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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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듯한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 소설!
 
  그녀의 남편에게는 애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봐도 둘은 서로 너무 잘 어울리고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를 놔주어야 할 법도 한데,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둔 채 사랑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녀에게도 애인만큼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우울이 그녀를 가만두지 못하게 할 때, 친구를 찾으면 그녀를 울리거나 황홀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그녀의 친한 친구는 술입니다. 그녀는 알콜중독자 입니다. 동성연애자 남편과 알콜중독자 아내. 그리고 남편의 애인과 아내의 술이 만난 이야기, 애쿠니 가오리의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 원제목은 きらきらひかる 입니다.   
   



"우울한 일만 생각나게 된다. 무츠키는 여자를 안고 싶어하지 않는다. 키스도 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거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내와 호모 남편. 참 내, 그야말로 끼리끼리다." (P 016)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만, 위의 커플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입니다. 가능하단 말인가? 물어보고 싶지만, 그들은 이미 성을 나눠가진 부부라고 합니다. 커플이 된  두사람을 두고 '어울린다' 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남들은 말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어울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울리지 않는다면, 나와는 어울릴까요? 당신과는 어울릴까요?
 
두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래서 애인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책에서 읽은 '인간의 사랑'에 대한 아이러니를 설명한 글이 생각나네요.
 
인간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휴대폰에 찍힌 번호가 처음 보는 번호면 받지 않는다.
집에 사람이 찾아와도 인터폰으로 슬쩍 보고
모르는 사람이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돈을 꿔 주는 인간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보통은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동안에만....
 
 열흘 전에 결혼한 부부. 그녀(쇼코)는 남편 무츠키의 애인 곤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묻습니다. '곤이랑 같이 본 영화 얘기', '곤이랑 바다에 갔던 얘기', '곤이랑 고양이랑 싸운 얘기'...그는 아내를 위해 모두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 때가 그립다는 듯한 표정으로. 똑같은 얘기인데도 번번이,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를 해주는 남편에게 아내는 만족해 합니다. 아내에게는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의 애인같은 친구, 술과 만나는 시간이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그렇게 소개하고, 남편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합니다.
 
  주말이면 남편은 대청소를 하고, 밤이면 자기전에 아내는 다림질로 침대를 주름 하나 없이 말끔히 펴 내고 따뜻하게 데워 놓습니다. 남편은 남편이 할일이니, 아내가 할일이니 하는 것은 언더도단이라고, 청소나 요리도 잘 하는 쪽이 하면 그만이라고 아내에게 말합니다. 시시각각 아무런 이유없이 감정이 변하는 쇼코, 그것을 지켜보는 무츠키. 주말이면 대청소를 하는 무츠키, 그것을 지켜보는 쇼코. 언밸런스 하고 이상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두 사람입니다.
 
  부부의 묘한 관계는 '그들 부모'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부부로서 갖춰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의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지금이라도 갖추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내의 친구'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남편의 애인 '곤'마저 그녀가 불쌍하다고 합니다. '안을 수 없어서' 그래서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일겁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거두기 위해 일을 꾸밉니다. 마지막까지 일을 꾸미는 것은 그녀, 쇼코의 차지가 됩니다.
 
  이들의 평온한 듯 하지만 불안한 사랑이야기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늘 그렇듯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짧은 단문으로 이어집니다. 나조차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사랑이듯, 구구절절 묘사하듯 표현한다면 '거짓'이 아니겠는가 말하듯 무척이나 짧습니다. 찢어지게 가슴아프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아프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슬프다'고 하지 않고, 싱겁게도 슬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든 작가가 제 3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그들을 묘사하지 않고, 아내와 남편을 번갈아가며 그들의 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분히 이기적입니다. 마치 사랑이 이기적이듯, 결혼이 필요에 의한 에고의 결정판이듯.
 
