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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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장님 소설가


2만권의 책 읽기와 유전, 불의한 사고가 겹쳐 시력을 상실했으나 죽을때까지 결코 독서와 쓰기를 멈추지 않은 전설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훗날 포스트모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 자신이 현존하는 지구인 중에서는 거의 견줄바 없는 석학인 동시에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이란 사실상 보르헤스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얻은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포스트모던을 접할 수 있었던 우리와는 달리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문제적 단어를 접하기 위해 1935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보르헤스의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출간된 해가 바로 1935년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대중 문화의 혼합


포스트모던 문학의 주요 창작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술과 대중 문화의 혼합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이 부분에 있어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집으로 보르헤스는 특히 갱스터, 웨스턴 영화의 장르적 특징을 소설 전체에 걸쳐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 문화와 예술의 혼합이, 그러니까 고급과 고급도 아닌 고급과 저급의 합체가 왜 포스트모던, 즉 근대성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보르헤스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서사의 힘을 믿었던 것 같다. 그는 한 대담에서 '우리들은 작가들이 시 또는 문학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서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할리우드가 서부 영화를 가지고 세계의 서사성을 살려놓았다'고 말했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문학의 본질은 서사다. 그러나 서사는 반복적이며 자기모방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점 더 비슷해진다. 새로움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몇몇 똑똑한 작가들은 이제 서사로는 승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형식에 눈을 돌린다. 회화가 해바라기를 어떤 식으로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예술을 만들어내듯 서사도 형식을 취해 서로 다르고, 복잡하고, 정교한, 그리하여 소설가라는 전문적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소설 예술이 탄생한다. 소설 예술은 끝내주게 아름답지만 그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 같다. 보르헤스는 이 지점에서 여전히 서사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 대중 소설에 눈을 돌린다. 


중세를 대체한 르네상스는 역사상 한 번도 제시된 적 없는 미학적 관점을 창조한 게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슬로건은 단순했다. 바로 찬란했던 과거로의 회귀, '고대의 부활'. 마찬가지로 보르헤스의 작업은 문학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며 이것이야말로 순수성을 잃은 모던의 포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로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느니라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특징 짓는 또 하나의 포스트모던 징후는 바로 상호텍스트성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쉽게 말해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베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은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존재하는 책을 다시 쓴 소설이다. 보르헤스는 이런 사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며 책의 말미에 원전을 써주기까지 한다. 


상호텍스트성은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있을 수 없다'는 창작 행위의 본질적 회의를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다. 이제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는 영광과 권력을 반납하고 편집자의 위치로 내려온다. 그들의 창조 능력을 굳게 믿는 사람이라면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 - 상호텍스트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넘어 심한 모욕으로, 나아가 파렴치한 사기로 보일테지만 나에겐 이것이 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중요한 열쇠로 보인다. 


상호텍스트성 안에서 개개의 작품들은 더이상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 작품은 그저 다른 작품의 그림자일 뿐이며 작가는 이 절대적 평등 속에서 원하는 것을 취사 선택, 그저 황홀한 그림자 놀이에 동참하면 그만이다. 새로운 것, 변화에 대한 강박의 성벽이 무너지고 그 위에서 놀이로서의 문학이 가능성을 싹틔운다이제 창작은 마치 레고를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의 놀이를 닮아간다.



