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 이번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알라딘 범계점을 방문했다. 이건 뭐 도장깨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참고로 괜찮은 책들을 사냥했던 안산과 북수원점은 문을 닫았다. 이젠 추억이 되었다.

 

딱 일주일 전에 데려온 녀석이 바로 캐런 헤스의 <황야를 벗어나서>였다. 원래 이 책을 사러 출동했지만, 실물을 보고 나서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라, 운문체 소설이야?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지만 우리 책쟁이들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지. 고민 끝에 결국 데려왔고, 오늘 아침에 다 읽었을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심경이 복잡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고민이 많았던 꼬맹이 빌리 조 켈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힐링이 되었달까. 1952년에 태어난 작가 캐런 헤스는 마치 대공황과 황사로 뒤덮인 1930년대 미국 팬핸들 지역을 살아보기라도 한 듯한 묘사로 독자의 염통을 사로잡는다.

 

이제부터 어쩔 수 없는 스포가 다수 출현하니, 원하지 않는 분들께서는...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빌리 조의 아버지 베이어드는 농부다. 켈비 가족이 사는 땅인 팬핸들은 황사와 가뭄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로 가난으로 찌든 그런 동네다. 마치 한국에서 벼농사를 포기하지 못하듯 베이어드 역시 밀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작물의 다양화 타령을 해대지만, 현지의 농부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팬핸들 주민을 위협하는 황사는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갑자기 들이닥친 황사에 질식사하는 장면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을 포기하지 못한다. 땅과 얽힌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에게 피아노 연주를 배운 빌리 조는 피아노 연주의 꿈을 꾼다. 노래 잘하는 또래친구 매드 도그에게는 호감을 갖기도 한다. 선생님의 응원에 힘입어 빌리 조의 피아노 실력은 나날이 향상된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임신한 어머니와 남동생이 프랭클린이 죽는다. 밀농사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 마당에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빌리 조는 손에 입은 화상으로 그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마저 할 수가 없게 된다. 어린 소녀에게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고통과 시련은 상상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캐런 헤스가 설정한 이야기틀은 어쩌면 성장소설이라는 방식일 지도 모르겠다.

 

빌리 조의 아버지 베이어드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연못을 파겠다고 나선다. 그가 파는 연못은 사랑하는 아내와 빛도 보지 못하고 져버린 자식을 따라가겠다는 그런 상징처럼도 읽힌다. 매도 도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응원할 수 없는 빌리 조의 모습에 얼마나 공감이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물론 저자의 설정이겠지만, 그렇다면 캐런 헤스는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졸업식에 초청받아 피아노 연주에 나서지만, 빌리 조는 연주를 하지 못하고 졸업식장을 떠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저미게 받아들인 장면이었다. 너무 슬펐다. 꼬맹이 빌리 조가 받아들이기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았을까.

 

결국 빌리 조는 지긋지긋한 팬핸들과 아버지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전에 등장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서부로 간 이들처럼 빌리 조 역시 서부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조금은 진부하지만, 그 기차에서 만난 어느 아저씨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팬핸들에 내린 비가 힐링의 상징이 되는 것처럼, 새엄마 예비후보 루이즈가 등장하면서 우리 꼬맹이 빌리 조에게도 희망이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는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땅인 오클라호마 팬핸들 지역에 사는 이들이 한 세기 전에 겪은 가난과 시련 그리고 희망에 대한 메시지다. 그들에게 황사는 고난과 시련을 그리고 한줄기 비는 희망과 꿈을 상징한다. 아무도 고난과 시련을 원하지 않지만, 우리 삶에서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을 참사로 규정한 프릴랜드 선생님의 간단한 설명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대전 후, 잠시 동안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경제 번영과 호황의 추억은 과잉공급과 생산을 초래했고 그렇게 부풀려진 풍선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져 버렸다. 대형 참사는 어느 순간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라 그전부터 숱한 징조/시그널을 보낸다는 저자의 말이 예언처럼 다가왔다.

 

어떤 작가의 좋은 작품을 만나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캐런 헤스의 다른 작품들이 만나고 싶어졌다.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간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05-30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 처음 드는 작가, 궁금한 작가와 소설은 자꾸 늘어납니다. ㅎ

레삭매냐 2023-05-30 11:20   좋아요 0 | URL
그게 바로 이곳
북플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자극하는 선순환
의 모델이라고 생각하
고 싶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고저 카페에서 책읽기가
그만이다.

