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럼! 제가 스펙트럼에 깊은 애정을 갖는 이유는 이 세상을 흑백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매우 강력하게 믿기 때문이에요. 스펙트럼은 회색 지대와 애매모호하고 유동적인 부분을 아우르지요. 이런 것들이 모두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스펙트럼이 정체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특별히 유용하다고 여깁니다. - P49

젠더를 정의 내리기란 매우 어려우니, 젠더가 아닌 것을 짚어보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섹스. 자, 섹스란 뭘까요? 우리 문화는 섹스와 관련한 셀 수 없이 많은 오해로 뒤덮여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볼게요. 사회는 주로 섹스를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정의 내려요.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이, 재생산 기능에 기초하여 분류되는 두 개의 주요한 범주(남성과 여성 male and female) 중 하나."(Oxford Dictionary, 2016) - P75

그렇지만 우리 문화에서 사람들은, 오직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에 자신을 끼워 맞추도록 끊임없이 강요받고 있어요. 한 사람의 섹스는 정부 서식과 신분 서류, 의료 기록, 투표지, 설문지, 데이트 사이트, 지원서에 표기되고 심지어 우리는 ‘태어날 때의 섹스‘를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는 화장실을 사용해요. 사회가 섹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모두는 이에 동의하는지 또는 이러한 구분에 본인이 들어맞는지와 상관없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고 있지요. - P85

나는 내 몸을 인식하는 문제에 있어서 특히, 줄곧 내면화된 트랜스포비아와 상대해왔다고 생각한다. 신체 부분과 젠더가 대등하게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여전히 트랜스사람들을 ‘정상‘으로 보는 게 어려울 때가 있다. 이건 아마 내가 특정 신체를 정상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정체성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각자 미디어와 사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것 같다. 가끔은 내 가슴이 느끼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이나 의견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한다. 예컨대, 그간 자라온 환경 탓인지 이따금 트랜스 사람들의 젠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가슴으로는 그렇지않다고 느끼고 또 절대 입 밖에 낼 것도 아니라지만, 이런 생각은참 끈질기게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이와 관련해 내가 기장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우리는 어떤 의견을 낼 때, 두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맨 처음 하는 생각은 우리가 그간 그렇게 생각하도록 길들여진 생각이다. 또 다른 하나가,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생각이다." - P93

젠더정체성은 한 개인이 본인의 젠더(들)를 인지하는 방식이자, 어떻게 자신을 인지하는지에 관해 타인과 소통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언어(들)입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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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 책이 정말이지 (사람들을 수용하고 이들이 공동체를 찾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이름표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용어들이 정체성을 규정하는 자료가 아니라 정체성을 기술해주는 자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P4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여러분이 이 책에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되는 용어를 찾았다면 멋진 일이에요. 또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없답니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특정 정체성으로 호명하거나 호명하지 않는 데에는 정말로 다양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 P45

정체성 표지를 사용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개인의 결정은 완전히 사적이고, 유효하고, 또한 타인들로부터 존중받아야 합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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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아무리 ‘균형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 ‘지속가능 도시개발을 외치도 ‘투기와 난개발‘ 유령을 잡지 못하면 모두 첫일! 나는 20년 전부터 쉬지 않고 ‘투기와 난개발 예방조치 없이 진행되는 개발이란 ‘돈잔치’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제는 외칠 힘도 소진됐다. 더 서글픈 것은, 이젠 더이상 보존할 땅 자체가 별로 없다는 것! 존경하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행정도시로 "재미 좀 봤다"고 했을 정도이니 더이상 할 말도 없다. - P46

이 칼럼에서는 일본의 평화운동가이자 민주주의자인 오다 마코토(小田實) 선생의 "우리가 양심적인 인간이고자 한다면, 필요한 것은 하늘을 나는 새의 눈(鳥瞰)이 아니라 땅을 기는 벌레의 눈(蟲歐)이다" 라는관점이 인용돼 있다.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농촌에서 살게 되면서, 이 문구를 늘 생각하게 된다. - P47