기타 등등


보르헤스의 명성을 듣고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첫 책으로 선택한 사람은 뭔가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집은 보르헤스 전형적 특징이 불완전하게 제시되거나 아예 부재하기 때문이다. 상호텍스트성은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새싹처럼 가냘프고 마술적 사실주의는 어두운 지평선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여명처럼 희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추리 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차용한 작품이 없다. 보르헤스 최고의 작품들은 뭐니뭐니해도 마술적 사실주의와 상호텍스트가 뿌려 놓은 수 많은 상징과 모호함, 그리고 난잡함이 다양한 복선과 어울려 강렬한 반전을 선사하는 추리 소설풍의 작품들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이 모든 것들이 아직 씨앗인채로 잠복해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르헤스는 필연이다. 어차피 그리 되어질 것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각 작품집의 호불호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무엇으로 시작했든 당신은 결국 보르헤스를 완독하게 될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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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탐정 1 : 스무고개 탐정과 마술사 - 제1회 스토리킹 수상작 스무고개 탐정 1
허교범 지음, 고상미 그림 / 비룡소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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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문학상 스토리킹은 최종 본심에서 어린이들이 직접 당선작을 가려낸다.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 문양이가, 스무 가지 질문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스무고개 탐정과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마술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짜릿한 사건을 그린 대망의 스토리킹 1회 당선작 '스무고개 탐정과 마술사'는, 역시 어른들에게는 전혀 짜릿하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이들을 열광케 하는가?


나에게 남은 질문은 오로지 이것 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도 한 번 아동 소설이란 걸 써볼까?'하는 불순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무엇에 열광하는가


첫째, 이야기. 어른들보다 집중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기에 아동 소설에 있어서만큼은 이른바 '손에서 뗄 수 없는'이라든가 '단숨에 읽어 내린' 따위의 상투적 수식어가 상투적이지 않을만큼 강력한 이야기의 힘이 필수적이다.


작가는 소설의 전반부를 '마술사의 비밀을 밝혀내는 스무고개 탐정의 추리'로 후반부를 '납치된 마술사를 찾아내는 삼총사의 모험'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추리가 무엇이냐? 모험이 무엇이냐? 그것은 이야기의 힘이 가장 큰 장르, 이야기 중의 이야기, 왕중의 왕 아닌가! 작가는 이 두개의 장르를 섞어 이야기의 힘을 극대화할 뿐만아니라 자칫 단순해질 수 있는 이야기 구조의 문제까지 해결하니, 참으로 매섭고 영리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미스테리 또는 맥거핀. 이 소설에는 두 개의 맥거핀이 존재한다. 하나는 교장 선생님과 또 하나는 스무고개 탐정의 삼촌. 두 사람은 스무고개 탐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 하나 정작 이야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맥거핀으로 보이나 스무고개 탐정의 비밀스런 정체를 더더욱 비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비밀의 향연은 상상할 시간이 많고 친구들과 얘기할 시간도 많은 어린이들에게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이 책을 본 어린이들은 교장 선생님과 스무고개 탐정의 관계, 혹은 삼촌의 정체를 밝혀내느라(혹은 지어내느라) 끝없는 토론을 할 것이며 서로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거침없이 후속작을 읽어내려갈 것이다.


셋째, 장난감.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장난감을 갖고 논다. 단지 그 가격과 종류의 차이가 생길 뿐이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장난감을 소설의 소재로 끌고 오는 건 매우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 선택의 문제가 있다. 실존하는 장난감, 만화, 캐릭터를 데리고 오는 건 좋지만 소설이 너무 트렌디해지는 건 아닐까? 작가라면 누구나 시간을 초월한 작품을 남기길 원한다. 야심차게 도입한 포켓몬이 3, 4년 뒤 한물간 캐릭터가 된다면 그 누추한 냄새가 내 소설에까지 배게 된다. 뿐만아니라 여기에는 저작권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난잡함이 있다. '크레용 신짱(짱구는 못말려)'의 작가는 아예 만화 안에 또 다른 만화(가면 라이더)를 만들어 이러한 문제를 비껴갔지만 '스무고개 탐정'의 작가는 그렇게까지 큰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소설엔, 탄생 이후 시대를 초월해 아이들의 영원한 로망이 된 '프라모델 장난감'이 등장한다.



아이들이 되고 싶은 건 뭘까?


