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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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한창 뜨겁게 스크린과 포탈뉴스를 달구었었다.  그들의 초점은 거의 한결같이 늙은이의 미성년 십대소녀에 대한 욕망, 신인배우의 올누드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영화를 보았을때, 내가 본 것은 역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에로티시즘이었다.  영화의 매 순간, 다른 장면은 크게 기억나지 않고, 박해일의 연기도, 김고은의 투혼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남는 것은 십대소녀로 분한 김고은과 젊어진 이적요 시인, 박해일의 비뚤어진 듯한, 그리고 욕구와 욕망이 활활 불타는 이젹요 시인의 상상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정사장면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리고 한 동안, 살짝 욕지기가 나오곤 했었다.  "미친 영감탱이.  늙어서 남은건 여고생 패티시인가?  그리고 그걸 교묘하게 catch해서, 어린 신인 여배우를 벗겨 그럴듯하게 포장한 한국 영화계는 역시, 그렇구나" 이런 말이 나올만큼 말이다.  대단한 영화평론가도, 팬도 아닌, 그저 그런 한 사람이면서...

 

그리고, 2012년 11월 경의 한국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호기심 반, 확인차 박법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사들고 돌아왔더랬다. 

 

그러나, 나는 이후 오랫동안 이 책을 읽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영화의 장면들과 오버랩되는 늙은이의 엇나간 욕망에 대한 장면이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13년 1월 나는 '은교'를 읽었다. 

 

책을 집어들고 한번도 내려놓지 못하고 숨가쁘게 그러나 매우 편안하게 한숨에 내려 읽어갔다. 

 

영화가 추구했던, 아니 추구한 것으로 보였던 에로티시즘이 아닌, 이 책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저 순수한 하나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렇게 보였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겠지만, 누구나 손가락질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겠지만, 아니 비정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은교'는 분명히 - 그렇다. 나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 사랑이야기,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느낀다. 

 

이적요-은교-서지우, 은교의 눈으로는 은교-이적요-서지우라고 볼 수도 있는 이 구도, 그리고 성애, 이젹요와 서지우 - 길을 잘못 듯 문청의 시절부터 함께한 그들 - 의 이야기, Q변호사...이 모든 것들은 그저 사랑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장치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애는 손녀 같았고, 어린 여자 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라는 이적요 시인의 말과 '하고 싶으시면요, 키스......하셔도 돼요......할......아부지가......나를요, 이렇게......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라는 은교의 말에서, 나는 사랑을 보았다. 

 

나이, 아니 그밖의 많은 이유로, 현실화될 수 없는 사랑을 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간 후에 느끼는 은교의, 이적요 시인에 대한 아쉬움 - 으로 표현되는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사랑 - 을 보면서,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것임을 느낀다.  변태스럽다고, 패티시라고 해도, 이 얘기는 기실 노인과 십대 소녀라는 구도를 빼고 - 예컨데, 노인을 청년으로 바꾼다고 하자 - 보면, 연애소설인것이다. 

 

PS 소설에서 거슬리는 한 가지.  5.16.  그래 박정희.  본국명 다카키 마사오의 군사 쿠데타를 굳이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는 박범신 작가...아니면 그의 습관일지도 모르는 그 말이 너무 괴롭게 다가왔다.  쿠데타는 쿠데타인 것이다.  혁명과는 분명히 다른, 쿠.데.타.  2012년에 민주화의 venue를 빌어 다시금 일어난 쿠.데.타. 

 

PS2 뜬금없이 십여년전, 5월경. 로스쿨 1학년 연말시험을 준비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그 당시 절친이던 한 녀석의 결혼소식. 그리고, 하루 venti 석잔과 콜라 2-3병으로 엉망이던 몸상태.  공부하면서 당시 활성화되던 youtube을 통해 보고 듣던 장나라의 4월이야기.  그 노래에 왜 그렇게 설레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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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미미앤 2013-01-2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사랑인 거시다' 비뚤어진 철자법에서 비뚤어진 사랑에 대한 이야기란 걸 말씀하고자 하신 것인지.. 무엇이 십년전 이야기를 떠오르게하는 책이 되게 했을까.. 궁금하네요.