오늘 책을 무려 세 권이나 들고 나왔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는 다 읽었다.
이 책은 왜 이리 슬픈지.
지난 주일에 사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뻔.

다음은 찰스 부카우스키의 못 다 읽은 시집.
리뷰를 위해 부지런히 노트하며 읽는 중.
아마 니콜 크라우스의 책은 결국 펴 보지
못하고 가져 가지 않을까.


4 200원.
에디야커피 아이스라떼는 나에게 두 시간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아울러 백퍼 핸드폰 충전도.
마음이 편안했다, 잠시 동안.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에서는
글쓰기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작가에게 글쓰기란 하나의 형벌일 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누칼협이지만 말이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페크pek0501 2023-05-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비가 오는 날에는 카페에서 책 읽기가 최고.. 오늘 그게 생각나더라고요.
비 오는 풍경이 보이는 창 넓은 카페에서 책 보며 풍경 보며 시간 보내고 싶은 날인데 못 했어요.ㅋ

레삭매냐 2023-05-28 21:45   좋아요 0 | URL
어제는 책을 두 권이나 읽어네요 :>
오늘도 한 권 읽었구요.

중쇄를 찍어라 만화도 재밌게 읽고
있답니다.

비오는 날에는 책읽기가 그만이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3-05-29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hanks to가 이디야님께 향하고 있어요^^

레삭매냐 2023-05-29 16:49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은 역시나 센수쟁이~~~

그레이스 2023-05-3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책들고 동네 카페로 갑니다^^

레삭매냐 2023-06-01 08:27   좋아요 1 | URL
비오는 날, 카페에서
책읽기 - 너무 좋았습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년 전, 우리 독서 중독자들의 본능을 자극했던 이창현 유희 팀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속편이 돌아온다는 뉘우스를 램프의 요정 서재를 통해 알게 됐다. 이웃 동네에서 연재한다는 소식에 물넘고 산넘어 가봤지만, 진입장벽이 있었다. 당근 패스했다. 내가 그런 걸 할소냐하는 의기양양함과 더불어. 이래봬도 나도 당당한 독서 중독자의 일원이란 말이지. 그런 거에 넘어가면 무리의 자격이 없으니까.

 

사실 연재 소식에 앞서 지난달에 읽다가 못 다 읽고 도서관에 반납한 기억이 있다. 그래도 기록을 해놓아서 어제 퇴근하고 나서 정처 없이 운동한답시고 동네를 배회하다가 결국 도서관으로 향했고, 서가에서 뽑아서 그 자리에서 후딱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빌린 다음 집에 와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사실 우리 책쟁이들의 일들은 매일 같이 이곳 북플과 서재에서 일어나는 일상이니 뭐 새로울 것도 없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미 산 책을 세 번이나 다시 사는 건 새롭지도 않거니와(램프의 요정에서 어, 이 책은 그전에 사신 기록이 있는데요라는 점원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사는 게 우리 독서 중독자들의 근본 없는 오기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갑으로 손이 가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 중고를 접하고 잠시 고민한 기억이 난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난 이 책을 내가 결단코 완독하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집에는 그런 책들이 한가득이니 말이다.

 

저자들이 예리하게 짚어내는 대로 사자나 슈, 예티 혹은 선생이나 경찰처럼 우리 독서 중독자들은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사회에 출몰하는 부적응자들이 아닐까? 그들이 주장대로 어쩌면 아니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책 읽지 않는 정상인들 사이에서 남들처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고,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퍼마시고 또 뭐가 있더라. 당근 거래도 하고 화초재배도 하는 척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 부적응자 다른 말로는 독서 중독자들이라고 불리는 걸 마다하지 않는 책쟁이들이 아닐까.

 

갑자기 싸한 냉소주의가 몰려 온다. 아니 언제부터 사람들은 책을 멀리 하게 되었고, 이런 책쟁이 혹은 독서 중독자들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해 버렸단 말인가. 보통의 평범한 닝겡들은 책을 읽지 않는 건 물론이고 책을 사는 데 단돈 1원도 쓰지 않지만, 우리 책쟁이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책 사는데 때려 박지 않는가. 아닌가? 지난 십년 간, 램프의 요정을 통해 사들인 책값이 무려... 고만 해야 될 것 같다. 도대체 독서 모임에 출몰하는 예티와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리고 보니 이창현 유희 이 작자들은 독서 중독자의 진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지 싶다. 대다나다.