대체로 농촌마을에서 개발 현안이 생기면, 이런 식이다. 법과 행정절차가 낯선 주민들은 공무원들이 일을 잘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공무원들은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인근 도시나 시내(읍내)권에 사는 공무원들에게는 농촌마을을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도 없어 보인다. 공무원사회에 존재하는 무사안일주의와 지역에 존재하는 온갖 인적 네트워크들은 업체 측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장은 업체편에 서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주민들 말을 듣는 편이라고 해도, 지방자치단체장이 공무원들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너무 고령화되어버린 농촌마을에서는 큰 문제가 생겨도 마을 일을 볼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이다. 그나마 한두 명이라도 사회운동 경험이 있고주민대책위라도 꾸릴 수 있으면 다행이다. - P51

폐기물과 관련해서도 "자기 지역 폐기물은 자기 지역에서 처리한다"는 원칙부터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주무부처인 환경부는 오히려 2019년12월 "폐기물의 안정적 처분 기반이 조속히 확보될 수 있도록 법령에 근거없이 인허가를 지연하는 사례가 없도록 협조하라"는 공문을 지방자치단체에 내려보내기까지 했다. 여러 지역에서 폐기물 소각·매립장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업체 편을 들어주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업체들은 이런 환경부의 공문을 근거로 소송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압박하고 있는 현실이다. 심지어 환경부의 머릿속에도 농촌, 농민, 농업은 전혀 없는 것이다. - P53

또한 지금 필요한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에 갇히지 않아야 하고, 민중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것이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대의제가 농촌주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농촌을 식민지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마을 자치가중요하고, 읍·면 자치가 중요하고, 자급과 자치가 중요하다. 그것을 가로막는 기득권세력을 비판하고 감시·견제하며,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에서부터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선이다. 내려다보는 자의시선이 아니라 ‘당하는 자‘의 시선, 폭격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폭격당하는 자의 시선, ‘버리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버린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자‘의 시선, 전기를 소비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발전소와 송전선으로 고통받는 자의 시선…. 그런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 모든 얘기는 필자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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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하 작가님 책도 읽어봐야겠당~

알쏭달쏭한 마음을 추스르며 야외 부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가 5분 만에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뭔가 깜빡해서 돌아온 게 아니었다. 다 둘러보니까 5분이었다. 행사장인 옛청주역사공원의 규모는 작았고, (‘역사‘가 ‘history‘가 아니라 ‘station이라는 걸 그때서야 깨닫고 마음이 더 알쏭달쏭해졌다. 그래, 무대뒤로 보였던 저게 ‘역사‘였어…….) 딱히 볼 것도 할 일도 없었으며, 비 때문에 인적마저 없으니 그마저도 천천히 걸은 결과였다. 전혀…… 축제 같지 않았다. - P169

축제라기보다는 공무원들의 숙제 같았다. 악천후와 저예산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 분투하셨음은 알지만 태생부터가 지자체와 별 관련 없는,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이었으니 잘못출제된 과제 아니었을까. 다른 축제들은 거칠지언정 ‘이 축제를 왜 여는가.’에 대해 뜨거운 진심의 대답이라도 갖고 있는 반면, 젓가락 페스티벌에는 마지못함의 기운이 팽배했다. 문화도시로 선정된 그해에 일회성으로 열었다면 모두에게 행복했을 축제를 어영부영 꾸역꾸역 끌고 와야 했던 청주와 젓가락의 슬픈 인연도 이제는 끝낼 때가 됐지 않나 싶다. - P182

김혼비를 이 축제로 이끈 것은 8할이 이 대회였다. 닭발이나 생선 눈알처럼 형체가 지나치게 노골적인 무언가는 입에 넣기 커녕 바라보기만 해도 입가에 메기수염이 잡히는 박태하에게는 ‘다른 축제도 많은데 왜 하필!’이었지만, (그는 뱅어포도 수많은 생선 눈이 다닥다닥 붙은 작은 ‘눈알들의 벽‘ 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먹기 힘든 맛 혹은 보기 힘든 모양 혹은 맡기힘든 냄새를(혹은 이 모두를) 지닌 음식들을 차례로 격파하고픈 ‘이색 소망’ (실은 ‘괴소망’)을 가진 김혼비에게 이 축제는 벼르고 별렀던, 버킷 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벼킷 리스트‘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 P188

