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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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를 살아가는 세 여자의 우울한 러브스토리


  
 멀리 이국의 땅 토론토에서 정원을 화려하게 꾸며놓고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항상 느끼는 써니, 전망좋은 집을 가지고도 항상 배부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인 혜령,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난 년들' 사이에서 보다 '난 놈'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 우영. 이렇게 세 여인과 그녀들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이야기, 아니 사랑이야기가 김윤영의 소설 [그린핑거]의 대략이다. 감히 사랑이야기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사랑이야기, 즉 러브스토리라 불러야 할까를 고민해서였다(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남자가 여성 작가가 쓴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항상 꺼름직하다. 마치 거뭇거뭇한 솜털을 달고 제 정체를 몰라 두려워 하는 소년이 연신 두근대며 쓰레기통을 딛고 올라 여탕을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지금껏과는 표지도 달라 얼핏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 감추듯 의식하며 읽어대는 나를 보면 아직도 솜털이 자라고 있나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읽는 이유는 지금 이 책을 읽고 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을 알기 위해서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대를 보내는 이성異性의 생각들은 짐작도 못했던 것들이어서 지나가는 여성들을 붙잡고 '이 글의 표현대로 느낀 적이 있는가?' 묻고 싶을 정도다. 다름을 알게 하고, 그래서 더욱 알고 싶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커플이 그들의 결실을 보려 함에 있어 두려워 하는 것들, 그리고 있어야 할 대상이 없어 부족함을 느끼는 커플과 소중한 결실을 잃어버린 커플의 마음이 전반부에 걸쳐 표현된다. 이것은 써니와 혜령만의 케이스가 아니라 노령화로 인해 미뤄왔던 아이갖기를 정작 바라게 될 때 느낄 수 있는 여성들의 심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남자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과연 내가 저렇다면...'하고 고민하게 된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잘나가는 직장녀' 우영만큼만 '계산적'이라면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언제든 다시 낳을 수 있고, 잘못되면 서로 합의하에 중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자식에 대한 20세기와 21세기의 가치관의 차이인가? 계산력의 차이인가? 헛갈리게 한다. 또한 사람이 좋아지는데 있어서 학력과 배경을 베이스로 깔아야 한다는 이 억지스러운 현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결혼이 끝이 아닐진대 우영이 써니와 혜령같이 되지 말란 법은 없는데, 그들의 계산에 의해 맺어진 사랑은 앞의 두 여인의 상황이 되면 또 그들의 계산법대로 해결되는 걸까? 혼란스러워진다.
 
  이 세사람의 공통은 '부족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래서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 어떤 때보다 풍족한 이 시대는 오히려 '부족감이 더해가는 시대'인건가? 그런 그녀들의 절반인 남자들은 어떨까? 채워주고 싶지만 못하는 그것 때문에 낙심할까? 아니면 한없이 바라는 그들때문에 실망할까? 세 사람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하고 싶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게 하고 싶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 책은 '우울'하지만 '러브스토리'인 것은 확실하다. 그 말은 이 시대가 충분히 공감하는 러브스토리라는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커플이 되면 우울해지는 것일까? 그런걸까? 많은 생각을 던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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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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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냄새가 진동을 하는 이제껏 한번도 만나본 적 없던 호러소설!


  
  호러의 대가, 스티븐 킹은 이 책의 저자를 이야기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나까지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의 책으로 인해 우리는 지난 십 년간의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어떤 단편들은 너무 오싹해서 읽을 수 없었고, 또 어떤 단편들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포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클라이브 파커, 그는 호러의 미래다."
 
