조약'이다.


조약의 주요 내용


(1조) 조선의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5조) 부산항 외에 2개의 항구(원산, 인천)를 개항한다.

(7조) 일본의 해안 측량 허용

(10조) 영사 재판권 인정


몰락의 시대


몰락의 원인은 조선 내부에서 발생한 부정부패였다. 1888년 함경도 영흥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함경남도 병마사 이용익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함경도의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이용익은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와 고종 사이에 연락책을 수행한 공로로 벼슬을 얻은 인물이었다. 


이 무렵 그는 영흥에서 사금을 채굴, 고종에겐 신임을 얻었지만 백성들에겐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던 것이다. 민란을 수습코자 고종은 이용익을 파직했다. 이후 함경도 감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철처하게 조사해 백성의 울분을 달래라고 명령했음에도 감사 이돈하는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영의정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 중 이런 글이 있었다.


"민란에 대한 조사를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탐학貪虐한 관리를 통렬히 징계하여 민심에 흔쾌히 사죄하기를 하였습니까?"


이에 고종은 민란의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도록 조치하고, 함경도 감사와 영흥부사에게 사건 처리를 제대로 수행못한 것에 대한 죄를 물어 각각 유배령을 내렸다. 또 파직시켰던 이용익도 전라도 나주로 유배했다. 하지만 두 달 뒤 이용익은 석방된 후, 1891년 1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했다.


1888년부터 1896년까지 전국 각지에서 민란과 소요 사태가 잇달아 발발했다. 영흥민란 이후 1889년 1월 함경도 길주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삼례역(1892)에서 동학농민들이 집회를 열고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외쳤으며, 급기야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항하는 동학농민봉기가 발발했다. 


동학교도 전봉준 등 60여 명이 2회에 걸쳐 조병갑의 학정을 시정 요구(1893년 11월)했음에도 가문의 권세를 믿고 오히려 농민 대표들을 잡아 하옥시키고 고문까지 했기 때문이다. 전봉준이 이끈는 농민군은 1894 4월 부안을 점령하고, 관군마저 대파하는 등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장악하더니 영광, 함평, ㅁ무안 일대를 거쳐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1894년 6월,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난입해 궁궐 시위 군사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청나라 이홍장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후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했다. 이미 청군 파병를 감지한 일본은 조선에 파병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발발한 징후를 보이더니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해군을 동원,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기습 격침시키고 아산에 상륙한 청나라군을 격파함으로서 개전 5일만에 조선땅에서의 전투는 일본의 완전 승리로 종결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청나라 요동 지역을 공략해 뤼순과 다렌을 점령하고 이어서 산둥반도의 북양함대 기지를 공략하자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강화회담을 요청했다. 서구 열강들이 이 전쟁에 간섭하자 일본도 결국 종전을 결정하고 강화조약에 나섰다. 그 결과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이 성립되었다.


조선은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 개혁을 실시했다. 소위 갑오개혁 또는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혁신 조치였다. 1차 개혁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정책을 반대하고 서양과 일본 문물을 수용하자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2차 개혁은 개혁 기구였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으로 임명함으로써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 들어선 셈이었다.


김홍집의 3차 개혁은 '을미개혁'이라고도 불리는데, 초기엔 박정양 중심의 친미, 친러파가 득세했다. 미우라 일본 공사가 새로 부임, 일본군을 동원해 왕후 민씨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 개혁의 핵심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독립 연호 사용 등이었다. 하지만 고종이 김홍집 내각을 믿지 못해 아관파천(1896)이 단행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말았다. 성난 백성들에 의해 김홍집은 살해되었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명성황후 민자영에 대한 평가는 아주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다. 한쪽에선 약소국의 왕비로서 외세를 적절하게 잘 이용한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고, 반면에 다른 쪽은 민씨 외척 정권의 우두머리로서 조선 몰락의 주범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또 한쪽에선 매우 검소하고 조용하며 고종을 영리하게 내조한 왕비로 평가한 반면 다른 쪽은 무속에 빠져 국가 재정을 함부로 낭비한 인물로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간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해야만 조선 정벌이 완수된다고 여겼을 만큼 가장 무서운 政敵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러일전쟁(1904)에서 일본이 승리함로써 조선은 이제 비빌 언덕이 사라진 셈이다. 서구 열강들은 두 나라의 전쟁을 디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하며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지만 말이다.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선제공격을 감행했고, 러시아 정부는 무척 당황했다. 이때 일본은 뤼순항을 봉쇄하여 러시아 함댕의 진출을 막는 작전을 진행했다.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고 이어서 1906년 경의선 철도를 완전 개통했다. 이는 조선의 경제 발전을 위한 구상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원활한 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의 용이한 보급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마침내 치욕의 을사늑약이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되었다. 유명무실한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이 본격적으로 강탈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 땅에 불법적으로 군대를 상륙, 대한제국의 행정력을 장악하고,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정과 외교 실권을 박탈햇다. 이어서 군사 목적을 내세워 독도를 강탈,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은 독도를 '석도'라는 이름으로 울릉도에 예속시킨 상태였다(1900년, 황제 칙령).



