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기침을 동반한 감기에 걸려서 아주 제대로 고생했다. 내일부터 다시 일상에 복귀로구나.

이걸 반가워해야 할지 어째야할지.

 



오늘 저녁에는 어제 낮에 실컷 먹다가 싸온 아구해물찜을 재료로 삼아 볶음밥을 해먹었다. 언젠가 준비해둔 후리가케까지 뿌리니 성찬이 따로 없더라. 이럴 때, 예전에 혼자 살던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순전히 생존을 위해서 먹던 시절의 추억들. 그 시절 이야기를 풀자면 또 한 보따리일텐데.

 

아참, 아구찜에는 왜 이렇게 콩나물이 많이 들어가는지. 맛이 있긴 한데, 이가 점점 더 시원찮아져서 그런지 질겨진 느낌이랄까. 설거지하다가 든 생각인데, 가위로 콩나물들을 좀 자를 걸... 항상 다 먹고 난 다음에 드는 생각들이지.

 

오늘 점심에는 인스타맛집(?)이라고 소문난 수원의 어느 식당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가게 앞에 늘어선 차량의 행렬을 보고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었지만... 그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게 안을 날아 다니는 파리 때문에 밥맛이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무조건 11식을 주문하란다. 아니 그냥 밥메뉴도 만이천원, 고등어 추가도 만이천원인데 왜... 그때 식당 문을 박차고 나왔어야 했나.

 

가격이 싼 것도 아니고, 반찬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하는 수 없이 동행한 꼬맹이 때문에 생선정식 2인분(이것도 무조건 2인 이상이라고 해서)에 콩비지를 주문했지. 콩비지가 너무 싱거워서 먹다가 나중에 양념간장을 좀 얻어다 먹으니 그나마 낫더라. 동행들의 일그러진 인상 때문에 내가 다 밥을 못 먹겠더라. ,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근처에 백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몇 번 가던 북극해 고등어가 차로 3분 거리였는데 말이지. 돈 쓰고 기분 잡치고를 이런 거라고 해야 하나 어쩌나.



밥을 먹었으니 그냥 가기가 아쉬워서 근처 탑동의 시민농장을 찾기로 했다. 다행히 멀지 않아 금방 갈 수가 있었다. 예전에 갔던 당수동의 시민농장이 얼마 전에 가보니 대단위 아파트숲으로 바뀌어서 아쉬웠는데...

 

너른 공간에 펼쳐진 잔디에 사람들이 텐트도 치고 공놀이도 하고 있더라.

다음 주초에는 영하의 날씨로 떨어진다고 하던데, 오늘 낮에도 차 온도는 30도던데.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간 모양이다. 아직 음력 8월 아닌가.



작지만 벼농사도 지어서 누렇게 익은 벼구경도 할 수가 있었다.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네.

시민농장에는 다양한 형태의 작물들을 심은 모양이다.

누구에게 들으니 한 번 시작하면, 주말 내내 농장에서 노가다라고.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들이 곳곳에서 꽃을 피우려고 준비 중이다.

그것도 찍질 못했네 그래. 집에서 키우는 녀석들은 대가 비실비실한데 야외에서 자란 녀석들은 줄기가 아주 단단해 보인다. 종자가 다른 건지 아니면, 환경 때문에 그런 건지.

 

억새밭에서도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더라.

사진 스팟인가 보다.



이렇게 도시농업 전문가 수료텃밭이라는 타이틀의 밭도 보인다.

우리 꼬맹이는 잠자리채를 들고 사방에 날아다니는 잠자리 사냥에 나섰다.

곤충잡기에 나름 전문가인 내가 요령을 알려 주었지만 내 말은 개코도 듣지 않는다.

 

앞에서 채를 날리지 말고, 장대에 가만 앉아 있는 녀석들은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후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데도 지 맘대로 하다가 결국 잠자리채 망을 북 찢어 먹었다.

엉터리로 해서라도 잡으니 나는 그게 신기하다. 이놈아 잠자리가 널 잡겠다.

하도 날뛰어서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흐르는 꼬맹이.

 

결국 잠자리채는 부서 먹고 말았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내가 가만 둘러보니, 텃밭에는 대개 다음의 작물들이 심겨 있었다.

배추--고구마-가지-고추-당근-호박 이 정도가 아닐까. 배추는 특히 요즘처럼 비싼 시절에는 아주 요긴하지 않을까 싶더라.

 

휴일인데도 출동하셔서 열심히 작물을 가꾸시는 분들이 보였다.

참 주차장에서는 장구를 치는 분도 있어서 한참 리듬을 타보기도 했다.

 


요즘이 사마귀들이 활동하는 계절인지 사방에 사마귀가 출몰하고 있다.

이 녀석은 지난 명절 전날 방문한 시흥 늘솜당에서 만난 거대한 사마귀다.