 그렇다. 이 책은 스티븐 킹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별개의 호러소설이다. 스티븐 킹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는 평을 듣는 작가이다. 그가 가족간의 불화, 집단 따돌림 같이 일상에 자리한 사소한 문제들이 언제라도 생명을 위협할만큼 커다란 위기로 치달을 수 있음을 스피디한 필치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내 주변에 있을 지 모르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다면, 이 책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서 끌어온 공포를 쏟아낸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적 공간적 소재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영국 판타지 문학상] [세계 판타지 문학상]을 받을 만큼 '판타지풍'의 냄새도 짙게 지니고 있다. 작가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고, 기괴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영화 [헬레이저]가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실제 구미에서는 그의 소설을 소재로 온라인 게임과 콘솔 게임이 제작된다고 하니 그 면면을 알 듯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지금껏 펴낸 피의 책Books of Blood의 단편들 중에서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작품들을 따로 모아 실은 책이란다. 그런 덕에 단편 하나 하나가 '끔찍하게' 무섭다. 클라이브 파커의 책, [피의 책Books of Blood]다. 모두 열 편의 단편들을 한 권으로 묶었는데,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한꺼번에 읽기에는 버거울 만큼 무서워서 한 달 전에 읽기 시작해서 사흘에 한 편씩 어제야 마칠 수 있었다(실제로 소설을 읽은 내용으로 꿈을 꾼 적이 세 번 이었고, 가위도 한 번 눌렸다).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딱 하나. '덜덜덜~' 끔찍했다.
 



 
 열 편의 작품 중에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피그 블러드 블루스] 그리고, [섹스 죽음 그리고 불빛]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은 지난 달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상영된 바 있다. 뉴욕에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지하철 살인사건에 주인공 카우프만은 피상적인 관심만 갖는다. 마치 우리가 신문을 통해 사건과 사고를 접하는 것처럼. 가해자인 연쇄 살인범 마호가니는 스스로를 선택받은 인간이라 여기며 매일 밤 벌이는 살인에 신성한 의무감마저 느낀다. 그리고 이 운명의 두 인물이 어느 날 한밤의 식육 열차 속에서 만난다. 상상속의 귀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살인자와 조우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피칠갑'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책을 읽으면서도 비릿한 '피냄새'가 나는 듯, 읽기조차 끈적거렸다. 
[피그 블러드 블루스]는 퀴퀴한 땀 냄새와 음침한 공기가 진동하는 청소년 갱생원에 파견되어 온 전직 경찰, 레드먼가 겪는 이야기인데, 색다른 느낌의 레이시와 그곳 사람들 그리고 석연치 않은 아이들의 행동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다. 판타지적인 그의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단편이었다.
 


 
 
 원한과 복수으로 비롯된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억울한 사연으로 첨철된 귀신이야기와 그와 대적하는 퇴마사들의 한판승부여서 결국은 결말이 원인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한국적 공포라면 이 소설은 꿈에 조차 생각할 수 없는 상상밖의 사물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원인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놀람과 공포는 배가가 된다. 인간의 상상력과 잔혹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책을 읽는 독자나 호러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잔인하다 또는 성격이 이상한 것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둘 수 있는데, 저자는 이 글의 서두에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일상에서 억제된 문화적 요구를 모처럼의 기회에 표출하려는 사람이다. (...) 우리는 이따금씩 우리 영혼에 깃든 어둠과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원시 자아, 요컨대 우리가 말을 배우기 전에 존재했을 , 그리고 세상은 거대한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자아와 재회하는 방법이다." 
 
책이라고 해서 항상 윤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교훈적일 수는 없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을 느끼려 한다면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활자 속에서도 악몽을 꾸는 듯 겁먹고 싶다'면, 그러기를 즐긴다면 꼭 한 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역자의 변에서 내년에도 계속 나올 것으로 암시한 바 있어 자못 기대도 된다. 공포소설을 즐기는 독자라면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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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이충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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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패션남성지 편집장의 쇼핑에 대한 허심탄회한 고백 !
 
 2001년 3월 이후 그의 글을 900페이지(10쪽 원고 90회)를 읽었다. 그리고 지금껏 세 권의 책이 나와 읽었고, 그리고 올해 360여 쪽을 하나로 묶은 책을 또 이번에 읽었다. 잘나가는 라이센스 남성 월간지 'GQ' 를 읽는 또 다른 쏠쏠한 재미는 편집장인 이충걸의 [Editer's Letter]를 읽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쓰기가 죽기 만큼 싫은 그가 편집장이 되어 좋은 점은 한 달에 한 번씩 '달랑 원고지 10쪽만 쓰면 된다'는 것이란다.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이듯, 냄새가 맡아질 듯 읽기 아까울 만큼 글을 표현하는 그가 글은 달랑 10쪽 쓰고, 후배들의 기사를 홍동백서 나누듯 배치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 10쪽 읽는 재미를 느끼려고 또 한달을 기다리는 나같은 골수(?)을 고려했나보다. 이번에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남성패션지의 편집장 이충걸이 말하는 쇼핑이야기,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이다.
 