"무츠키와 잘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태연하고 부드럽고 자상한 무츠키를 견딜 수 없다. 물을 안는 기분이란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이다." (P 183) 

 서로가 나름의 컴플렉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을 서로 묶어 놓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선남선녀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로는 부족한 인간에게 나머지를 채워주는 것은 친구이고, 애인이고, 부부이고 가족인 것입니다. 쇼코와 무츠키가 서로 떨어져 있었다면 은색빛으로 아름답고, 초식을 하는 은사자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있기 때문에 더이상 은사자가 아닐 겁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가지지 못할 바에는 절반이라도 갖고 싶다"고 말하며 자보와 안드라스 그리고 한스가 사랑을 공유했던  영화 [글루미 선데이] 를 생각나게 하고, "난 알콜 중독자이고, 당신은 창녀야. 그런 면에선 난 편한 사람이란걸 알아주길 바래. 나가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판단을 믿고 존중하기 때문이야"라고 벤 샌더슨가  말을 했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저자는 에쿠니 가오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용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하고마는 많은 무모한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힐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거나 못하거나,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보이는 모든 사람의 관계는 '무모한 만용'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그 '무모한 만용'에 빠져 들겁니다. 그전에 했던 말들은 모두 잊은 채. 완전하게 채워지는 사랑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결혼은 서로가 지켜주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일생을 지켜보는 마지막 증인이 되어주고 싶은 것' 은 아닐까 싶습니다. 쇼코와 무츠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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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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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릴러 매니아'인 당신, 이 책을 놓치면 후회할 것이다! 

  변호사. 소위 사자士字 들어가는 직업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중에서도 물리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의사나 인격적인 생명을 다루는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사에 대해서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그 격格을 달리 해 왔다. '감히' 인간의 생명과 인격을 취급할 수 있는 자리인 만큼 그들의 수고로움은 존경과 높은 보수로 그들에 대한 존경과 그 판단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 직업을 만든 때부터 세인들은 '암묵적인 합의'를 본 것이다. 그중에서 세인들과 가까운 직업군은 '의사'와 '변호사'인데,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사랍답게 살기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들의 희소가치는 높아지고,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직업군은 '금전'과 결부되어 그 서비스를 보다 잘, 그리고 빠르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경제학적으로 판단할 때 당연한 이치가 '생명'과 '정의'의 가치를 놓고 봤을 때 종종 달리 평가되고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그중에서도 '변호사'는 '억울한 인간을 돕는 직업'이라는 직업관과 '세상의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정의'라는 가치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직업이라고 보여진다. 그들은 과연 '의뢰인'과 '정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주 만날 수 는 없지만 그들을 보게 되면 늘 떠올리는 질문이었다.
 
  본디 이야기를 좋아하는 지라 책은 물론이고, 영화도 좋아하는데 장르를 불문하고 즐겨보는 편이지만 유독 좋아하는 장르는 '법정 스릴러'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는 곳이지만 좀처럼 가기 힘든 곳, 그리고 자주 가서 좋을 것이 없는 곳이기 '법원'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간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자신과 상대방이 단 둘로서는 그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고, 서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누군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서로가 금전적 물질적인 박탈을 요구하는 단판 승부를 가리는 것이고, 시간에 비례하여 상당한 서비스료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3자된 입장에서 그곳을 지켜보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세상의 일이기에 언제든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나름의 공부가 될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들이 판단하는 '정의'는 어떤 방법으로 도출되는가를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공부가 될 수 있어서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과 결말은 어느 이야기보다 가장 '사실적'이고 종종 당연한 정의가 때로는 잘못된 판단과 얽혀진 관계에 의해 '불의'에 무릎을 꿇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목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방의 주장에 누군가가 냉엄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손가락질하며 훈수를 두고 싶은 때문이다.
 
  그런 내게 기가 막힌 이야기를 만났다.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미국의 노련한('유명한' 이라는 말보다는 악의가 담겼다) 변호사가 있다. 그에게서 재판에서의 승소는 그에 버금가는 마땅한 수임료와 사례를 보장한다. 링컨 리무진 세 대. 이것이 그의 현재를 대신할 만큼. 그러기 위해 그가 선택하는 의로인은 '진정한 정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식의 정의'를 만들 의욕을 불러 일으킬 만큼 돈 많은 의로인이다. 그런 그에게 '정의를 필요로 하는 돈많은 의뢰인'을 만났다. 변호사로서 '정의'를 찾는 기쁨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넉넉한 수임료와 수고료를 챙길 수 있는 '대박'을 만난 것이다. 서슴치 않고 사건을 수임한다. "순진한 사람만큼 무서운 의뢰인은 없다"고 늘 말했던 선배 변호사인 아버지의 유언도 잊고.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아 오히려 불안하게 시작하는 이야기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원제목 The lincoln Lawyer 이다. 
 
