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홀든 콜필드의 목소리를 20년 만에 다시 들었다. 두서없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샐린저의 문체가 얼마나 독특한지 감탄할 기회는 번역서를 읽는 한국인에게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남은 건 도저히 듣고 있을 이유가 없는 푸념, 걱정, 광기인데 이것들이 암시하는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자기마저 이해할 수 없는 홀든 콜필드처럼, 나도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20년 전보다 훨씬 읽기가 쉬웠다는 점이다.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콜필드와 상황이 비슷했던 건 그때가 아니었나. 흔들리는 세상에, 사실 외부 세계는 언제나 굳건했고 흔들리는 건 내 자아였겠지만, 아무튼 그로부터 마음의 병을 얻어 앓던 시절은 그때가 아니었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에서야 그의 목소리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까?


역시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 또한 내 자아를 갉아먹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남의 이야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 보다.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건 결국 혼자만의 몫이다. 도와줄 이도 없고, 도와준다 한들 순순히 그 손을 잡지 못하는 촌스런 자존심과 과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어두운 우물 속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콜필드에게 탈출구는 가족이었다. 형 D.B.가 할리우드로 가 영화 시나리오 따위를 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남은 건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동생 피비. 콜필드가 가출을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피비에게 쪽지를 건넸을 때 그녀가 보인 행동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 위로 피어오른 모닥불 같았다. 어둠을 몰아내는 데는 작은 초 하나로도 충분하다. 콜필드는 자기도 같이 가겠다며 옷가지를 단단히 챙겨 나온 피비를 달래 동물원으로 향한다. 몇 번씩 회전목마를 타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피비를 바라보며 그는 때아닌 겨울 소나기를 맞아 흠뻑 젖는다. 울었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큰 비였지만 콜필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행복했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콜필드는 피비와 한 약속을 지켰다. 결국 다시 집에 돌아갔으니까. 그리고는 병에 걸려 입원했다. 그는 폐렴에 걸려 죽고 난 뒤 자신의 장례식장을 가득 메울 사람들의 행렬에 대해 상상하곤 했지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9월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 줄곧 캐물었다. D.B.는 자신이 쓰고 있는 영화 시나리오에 출연할 영국 여자와 함께 콜필드를 찾아왔다. 좀 잘난 척을 하기는 했지만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콜필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이야기, 그러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에 적힌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이 대목에서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의 뒤에 숨어 어쩌면 길이 남을 수치가 될지도 모를 이 소설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한다. 홀든 콜필드 혹은 J.D. 샐린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난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The Catcher in the Rye>는 결론적으로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후회는 여전했을지 모른다. 그 바닥에서 환호는 봄날의 신기루 같은 거니까. 어느 순간 모두가 착각이었으며, 자신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며, 마치 사악한 음모에 빠져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발을 뺄 수도 있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출간된 건 1951년이었다. 1965년 이후로 샐린저는 그 어떤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 유럽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통칭 도자기라 부르는 말은 사실 도기와 자기가 합쳐진 단어다. 차이를 구분하는 법은 동양과 서양이 좀 다르다. 중국에서는 철 함량이 3% 이상인 점토(흔히 보는 붉은색 진흙)를 사용해 900도 내외에서 구운 것을 말하고, 자기는 철 함량이 3% 이하인 자토(이 중에 가장 유명한 게 고령토다. 흰색을 띤다)로 빚어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것을 말한다.


반면 서양의 구분은 세 가지로 나뉜다. 가소성이 높은 점토를 이용해 800~1000도 사이에서 구운 것을 도기(Earthenware), 불순물을 많이 함유한 흙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1,200~1,300도 사이에서 구운 것을 석기(Stoneware), 고령토와 백돈자(백운모로 구성된 유리질 암석)를 혼합한 재료로 빚어 1,280도 이상에서 구운 것을 자기(Porcelain)라 부른다.