 


 
 
 "나에게 쇼핑은 마케팅의 측면이나 문화적 결핍을 충족시키는 레저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잡지 에디터라는 직업을 취함으로써 뻔뻔한 쾌락주의자이자, 기품 없는 유물론자이자, 즐거움을 좇는 호색가로 살아가는 동안, 눈은 높고 본 건 많은데 가진게 없다는 진실만이 내 인생의 비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 시작되는 이 책의 저자는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자신에게 꼽히는 티셔츠를 줄창 입는 겁나게 멋있는 사람이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동안진 외모는 차치로 하고, 주제를 가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머리와 머리속 생각을 막힘없이 글로 토해낼 줄 아는(실제로 말도 그렇게 한다면 ...신은 불공평한 것이다) 멋쟁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쾌락주의자이자, 유물론자이자, 호색가로 변신하게 되는 직업인 잡지사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그가 본 패션과 스타일과 명품, 그리고 쇼핑을 이야기 한 책이 이번 책이다.
 
 작은 제목들 또한 멋지다. '매장의 미아', '트렌드를 소비하는 야비한 방법들', '괴로운 부르주아 세계', '무엇을 위한 죄의식인가' 네가지로 구분하여 그가 생각하는 '패션과 쇼핑'을 모아 두었다. 그의 직업상 이 책은 상당히 위험한 요소들을 담았다. 소위 명품을 향해 '너희가 정말 명품될 자격이 있는가?'를 혼내기도 하고, 그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명품족'들에게 꼴불견은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휘어감고 다니는 너희들 이라고 말한다. 그가 발행하는 잡지의 삼분지 일은 소비자를 부르는 광고일색이고, 그것을 읽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 역시 이러한 바를 용인하고 그것을 추적하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직업인으로써 다 하지 못한 일종의 'Off the Record' 독백인터뷰다(할 말은 꼭 하는 사람같아서, 그래서 더욱 멋쟁이다).  
 
 그는 세일Sale에 대해 '누구에겐 광란이지만, 누구에겐 마법이다.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원목 책장을 찾아 헤매는 것, 시즌 막판, 세일의 끄트머리에서 미리 점찍어 둔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야말로 절묘한 현대의 예술' 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경제적 쇼핑을 위한 변명이 적용되는 시즌이자, 디자이너 상표가 덤으로 딸려온다는 환상에 갇힌 볼모의 계절이며, 쇼핑중독자들이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유라 말한다. 또 백화점을 일러 획득을 사회성으로 탐욕을 멤버십으로 가장하는 곳이자, 소비주의의 장대한 성전이고 물질적 열망과 기도의 현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백화점에 가는 건 고상해서라기보단 소비의 원천이라는 구매자로서의 존중감을 갖고 싶은 단순한 욕구 때문이이라고 말한다. 쇼핑의 세계에 대한 독설이자 자조섞인 회한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딱 이런 말투로 패션을 말하고, 쇼핑중독으로 인한 빚을 말하고, 복제도시를, 청담동을, 럭셔리를, 그리고 소비를 향해 꼬집지만, 그 또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 임을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멋쟁이다. 스토리가 있어보이는 (상상을 뛰어넘는)물건을 좋아하고,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것을 고를 줄 알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를 엄마 다음으로 사랑한다.
 
 패션과 쇼핑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늘 갖고 있던 의문, 즉 패션지 에디터들은 그것을 즐기고 누리는가, 아니면 나처럼 갈망하고 원하지만 결국은 '신포도'취급을 하는가에 대해 답을 해 줬다. 소유하는 만큼 행복을 보장한다는 그들의 유혹에 빠져 앤디 워 홀처럼 포장지를 채 뜯지도 못한 채 쌓아놓을 만큼 가졌던 닐 부어맨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무명無名의 것만을 걸치고 먹는다고 자신의 책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라는 새 이름을 부여한 제품(?)을 만든 자보다 저자가 현명해 보이는 것은 명품이든 구제품이든 제품을 떠나 스타일Style은 자신 깊은 곳에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자 또한 스스로에게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라면'을 먹으면서 '웰빙'을 외치는 괘변론자의 글도, '신상'이 최고라 외치는 속없는 치의 글도 아니다. 그는 현명하고 제대로 세상을 보는 눈갖기를 권한다. 그가 이 책을 신중하게 읽게 되는 것은 그가 언급하는 모두가 '경제적 가치'의 맞교환을 필요로 하는 '돈쓸 꺼리'들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가장 사랑하는 듯 그는 말한다. '젊음을 자랑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그의 말에서 젊음을 스타일로, 또 멋으로, 시간으로 바꾼다해도 그의 말이 될 듯 하다. 정작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이 책에서 제 나름대로 찾게 될 것이다.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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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녀의 일기장
전아리 지음 / 현문미디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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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문 앞에서 만날 것 같은 '꼴통' 여고생의 이야기 !