transient-guest 2013-01-25 02:55   좋아요 0 | URL
별 의미없이 쓴 말입니다. 십년전 이야기는 그야말로 random하게 떠오른 것이구요. 역시 본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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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바 있지만, 김영하 작가는 그의 팟캐스트를 통해서 알게 된 한국의 현대 작가들 중 하나이다.  한국문학읽기의 한 갈래로써, 그를 비롯한 현대의 우리 작가들의 책을 하나씩 읽어가고 있다.  내가 읽는 그의 세 번째인 이 책은 참으로 특이한 설정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 같다.  무력한 중년의 가장이지만 정체는 특수훈련을 받아 북이 남에 심어놓은 세포인 주인공, 기영.  권태기와 오랜 외로움을 아들뻘에 가까운 애인과의 정사 - 를 넘어서는 - 로 풀어내는 시들어가는, 그러나 한때는 운동권이었던 마리.  코미디언의 아들로 태어나, 지극히 공무원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철수는 그러나 국정원의 요원이다.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직업상의 하루와는 다르게 - 적어도 내 눈에는 - 그는 초식남, 그러니까 vegetarian이다.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닐게다.  8-90년대의 운동권에, 지금도 노동권이나 기타 야권으로 총칭되는 사회운동/사상운동계에 북의 세포들이 잠입해있다는 설은 꾸준히 제기된다.  워낙에 공작정치에 시달린 우리들인지라, 정부의 이런 발표들을 잘 믿지 못하고 - 실제로 최근 들어 공안사건의 경우 검찰의 승소율이 매우 낮다 - 기득권당이 대세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작전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빈도수는 몰라도, 실제로 이런 의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류의 사건들이 터지는 타이밍은 어찌나 기가 막힌지).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다 지나가버린, 이제는 남한에서의 삶에 익숙한 그를 다시 흔드는 과거, 그 과거를 이용하여 다른 세포들을 잡으려는 국정원의 음모, 마리의 불륜 - 을 넘어선 법대생들과의 난교 -, 이런 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거의 끝에서 기영은 결국 국정원에 협조하고 남한에 남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정원은 아마도 그를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모종의 작전을 감행하여 그의 사망 내지는 사고를 위장하는 것 같다.  잠수정이 나타나고 공작조가 상륙하는 시점에서 공격의 섬광이, 빛이 기영의 눈을 가린다.  흡사, birth와도 같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서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에 이런 빛을 보는 것이라면 말이다.  아니면, 단순히 터널 끝에는 빛이 보인다는 것을 강조하여 기영이, 자랑스러운 국정원의 도움으로 G-20에 빛나는 대한민국으로 온전히 귀화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either way, 빛은 찬란한 시작같으나, 기영은 일상은 실로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그의 과거를 아는 마리, 불륜은 끝냈으나, 앞으로는 더 멀어질 것만 같은, 기영의 wife와, 아이와의, 그리고 여전히 고단한 중년남자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엇인가 잘 끝나려는 듯, 국정원의 철수는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수거해가는데, 이 chapter의 제목이 "변태"이다.  그런데 나는 이 "변태"가 비디오를 녹화한 러브호텔 주인영감인지, 이를 수거해가는 철수를 말한 것인지 조금 생각하게 된다.

 

철저한 무관심, 일상, 권태, 이런 이야기를 빌어, 시대정신의 부재를 느끼는 요즘의 세태를 표현하려고 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이 소설에서조차 사상은 이제 우리에게 큰 화두가 아니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것, 기왕이면 잘 사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화두인 것임을 보게 된다. 

 

김영하 작가는 단순한 소설로 보아도 재미있고,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행간을 추측해도 상당히 흥미있게 접근하게 된다.  특히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살짝 금기시되는 테마 - 난교, 자위 등 - 를 쿨~하게 다루는 것 또한 흥미롭다. 

 