태어나서 이 정도 크기의 사마귀는 처음 봤다. 다큐멘터리에서 사마귀가 개구리를 사냥해 잡아 먹는 걸 보고 기겁했는데 나중에 보니 뱀이며 새까지도 잡아 먹는다고. 정말 무시무시하지 않나.

 


작물에 물주는 게 농사의 핵심이라고 어디선가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인지 곳곳에 이렇게 물뿌리개가 걸려 있더라.

그리고 보니 우리 동네 천변 텃밭에 농사짓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물대기가 용이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농사짓지 말라고 해도, 해마다 반복해서 단속과 농사가 거듭된다.



쓰레기 투기를 하지 말라는 경고문인데, 보기 좋게 그 앞에 이렇게 쓰레기들을 투척해 주시는 센스란.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나름 재활용을 하는데, 리사이클 센터에 가보면 가관이 아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우리의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걸까.

 

언젠가 유시민 작가가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우리 인류가 에너지를 소모하고 환경에 쓰레기를 만들어내면 우리 지구별이 세 개는 필요하다고. 동네 공원에 가봐도 쓰레기 천지다. 쓰레기통을 만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사항은 어디서 나온 건지. 차라리 쓰레기통을 잘 구비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긴 바로 앞에 쓰레기통이 있어도 그냥 길에 쓰레기를 내버리는 장면을 보고 기겁한 적도 있지.



요즘 나름 식집사 행세를 하고 있어서 아침에 커피를 사러 갔다가 복귀하는 길에 만난 꽃집에서 황칠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고 녀석 귀여운데 그래.

 

참 지난 몇 달 동안 밖에 내둔 치자나무를 들여놔야 하나. 다음 주에 영하로 날씨가 떨어지면 바로 얼어 죽는 건 아니고 말이지.



마지막은 늘솜당에서 보기만 하고 미처 사오지

못한 디저트와 육쪽마늘빵인지 무언가에 대한

미련으로 엔딩.



아디오스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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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0-03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마귀 너무 충격적이네요. 믿기지가 않아서 바로 영상을 찾아봤는데
럴쑤....ㅋㅋㅋㅋ 무시무시한 육식 곤충이었군요!

저는 아구찜도 좋아하지만 거기 들어간 콩나물 킬러예요ㅋ
거기 볶음밥을 해드시다니 야밤에 군침이 돕니다^^



레삭매냐 2023-10-04 12:53   좋아요 1 | URL
아 아구찜 좋아하시는군요 ^^

저희가 갔던 집에는 아구가
제법 들었더라구요. 어디는 정말
아구 살이 한 두개고 나머지는 죄
다 콩나물 무침이거든요 :>

사마구, 무시무시합니다.

coolcat329 2023-10-04 0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식당에서 파리가 보이면 밥맛이 뚝 떨어집니다. 파리가 날아다니는데 주인은 신경도 안쓰고 셀프 반찬바는 다 오픈되어 있으니 말이죠.

근데 저 사마귀 진짜 킹사이즈네요. 저도 동영상 찾아봐야겠어요 ㅋ
대단한 곤충이네요.

레삭매냐 2023-10-04 12:55   좋아요 1 | URL
크하~ 맞습니다.

파리가 너무 많았어요. 저희 꼬맹이는
아주 대놓고 자기는 바퀴벌레보다 파리
가 더 싫다고 떠들더라구요...

셀프 반찬바도 별루던데 에휴 참-
다시 갈 일이 없을 테니...

그 전에 바로 잡은 녀석도 있는데
사이즈가 다르더라구요.

페넬로페 2023-10-04 0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을의 느낌들이 비슷한가 봅니다.
저도 최근에 사마귀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어요.
윗쪽 지방엔 아구찜의 아귀를 생으로 조리하는데 저의 친정쪽에는 아귀를 말려서 아구찜을 만들거든요.
이번에도 가서 먹고 왔어요.
두 가지 맛 다 나름의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커피를 부르는 디저트의 비주얼입니다.

레삭매냐 2023-10-04 13:01   좋아요 2 | URL
오오 아구를 말려서 찜으로
드시기도 하는군요.

저는 아구는 만날 생으로 먹
는 줄 알았답니다. 간만에 먹
으니 맛나더라구요 ^^

디저트 맛나 보이지요.
항상 실컷 먹고 가는 바람에
디저트를 즐기지 못하게 되
더라구요.

얄라알라 2023-10-18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월엔가 연두색 사마귀 사진 하나 겟했는데 레삭매냐님 올려주신 사마귀는 색으로 보나 몸집으로 보나 어른 사마귀가 틀림 없네요^^;; 무서워요 ㅎ

레삭매냐 2023-10-18 09:55   좋아요 0 | URL
아주 무지막지하게 생겼지요.

사마귀가 그 동네에선 최상위 포식자
라 거의 모든 녀석들이 벌벌 떤다고
하더라구요. 먹을 거리가 많아서인지
아주 살이 통통하게 올랐더라구요.
 