  
  "아, 씨바~" 신호를 기다리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다. 내 뒤에는 여고생 단 둘 뿐. '에이, 설마' 했다. 헛들은 소리가 아님을 안 것은 삼 초도 되지 않았다. "그니까, 졸라..." 제 눈에 보이는 세상은 단 둘만 있는 듯 연신 욕으로 시작되는 그녀들의 대화 속에는 까르르르 뒤집어지는 웃음이 하나 가득이다. '쯧쯔 어디 세상에 여학생들이 욕을...' 하며 생각하면서도 나도 미소가 번진다. 목젖이 보일 듯 큰 입을 벌리고 웃는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언제 웃었는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나의 굳은 입모양을 번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 참 많이 밝아졌다'고... 여고생들의 웃음소리를 등에 두고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걷던 그때가 아마 내가 '을乙'의 입장에 서서 '갑甲'과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가던 길은 아니었을까. 몇 분을 더 '간신나라 충신'이 되어야 할 지 몰라 '자괴감'에 무너져 있던 때는 아니었을까. 아무튼 난 그녀들의 웃음에 전염되어 몰래지만 함께 웃을 수 있었다. 태초부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또래들의 웃음소리.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하지만 확실히 정말 세상은 많이 변했고, 많이 밝아졌다. 마치 오늘이 구석기 시대때부터 그대로인 것 같이 생각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내 아버지 세대는 산업역군이 되고, 새마을 운동가가 되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열심히 일해 이 나라를 굶지 않는 나라로 만드셨고, 죄수번호같은 486, 386 세대는 목이 터지고 어깨가 끊어질 만큼 가열찬 구호를 외치고, 불끈쥔 주먹으로 하늘을 찔러대 독재를 물리고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후 허허발판의 땅덩이인 이 나라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든 이들이 겪는 오늘날을 대변해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놀부가 죽어 지옥에 가서 제가 받을 죄를 선택하라고 해서 살펴보니 뜻뜨미지근한 똥물을 가득채운 운동장 만큼 큰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사우나를 하는 사람들이 보여 '여기서 벌 받겠소'하고 홀딱 벗고 탕에 몸을 담그니 이러더란다. " 삼분 휴식 끝, 또 다시 백년 똥물에 잠수우~."
나도 목젖을 내놓고 웃을 줄 알듯이 그녀들에게도 고민은 있겠지. 하지만 그녀들은 잠시 잊을 수 있는 능력, 잠시 뒤로 미루고 지금을 느끼고 만끽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어깨에 백 톤은 되는 짐을 진 듯 엄살피우는 내가 부러운 건 그녀들의 잠시동안의 여유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깊어 채울 수 없는 헛헛함은 이젠 이력이 났다. 걱정과 고민도 이젠 웬만해서는 1분도 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없으면 '매맞지 않고 잠자리에 든 신병의 마음'처럼 두근대고 울렁거린다. 이룬 것 하나 없는 것 같아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어지는 것이 요즘, 한 권의 성장소설이 버스비 아껴 만화가게에서 킥킥대며 '문화생활'을 즐기던 중학교 1학년으로 나를 몇시간 돌려놨다. 바로 전아리의 소설 [직녀의 일기장]인데, 글을 읽을 맛이 성게알 빼먹듯 참 쏠쏠했다.
 