끝으로 대마초의 황홀경을 교회에서의 황홀경 으로 비교하는 부분은 은근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왜냐면, 적어도 그 지점장의 인간됨에 대한 묘사를 보건데, 작가가 의도하는 표현은 지점장이 느끼는 황홀경이 군중심리와 집단최면에 의한 것임을, 즉 그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종교체험과 그릇된 것의 차이라는 것이 종이한장차이 정도이고, 받아들이는 이의 분별에 따라 혼동되기도 하는것을 알기에, 적절하게 지점장의 인간성을 우회해서 묘사한 것이라고 보인다.  즉 특정종교나 종교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닌, 소설상의 기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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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1-1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90년대 소설들은 80년대와는 다르죠.간첩을 대하는 시각도 그렇습니다.분단문제를 다루는 소설가로 김원일 씨가 있는데 그가 간첩을 다룬 중편 '환멸을 찾아서'는 좀더 진지하고 애잔하게 간첩문제를 접근합니다.소설적 재미도 좋은 작품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1-19 00:22   좋아요 0 | URL
보관했다가 구해봐야겠습니다. 공산주의국가의 본격적인 붕괴를 체험하게되는 90년대부터는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체감되는 것, 그리고 한국의 경우 김영삼씨의 삼당합당을 통한 일부계열의 '민주화'세력의 기득권화로 인한 전반적인 냉소주의, 체념, 허무주의같은게 적지않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 IMF도 그런 작용을 했을 것 같구요. 그런데, focus를 향한 다양한 이야기 떄문에 그런지, 현대소설은 상당히 산만하게 느껴질 때가 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3-01-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문제는 냉전 직후 신세대를 표방한 사람들도 이제는 사십이 넘어서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정치성형과 무관하게...청소년이나 이십대가 듣기에는 잔소리 같은 그런 것 있잖아요.

transient-guest 2013-01-20 01: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게 세대간의 차이 아닐까요? 정말이지 이야기는 조심해서 해야하는 것 같아요. 난 젊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꼰대냄새가 나는거죠.ㅎㅎ

아이리시스 2013-01-2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 좋아해요. 간첩, 국정원, 음모론 같은 키워드에 관심도 있는 편이고요. 이보다는 <검은꽃>을 더 많이 좋아하지만. 이 소설까지는 김영하도 좋아하는 국내작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제가 변한 건지, 작가가 변한 건지, 이후 읽지를 않았으니 제가 변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transient-guest 2013-01-24 02:26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할수록 무엇인가 배어나오는게 있어요. 간혹 나타나는 표현도 좋고. 김영하 작가의 책을 출판된 시기에 맞춰 읽은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요, 초기작부터 시기별로 구별해서 보아도 좋겠네요. 어느날, 다시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변했다는 생각일랑 마셔요.ㅎ
 
문학의 탄생 -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 문학의 광장 1
시오노 나나미 외 25명 지음, 이목 옮김, 강대진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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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느낌으로는 창해 ABC나 시공사에서 나오던 작은 책을 크게 만들어 출판한 것 같다.  내용면에서 꽤나 충실하고 시오노 나나미 외 25인의 일본 작가들이 한 주제당 글을 쓴 것 같다.  즉 이런 책인데도 일본의 출판물을 그대로 번역하여 들여왔다는 것인데, 조금은 놀랍다.  요즘처럼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보면 survey류에 가까운 이런 책을 들여온 출판사의 자존심 혹은 자본에서 뚝심보다는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종의 브랜드를 본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나의 책 검색에 올라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 책이 도달할 때까지, (1) 시오노 나나미 외 25인의 저작인줄, (2) 이런 survey계통의 책이라는 것, 그리고 (3) 가로 22 X 세로 27의 비교적 큰 책이라는 것을 몰랐다.  즉 사지 않았거나, 애시당초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책인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책 답게,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까지의 문학의 발전상을 다양한 글쟁이들의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는데, background지식을 갖는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고, 고대 작가들의 희곡을 찾아볼 때에는 좋은 reference가 될 것도 같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혹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들을 일부 가지고 있는데, 이들을 읽기 전에 해당하는 부분만 찾아서 일독하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시오노 나나미의 걸출한 입담을 기대했던 탓인지, 그녀가 쓴 유일한 부분인 율리우스 카에사르에 대한 단 역시 그저그렇게 느껴진다.  브랜드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때에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좀 나쁘게 얘기하면 그렇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커버된 내용의 지식정도는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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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아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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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거의 다 썼다가 Back Space키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싸그리 날려버렸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는지, 마침 임시저장도 되어있지 않았기에, 말 그대로 싹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일단, 쓰던 글을 다시 복제해내거나 되살리지 못한다.  그냥, 알라딘 사이트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렇게 날려버린 글에 살짝 화가나서 이짓 저짓을 하면서 글을 살려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임시저장 옵션만 매 일분간격으로 바꾸고 점심운동을 하러 나갔다 들어와서도, 한참 지난 후에야 다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요즘에, 아니 이전부터, 아마도 블로그가 활성화되고부터는 더욱 많이 나도는 그런 시중의 여행기가 아니다.  멋들어진 사진과 개인적인 사연을 보면 책이 아니라 온라인에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한 그런 책들, 혹은 특정 지역이나 그 지역 관광청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그럴듯한 제목의 책도 아니다.  제목부터가 심플하다 못해, 매우 일반적이기까지 한 '모레아 기행'이다.  '모레아'는 위키에 의하면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 고대의 전쟁지역으로도 유명한 - 를 일컫는 말인데, 중세와 20세기 초엽에 이 지역을 부르던 말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또한 한때 비잔틴제국의 일부이기도 했었다고 하니, 고대 그리스의 유적부터 동로마제국의 유적들까지 볼거리가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이런 좋은 곳을 카잔차키스라는 대가와 함께 걸어다니면서, 그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아니 그와 함께 걸었다고 해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속으로 실시간 체널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아직은 가능하지 않으니까.