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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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인데 아프다. 4일 중에 3일을 앓고 있다.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구나. 책쟁이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인천에 갔다가, 무언가 재미난 책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을 두 권 만났다.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의 책이다. 그리고 내가 한동안 괴짜 의사 이라부가 등장하는 <공중그네> 시리즈를 열심히 읽지 않았던가. 명절에 제격인 책을 만났다. 그리고 700쪽 짜리 책을 단박에 읽어 버렸다.

 

시간적 배경은 2005년 봄의 어느 때쯤 그리고 공간은 도쿄도 나카노 어디라고. 내가 일본 지명에 대해 좀 더 안다면 지리적 인과관계를 알겠지만, 그런 건 모르고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는다.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11살 짜리 초등학교 6학년 우에하라 지로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과거 혁공동 출신의 전설적 투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지닌 아버지 이치로, 동네에서 자그마한 찻집 <아르가타>를 운영하는 어머니 사쿠라, 9살 터울의 누나 교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4학년 모모코가 우에하라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아버지는 말은 프리라이터라고 하지만, 거의 백수에 가까운 존재다. 딱히 하는 일은 없다. 대신 반국가주의 아나키스트답게 국민연금과 세금 따위는 낼 수 없다면 공무원들과 그야말로 전쟁을 치른다. 아마 한국의 사회복지 담당자들이 이런 사상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어떨지 사실 좀 궁금하긴 했다. 이치로 아저씨는 그냥 돈이 아까워서 못내겠다는 게 아니라, 국가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내 자유의지로 살겠다는데 왜 자신의 삶에 간섭하겠냐는 아니키스트인 동시에 어느 지도자를 떠올리게 하는 절대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지로는 여느 십대 초반의 아이들처럼 준과 무카이 그리고 구로키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 이치로 아저씨는 학교에도 꼭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어린 지로의 삶을 대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빌런으로 중학생 가쓰가 등장한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악직 학폭 주동자이자 아이들을 돈을 뜯는 최악의 악당이다. 어른들은 이런 악당의 존재를 어른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제재는 일시적인 것일 뿐 그들의 보복은 예상보다 집요하고 악랄하다.

 

아들 지로의 이런 고민을 주워들은 아버지 이치로는 혁공동 전사답게 당당하게 빌런에게 맞서 싸우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리고 쇠파이프를 이용하라는 혁공동 투사다운 팁을 알려준다. 세상에나, 이게 아버지가 할 말인가. 어쨌든 가쓰 문제는 어느새 아버지의 식객으로 우에하라 가문에 침투한 나카무라 아라키 씨가 말끔하게 해결해 준다. 문제아 구로키와 동반으로 가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큰 일탈은 아니고 작은 해프닝 정도로 끝난다. 어쨌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세상의 간단한 이치리를 아버지 이치로는 아들 지로에게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남쪽으로 튀어>는 성장소설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친근하던 아라키 아저씨의 테러가 공론화되면서, 우에하라 집안은 결국 조용하게 살던 나카노에서 쫓겨날 처지에 처한다. , 지로는 가쓰와의 대결에서 세상 조용해 보이는 엄마 사쿠라가 오래 전 누군가를 칼로 찌르고 형무소 생활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전해 듣기도 한다. 아버지 이치로는 후텐마 투쟁에서 팬텀기를 불사른 사건의 주모자였다는 말도 들었던가. 분가해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나는 누나 교코는 지로가 12살이 되는 날, 집안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말도 한다. 아니 이 집구석 잘 돌아가는구나.

 

지로는 엄마 사쿠라가 알고 보니, 잘나가는 전통의상집의 부유한 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엄마도 아빠처럼 젊은 시절 잔다르크 뺨치는 활동가였다는 점도. 아니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이야기를 도대체 어디로 인도하려고 이렇게 방대한 설정을 짰단 말인가. 어찌어찌해서 근 20년간 의절하고 살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삼촌 가족을 만나게 되는 지로와 모모코. 하지만, 몇 번의 방문을 통해 자신의 사촌들이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라키 사건을 거치고 전광석화처럼 오키나와 이리오모테 아이주가 결정되면서, 외할머니 집과의 인연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집안과의 인연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키나와에 정착한 우에하라 집안이 개발 저지 투쟁을 위한 총력전에 투입되면서 휘발해 버렸다.

 

오키나와에 가서는 상라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에하라 가족들은 큰 위기 없이 정착할 것처럼 보였다. 대도시 도쿄에서는 천지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던 아버지 이치로 역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외딴 섬의 오지에서는 자급자족을 모토로 삼아, 가족을 위한 치열한 보급투쟁에 나선다. 2005년에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지로와 모모코의 의향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완벽하게 현지에 적응한다.