  이 책으로 작가를 처음 알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청소년문학상을 휩쓸고, 대학을 가서도 문학상을 탔단다. 이 작품 또한 제 2회 세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니 문재文材가 입증된 여대생 작가다. 노구老具가 될 법한 나이의 작가들이 써내려간 추억 가득한 성장소설도 아니라 책 속 주인공은 오늘을 이야기하는 성장소설이다. 약간은 삐딱한 성격에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외모를 지녔을 것 같은 만만치 않은 여고생 직녀는 문밖에만 나가도 만날 수 있는 요즘 여고생같은 현실속의 인물이다. 그 시절이면 누구나 거의가 그랬듯 학교와 집을 오가며 만나고 얽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 책의 주를 이룬다(한 번의 가출, 그녀에게는 또 다른 세상의 경험도 포함되지만). 항상 자신을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하지만 그리 자주 볼 수 없는 바쁜 아버지, '견원지간' 네 마디로 둘 관계를 대신할 것 같은 엄마, 세상의 남자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드는 한심한 오라버니 그리고 직녀, 그녀의 생각들이 이 책의 이야기 절반을 넘긴다. 그리고 절반이 약간 넘지 못하는 나머지는 그녀의 친구들, 그녀의 학교생활, 선생님들이 채운다. 아주 적절하고 타당한 배분이다. 내 시절을 더듬어도 딱 그정도 였으니까.
 
  학생이 '공부'빼면 고민이 뭐 있겠나 쉰소리들 하지만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녀들은 다르게 고민하는 모양이다. 어른들은 바쁘다고 입버릇을 떨지만 자갈만한 걱정으로 하루를 꿍싯거리며 고민하지만, 그녀들은 그리 오래가질 않는다. 순진무구? 단순무지? 아니다. 보이는 세상과 사람이 모두 궁금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온갖 것이 흥미롭고 생각을 자극한다. 그래서 1분을 채 넘지기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 튀어나와 미친 말처럼 나를 끌고 다닐 때가 있거든. 얼핏 보기에는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하니까, 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거든? 근데 뒤에 보면 그게 아니야. 정신 차리고 보면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기 일쑤란 말이지. 그래서 난 감정이 날뛰려고 할 때면 일단, 유체이탈을 시작해. (...) 혼을 육체에서 분리해 빠져나오게 해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이 내 몸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거야. 그리고 재판관 같은 목소리로 묻는 거지. 지금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무어냐?하고." (p111-112)
 
남들 마음 아는 것보다 제 마음 아는 것이 더 어렵다며 친구 민정이가 직녀에게 던지는 이 말에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그녀들의 마음을 넌즈시 알려준다. 그렇다고 '너는 어떤 사람이니?' 혹은 '너는 누구니?' 라고 묻지 않고 '넌 커서 뭐가 될래?' '넌 대체 왜 그러니?' 라며 묻는 뻔한 어른들의 매뉴얼로 본인들이 묻고 싶은 질문만 툭툭 던지고는, 그 답이 자신들이 지닌 모범 답안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에 따라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가름하는 어른에게 자신을 맡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 자기 마음을 아는 게 더 어려울까? 내 생각엔,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잘 앍로 있다고 확신하는 데에서 문제가 비롯되는 것 같아. 사람이 사라을 완벽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야.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해도. 때문에 나에 대해선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오만을 품기에 앞서서, 나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라며 그 답을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대화체는 숨쉬기 좋게 무척이나 짧다. 직녀를 포함한 그녀들의 생각도 짧다. 그리고 주어지는 시선도 짧은 만큼 에피소드들이 짧고 많게 느껴진다. 마치 직녀의 한 줄 일기장처럼. 그래서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이 스피디하게 느껴진다. 요즘 세상과 많이 닮았다. 직녀는 확실히 오늘날을 살고 있는 여고생이었다.
 
  지난 주에 읽은 최인호님의 [머저리 클럽]을 읽은 덕에 나보다 앞선 세대의 학창시절과 나보다 뒤에 선 학창시절을 겹쳐보며 내 학창시절도 덧대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직녀보다 두배가 넘는 나이가 되어 웃어가며 그녀들을 읽는 내게 '롤리타 신드롬'이냐고 눈흘길 지 모르지만,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륵 거리는 철없는 여고생들이 아니라, 그들도 나처럼 친구와 가족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공유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면 독자로서 제대로 이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닌가 하고 대꾸하련다. 하나 있는 딸을 두고 '자식이 웬수'라며 속썩고 있는 또래의 딸을 가진 박선배에게 한 권 권해야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직녀같은 딸도 있더라고 말하면서. '간호사'수업을 받는 직녀의 근황도 궁금하다. 직녀라는 이름이 꽤 오래 뇌리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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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 - 상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아르테)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아르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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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잊게 만든 최고의  X등급 추리 스릴러소설 !
 