울분이 넘쳐 난다


책은 고종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누락되고 편향된 고종 시대를 다시 보기 위한 최소한의 복원 작업의 일환이다. 저자는 고종을 제대로 봐야 비로소 한국 근현대사가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서문에서 책의 집필 동기를 밝혔다.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역사 #한국사 #조선역사 #대한제국 #고종황제실록 #박영규 #옥당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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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곧 비즈니스다 - 성공을 창조하는 공간의 비밀
이현주(줄리아)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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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에 걸친 학업과 실무 경험, 그리고 글로벌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디자인이 비즈니스 성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각적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함께 융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속한 비즈니스에서 디자인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



저자 이현주(줄리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컬리지 오브 더 아츠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환경 디자인 과정을 수료한 후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건축을 공부하며 지형과 기후, 사람의 삶이 공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 경험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나이키 등 유수 기업의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를 다수 수행해 왔다.


책은 비즈니스 공간 디자이너로의 성장(파트1), 공간의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흔드는가?(파트2), 브랜드 정체성과 고객 경험을 반영한 공간 전략(파트3),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업무 공간 전략(파트4) 등 4개 파트 36개 챕터로 구성되어 공간이 어떻게 성공을 창조하는지 그 비밀을 풀어낸다.


공간 디자이너로의 성장


디자인은 사람들의 경험을 설계하고,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브랜드의 가치를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다. 저자의 디자인 여정은 '추억'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적, 가족과 함께 갔던 레스토랑은 약간 어둡게 느껴지는 공간에서 꽃을 연상시키는 컬러풀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따뜻한 색감이 빛과 어우러져 공간 전체를 포근함과 더불어 특별한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기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국제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16살 때 미국 뉴저지에서 생활할 적엔 자연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했다. 중산층 주택가에 위치한 목재 구조의 하얀 단독 주택에서 지내며 호스트 가족과 함께 넓은 뒤뜰에서 놀거나, 뒤뜰이 보이는 식탁에서 그림을 그리며 여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특히, 잠자리에 들 즈음 방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남부의 조지아에서의 삶은 한국에서 살던 방식과 크게 달랐다. 호스트 가족의 생활 방식을 통해 공간이 어떻게 가족 간의 상화작용에 중요한 영행을 미치는지를 경험했다. 저녁 식사 시간엔 가족 모두가 라운드 테이블에 모여 로스트 치킨과 사이드 디쉬를 나누고, 하루 동안의 일상에 대해 얘기하는 풍경이 따뜻했다.


대학 진학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중 어디를 택할지 고민하다가 학교 네임 밸류보다는 도시의 분위기와 그곳에서의 경험을 더 중요시해서 최종 샌프란시스코 CCA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 도시와 자연환경이 서로 상호작용 하는 방식을 통해 디자인적 영감을 얻곤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학업을 마친 후, 동부의 디자인 접근 방식이 궁금해 뉴욕의 복잡한 도시 환경과 역사적 건축물들을 통해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파슨스에서 환경디자인을 공부했다. 뉴욕의 디자인은 역사와 현대가 교차하는 새로운 해석을 요구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미에서 더 깊은 학문적 탐구를 이어갔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건축 디자인 수업을 들으며, 지형과 기후가 건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선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건축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었다. 또 글로벌 프로젝트와 외국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공간이 사람, 브랜드, 문화 등에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를 성찰했다.


공간과 우리의 감정


왜 어떤 공간에선 우리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다른 공간에선 창의적 영감을 받는가? 무엇이 그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이는 단순히 공간의 미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공간은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끌여들여 감정적으로 소통한다.


색상은 사람의 감정과 반응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도구다. 따라서 색상은 비즈니스 공간에서 고객의 경험과 직원의 생산성을 크게 좌우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색상에는 각각 고유의 감정적 코드가 있다. 파란색은 흔히 신뢰와 차분함을, 녹색은 부드러운 촉감과 자연의 온기를, 빨간색은 뜨거운 열기와 같은 강렬한 에너지를, 노란색은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보라색은 우아함과 세련된 이미지를 통해 평온함을 준다.