 



 
  다소 낯선 이름의 작가 마이클 코넬리는 경찰출입기자로 활동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LAPD 해리 보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The Black Ice>를 썼고 이 작품으로 1992년 에드가 상을 수상한 이후 해리 보쉬를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시리즈를 발표함으로써 최고의 명성을 얻는 베스트 셀러 작가이다. 13편의 해리 보쉬 시리즈를 쓰는 틈틈이 라스베이거스의 전문 도둑 <Void Moon>, 신문기자 <The Poet>, 변호사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등 색다른 주인공들을 소재로 한 스탠드 얼론(시리즈가 아닌 1권으로된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법정 스릴러'의 대표작가 '좀 그리샴'을 뛰어넘는다는 찬사를 받고 있는 작가이다.
 
  LA의 밤세계를 살고 있는 범죄자들을 주로 변호하며 그들의 검은 돈을 수임료로 받아 챙기는 형사법 전문변호사 미키 할러.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직업관은 단순하다. " 개업한 지 15년, 이제는 아주 단순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나는 괴물을 다루고 질병을 고쳐주는 전문가이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는 것뿐이다. 지키고 풍어야 할 법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자주의, 억제와 균형, 정의의 추구 같은 로스쿨 개념은,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조각상처럼 부식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엔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P 35)
 
  높은 승률, 많은 보수로 유능한 변호사로 통하지만 범죄자를 대변하는 이혼남 변호사, 검사인 전처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파트너로 근무하는 또 다른 전처 여비서, 그를 돕는 수사관들, 정보원들, 무죄를 주장하는 의뢰인과 그의 가족 등 소개글만 읽어도 모습들이 떠오르는 독특한 이미지의 캐릭터들과 하나 둘 씩 터지는 연속적인 사건들로 460여 페이지를 읽어내리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다. 미국의 형사법 재판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최근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사법권에 대응해 추진하고 있는 [로스쿨제도]와 배심원제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얼한 대사와 눈 앞에 스크린을 비추는 듯한 저자의 상황묘사는 이 소설을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눈을 감으면 Stpo 버튼이 눌러지고, 눈을 떠 글을 읽으면 Play가 되어 화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느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든 느낌이 딱 그랬다. 
 
이 소설은 리챠드 기어가 변호사로 주연을 맡았고 최근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주연을 따낸 에드워드 노튼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영화, [프라이멀 피어] 를 연상케 하고, 통쾌한 결말은 지난 해 조지 클루니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 를 떠올리게 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내 심장도 쥐락 펴락 반복을 거듭했다. 실제로 2009년 헐리우드에서 영화화 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하니, 그 반가움은 두배였다. 존 그리샴이 '정의의 실현'에 중점을 둔 작가라면 이 소설의 저자는 '범죄와 재판의 아이러니'에 중점을 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재미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이클 코넬리'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 이 책을 펴낸 [랜덤하우스코리아]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을 계속 내놓을 계획인 듯한 뉘앙스를 띄웠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만난 본격 법정스릴러, 이 작품을 읽지 못했다면 후회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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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잃다
박영광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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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로 살고 있는 진정한 영웅, 아버지를 이야기한 소설!


  
  범죄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클라이막스 무렵, 형사는 자신들로는 부족해 지원요청을 하고 범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한 무더기의 경찰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팀을 나눠 전후방을 맞게 하고 정면에서 엄호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거기 몇 명, 날 따라와." 범인이 숨어 있는 건물의 문앞. 주인공인 형사는 몇 명의 경찰들에게 문을 따고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 경찰1 과 경찰2 는 문앞에서 문을 따려고 하는 순간, 악당들은 문에 대고 총을 난사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지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죽어버린다.
 