하지만 김혼비는 이 싸움이야말로 결국 ‘기세’라고 생각했다. 한번 기가 눌려 버리면, 원치 않는 상상력이 발동해 이 ‘음식‘의 곤충성을 각성해 버리면, 애벌레도 메뚜기도 굼벵이도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이다. 파이터가 되려면 우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이미지트레이닝을 마친 김혼비는 판매원이 건네는 번데기를 받아 들고는(번데기가 얼마나 크면 이쑤시개도 아니고 나무젓가락에 꽂혀 나올 일인가요.) 한 입 덥석 베어 물었고, "먹을 만해. 별맛 안 나는데 살짝 ‘곤충 맛‘ 같은 게 섞여 있는 느낌이야." 라는 촌평을 남겼다. 베어그릴스가 강림한 듯한 그 기세에 박태하는 다시 한번 오싹했다. - P191

남대천 변 축제장 입구에 서니 올 데 온 것 뿐인데 올 게 왔다는 기분이었다. 인어를 빙자한 연어인지 연어를 빙자한 인어인지 모를 마스코트 조형물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고, 아직 이른 시간이라 어수선한 부스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동안 스피커에서는 안 그래도 여기 오면 내내 듣지 않을까 예상은 했으나 제목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인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인지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인지 한 번에 맞춘 적이 없고 이 대목을 읽고 난 후에는 헷갈린 적 없던 사람도 이제부터 헷갈릴 바로 그 노래가 울려 퍼졌다. - P213

생태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물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콘텐츠들로 바꿔 나가지 않을 거라면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결국은 괴롭히고 죽이는 축제들은 이제 사라지면 좋겠다. 모든 축제에서 물고기 맨손 잡기와 그에 준하는 행사들도 사라지면 좋겠다. 산천어축제 측에서는 "그런 행사들이 없어지면 누가 무슨 재미로 오겠나." 라며 맞서곤 하는데 이말이 본의 아니게 실토한 대로 ‘살상의 재미’가 전부인 축제라면 폐지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 P232

기다린 행사가 이거였냐고? 그건 아니다.(성석제 작가께는 죄송하지만 그분도 우리가 이걸 기다렸다면 부담스러우실 것이다.)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진짜 이유. 자, 이름도 찬란한, 두둥, ‘작가 조정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위한 발대식’?! - P247

문학기행 중에도, 또 우리끼리 읍내를 거닐면서도 [태백산맥]이 이 고장에 미친 영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축제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굳이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려 연결 짓않더라도 풍경의 곳곳에서 『태백산맥』이 움틀대고 있었다. 다리난간뿐 아니라 가겟집들 앞에도 소설 속 대목들이 붙어 있었고("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같은 문장이 읍내 한가운데에 적힌 동네가 대한민국 어디에 또 있을까. 역시!) 상점 간판의 배경에는 태백산맥 줄기들이 공통 로고인양 그려져 있었다. ‘태백산맥 꼬막거리’ 안팎의 수많은 꼬막정식 가게들, 축제장에 맞닿은 시장에서 쉴 새 없이 팔려 나가는 수많은 꼬막들 또한 ‘벌교 꼬막’을 고유명사화한 이 소설에 큰빚을 지고 있을 것이다.(‘벌교 꼬막을 유명하게 만들다 못해 ‘고막‘이었던 표준어를 ‘꼬막‘으로까지 바꾼 주역 또한 『태백산맥』임은 유명한 일화다.) - P257