소설을 읽으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되고 싶은 건 뭘까? 적어도 내 시대에는 과학자, 대통령, 소방관, 경찰관 같은 이름들이 거론됐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되고 싶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이들이 되고 싶은 건 과학자나 대통령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스무고개 탐정은 어른처럼 옷을 입고 어른처럼 행동하며 또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전모를 밝혀냄으로써 자신이 어른의 지능을 가졌음을 과시한다. 삼총사가 납치된 마법사를 구출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그것이 어른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난리법석의 대미는 모든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여되는 표창장이다. 표창장은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칭찬, 즉 어른스러움에 대한 인정이다. 물론 어른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그릴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구국 영웅'이나 '슈퍼 히어로'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둘중에 하나를 골라 소설을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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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2-2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할만한 책을 어른이 쓴다는건 역시 어려운 일이네요. 출판사가 이런 공모전을 기획한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고요.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는 결코 어른들이 그럴거라 섣불리 짐작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시작점일수도, 끝나는 점일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깨짱 2013-12-24 13:12   좋아요 0 | URL
무엇을 쓰든 쓴다는 거 자체는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배운 게 많은 책이었습니다.
 
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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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말


LP 시절의 더블 앨범에 대한 로망으로 자신의 소설집을 기어이 더블로 출간하고야만 작가에게는 대단히 외람된 말이오나, 이것을 정녕 더블 앨범으로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정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더블은 일관된 주제와 내용에 따라 정밀히 기획된 작품이라기 보다는 그저 작가가,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준, 자신에게 사상적, 문학적 토양을 제공해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오마주로써, 예의 그 광범위한 관심사를 끓여 만든 잡탕찌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소설은 늙지 않지만 소설가는 늙는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순차적으로 천천히 따라오지 않았기에 변화를 더 크게 느꼈을테지만, 솔직히 지구영웅전설, 카스테라를 숨 가쁘게 건너 바로 더블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숨을 고를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지구영웅전설을 썼을 때 36세였던 소설가는 더블이 나올 때 이미 43세였다. 물론 더블에 수록된 소설들을 모두 43세에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카스테라 이후에 씌여진 것들이고 보니 세 작품을 연달아 건너온 나로서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느낄 수 밖에. 우선, 


등장 인물들이 나이를 먹었다.


취업에 눈물을 흘리거나 갓 사회에 발을 들인 과도기적 어른의 모습이었던 주인공들은 더블에 이르러 비루한 직업을 가진 가장이 되거나, 이미 닳아버린 사회인, 혹은 하릴없이 죽음을 기다려야하는 소외된 노인이 되었다. 모두 해볼만큼 해본 사람들, 알만큼 아는 사람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세상은 훨씬 끈적하고, 훨씬 높고, 훨씬 답답하다. 예전같으면 답답한 현실에 주저앉을려다가도 돌연 환상으로 급커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간단히 세상을 뒤집었겠지만 더블은 파리 끈끈이에라도 붙은 것 마냥 허우적대다 체념과 안분과 죽음의 먼지를 쓴채 그대로 박제가 되버린다. 


이러한 변화는 피터지도록 부딪혀 봐야 세상은 여전히 'I Don't Care'라는 패배감의 발로 일지도 모르고 똑똑하고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인한 걸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다면 적응을 해야지. 그렇게 가는 와중에 따뜻한 위로를 할 수 있으면 좋은거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외롭게 살다 쓸쓸히 죽을 수 밖에. 


더블은 대단히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대단한 야심없이 그저 무겁게 흐른다. 이 무게가 바로 기성작가들이 말하는 성장일지도 모르고 데뷔 이후 줄곧 그를 따라다닌 주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추측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쎄, 그러니까, 뭐랄까, 그래


좀 밋밋했다. 