 '한 명의 영웅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산만큼 높이 쌓인 이름없는 병사들의 주검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이야기했던가?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종종 그들을 주목하곤 했다. 총은 커녕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몇 초 만에 죽어버리는 엑스트라 인생들. 영화속 이야기라 주인공은 범인은, 또 관객은 주인공을 따라 눈을 돌리겠지만, 소리없이 죽어간 그들도 삶이 인생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누구의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아빠일 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박영광의 소설 [이별을 잃다]가 바로 그런 어느 이름없는 형사의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실제로 현직 형사에 근무중이며 지방의 경찰서에서 수사과에 재직하고 있는터라 사건과 수사상황을 둘러싼 주인공의 활동은 어느 다큐멘터리나 영화 못지 않게 리얼하고 스피디하게 전개 된다. 또한 독특한 구성이 매력적인데 책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이 죽게 되는 다소 황당한 구성을 목격하게 되는데, 멋지게도 이 책을 모두 읽는 순간까지 주인공은 죽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간다. 스토리도 장르를 딱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라고 보기에도 충분하지만, 범죄현장에서 범인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추리소설보다 박진감과 스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사라는 직업은 원래 말보다는 행동이, 그리고 생각이 많아야 하는 직업이듯, 저자가 일을 하면서 느끼는 평소의 생각과 애환이 곳곳에서 짙은 향을 피운다. 이를테면 저자 스스로가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범인을 기다리며 아내와 아이를 생각했던 것처럼,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했던 수많은 작지만 소중한 생각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슈퍼 일을 계속했다. 결혼하면 힘든 일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 둘이 일을 마치고 팔짱을 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고, 가끔 등에 업고 걸을 때 누가 볼까 내려 달라고 조르는 것이 매우 예뻤다. 나는 힘들다고 헉헉댔지만, 사실 힘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면 아내가 웃는다. 나도 따라 웃었다. 가로등도 추워 오들오들 떠는 골목길도 개들조차 입김을 내며 집으로 돌아간 쓸쓸한 거리도 우리에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보다 더 아름답고 따뜻했다."   (p55)
 
 한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잘 자라서 경찰이 되었고, 순찰을 돌다 컵라면을 먹으러 우연히 들린 슈퍼에서 평범한 처녀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나는 사회의 파렴치들을 잡는 형사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나누고 싶지만, 형사라는 직업은 그를 늘 밖에서 떠돌게 된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에서 적에게는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우지만, 한 겨울 하루종일 사냥을 해 새끼를 먹이고는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는 '늑대 한마리'를 생각나게 한다. 몸은 떠나 있지만, 항상 마음만은 함께 하는 주인공의 그것은 이세상을 사는 아버지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족의 가장으로서 갈등하는 모습과 떨어져 있으며 가족을 그리는 모습은 실제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 잔잔하고 리얼하게 내 마음으로 전해진다.
 
"나를 닮은 사람이면 좋겠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다.
나를 닮아 당신과 아이들이 쉽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
나를 닮지 않아 쉽게 나를 잊어버리면 좋겠어.
그래야 해. 힘들겠지만 그래야 해.
내가 잊을게. 나는 그냥 당신 곁을 잠시 지나갔던 사람처럼,
나는 그때 한 번 담배를 사러 갔던 사람이고,
당신은 어쩌다 단 한 번 나에게 담배를 팔았던 사람이라고.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p268)
 
영화 [사랑과 영혼]을 연상하듯 주인공인 나는 죽었지만 채 죽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자신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혼자서 이야기한다. 저자의 직업이 형사인 만큼 누구보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을 그림자처럼 달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인 듯 같아 마치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는 그의 애잔한 마음을 나타내는 글을 읽을 때는 김현승님의 시, [아버지의 마음]이 떠올리게 했다.
 
 
바쁜 사람도
굳센 사람도
바람같던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걱정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는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예전에 소설가를 꿈꾸는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
"너, 이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컬한 직업이 뭔지 아냐?"
"뭐지?"