정말이지 이런 걸 만나는 순간이 너무 좋다. 어딘가에 ‘한국감연구회’라는 단체가 있고,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 과일 선발대회‘가 열리고 거기에 입상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있다. 감 박피기를 개발하는 사람이 있고, 얼레 가방을 고민하는 이들이 있고, 전국을 다니며 연싸움을 하는 이들이 있고, 한때 만든 대금을 끼고 다니며 군밤 옆에 펼쳐 놓는 이가 있다. 축제장 음지의 꽃인 품바도 있고, 그 품바에 위로받는 팬들이 있고, 썰렁한 관객석 앞에서 열창하는 무명 트로트 가수들이 있고, 아이들을 달래 가며 공연하는 마술사가 있고, 만만찮은 지역민들의 입담을 능숙히 받아치는 노련한 사회자들도 있다. 우리가 아는 세계, 아니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 생각보다 수많은 취향과 노력이 질서를 이루어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 또한 누군가들이 아는 세계의 바깥이겠지.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서로가 서로의 바깥일 대금 아저씨와 우리는 대금 버스킹이 펼쳐지는 시간 동안 잠시 마주 서 있다가 연주가 끝나고 한 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새해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라는 평범하지만 다정한 말들로.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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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대축제’.
하지만 중대한 난점이 있었다. 널 보러 오긴 했는데 정확히 너의 무엇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 프로그램은 풍부했다. 문제는 그 프로그램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좀체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올해 축제에 붙인 제목만봐도 "백 년의 함성, 아리랑의 감동으로!" 인데 약간 ‘어쩌라고’의 느낌이 든다. 우리가 방문했던 2019년이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의열단 창단 ‘100주년‘ 이라는 걸 감안하고 봐도 말이다. 홈페이지와 리플릿에 빼곡하게 적힌 설명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텅 빈 것 같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추상적인’ 게 가능하다니….….. - P95

그런 점에서 애초에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왜 밀양 아리랑인가.’ 같은 질문을 놓지 못한 우리가 고지식하고 순진했다. 축제란, 아니 K-쇼란 본디 그런 본질적인 질문 대신 ‘우리가 왜 짱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관련될 수 있는 모든 것을(관련 없을 것 같으면 ‘관련’의 의미를 무한 확장해서라도) 때려 넣어보여 주면 되는 것이었다. 부재한 철학은 중구난방 콘텐츠로, 중구난방 콘텐츠는 음향·조명·스케일을 최대치의 ‘고퀄‘로 뽑아내어 잘 커버하는 것이 K-쇼의 척도라면 ‘밀양강 오딧세이’는 예상을 훌쩍 넘는 양과 질로 흠잡을 구석 없는 쇼다. 축제 기간에 밀양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할 수도 있겠다. K에게서 늘 배우는 교훈은 일관되게 일관성이 없으면 일관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K에게 가장 아쉬운 점이면서 동시에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힘이기도 한, ‘이렇게까지’를 통해 가닿는 K-뚝심. - P104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축제 자체가 품바의 옷처럼 ‘거대한 누더기‘였고, 그 점에서 가히 메타적 - 프랙털적 축제라 할 만했다. 다른 축제들이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더 세련되게 만들려고 애쓰다가, 그런데 좀 과하게 애쓰다가 본의 아니게 키치에 빠지고 만다면, 이 축제는 그런 골치아픈 고민 없이 키치를 마음껏 드러내도 되는 축제, 아니 더 드러내야 하고 더 드러낼수록 목표한 바에 가까워지는 ‘대놓고 키치’ 축제인 것이다.(약간 날로 먹는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이곳에서 키치는 기지다. - P134

단오의 줄어든 위상과 달리 강릉단오제는 무척 메이저한 축제다. 기획된 ‘양산형 K-축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오다가 자연스럽게 현대판 축제로 자리매김한 축제고, 전통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국내 축제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그나저나 ‘유네스코‘는 잊을 만하면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한국의 무엇을 수식한다는 점에서 OECD와 참 비슷하지 않은가.) - P140

‘창포물에 머리 감기’라는 어구에서 풍기는 고즈넉하면서도 운치 있는 느낌과는 다르게 예상치 못한 인력들이 동원된, 약간 ‘창포물 세발(洗髮)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오른 가분이 들었지만, 많은 인원이 밀리지 않게 빨리빨리 체험하고 지나가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같기도 했다. 이런 유의 서비스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주변머리는 없고 감을머리만 있었던 우리는 잔뜩 어색한 얼굴로 엉거주춤 선 채 머리 감겨지는 서로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체험장에서 나오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 댔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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