변명을 좀 하자면


짜장면이 수십년간 언제 어디서나 거의 똑같은 맛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중국집 주방장들의 대단히 훌륭한 장인 정신과 긴밀한 협의 때문은 아닐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춘장을 묻은 곳의 기후도, 거기에 담은 물도, 각종 재료의 산지도, 그리고 산지의 환경도, 심지어 조리기구와 불 때는 방식까지 모두 달라졌을텐데 어떻게 그 맛만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까? 뭐긴, 애초에 조미료를 잔뜩 친거지. 워낙에 강한 맛으로 간을 봤으니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조미료 한 숟갈이면 맛이 똑같을 수 밖에. 몇십년째 그 맛이 한결같다는 어르신들의 맛집에는 사실 이런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데뷔와 동시에 완성된 작가가 아니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헤아리는 전지전능한 소설가가 아니라면, 시간이 흐르고 작품이 거듭될 수록 변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소설가는 나이를 먹으며 고민은 깊어지고 지혜는 쌓인다. 하물며 현실에 깊게 뿌리를 둔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더이상 말해 무엇하랴. 


이 변화가 옳은 것인지 잘 된것인지는 오로지 다음 작품을 통해서만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작품은 그 다음 작품으로, 그 다음 작품은 그 다다음 작품으로, 그 다다음 작품은... 소설가가 해야할 일은 평가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가 느낀대로, 생각한대로, 살아온대로 쓰는 것이다. 여러분은, 설령 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많이들 읽어 주시라. 세계를 걱정하는 모든 소설가들을 위해 그리고, 이 세계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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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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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많은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까지 읽어온 모든 책들이 한낱 장난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책은 이미 수년전부터 존재해왔으나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아오다, 책이 이 땅의 빛을 본지 딱 10년이 되가던 2013년 어느 겨울밤, 비로소 지금까지 읽어온 모든 책들이 한낱 장난처럼 느껴진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려한다. 


*이 리뷰는 리뷰의 대상으로 삼은 해당 작품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뒤 그저 한 두개의 단어를 바꾸는 방식으로 씌여졌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이야기의 마왕


훗날, 문학동네소설상에 의해 그 존재가 만천하에 알려져 세상에 흔히 '이야기의 마왕'으로 소개된 그 남자 소설가의 이름은 명관이다. 월드컵의 열기를 한참 우려먹고도 그 찌꺼기를 말려 만찬을 해먹던 2003년, 그는 문학동네신인작가상에 의해 단편 소설 하나를 낳는다. 그 소설은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심사위원들을 들뜨게 할 정도로 밀도 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수상을 한지 100일 채 지나기 전에 '새로 쓴 소설은 없느냐'고 묻는 출판 관계자들이 수 백명을 넘어섰다. 제도권 교육을 통해 글쓰기를 배우지 못했던 그는 자신만의 세계 안에 독특한 작법을 만들어갔으며 한국과 미국의 소설, 만화와 아서 코난 도일, 수호지와 삼국지 같은 영웅담으로부터 소설을 쓰는 모든 방법을 배웠다. 열망은 있으나 재능은 없는 수 천, 수 만의 소설가 지망생을 낙방의 우울과 자기멸시의 지옥으로 빠뜨린 문학동네소설상이 발표 되자, 때마침 장편 '고래'를 써낸 그는 수상자로 선정되어 학계와 세간의 관심에 수감되었다. 영어(囹圄)의 시간은 화려했으며 그는 신문에 게재된 수상자 발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야기의 마왕'으로 우뚝섰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



고래


명관은 원래 영화판에서 굴러먹던 한량이었다. 되지도 않는 영화 시나리오에 매달리느니 소설이나 써보는 게 어떻냐는 동생의 권유로 '그럴까?'하며 돌아선 것이 시작이었다. 본디 희대의 이야기꾼이자 명성 높은 구라꾼에 그 바닥에서 상대가 없는 달필가인 동시에 호가 난 이야기광이며 모든 기담괴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대중소설가인 그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난관을 이미 정복하고 있었다. 그는 온갖 술수에 능했으며 복잡한 이야기들을 한 번은 날실, 한 번은 씨실로 꾀어 어느덧 아름답고 정교한 문양의 수제 카페트로 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글을 쓰는 방편은 대부분 일반적 소설의 작법, 그 테두리 바깥에서 행해지는 일이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예술이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린지 지나치게 오래되면, 아뿔싸 이제는 그 자리에 예술이 있었는지도 모를만큼 범상한 것이 되고 말아, 세상은 반드시 이러한 새로운 작품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었다. 