 

지로의 증조부 간진 어른이 오키나와 현지에 남긴 전설의 광휘는 대단했다. 선대의 조상들이 남긴 후광을 후손들이 받는다고 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아카하치 집안의 전설에 대해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아버지 이치로는 지로에게 인간은 모두가 전설을 원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과연 우에하라 이치로는 모든 불의에 대항해서 맞서 싸운 반골 조상들의 후예다웠다. 도쿄에서 긴급하게 최소한의 짐만으로 오키나와로 튀었지만, 현지 사람들은 간진 어른의 손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마치 자기 집안일을 하듯, 음식을 마련해서 대접하고 각종 생필품을 물론이고 먹거리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제공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집을 수리해서, 자기네 집 드나들 듯 방문해서 소주를 마시고 사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인스타에서 보니 우리네도 언젠가 그런 적이 있다고 하던데, 과연 이리오모테 섬이야말로 우에하라들이 꿈꾸던 그런 낙원이자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가족들이 느낀 행복한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리조트 개발 문제가 등장하면서, 애써 터를 일군 우에하라들의 거처가 도쿄의 개발사의 사주를 받은 현지 하청업자들의 불도저에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 우에하라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 사회에 과연 변혁이 가능한가라는 거창한 담론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철지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전설적 투사 우에하라 이치로 가족의 좌충우돌 소동극에 녹여냈다. 국가란 무엇인가? 왜 국가라는 이름의 권력이 무슨 권리로 나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한단 말인가? 우에하라 이치로는 전통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그리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계속해서 변신을 거듭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삶을 산다. 어떤 점에서 이치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냥 자신을 자유롭게 살게 놔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개인이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식주까지 책임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미래의 사회보장제도라는 미명 아래, 세금과 세금에 준하는 국민연금을 뜯어가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이치로 아저씨의 투쟁이 일견 수긍이 갔다. 국가가 개인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오키나와 리조트 개발저지 투쟁 과정에서 등장하는 매스 미디어의 과다경쟁에 대해서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일침을 놓는다. 과거 전설적 투사가 등장해서,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자극적 기사를 원하는 언론들의 특종 경쟁이 시작됐다. 그들은 균형 잡힌 보도나 양측의 주장을 공정하게 다루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무대와 판에 전설적 영웅이 등장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았을까. 전설과 유대인 뜨내기 여행자가 불도저 군단을 함정에 빠트리고, 체포되었다가 도주한 용의자들이 다이너마이트로 현지개발사의 자재창고를 폭파하는 서사를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남쪽은 어쩌면 우리 도시인들이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기억이 쇠락한 자리에 채색된 전설이 채워지면서 갈 수 없게 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짚어낸다. 나도 파이파티로마에 가보고 싶어졌다.


[뱀다리] 아마 이 책은 십년도 전에 사둔 책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포인트 하나, 언제고 산 책은 반드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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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10-0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지금은 괜찮으신지. 김윤석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재밌게 본 기억이 있어요.

레삭매냐 2023-10-01 21:0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조금 쉬어서 많이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김윤석 배우가 나오는 한국영화가 있네요.
전 당연히 일본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페넬로페 2023-10-01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빨리 쾌차히세요^^

레삭매냐 2023-10-01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아직 명절이 이틀 남았으니
그 안에 낫겠지요. 캄솨 ~~~

자성지 2023-10-0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픈 중에도 책을 놓지 않는 레삭매냐 님 쾌차를 바랍니다.

레삭매냐 2023-10-01 21:04   좋아요 0 | URL
배우자들이 상대방의 취미생활로
가장 좋아하는 게 독서와 영화감상이
라고 하더군요 ^^

아파도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책 읽는
게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자성지님.

cyrus 2023-10-01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파도 손에 책을 놓지 않으려는 정신. 아주 좋아요. 연휴 아직 남았으니 끝나기 전에 푹 쉬시면서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

레삭매냐 2023-10-01 21:05   좋아요 0 | URL
평소에 게을러졌던 독서 욕망이
아프면서 부스트업~ 된 게 아닌가.

빨랑 나서서 주말 달궁 모임에 출격
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 삼국간섭과 갑오개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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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도서관 열람 차례가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먼저 볼 수 있는 책부터 읽다 보니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나머지 그리고 갑오개혁 편이 뒤로 밀리게 되었다. 이런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한중일 삼국의 근대사를 다루는 방대한 작업에 도전한 작가와 그리고 그 작가를 꾸준하게 후원하는 출판사의 역량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쨕쨕쨕.