 "그것도 몰라? 소설가지. 허가받은 거짓말쟁이들 말이야.
거짓말을 잘 할수록 칭찬받잖냐."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양식'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소설을 읽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테다. 시간이 펑펑 남아돌아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미안한 자신에 위로를 주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중학교 여학생이 멋진 교생선생님을 만난 듯 한 저자에 빠져 그를 추적하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바빠 자기계발을 못한 이들의 유일하고 따뜻한 안식처일 수도 있고, 잠시라도 활자를 눈에 넣지 않으면 안되는 활자중독자에겐 치료제가 될 수도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자 하는 공통된 목적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이 말을 하자니 한편으로는 외롭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잘하는 작가를 만나면 독자들도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 작가의 책을 만나면 깊이 빠져서 시간과 자리를 잊곤 하는데, 어제 만난 이 소설이 그랬다. 이야기속 자신의 모습은 영화의 이름없는 엑스트라였는지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멋진 아버지요, 가슴 뜨거운 로맨티스트였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버지 역시 위대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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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스이카
하야시 미키 지음, 김은희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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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 왕따 이야기!


  
  내가 보낸 학창시절에도 '미움받는 아이'는 있었다. 군대에서도 이른바 '고문관'이라고 해 고참들의 꾸중을 도맡아서 듣기도 했다. 누가 먼저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몇몇에게 미움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미안하지만 함부로 거들 수 없는 것은 대다수가 미워하고 있기에 애잔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애써 무시했었다. 이제와 그들을 생각해 보니 주늑들어 움츠려 있는 그들의 어깨와 반쯤 내리 깐 멍한 시선이 떠오른다. 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 게임하자. 치카 데리고." 2학년 3반의 어느 점심시간, 이 누군가의 입에서 제안된 이말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심심하잖아. 장난인데 뭐 어때?" 로 동의를 구하며 시작된 그녀들의 게임은 같은반 친구 치카를 따돌리는 일이었다. 집단 따돌림, 소위 왕따를 말하며 일본말 이지메 에서 비롯된 무서운 게임이다. 일주일이 넘어 계속 되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눈을 쫓으며 도와달라는 표정을 짓는 치카를 외면하기 힘들어 스이카는 "이제 그만해!"라고 말한다. 다음날, 교실 자신의 책상위에 흰 국화꽃이 놓여 있다. '어제부로 다치야마 스이카는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스이카 그녀가 왕따의 대상이 된 것이다. 16세의 나이로 소설을 낸 하야시 미키의 소설[미안해, 스이카], 원제목은 いじめ 14歳のMessage -이지메(왕따)14세의 메시지 이다.
 
 



     <국내판 표지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포스토들, 마지막 일본원서 표지>
 


 이 책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집단따돌림(이하 왕따)을 당한 여학생이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아픈 경험을 소설로 쓴 소설이다. 왕따를 당한 동급생 치카를 돕다가 오히려 왕따의 대상이 되어버린 스이카는 같은 반의 요우꼬와 그 무리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시련들을 겪는다. 처음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치카마저 스이카를 외면하면서 그 슬픔과 괴로움은 더해 간다. 섬득한 아이들이 행동과 그것을 온몸으로 부딪혀 막아내며 '절대로 지지 않을거야'라며 스이카는 버텨내지만 날로 더해가는 그들의 괴롭힘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다. '지겨워. 지겨워 죽겠어. 이내 끝을 내야 할 때야.' 여기까지의 내용으로 본다면 비극적인 성장소설로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은 스이카의 투신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낸다. 유체이탈 상태의 스이카는 사고후 자신을 둘러싼 지난 날의 일에 대해 치카는 밝히게 되면서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피해자이기도 했던 저자는 스이카의 입을 빌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용기가 있다면 자신을 '쉬게 할 용기'도 가질 수 있는 법이니 등교거부든 뭐든 방법을 찾으라. 분명한 것은 죽는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혼자서 감내하지 말고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용기있는 행동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임을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난 가해자의 두목격인 요우꼬에 주목하고자 한다. 왕따를 주도한 학생은 다른 아이에게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이들은 욕을 퍼붓거나 고립시키고, 위협하고, 물건을 손상시키며, 감정적 신체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자기들이 하기 싫은 일을 시킨다. 그래서 이런 행동을 시킴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든다. 이 아이들은 자신도 부모나 형제로부터 왕따를 경험했으며 자신의 보금자리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그런 행동을 배웠을 수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가족과 사회에서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겪었는데, 학교에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희생자는 자신이 고립됐으며, 불안하고, 자신감이 부족하여, 적합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대접받는 것을 느끽게 되면서 어울리기 힘들어진다. 이러한 영향은 오래가기 때문에 왕따가 위험한 것이다. 왕따에 동조한 아이나 친구를 위해 나서지 못한 아이들도 죄책감으을 느낄 수 있다. 슬프게도 왕따의 희생자는 제대로 지도되지 않는다면 쉽사리 가해자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왕따를 겪었던 치카처럼.
 