유럽을 열광시킨 건 고온에서 구워 만든 경질 자기였다. 오늘날 우리가 식탁에서 보는 표면이 매끄러운 그 흔한 그릇들 말이다. 우리 입장에선 좀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유럽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 경질 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가까운 이웃나라 왜국에서도 이 백색 자기는 1600년대 초에야 시작됐는데 그것도 조선에서 다수의 도공을 납치해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도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휘하 쇼군들 사이에서도 붐이 일어난 모양인데 그들의 눈높이는 당연 조선의 자기에 맞춰져 있었다.


이 역사를 시간 순으로 조금 더 정리해보자. 일본에서 분 다도 바람으로 수많은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갔다. 그들 중 이삼평이라는 도공이 드디어 아리타라는 곳에서 고령토를 찾아내 최초의 백색 자기를 만들어낸다. 유럽에 불어닥친 도자기 광풍은 이 아리타 자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다. 왜 중국이나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을까? 원조를 놔두고 굳이? 이는 두 나라가 쇄국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융성은 대대로 바닷길을 열었느냐 닫았느냐에 따라 달려있었다. 가정은 하지 말라지만 그때 우리가 서양과 활발히 교역을 했다면 일제의 침략을 막아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두나라의 쇄국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새로운 거래처를 찾아야 했고 그곳이 바로 일본이었다.


동양의 백색 자기는 '백색의 금'이라 불릴 정도로 귀하고 비쌌다. 유럽 귀족들의 사치야 워낙에 유명했고 근처에서 누가 신기한 걸 가졌다 하면 뒤질세라 따라 하는 게 당시의 세태였다. 드레스덴이라는 도시가 있는 독일 작센 주의 군주이자 폴란드 왕이었던 아우구스트 1세도 사치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난 드레스덴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호사 취미와 낭비가 심했고 사생활도 방탕하기 이를 데가 없어 사생아가 거의 400명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게 바로 당시의 반도체인 자기였다. 거기서 시작된 게 바로 독일의 유명 도자기 회사 마이슨이다. 따지고 보면 그 시작이 조선. 그런 생각이 우리만은 아니었던지 드레스덴 박물관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가 붙어있다고 한다.


일본 도자는 조선 도공 이삼평으로부터 시작됐다.


마이슨은 도자기 생산의 비밀을 최대한 숨기려 했지만 세상일이 어찌 마음대로 돌아가겠는가. 직원 중 하나가 비법을 들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간다. 그렇게 돌고 돌아 유럽은 세계 도자기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헝가리를 주 무대로 펼쳐지지만 그중 반은 독일에 할애되어 있다. 자동차 왕국으로만 알고 있던 융통성 없는 노잼 국가가 우아하고 유려한 도자의 왕이었다니 놀랍고 신기하다. 그러나 도자기를 핑계 삼은 역사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물론 역사 얘기가 없지는 않지만 이삼평 - 아리타 - 아우구스트 1세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이후에는 우리와 연관된 역사가 거의 없고 그들의 낯선 지명, 이름, 사건만이 펼쳐진다. 유럽 도자기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좀 지루할 수도 있다. 다행히 사진은 아주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과 팔레스타인은 역사의 비극이라는 장르에서 수많은 장면들을 공유한다. 우선 격동기에 식민지배를 당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물론 팔레스타인은 당시 이슬람 세계를 완전 정복하여 사실상 단일 국가와 비슷했던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다 그 대상이 영국으로 마지막엔 이스라엘로 바뀌었고 대한민국은 일본 한 나라에 의해 불법, 강제적 주권 침탈을 당했다는 차이는 있다.


팔레스타인의 원수는 그래도 영국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오스만 튀르크는 갈갈이 찢어졌고 그 일부는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영국인은 아랍 대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동시에 유대인 시온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땅에 모으기 시작한다. 유럽에 나치가 등장하고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이주 속도는 급격히 빨라졌다.