 

전편에서 1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청일전쟁의 발발 과정을 살펴봤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전쟁의 페이즈 2를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몰려갔다. 일본군과 경군이 부재한 사이, 호남 일대는 동학군이 휩쓸어 버렸다. 집강소를 중심으로 해서 폐정개혁안이 실시됐다. 특히 남원의 접주 김개남은 래디컬리스트답게 개혁안 중에서 최고봉인 신분제 철폐에 주력했던 모양이다. 조선 오백년 반상질서를 무너뜨리는 그의 기백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서울의 흥선대원군은 친일 갑오파정권에 대항해서 동학군에게 밀지를 보내 내응하는 전략을 세운다. 과연 노회한 정치인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번번히 대항하는 아들 대신, 손자인 이준용을 군주로 삼아 다시 한 번 화려하게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는 권력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보니 민씨 척족만큼이나 흥선대원군 역시 조선 국가 몰락에 책임이 있는 인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녹두장군 전봉준은 그동안 미적대전 북접의 승인을 받아 다시 한 번 두 번째 동학농민운동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삼례에 집결해서 위력을 과시한 동학군은 자신들을 토벌하러 나선 경군과 일본군과 대항하기 위해 공주 진격에 나선다. 스스로 십만 군세라고 했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어쨌든 경군보다는 인적으로 우세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일본은 주력 부대가 모두 만주로 진공한 상태에서, 본국에 있던 예비대대를 동원해서 조선 경군 지원에 나선다.

 

그리고 189412월 공주 우금치에서 맞붙은 동학군과 토벌군의 전투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경군/일본군에게 동학군 주력부대가 갈려 나가면서 전국을 호령하던 녹두장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그리고 관군에게 추격당하던 동학당의 전봉준 위하 접주들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김개남은 잡힌 뒤 바로 사형당했고, 나머지 동학당의 리더들은 형식적 재판과정을 거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근왕척왜 슬로건을 걸고 사회개혁에 나선 동학혁명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엔딩은 초라했다. 여러 요건의 미비로 처음부터 봉건질서 타파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 않았나 싶다.

 

조정에서 이후 거의 평정된 동학운동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약속했지만, 동학운동이 보여준 기존 사회 질서 유린에 기겁한 민보군을 필두로 한 기득권층은 동학이라면 아주 치를 떨면서 잔혹한 사적 제재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화형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청일전쟁의 남은 이야기다. 이미 조선에서 청군에게 대승한 일본군은 천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세로 압록강을 넘어 만주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조속한 전쟁의 종결을 바라지만,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전선을 넓혀 이후의 종전/평화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게 일본 전쟁지도부의 목적이었다.

 

다된 밥에 숟가락을 얹기 위해 등장한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삽질로 동계작전에서 전사자의 열배에 달하는 병사자가 등장한 건 10년 뒤에 벌어질 러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일본군은 요동의 요충지 하이청과 요동반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저우-다롄 그리고 뤼순항을 잇달아 함락시킨다. 이런 기세라면 텐진과 베이징까지도 도달할 기세였다. 하지만 훗날 일본군의 잔악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뤼순 대학살로 상승군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가버렸다.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해군이 이홍장이 애써 기른 북양함대를 박살낸 건 천운이기도 했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던 청나라는 결국 러시아를 동원해서(비밀협약을 맺은 뒤) 종전협상을 개시한다. 일본은 전쟁의 목적이었던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 지위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보호국으로 삼아 버리고, 2억냥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 그리고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이라는 두둑한 보상을 얻는다. 그나마 종전협상을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전권대신 이홍장의 암살 시도가 없었다면 그 이상을 얻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굽시니스트 작가가 이 지점에서 지적해 주는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선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부국강병을 국가의 모토로 삼아 시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교육에 나섰다. 현대식 학제 개편과 교육 제도 도입으로 농민들을 미래의 병사들로 양성하는데 성공했고, 청일전쟁으로 그 덕을 톡톡히 볼 수가 있었다. 일본 국왕에 충성하고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이른바 황군은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조선과 중국 더 나아가 남방전선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막대한 전쟁 특수는 애초 전쟁에 부정적이었던 자유당과 번벌 메이지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민들까지 정부 편을 들게 만들었다. 아니 전쟁이 이렇게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단 말인가? 원래 전쟁 목표였던 조선에서의 우월한 지위의 확보는 물론이고 새로운 광활한 영토와 일본 국가 재정의 몇 년 치에 해당하는 전쟁배상금으로 열도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탕이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뜯어낸 전쟁배상금을 종자돈 삼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됐다.

 

다음 단계는 저자가 트리플 겐세이라고 명명한 삼국간섭이다. 노회한 정객 이홍장은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기에 앞서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맺었다. 아마 요동 반도 할양을 대비한 것이었을까. 서구 열강이 노리고 있던 중국에서의 이권을 매개로 삼아, 극동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던 러시아를 추동해서 독일과 프랑스까지 파트너 삼아 일본으로 여금 요동 반도를 토해 내게 만든 것이다.