 

어제 이 책을 다시만나면서 혜성처럼 명멸하는 책들을 도서관에서 직접 찾아 대면하는 그런 영광의 순간들을 갖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아 이런 책도 있구나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아니 그게 서점이었다면 당장에 전리품처럼 사들고 집으로 귀환했을 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요일 밤에 중고서점에서 2만원이상 사면 2천원 깎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버스 타고 전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램프의 요정 범계점을 방문했다. 우선 이 자리를 빌려 안양이 아닌 산본에 먼저 램프의 요정이 들어선 것에 감사한다. 그곳에 많은 책도 팔아먹고 또 그 이상의 책들을 사들이면서 충분히 보답했다. 그리고 오픈 즈음해서 아침저녁으로 언제나 문을 여나 하고 고대하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날 세 권의 책을 사들였는데, 주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고 한적해서 좋았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 항타고드 오손보독의 <에리옌> 그리고 니콜 크라우스의 <위대한 집>을 샀다.

 

캐런 헤스의 책은 오늘 은행에 가서 업무를 보는 동안, 버벅대는 직원에게 시위하는 차원에서 가방에 꺼내 몇 장을 읽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이십분 대기 플러스 삼십분이라니. 업무상 은행에 자주 가는 나는 전과가 있는데, 그전에 하도 일처리를 못해서 비슷한 짓거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직원분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한 기억이 나서 그렇게 했다. 시그널을 보냈는데 상대방이 못 알아 차렸을 수도.

 


그렇게 책사냥에 성공한 나는 집으로 복귀하기 위해 인근 롯데백화점을 지나 전철을 타러 가고 있었다. 저녁 술자리 약속이 있는지 전철역 부근에서 쭈구리고 앉아 있던 어떤 분이 내 뒤에 오는 지인을 보고 반색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그 순간을 카메라로 담고 있을 정도였다. 하긴 오늘 회사에서 집에 오는 길엔 소문난 고깃집 입장을 위해 웨이팅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냅다 거리에서 키갈하는 커플들 볼거리가 많았다.

 


이것저것 쓰다 보니 이게 리뷰인지 아니면 일기인지 헷갈린다. 오락가락 저자들의 이야기처럼 이런 게 다 우리네 삶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내일은 월급날이다. 내일 월급 받으면 앞으로 줄창 입을 반팔셔츠 두 벌하고, 노스페이스에서 반값 세일하는 조리나 한 켤레 사야겠다. 신난다. 책은 이제 고만 사고. 다 필요 없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처럼 조용한 골방과 책이 내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우리는 독서 중독자니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3-05-25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책이 도대체 뭔지 이렇게 독서중독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플이 폭파되면 모두 다 흩어질런지요!
이런 책은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만 공감할 것 같습니다^^

같이 책을 읽던 지인이 어느 날 재테크에 눈을 떠 과감하게 책세계를 떠난 적이 있는데 여전한 저를 아직까지도 한심하게 보고 있더라고요.

그냥 타고 났다고 생각하고
이 생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다 갈 것 같은, 다행인지 불행인지의 힘든 삶을 계속 살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05-25 08:10   좋아요 1 | URL
예전에 소설리스트라는 사이트
가 있었는데, 폭파되었을 때
참 아쉽더라구요.

독서 중독자들에게 램프의
요정 서재/북플만한 놀이터
가 또 있을 지요.

독서 중독자에서 재테크의
달인으로의 변신이라...
경천동지할 만한 트랜스포
메이션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

사고 읽고 쓰고의 무한반복이
우리 독서 중독자들의 숙명이
지 싶습니다.