그가 지은 장편 '고래'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딱 맞춘 듯한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바가 없지 않은 바, 말하자면 이 작품은 기존의 줄기에 뿌리를 내린채 독특하게 가지를 뻗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글쎄, 아예 다른 종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며, 어리석은 머리를 굴리고 굴려 보다 적합한 표현을 찾는다면, 바로 그 제목 '고래'와도 같이 어느날 문득 바다 한가운데에 불쑥 떠올라 신비하고 낯선 생명력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강력하게 뿜어대는, 진정 괴물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게 옳지 아닐까?


그는 역사적 시간 위에 허구의 공간을 걸어두는가 하면 도저히 현실감이 없는 설화적 인물들로 그곳을 가득채우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간적 배경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느라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죽이는 와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 수 많은 여자를 따먹곤 하던, 검은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던 우리 장군님의 통치 시절인데, 배경은 평대라는 듣도 보도 못한 미지의 공간이며, 그곳엔 사상 최악의 추녀 박색의 노파, 노파의 딸이었으나 그녀가 휘두른 부지깽이에 애꾸가 된 뒤 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소녀, 만나는 남자마다 불행에 빠뜨려 거지로까지 몰락해 여자로선 참으로 기구한 팔자였다고 할 수 있으나 훗날 돈벼락을 맞아 평대 최고의 사업가가되고 더 훗날 그 배짱과 오만으로 인해 남자로까지 변하게 되는 금복, 그리고 7세에 이미 100키로가 넘었던 그녀의 딸 벙어리 춘희, 이 밖에도 온갖 영화와 만화, 옛날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물들이 양산박에 모인 108 도적들마냥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채 평대로 기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고래는 일견 시정잡배들이나 입에 올릴법한 너절하고 더러운 이야기들의 쓰레기장처럼 보이면서도 그 안에 인간의 만사를 집약해 놓은 듯한, 마치 하나의 우주처럼 군림하는 독특한 권위를 내뿜어 책 깨나 읽는 사람들치고 고래의 마력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명망 높은 선생님들은 도무지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한결같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누군가에게 그는 말하자면 솜씨 있고 믿을 만한 소설가였다. 



비밀


나는 고래의 재미, 그 근본을 밝혀야만 두려움이 멈추는 명망 높은 선생님이 아니며 그 비밀을 알아내 생활적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재미를 느끼는 감각만큼은 꽤나 타고난 면이 있을 뿐더러 불행히, 그 원인을 탐구하려는 기벽이 있어 정말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고래는 왜 그토록 재미있는 걸까?


누군가는 고래가 나의 고립된 생활 속에서 피어난 무료함을 달래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유희적 욕구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느라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죽이는 와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 수 많은 여자를 따먹곤 하던, 검은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던 우리 장군님의 통치 방식을 풍자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 어떤 해석도 충분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단지 무료함을 달래는 수단이라고 하기엔 내 주변에 너무나 많은 만화와 영화가 있었으며 단지 유희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된 일이었으며(무려 455페이지의 책), 또 단지 풍자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 강도가 지나치가 약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고래의 재미를 두고 우주의 비밀을 신화, 즉 이야기로 설명하고자 했던 초기 인간의 종교적 태도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누런 종이 위에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을 그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늘어놓을 뿐인 글쓰기 안에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는지도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이 무수히 섞이며 전진하는 누런 종이에서 나는 왜 그토록 기괴한 재미를 느꼈던 걸까? 나는 이 종이를 수도 없이 반복해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걸까?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내 독서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고래dml 넓은 등짝 위에 섬뜩하고 폭력적인, 그 잔인한 작살을 꼽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뜨거운 바다를 가로지르는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여기에 앉아 이야기가 계속 되는 걸 지켜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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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
윤대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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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미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미란. 갓 제대를 한 뒤 여행을 떠난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였다. 미란은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려웠던 어린 소녀였고 그녀는 우물쭈물 다가왔다 홀연히 떠났다. 짧았던 것 만큼 여운은 깊었다. 이후 남자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번듯한 청년이 되지만 마음 한구석은 뻥 뚫린 채 껍데기만을 안고 살아야했다. 난파된 배의 잔해들처럼, 바다 위에서 부유하듯.