 

서구 열강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일본의 부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이 중국이라는 파이를 많이 먹을수록 자신들이 먹을 게 줄어드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훗날 태평양전쟁의 서전이 되는 중일전쟁에서도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열강은 일관되게 중국 편을 들었다. 내가 먹지 못할 바에야, 다른 놈들도 안된다는 생각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18947, 경복궁 폴런(fallen)으로 시작된 갑오경장 역시 한계가 뚜렷한 개혁 시도였다. 친일파 내각이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나마 어윤중이 탁지부에서 세금 징수를 일원화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보호국의 된 마당에, 자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 와중에도 갑오파, 갑신파 그리고 정동파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하는 모습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군주 고종이 조선조 내내 비장의 무기였던 환국 키워드를 사용해서, 박박 정권의 박영효를 실각시키자 일본에서는 드디어 미우라 고로 특명전권공사를 기용해서 이른바 여우사냥에 나선다.

 

역시 이번에도 격동의 구한말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진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좌절, 요동반도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야욕이 꺾인 트리플 겐세이의 실상(러시아의 외교적 승전보), 청일전쟁을 통한 군국주의 국가 일본의 탄생의 과정 정도가 본격 한중일 세계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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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골드 - 이슬람 제국의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의 잊혀진 이야기 가일스 밀턴 시리즈 5
가일스 밀턴 지음, 이충섭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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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문자로 이루어진 책은 거의 유일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었다. 21세기에는 인터넷과 그에 기반한 너튜브가 그동안 책이 수행해온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아니 대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대체가 되었던가. 동영상 컨텐츠로 만나게 되는 신속한 정보는 몇 시간 아니 며칠 걸려 읽는 책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올드패션 스타일의 우리 책쟁이들은 책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걸 더딤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느린 속도로 수집하는 지식과 정보들을 나는 더 좋아한다.

 

대중역사가 가일스 밀턴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무라이물이 읽고 싶어졌고, 중고서점에 가서 사무라이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사무라이 윌리엄>이 떴다. 그 책은 17세기 초, 일본에 상륙하게 된 영국 출신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윌리엄 애덤스)의 일대기였다. 가일스 밀턴이 저술한 책들이 궁금해져서 하나하나 컬렉션을 시작했다. <사무라이 윌리엄>을 읽고 나서 <향료전쟁> 그리고 <화이트 골드>를 읽기 시작했는데 후자를 먼저 읽었다.

 

<화이트 골드>에서 저자 가일스 밀턴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이트 골드, 백인노예들의 처절한 삶의 추적에 나선다. 아니 백인노예가 있었다고? 노예하면 아프리카에서 북아메리카로 끌려간 흑인노예들 이야기가 아니었나? 수세기 동안 지중해 연안에서 맹활약한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영국과 네덜란드, 에스파냐 유럽 각지의 선박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배에 실린 화물들 외에도 그들이 진짜 노리던 상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백인노예들이었다.

 

저자 가일스 밀턴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했다. 당시 편지들은 물론이고, <화이트 골드>의 지분을 양분한 영국 웨스트컨트리 콘월 펜린 출신의 백인노예 토머스 펠로우의 일대기의 상당 부분을 참조했다. 이렇게 멋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를 위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171511살 짜리 꼬마 토머스 펠로우는 집에서 얌전히 라틴어 공부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원양 항해에 나섰다.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선장인 삼촌 존 펠로우의 배에 올랐타가 살레 해적에게 포로가 되어 자그마치 23년이나 되는 노예생활을 하게 됐다.

 

살레 해적들은 당시 모로코의 술탄이었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주를 받아 백인노예들을 납치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영국 본토에까지 가서 노예사냥을 벌였다. 살레의 노예시장에서 두당 35파운드에 팔린 백인노예들은 이른바 노예우리에 갇혀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 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유인이었던 꼬모 토머스 펠로우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토머스 펠로우의 23년 간의 노예생활이 <화이트 골드>의 한 축을 차지한다면, 그를 포로로 잡은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의 엽기적 행태도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하다. 오스만 투르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렇듯 물라이 이스마일 역시 왕위계승 과정에서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형제 친지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그가 부리던 검은 친위대는 술탄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이 잡아온 여자 백인노예들은 자신의 하렘에 넣었고, 쓸만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남자노예들은 모두 제국의 수도 메크네스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곽 건설에 동원됐다. 술탄의 비인도적 처사는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술탄의 잔혹함이야말로 어쩌면 제국의 통치하는 원동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자식의 자식이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건장한 흑인 노예를 동원해서 어쩌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지도 모를 아들의 목을 부러뜨리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국가들에게 바르바리 해적들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영국에서는 노예로 잡힌 자국의 포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수차례 특사들을 메크네스에 파견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고, 해상에서의 협상협상을 진행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물라이 이스마일은 수차례 협상의 갱신과 파기를 번복했다.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군주가 아닌가. 게다가 무슬림 통치자들은 대다수가 기독교도들인 백인노예들의 개종을 재미삼아 시도했다. 백인노예들이 반항할수록 그들이 실시하는 족발치기같은 가혹한 고문은 지속됐다. 우리의 어린 포로 토머스 펠로우 역시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배교자가 되었다.