빨강앙마 2023-05-25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저도 책을 고만 사야합니다..ㅠㅠㅠㅠㅠ 그래서 구판절판, 절판, 품절책인 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오프은행직원들 일이 왜이리 더딘지..ㅠㅠㅠ 저도 차라리 그냥 제가 할테니 공인인증서 등록이나 제대로 해주세요..무슨 서류를 그리 못떼시냐며..ㅠ.ㅠ;;;;;; 그런적이 있지요.. 저도 책을 읽는 시위를 해야했나... 그러고있습니다..,.ㅡ.,ㅡ

레삭매냐 2023-05-25 15:4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책은 고만 쟁여야
하는데, 만날 대는 핑계지만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슈슈슉~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업무를 처리하
셨었는데 요즘에는 영 -
신종 업무가 더 많이 생겨서
일까요?

그레이스 2023-05-3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런 제목에 끌리네요 ^^

레삭매냐 2023-06-01 08:2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제목이 열일한
것 같습니다 :>
 
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마크 C. 엘리엇 지음, 양휘웅 옮김 / 천지인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다 읽은 지 열흘이 넘어가는 마크 C 엘리엇이 저술한 <건륭제>를 회상하며 리뷰를 써본다. 원래 포부는 장대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기억의 한계로 생각나는 대로 써볼 생각이다.

 

1711년 출생한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의 4남 홍력은, 부황이 1735년 사망하면서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대로 강건성세(강희-옹정-건륭)의 무대를 활짝 열었다. 사실상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의 나라 청은 18세기 세계 최강국이었다. 아마 지금의 중국이었다면, 아시아 대륙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영역에 도전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였던 강희제 시설 이미 중국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는 느슨했던 강희제 통치 시절을 지나 문자옥을 시행하며 독재자로 군림했던 옹정 시절을 지나 이십대 청년 천자를 맞이했다. 어려서부터 황제 교육을 받은 건륭제는 자신감에 넘치는 청년 황제였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압도적인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청나라는 철저하게 무력에 의존했다. 만주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던 시절 청군의 주력이었던 팔기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나라의 대륙 지배가 공고해 지면서 과거를 통해 발탁된 관료들도 망국 명나라에 대한 기억조차 잃어 버리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었다.

 

저자는 건륭 치세의 특징으로 군기처와 주접제도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무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다 보니, 특권화된 군인들의 연합체가 중요했다. 옹정제 시절에 만들어진 군기처는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만주 출신 황족들 중심이었으나 한족들이 등용되면서 건륭제 치세 동안 핵심 기관으로 발전해 나갔다. 다음의 주접제도는 전국의 관료들을 감시하고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제도였다. 정력 넘치는 청년 천자는 붉은 글씨로 전국에서 조정으로 올라오는 문서에 비답을 달았다. 결국 정보가 권력 그 자체라는 점을 청년 천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훗날 십전노인이라 불릴 정도로, 건륭제는 전쟁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즉위 초반 남부에서 터진 묘족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한나라 이래 중원의 골칫거리였던 중가르와 동투르키스탄을 마침내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현대 중국의 국경은 건륭제가 사실상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청년 천자는 채찍과 당근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변경의 식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아버지 옹정제가 남긴 막대한 재정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대원정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마 돈이 없었다면 중가르 원정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건륭제의 원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단순하게 전투단을 조직하는 것 뿐, 아니라 대규모 원정군을 위한 보급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전쟁이란 보급으로 한다는 사실을 청년 천자는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점 한족화되어 가는 만주 귀족들의 야성을 키우기 위해 건륭제는 실전에 버금갈 정도의 사냥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말로 제국을 세울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통치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이미 한족을 능가하는 학식과 골동품에 대해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건륭제는 청나라의 천하를 위해 지나치게 한족화되어가는 황실 귀족들이 조부 시절처럼 말을 달리고 사냥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상격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그런 식으로 망한 경우를 천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에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모후를 위해 자주 남순 혹은 순행에 나서 장강 주변 유역을 유람했다. 물론 천자의 순행은 비용이 많은 드는 사업이었지만, 특별한 내우외환이 없는 가운데 충분히 황실의 재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서양 출신 저자는 건륭제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제위 기간 후반에 인구가 폭증하면서 후대에 미치게 될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로 저술한다. 하늘의 아들 그러니까 천자는 모든 인민의 아버지로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쩌면 황제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의 무게에는 인민의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만큼의 막중한 책임감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18세기 중국 인구 폭발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전 세대보다 더 많아진 인구를 먹이기 위해 그만큼 많은 토지가 필요해졌다.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지만, 세금 징수를 피하기 위해 개간된 토지들이 나라의 장부에서 대규모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미래 국가 재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이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사업과 무역의 기회를 찾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륭제가 아무리 성군이라도 하더라도, 치세 말기에 가서는 화신 같은 탐관을 잘못 기용하는 실책이 이어지면서 성쇠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달이 차면 기울기 시작한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 게 아닐까 싶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강희제>, <반역의 책> 등으로 강희 옹정 연간을 읽었다면 또다른 서양 학자인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절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책이 절판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꼰대 정치의 위기, 90년대생의 정치질 - 노무현재단 청년 황희두 에세이
황희두 지음 / 포르체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나라가 다 떠들썩하다. 한쪽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거라며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편인데, 내가 즐겨 보는 너튜브의 김태형 소장님은 전자들이 1년 정도 후쿠시마 생수를 마시고 또 거기서 산 음식물들을 섭취한 뒤에 괜찮다면 방류하는 것도 어떠한가라는 솔루션을 제시했다.