영국의 한 각료가 유대인의 국가를 창설해주겠다고 약속한 1917년의 밸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본인들은 정작 그 논의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신탁통치가 그 땅의 주인을 배제한 채 결정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왜 우리는(앞으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대한민국인을 통틀어 우리라 칭하겠다)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을까? 두 나라의 공통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찢어지게 가난했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악덕 사채업자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유럽에서 그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돈'에 관한 한 얼마나 철저하고 강력했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때는 바야흐로 전쟁의 시간이었다. 이 책은 시온주의자의 책략을 외교와 로비로 퉁치며 깊이 파고들지는 않지만 외교와 로비라는 게 어디 맨입으로 이루어지던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정부 입장에선 유대인의 자본이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로비는커녕 당장 먹고 살 쌀 한 줌도 없는 상태였다. 대한민국은 악랄한 일제 침략자들에게 뼛국물까지 쪽쪽 털린 상태였고 아랍인들은 상대가 너무 강했다.


둘째 외교력이 전무했다. 유대인은 이미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로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었고 거기서 나름의 기반을 닦아 잘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쌓은 인맥과 영향력은 격동의 시기에 그대로 외교력으로 전환된다. 서구 열강의 눈에 유대인은 본인의 친구이자 조력자였으나 팔레스타인인은 지배 대상이었으니 아랍인들이 맞이할 끔찍한 운명에 공감이 생겼겠는가? 한 민족에겐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결정이 고작 몇 명의 유력인들 사이의 합의로 정해진다는 건 정말 놀랍다. 그러나 이는 외교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하고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니 대한민국도 독립운동계에 분탕질이나 치던 이승만 같은 사람이 미국 유명대학에서 취득한 학위를 배경으로 실효도 없던 외교 독립론을 펼치다 건국의 아버지가 된 게 아니겠는가. 나라가 힘이 없을 땐 침략자와 언어가 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성배를 거머쥘 수 있다.


셋째, 우리에겐 국가의 이름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한 정규군이 없었다. 유대인들도 국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전후 자기 땅을 얻어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 아래 군대를 조직하여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참전은 했다. 대한민국도 연합군에 합류해 추축국에 맞섰고 아랍인들은 중동을 노리는 나치에 대항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한민국군이나 팔레스타인군이 아닌 동방부대, 아랍 부대 따위의 패키지에 포함된 개인에 불과했다.


우리가 정규군을 구성했더라도 우리를 독립국가로 인정해줬을지는 솔직히 미지수다. 여기서도 역시 외교력이 중요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조건 없이 인정을 받으려면 실력으로 증명된 압도적 규모의 병력이 필요했을 텐데, 세계 각지를 떠돌며 군수품을 지원받고 이념 갈등까지 있었던 대한민국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있던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으로 완전히 와해됐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두 주인공 홍범도, 김좌진 장군조차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아랍인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은 아랍 대 유대인의 충돌이 단순한 민족 갈등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거기에 저항하는 피식민인의 구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시비를 가리기는 불가능하지만 상당히 공감이 가는 건 사실이다. 유럽의 열강이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을 철저히 짓밟아 식민화하는 과정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제 이런 일을 다시 겪기엔 상당히 멀리 온 것처럼 보이지만 변덕스러운 역사의 장난은 언제든 우리 민족을 다시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배울 것들이 많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사 간신열전
최용범.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스낵 역사다.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시간을 훑으며 이름난 간신들을 탈탈 털어냈다. 대한민국의 의무교육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서경천도의 주인공 묘청, 고려말의 신돈, 정조의 남자 홍국영, 영애를 꼭두각시로 삼은 최순실, 망국의 주범 이완용,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불이 번지는 사람도, 왜 이 이 자는 간신이 되었나 곰곰이 들여다보게 되는 사람도 있다.


작가는 간신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 이른바 '왕의 남자'로 일컬어지는 측근형이다. 정조의 남자 홍국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측근으로 시작한 이들이 왕권을 넘볼 정도로 권세를 부리는 교만형이다. 이자겸과 한명회 같은 이들이 여기에 속하며 대개 왕위 찬탈을 도와 공신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셋째, 역사의 희생양이 된 논란형이다. 결국 승자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이기에 시대의 정신과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과 재해석이 난무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논란의 여지는 많으나 박정희 시대에 이순신을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악역을 맡은 원균이나 개혁에 실패하여 수구의 먹잇감이 된 고려말의 신돈 등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 인생의 모든 기준이 '대세'에 맞춰져 있는 박쥐형이다. 나의 부귀영화보다 중요한 건 없다. 오로지 대세를 따라 생존을 도모한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일제의 주권 침탈 이후에도 고종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는 왕실에서도 이완용의 행동이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는 인식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이완용을 조선과 일제의 다툼 사이에서 합리적 중재를 제시하는 인물로 간주한 것 같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행위를 합리화하는 인물들이 결국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되는가 참고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각자의 행동과 목표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간신이 등장하는 때는 대부분 역사의 격동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요동치는 정세를 이용해 권력을 거머쥔 뒤 국력을 갉아 축적한 뒤 수구의 담 너머에 쌓은 사람들. 간신에게 위기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던 셈이다.