 

포로석방 협상에서 이런 배교자들은 제외가 되었다. 강제의 의한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들은 고려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형식주의야말로 현대 외교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부조리가 아닐까 싶다. 토머스 펠로우는 이십대 무렵에 강제로 결혼해서, 그곳에서 딸도 낳고 어려서부터 배운 아랍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젤라바를 걸친 배교자 백인노예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술탄의 신임을 얻어 백인노예 출신 용병이 되어 술탄에게 반항하는 제국의 이곳저곳을 진압하기 위해 각지를 누비기도 했다. 그러다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고향 펜린을 잊지 못해 탈출 시도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악랄한 독재자 물라이 이스마일의 죽음과 그에 이어진 후계자간의 내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결국 토머스 펠로우는 영원히 살 것 같았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후, 아내와 딸이 죽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 상태에서 결국 모로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영국령인 지브롤터를 걸쳐 런던 그리고 마침내 23년 만에 고향땅인 펜린을 밟는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토머스 펠로우가 포로가 된 지 근 100년 만인 18168월 펠로우의 사돈의 팔촌 조카 뻘 정도되는 에드워드 펠류가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북아프리카 백인노예 무역의 거점도시인 알제를 공격해서 수백 년에 걸친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한다. 영국인들에 이어 들어온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아 새로운 형태의 노예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에드워드 펠류의 활약으로 트리폴리와 알제 그리고 살레 일대의 백인노예 무역을 일소할 수가 있었다. 토머스 펠로우의 후예들은 그 뒤로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바다로 자유롭게 나갈 수가 있었다.

 

최근 소말리 해변을 중심으로 활약 중인 21세기 해적단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과 행정의 공백기를 파고드는 무법자 해적들의 실체를 엿보게 됐다. 18세기 초반, 비슷한 궤적의 그리던 살레의 해적들은 아예 권력집단과 결탁해서 해상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고 선박에 탑승하고 있던 백인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었다. 이 책의 제목인 화이트 골드가 암시하듯이 해적드에게 포로로 인간들이야말로 수지가 맞는 상품이었다.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그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할 수가 있었고, 그들이 보유한 무기 제작기술 혹은 건축술로 자기가 건설한 술탄 제국의 질서와 안녕을 모도했다. 또 서방 제국들이 비싼 몸값을 내고 자국 출신의 노예들을 되산다고 하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서사의 다른 축에서 토머스 펠로우라는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를 배치해서 사실감을 더하는 작법으로 가일스 밀턴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과연 글 좀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건 토머스가 펠로우가 고향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펜린으로 돌아온 토머스는 고향에서 돌아온 영웅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고 부모님마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펜린이 낯설었고, 오히려 그가 노예 생활을 했던 메크네스가 더 그에게 편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고향으로 돌아온 지 7년 뒤인 1745년에 토머스 펠로우는 죽었다. 눈물과 고통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그렇게 끝났다.

 

윌리엄 애덤스/미우란 안진의 경우처럼 익숙한 고향을 떠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디아스포라 같은 삶을 산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동질감을 느꼈다. 아울러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과연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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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 을미사변과 황해 위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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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근대사에 대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됐다. 아니 국권침탈의 시대를 외면하고 싶은 어떤 마음의 발로에서 아예 이 시절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보면 볼수록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8월말부터 읽기 시작했다가 지지부진하던 17번째 이야기들은 어제 하루 작정하고 다시 읽기 시작해서 날을 넘기지 않고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오늘 도서관에 가는 길에 반납하려고 리뷰까지 부지런히 써야겠다.

 

1894723일 경복궁 폴런으로 이미 조선은 망국으로 접어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다음 해인 을미년에도 다시 한 번 조선 왕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이 털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심각했다. 일단의 일본 낭인들로 구성된 자객들과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합세해서 일명 왕비 처단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계속되는 정변 속에서도 고종 정권의 핵심으로 부활하는 왕비 민씨를 물리적으로 처단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돌리기 시작했다. 친일파 유길준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며느리이자 정적인 왕비를 처단해 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했다고 하나, 믿을만한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왕비 민씨는 이미 백성들의 온갖 미움을 받고 있는 터여서, 십여년 전 임오군란 당시에도 민중에게 잡혔더라면 바로 죽었을 것이다. 조선 국가를 망국으로 몰아넣은 핵심 인물 중에 하나이자 오직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던 그에게 동정이 일지 않는다.

 

어쨌든 일국의 왕비를 처단한 행위는 만국의 지탄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일본이 주도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항거하는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을미사변 후에 구성된 김홍집 주도의 친일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역시 의병활동에 불을 끼얹는 효과를 가져왔다. 신체발부수지부모 타령하며 단발령에 극렬 저항하던 유생들의 속마음은 양반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에 더 컸다는 굽시니스트 선생의 지적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와이프가 국가의 정전인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군주 고종은 PTSD에 시달리게 됐다. 그리고 국가의 안위나 군주로서 체면보다 오직 자신의 신변만 걱정하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튀게 된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이런 전후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앵무새처럼 아관파천을 외우던 시절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는 기분이랄까.