(사진, 서도호 작품 '집 속의 집')


좋은 색상 전략은 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넘어 사용자에게 감정과 기억을 자극하고, 브랜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색상은 고객이 브랜드에 대한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직원들에게는 일터에 대한 긍정적인 애착을 부여한다.


브랜드 정체성과 고객 경험을 반영


브랜드 공간은 부랜드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잘 설계된 공간은 고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 스토리를 시각적, 정서적, 경험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고객과 브랜드 사이에 감정적 연결을 형성하고, 그 기억이 장기간 동안 지속되도록 만든다.


브랜드 DNA는 공간 디자인의 시작점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디자인은 그저 장식에 그칠 뿐,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브랜드가 어떻게 고객과 소통하며, 어떤 가치를 전달하고 싶은지를 공간을 통해 보여주려면 결국 디자인은 브랜드의 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브랜드 DNA를 이해하려면 먼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브랜드는 누구인가?, 고객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 브랜드가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고객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등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DNA를 기반으로 한 공간 디자인은 고객과의 '정서적 연결'을 강화한다. 이는 고객이 브랜드와의 경험을 통해 감동을 느끼도록 만든다. 공간 디자인이 브랜드 DNA와 일치하지 않을 때, 고객은 혼란을 느낀다. 즉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불일치할 경우 고객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브랜드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다. 이는 철학이며, 가치이고, 고객과의 관계를 맺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고객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그 답은 공간에 있다. 그렇다. 브랜드가 가장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공간'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공간은 이미 브랜드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7가지 핵심 전략


색채와 조명 활용하기~ 브랜드의 분위기를 형성

텍스처와 재질 선택하기~ 브랜드의 감촉을 경험

동선과 공간의 흐름 조율~ 브랜드와의 상호작용을 디자인

공간의 형태, 구조, 배치 최적화~ 브랜드의 세계관을 형성

공간의 스케일과 비율 조정~ 브랜드 존재감을 극대화

향과 소리 설계하기~ 브랜드의 기억을 형성

시간적 요소 반영하기~ 브랜드 경험을 지속 축적


브랜드의 정체성을 반영한 공간 디자인은 단순히 멋진 외관을 만드는 게 아니라, "브랜드가 고객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는가"란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과정이다. 색상, 텍스처, 동선, 조명, 공간 속 작은 디테일 등 공간의 모든 요소는 고객의 오감을 자극, 브랜드와의 연결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업무 공간 전략


내가 지금 일하는 책상이 단순히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 아니라, 영감이 떠오르고, 동료들과 협업하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무대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현대의 업무 공간은 효율성을 넘어 창의성과 인간적인 연결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엔 '유연성'이 있다. 업무는 더 이상 고정된 책상 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 업무의 특성, 팀의 목표에 따라 공간은 자유롭게 조정될 수 있어야 한다. 유연한 공간은 집중, 협업, 휴식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환경을 만든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더 큰 자율성과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책의 파트4에선 업무 공간 혁신 사례와 전략을 살펴보고 있다. 전통적인 사무실에서 어떤 혁신적 공간으로 변화했는지를 다룬다. 또 다야안 근무 스타일을 지원하는 맞춤형 공간이란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오피스 공간에서의 호스피탈리티 디자인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다.


나이키는 사무실에 라이브러리 스타일의 집중 공간을 만들어 몰입을 유도하도록 디자인되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개발자들을 위해 자리 옆 스크럼 존을 마련해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 곧바로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스크럼 존이란 팀 내부의 민첩한 의견 교환을 위해 이동식 화이트보드와 스툴들로 이루어져 있는 공간이다.


업무 공간의 변화가 정말로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많은 기업들이 실제로 공간 혁신을 통해 직원 만족도, 생산성, 협업 지수, 브랜드 인지도 같은 지표들을 통해 의미 있는 변화를 보고하고 있다. 감성에서 성과로, 정서에서 전략으로 이어지는 '공간과 성과의 연결 고리'를 살펴본다.


실사례로 유한킴법리는 본사에 '스마트 워크' 사무실을 도입, 공간 혁신을 이뤘다. 직원 수의 80%에 해당하는 좌석과 라운지를 마련하고 자율좌석제를 시행하여, 임원까지 모든 직원이 정해진 자리 없이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게 했다.



좋은 디자인이란


공간의 주인이자 주체는 바로 '사람'이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만큼 모든 사람에게 모두 좋은 디자인이란 있을 수가 없다. 공간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용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공간은 디자이너의 기준이 아닌 사용자들의 삶의 기준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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