 

황희두 청년이 쓴 책 이야기에 앞서 극단적으로 갈리는 정치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시절에 우리가 얼마나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받아들이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국인에 도움이 되는지 말이다.

 

사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이러저러한 팟캐와 너튜브를 통해 황희두 청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청년 정치인 기대주로 성장하고 있는 그의 삶을 조명해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오십대 이상의 중년남성들이 장악한 정치 영역에 이런 청년들의 진출을 적극 환영하는 바이다. 왜 우리는 서구의 정치 선진국에서처럼 십대 시절부터 정당 활동을 펼치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해서 이십대, 삼십대 청년들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나올 수 없는 그런 토양이 되었단 말인가.

 

한 때 386이라 불리며 한국 정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시간이 많이 지나 기득권층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보여준 민주화 학생운동 그리고 그 후에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효용은 다한 게 아닌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제 총선이 일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새로운 바람이 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작금의 상향식 공천으로는 새로운 개혁을 주도할 신진 세력의 등장을 기대하기란 난망해 보인다.

 

오늘 따라 유난히 서설이 길었다. 여튼 프로게이머로 출발한 황희두 청년의 일대기는 파란만장했다. 우선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학교를 그만 두기 전에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학교를 중퇴한 뒤, 본격적인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가 누린 성공의 시간들을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그런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누구나 비슷한 궤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입시라는 획일적 교육이 미래 청소년들의 꿈과 희망을 죽인다는 마당에 말이다.

 

그의 책에서 내가 퍼올린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능한 관종이라는 표현이다. 언제부터인가 청소년들의 꿈이 인기 너튜버가 되어 돈과 권력 그리고 명성을 거머쥐는 거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만큼 너튜브 콘텐츠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닐까. 그전에는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권력자의 꿈을 그 다음에는 건물주가 되겠다고 하다가 이제는 또 콘텐츠 개발자가 되겠다고 한다. 황희두 청년의 말대로 유능한 관종이 되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치 선진화에 앞선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그런 나라가 되는 기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이야기지만 말이다. 어쨌든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먼저 체험 황희두 청년의 조언이니 새겨 두면 좋을 듯 싶다.

 

황희두 청년은 이제 모두가 공감할 만한 국민 예능의 부재를 들며 파편화된 개인들의 단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각자도생의 시기에 공존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하게만 들린다. 전지구적 위기였던 역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보정권에서도 우리의 삶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공동체적 삶을 우선하기보다, 개인의 영달과 사익 추구야말로 중요한 삶의 가치라고 떠들어대는 유사 언론의 선전선동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 지에 대한 가늠하기조차 어려워진 시절 탓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황희두 청년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고지전, 진지전 그리고 심리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어쩌면 일상에서 정치질은 이런 전투의 연속일 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일상에서 회피기동을 하거나 아니면 설득하는 작업도 마다해서는 안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생각들을 가진 이들과 일상에서 마주하는 때가 많은데, 나는 그것을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나도 청년이었다면 아마 그들의 생각을 단박에 바꾸기 위해 전쟁을 치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전쟁을 치른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황희두 청년의 글을 다 읽은 소회는 부디 그가 국회에 진출해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청년을 발굴하기란 난망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내공을 쌓고, 활발한 정치력을 발휘해온 황희두 청년이 현실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꿈이야말로 일상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초석이 될 거라고 감히 예언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