 

이를 계기로 해서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되고, 조선 병탄의 야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비치던 조선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조선을 홀로 다 먹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러시아와 나눠 먹겠다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이 조선 37도 분할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2차 세계대전 후 미소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의 미래가 엿보이기도 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해서 다시 정권이 뒤집어지고, 불사조 같아 보이던 총리대신 김홍집과 어윤중이 순검들에게 맞아 죽고 갑오파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은 김윤식은 유배형을 받는다. 그리고 정동파 선수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비로소 을사오적의 수괴 이완용이 등장한다.

 

한편, 청일전쟁으로 2억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일본에 할양된 포모사(대만)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대만 할양에 동의했지만, 현지에 있던 외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남방 양무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장지동은 갖은 꼼수로 대만 할양을 막아 보려고 시도했고, 대만순무 당경승과 대만군무 유영복은 이른바 대만 민주국을 수립하면서 일본에 저항했다.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최초로 해외 식민지 획득에 성공한 일본이 이런 사태를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결국 사단급 병력을 동원해서 타이베이와 타이중 그리고 타이난을 차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대만 전토를 장악한 일본은 총독을 파견해서 패전까지 50년 동안 대만을 지배하게 됐다. 대만을 일본의 현으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본 헌법의 테두리 밖에서 예외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식민지 사람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훗날 조선에서도 써먹게 된다. 이런 방식이 주는 다른 효과로는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특권의식을 갖게 했다나. 위정자들은 상층부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다음의 소소한 이야기들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의 대관신에 관련된 에피소드들, 이홍장의 세계유람 그리고 거대한 청제국을 무너뜨리게 되는 젊은 혁명가 손문(쑨원)의 굴기가 이어진다. 하와이에서 성공한 형님의 도움으로 미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손문은 광저우에서 기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도주한다. 뜻을 같이 하다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동료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청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손문은 역적인 셈이다. 나중에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납치되어 있다가 영국 정부의 압력으로 석방되면서 네임드 인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 차르 대관식 잡상편에서 보리스 아쿠닌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오늘 도서관에 가면 빌려서 볼 생각이다.

 

일본의 압력과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시원하게 러시아의 뒤통수를 때리고 환궁한다. , 방대한 경복궁 대신 주위에 외국공사관이 많고 단출한 경운궁이 고종의 픽이었다. 그리고 고종은 처음에 일본이 제의한 칭제건원을 시행하고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지. 아마 세계열강들의 비웃음만 사지 않았나 싶다. 그럴 시간에 개혁과 내실을 다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러시아가 만주에서 러청밀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보이자, 역시나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이번에는 러시아에게 만한 나눠먹기를 제안한다. 고종을 자기 공사관에 품은 러시아는 조선 경영에 자신감을 품고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영도)에 저탄소를 만들기 위한 조차 요구에 나선다. 중국에서 거점을 만들고 싶었던 독일제국이 칭다오와 교주 조차에 들어가자 부동항을 노리던 러시아가 뤼순을 점거하고 25년짜리 조차를 따내기에 이른다. 세계 최강대국 영국은 독일의 교주 먹기는 양해했지만,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 러시아는 철저하게 견제했다. 갑신 역적으로 몰려 미주로 건너갔다가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해서 조선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서재필의 독립협회 주도로 절영도 조차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시도는 무산되고 뤼순 확보에 만족해야했다. 다음 세기에 벌어질 러일전쟁에서 뤼순이 육전에서 가장 결정적 전투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고s> 에피소드에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사들의 부고장을 돌린다. 일본이 맺은 불평등조약 갱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를 필두로 해서, 영국 수상 글래드스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청나라의 공친왕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편을 통해 19세기말 극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열강의 치열한 각축전의 실태를 알게 됐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엯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차르 니콜라이의 대관식 즈음에 벌어진 호딘카 압사 사건이 제국의 종말을 가져올 줄 누가 알았을까. 보잘 것 없는 흥중회라는 단체를 설립한 애송이 혁명가가 거대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아마 그런 점에서 훗날 역사를 복기하는 재미가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역사 가운데 미처 몰랐던 그런 소소한 점들을 애써 전파하는 이 시리즈를 내가 좋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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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9-22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리즈를 읽으시는 분, 훌륭합니다!!!
저도 긴 역사 시리즈를 읽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어요. 계 획 만...
한국 근현대사나 로마인 이야기 같은...
완독하고 나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9-23 22:44   좋아요 1 | URL
저는 오래 전에 <로마인 이야기>를
열심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작가가 극우 성향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바로 끊어
버렸네요. 책을 읽으면서도 영웅주의
사관이 좀 그랬거든요.

그리고 보니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
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네요. 흠...

말씀해 주신 대로 다 읽었을 적에는 왠
지 성취감이 생기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