부유하던 잔해를 건져 올린 건 또 하나의 미란이었다. 땅 밑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듯한 육지같은 여인. 이후 남자는 새로운 미란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빈탄에서 태초의 미란과 재회한 후 남자의 삶은 다시 안개 속에 휩싸이게 된다. 



타자는 곧 자신이다


누군가를 잊는 게 괴로운 이유는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타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내가 인식한 타자'가 있을 뿐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타자는 곧 '나'라는 고치로 똘똘 쌓여 마음 속에 저장된다. 우리가 타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은 사실 내가 쌓아놓은 내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뜯어 내는 게 내 살을 뜯는 것 처럼 아플 수 밖에.


남자 주인공 연우는 태초의 미란과 재회하자 자신의 마음 속에 여전히 뻥 뚫린 공동이 자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미란과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음에도 결국 연우는 이국땅의 미란을 찾아 한국을 떠난다. 그러나 연우는 그것을 알아야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 존재했던 미란의 타자를 박살낼 수 밖에 없음을. 자신의 공동을 메우기 위한 여행이 남겨진 사람의 마음 속에 또 하나의 공동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말이다. 



타자로 인한 슬픔은 오로지 나의 책임인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연우가 부인 미란의 고통에 그토록 담담할 수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진짜 타자'와 '나의 타자'의 괴리로 인한 슬픔은 결국 '나의 타자'를 만든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연우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로 작정했을 땐 그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를 되묻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란은, 


'당신은 자신을 이해시키려고하지 않으니까요. 좀처럼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죠. 당신은 저에게 당신이 바라는 바를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단 말이죠. (중략) 당신은 또 저에게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저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해하기를 포기하더군요.'(p. 314)


라고 항변한다. 


예전의 연우는, 그러니까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미란을 만난 그 때의 연우에게는, 어쩌면 타인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며 끝까지 이해해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각오는 홀연히 사라진 미란으로 인해 산산히 박살나 버렸다. 그리고 그는 어른이 된다. 단단한 껍질을 둘러싸 마음의 공동은 가렸으나 덜어낸 무게까지는 채울 길이 없어 그저 부유하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남자. 연우는 두 명의 미란 그 누구와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는 못한다. 태초의 미란은 끝내 연우의 공동이 되기를 바랐고 연우 자신은 또 다른 미란의 공동이 됐기 때문이다.



그후로 연우와 미란은


의외로 평범하게 잘 살았다. 삶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잔잔한 파도를 오르내리며 순항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변함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마음은 무뎌진 신경을 축복처럼 받아들인다. 타자니, 이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이제 자그마한 흠집도 내지 못한다. 남자는 들키지 않게 바람을 피우고 적당히 흐물거리며 세상과 타협한다. 여자는 여자를 버리고 엄마와 주부가 된다. 도저히 유지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단단히 묶어 주는 건 아이다. 아이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럭무럭 자란다.


인간은 모두 이렇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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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12-0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낸 압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게 결국은 자기 자신의 길을 홀로가는 존재일뿐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너무 깊게 들어갔나요?
저는 너무 심각한게 문제입니다.^^

한깨짱 2013-12-03 22:06   좋아요 0 | URL
요즘같이 경박한 시대에 심각한 건 오히려 축복일 겁니다. 저는 때때로 타인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질 때가 있는 데 그럴 때 마다 심각한 우울에 빠져요. 얼마전에는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 카카오톡도 지웠어요. 별일 없더라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