 일본사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말 중에 마케이누(負け犬 -まけいぬ)란 표현이 있다. 원래는 '싸움에 져서 꼬리를 감고 도망치는 개'를 뜻하는데, 예를 들어 '30대 이상, 미혼, 아이가 없는 여성'을 일러 마케이누라고 한다.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표현이지만, 일본여성은 20대 안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전통이 있는 일본사회에서 20대에 경쟁에 뒤쳐저 30대까지 결혼을 못한 여성을 비꼬는 말인데, 이처럼 일본은 알게 모르게 '경쟁부추기는 사회' 이기 때문에 경쟁에 조차 끼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부류를 선정해 경쟁에서 느꼈던 스트레스와 분노를 그들에게서 풀어내려는 비열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본디 내성적이고, 표현을 자제하는 이들이었던 만큼 왕따의 대상에 행하는 짓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이고 포악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만 그럴까?
 
  일본의 여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지만, 이 무섭고 슬픈 이야기는 결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가족과 자녀들이 오늘도 가해자로, 피해자로, 그리고 가슴졸이며 지켜보는 목격자가 되어 겪는 우리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왕따문제의 단절은 그들을 통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무한경쟁사회'가 된 것을 당연한 일인 듯 아주 잘된 일 인듯 생각하고 있는 기성세대가 먼저 자성해야 할 문제이다. 이 소설을 통해 '왕따'를 당하는 피해자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지를 독자가 가슴으로 체험느낄 수 있다. 스이카와 같은 피해자가 또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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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오늘을 사는 지적인 유부남의 슬프지만 유쾌한 자기고백!


   
  대학때 잘 어울리던 동기들과 '계契'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었다. 홀수 달 마지막 금요일저녁, 그럴듯한 장소에서 먹고 싶은 것 잔뜩 사놓고 만나 둥그런 원탁에 둘러앉아 친목도모로 조촐하게, 아주 조촐하게 카드놀이를 하는 모임이다. 동종업계의 소식도 듣고,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나누자는 목적에서 만들었는데, 나름 유익한(?) 모임이었다. 그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하룻밤 술값'의 목돈을 놓고 열띤 승부수를 띄우고, 승자는 패자에게 술 한잔과 차비를 나눠주며 자신의 '남성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하룻밤의 전투였는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다. '황야의 7인'이라며 시작한 모임이 2년을 간격으로 '독수리 오형제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숫자를 갈아야했다. 그 뿐인가? 손을 털고(다 잃고) 일어나며 "자, 오늘은 누구한테 술을 얻어먹냐?"고 웃던 자식들이 한 판에 몇 푼 잃을라 치면 "에구구, 우리 애가 분유값 두 통 날라갔다. 쯧쯔..."라며 안타까운 얼굴로 머리를 쥐어 박고 있으니, 게임도 재미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밤 11시만 되면 심야할증으로 택시타면 마눌에게 맞아 죽는다며 하나 둘 일어나는 통에 밤을 하얗게 올나이트 모임이 미성년자 디스코텍처럼 변해버렸다. 마지막 두 명이 남은 지난 해, "우리 맞고 칠 순 없잖아?" 라며 그 계모임을 없애버렸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소중한 무엇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때 둘은 맹세했다. "변해버린 녀석들 보기 싫어서라도 우리는 싱글로 살자"고. 지난 봄 나머지 한 녀석도 열 살 어린 신부에게 도둑장가를 들었다. 얼마전부터 '유부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었단다. 치사한 자식들.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것과 싱글로 (마지못해)살아가는 것을 두고 '행복한 구속'과 '외로운 자유'라고 생각해 왔다. 제눈이 높은 건지, 능력이 모자른 것인지 혼자 살아가며 느끼는 것은 결혼해 '행복한 구속'에 속한 이들은 마냥 부러운 존재라는 것. 제가 죽을만큼 사랑하는 짝을 만났고, 사랑의 결과로 자신을 닮은 2세도 얻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게다가 잭이 심은 콩나무마냥 무럭 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밥 안먹어도 배부르겠다 하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외로운 자유'가 그립다 하니 이 또한 소모비용과 기회비용 사이에서 집착하는 전형적인 인간성이 아니겠나. 오늘 '행복한 구속'에 속한 녀석들이 왜 초라한 내 위치를 그리워했는지를 조금은 알것 같았다. 배를 움켜지고 웃게 만든 소설, 다비드 아비께르의 [오, 나의 마나님]을 읽어서 였다. 프랑스어인 원제목은 Le musée de l'homme : Le fabuleux déclin de l'empire masculin (인간 박물관: 남성제국의 가상적 몰락) 이다. 순차적인 진화의 끝이 남자 다음에는 여자라는 원작의 책표지가 이 책의 전부를 말하는 것 같다. 맞다, 이 책은 아내에게 눌려사는 현대 남성의 자조섞인 소설이다.   
 