 한동안 즐거웠다. 유난히 더운 더위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 16일을 환호하며 열광했던 북경올림픽을 보며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집합(集合), 기억(記憶), 광희(狂喜)  로 이어지는 채 끝나지 않는 폐막식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하나. '이젠 뭘 한다지?'...
다행히 그 열광은 오늘까지 계속되었다. 섬뜩하게 쳐다보는 여자아이 그림의 심상치 않은 책 표지에 끌렸고, 지금까지 전유럽을 1,000 부를 눈앞에 둔 경이로운 숫자로 팔리면서 '어른들을 위한 해리포터'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책이라는 소개글에 기꺼이 서재에 꽂게 만든 책을 지금까지 읽었다. "일요일 저녁에는 [밀레니엄]을 읽지 마라. 뜬눈으로 월요일 아침을 맞고 싶지 않다면." 이라고 언급했던 어느 프랑스 독자의 경고를 미쳐 알지 못했다. 폐막식이 끝난 바로 직후 읽기 시작했고, 난 월요일을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스티그 라르손Stieg Larsson 의 책, [밀레니엄I] 원제목은 les hommes qui n'aimaient pas les femmes (Millénium, T1) (Paperback)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상,하)이다.
 
 


 
  훌륭한 작품의 작가답다고 해야 할까? 이력 또한 기이하다. 이 작품은 저자인 스티그 라르손의 데뷔작이자 유작인데, 2005년부터 3년 동안 세 편의 시리즈로 [밀레니엄]을 발표했는데, 3부 집필을 마치고 12일 후 2004년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2005년에 출간되면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는데, 그 인세는 32년을 함께 한 동반자인 그의 아내에게 전해지 못했다는 것. 법적 혼인관계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아버지와 형제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현재 소송중이라고 하는데, 우습게도 그 시작은 '노후보장' 차원에서 10부작을 계획하고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이 정말 유감일 따름이다.
 






  책을 펴면 시작부터 풋내기 작가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대기업을 상대로 폭로기사를 썼다가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하게 된 베테랑 기자 미카엘 블로크비스트와 천재적인 해커지만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생활을 하는 미스테리 여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주인공으로 스웨덴의 대기업 가문에 숨어있는 미스테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스웨덴 사회당의 열혈 당원이자 독립 언론사의 기자였던 이력만큼 대기업의 횡포와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론사의 비리를 사실적으로 고발하면서 스토리를 이끌어나간다. 전체적으로는 전형적인 '밀실 미스터리'의 형식을 띄면서도 범상치 않은 두 주인공의 활약과 매 번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들, 그리고 점점 커지는 스케일은 모래귀신의 늪에 빠지듯 깊이 깊이 빠지도록 만들었다. 현실과 가공을 넘나드는 리얼리티한 전개 또한 매력 중 하나인데, 주인공의 직업이 기자인데 저자도 기자였고, 진보적 성향의 사회고발적 폭로 기사를 주로 다루는 신문사의 이름이 [밀레니엄]이고, 이 책의 제목 또한 [밀레니엄]이다. 그렇기에 필연성과 정교함이 묻어난 생생한 '리얼리티'를 이 책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된다.
 

  
 

 장르를 장편 스릴러 추리소설(1, 2, 3부를 합하면 2,000 페이지를 넘는다고 한다)이라고 해야 할까? 1부는 800 페이지 가량. 하지만 걱정할 것이 없다. 몰입도가 최고치에 달해서 책의 두께와 시간을 잊었으니까. 반지의 제왕과 같이 주인공을 골자로 다른 사건을 펼치기 때문에 현재 출간된 1부로 하나의 사건은 종결된다. 올 9월에 나올 2부와 내년 2월에 나올 3부가 마냥 기대될 뿐이다. 더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라 욕먹을 것 같고, 조금 더 언급을 하자니 가슴만 답답하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또 다른 잠재독자에게 이 책을 소개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따름이다. 여름의 끝에서 절대로 놓치면 안될 최고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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