결국에는 리더의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강력한 왕권을 지켜냈다면, 다양한 목표와 생각을 가진 신하들 사이를 오가며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면, 간신이 파고들 권력의 공백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현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오매불망 강력한 리더의 강림을 기원하는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리더가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국가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그 방향과 일치하는 이들을 대표자로 내세워야 한다. 잘 좀 해보라고 뽑은 놈들이 개판을 쳤다며 가슴을 치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믿고 의지했던 최순실이 일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놨다며 눈물을 흘리는 영애와 같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무능력한 리더가 간신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무관심한 시민이 간신을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방의 인문학 - 역사의 땅, 중국 변방을 가다
윤태옥 지음 / 시대의창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금성은 환관과 궁녀의 좌표일 뿐이고, 창업 군주인 황제는 정작 변방에서 온다.(p.5)


첫 문장이 눈에 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대업을 이룬 힘은 천년만년 그 기세를 유지할 것 같지만 거짓말처럼 몰락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경치를 만끽하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말은 곧 몰락이 시작됐다는 말과 같다. 대륙의 통일을 이룬 권력이 스스로 중앙을 칭하는 순간 변방에선 또 다른 혁명이 잉태된다.


한편 저 문장은 중앙과 변방을 나누는 게 합당한 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수도의 위치인가? 인구수인가? 경제력인가? 아니면 군사력? 문화? 따지고 보면 모든 곳이 중심이 될 수 있는 동그란 행성의 거주민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웃기기도 하다. 창업 황제들의 힘은 어쩌면 거기서 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중앙을 탈환하겠다는 야망이 아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중앙이라는 인식.


윤태옥 작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첫 문장에 쓰인 변방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너와 나를 지정학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단순한 수사일 뿐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갖고 중국의 변방을 돌며 자신만의 독특한 여행기를 남겼다.


처음엔 동아시아를 염두에 둔 것 같지만 여러 제약 때문에 <변방의 인문학>은 중국과 그 국경지대에 머문다. 대부분 오지인데, 못 들어본 지명과 그 낯섦이 갖는 이국적 풍광이 글과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깨끗한 숙소 없이 여행이 불가한 나지만 작은 사진으로도 전해지는 풍광의 박력에는 엉덩이가 절로 들썩여진다.


특히 더 재미있었던 건 골짜기 너머 골짜기에 위치한 구석구석 곳곳에 수백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역시 배달의 혼은 위대해, 어떻게 조그만 땅덩이를 지나 세계를 누빌 수 있었을까! 하는 국뽕이 아니라 무슨 연유로, 어떻게 거기까지 다다랐나, 그 사람이 겪어야 했을 위험과 모험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상상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발자국은 근대에 이르러 더 잦아졌다. 망국의 한은 민족의 거처를 아예 북쪽으로 밀어 올렸고, 기회 아닌 기회를 이용해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중에선 중국과 소련 공산당의 주요 인물이 된 사람도, 정부의 존경을 받는 학자가 된 사람도 있다. 역사에 꽤나 관심이 있었음에도 이런 장면에서 매번 생소한 이름을 마주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즐겁고 또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이 든다. 분단된 조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역사 교육.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정신에 새긴 비극은 분명 대한민국의 미래에 큰 방해물이 될 것이다.


다행인 건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이런 이야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건 순전히 본인의 잘못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결의와 즐거움이 동시에 생긴다.


단순한 여행기라고 하기엔 생각할 것이 많았던 <변방의 인문학>. 고리타분한 역사를 여행처럼 즐기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