   
 자신의 결혼 후 삶을 이야기한 이 책은 소설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에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장르다. 하지만 소설만큼 재미있고 유쾌하며, 에세이보다 더 깊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마치 프랑스의 빌 브라이슨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질 만큼 페이지마다 폭소를 자아낸다. 결혼후 잃어가는 자신의 남성성에 반비례에 우성 유전자적 인간으로까지 보이는 아내를 비교하며 때로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아이러니로 가득한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곳곳에서 남성만이 느낄 수 있는 쓴웃음도 눈에 띈다). 아이의 공동육아를 기본으로 알고 있는 프랑스의 남자들은 우리의 그것보다 더 했다. 모든 것을 함께 하면서도 보다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아내의 능력을 당해내지 못해 무시당한다. 나아가 이젠 마지막 보루인 월급마저 자신보다 아내가 더 받게 된다. 그러자  
 
 여섯 번 째인가, 일곱 번 째인가 보는 마피아 영화 [대부]에서 눈짓이나 턱만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딸들과 아내를 부엌으로 보내는 것을 보고 자신도 굵고 낮은 목소리로 흉내를 냈다. "혼자 거실에서 식사하고 싶어 그러니 당신은 부엌에서 먹어. 다들 아무 말 하지 말고, 행여 나를 바라볼 때면 눈을 깔아. 내가 손가락으로 탁 하는 소리를 니면 음식을 가져오라고. 골치아프게 따지지 말고." 한 시간 동안 깔깔거리는 아내의 웃음 이후에 돌아온 것은 한 컵의 적포도주 목욕, 그는 그날 저녁 혼자 부엌에서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 비교하는 건 정말 사내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다섯 살 때는 장난감 트럭 크기를 비교한다. 열 세살 때는 성기 크기를 비교한다. 열 여덟 살이 되면 여자친구의 가슴을 비교한다. 서른 다섯에는 전자수첩을 비교한다. 그런 식으로 끝까지 계속한다. 아니다, 끝에 가면 더이상 비교하지 않는다. 멍청이처럼 세상을 뜨니까."(p62)
 
 그는 계속해서 아내와 비교하고 비교하지만 결국은 아내가 항상 이긴다. 그래서 비교하는 것도 포기한다. 자신의 남성성과 열정 모두를 반지에 녹여 아내에게 끼워주는 순간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내가 모두 빼앗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한 여성에 대한 사랑과 어여쁜 어린 두 딸, 그리고 버려지고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유머는 남겨주었다고 한다. 불쌍할 만큼 자신을 이야기한 이 책도 아내의 허락을 받아 쓰게 되었다고 전하면서.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위해 그리고 아이를 위해 실수를 거듭하지만 분발하는 모습은 남자이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3 초마다 바뀐다고 했던가?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그의 수다스러움은 만만치 않다. 결혼후 왜소해지고 여성화되는 자신을, 그리고 변해버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 변해버린 자신을 웃음으로 해소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중첩되지 않을까 여유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한다. 씨니컬한 유머가 가득했던 책, 슬프지만 재미있었다. 추석이 지나고 동기들과 오랜만에 모이기로 했다. '행복한 구속' 수감자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잃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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