 

사진이라고는 책 중반부에 실린 초라한 흑백사진들 몇 개가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간 들여다본 많은 여행기들과 블로그들 중 단연 최고의 서술과 깊이를 자랑하는 이 책은, 역시 대가는 괜히 대가라고 불리우는 것이 아니구나를 느끼게 해준다.  일례로 '그리스인은 말라리아와 과대망상증이라는 두 가지 열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인이 떠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말라리아는 좀 생소한 정보이지만, '과대망상증'이라 표현되는 그리스인들의 천박한 허영(?)은 낯설지 않다 (현대의 이탈리아인들도 좀 그렇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리스인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맘에 드는 문장이나 묘사가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일일이 밑줄을 치면서 읽는 것보다 한 호흡으로 읽어내고 싶어서 자제했다.  그 덕에 쓸만한 문장들을 많이 놓쳐서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다음번에 그리스가 떠오를때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함께 읽으면, 그 때에는 꼭 밑줄을 그어가면 읽을 것 같다. 

 

작년에 케이스가 수임될 때마다 조금씩 사들였던 책들 중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이 다수 들어있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 러시아, 영국, 스페인, 그리고 지중해를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별로 맘에 안들었다.  내가 동양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의 위치에 맘이 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잔차키스를 알게 된 것은 조희봉씨의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나온 이윤기 작가의 번역경력에서 소개를 받은 것이 시작이고, 작품으로는 지금까지 '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기행까지 포함하면 '천상의 두 나라'까지를 읽었다.  그 덕분에, 자주 인용되는 '조르바' 이야기, 특히 나꼼수에서 인용될 때,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당시 회사의 대표와 회계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간성을 가진) 내심 우습게 보는 속물적 우월감에 기반한 소시민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기까지 했다. 

 

역시 책이란 끊임없이 읽고 배우며 옮겨다니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서친님들의 책 소개와 이를 통해 알게 된 작가나 책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는데, 이 행복한 여정을 죽는 날까지 계속 하려면, 열심히 일해서 자금줄을 잇고, 열심히 읽어서 눈과 마음을 채우고, 이렇게 써내려가서 자꾸 남겨야 하는 것이다.  부족한 살림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 책읽기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신 부모님께 새삼 감사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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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3-01-11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고 저도 카잔차키스를 전작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는데
우와! 정말 책이 '너무' 많군요. 이렇게까지 다작한 작가인 줄은 몰랐습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하지만 사실 전 이윤기님의 에세이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윤기님의 번역이라면 믿을만할 것 같아서.^^

보니까 여행기도 많은 편이던데, 읽게 되면 꼭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요.

transient-guest 2013-01-11 02:07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이 사이즈나 디자인, 내용 모두 마음에 들어서 계속 조금씩 구입하고 있습니다. 매우 다작의 작가라서, 시간이 좀 걸리네요. 조르바는 역시 이윤기 선생님을 통해 알려지는 경우가 때때로 있군요. 저도 사실상 이윤기->조희봉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꼭 읽으시고 같이 나눠요.ㅎ

아이리시스 2013-01-17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레아' 특이하네요. '그리스 기행'도 따로 있는 것 같던데. 저는<영혼의 자서전> 구입해서 묵히고 또 묵히고 또 묵히고 앞부분은 열 번도 넘게 읽은 것 같아요. 몰입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겹쳐지다 결국 밀리고 밀리는 건데 절대로 밀릴 만한 문장들이 아니거든요. 제가 나빠요ㅠ.ㅠ

전작하고픈 작가에 저도 카뮈에 카잔차키스를 더하는데(단지 읽는 것에 그치는 의미보다 좀 더 큰 의미로) 종교, 여행 너무 폭넓고 많아서 하루는 날잡아서 책소개만 읽은 적도 있어요. 트란님 전작을 응원할게요!

transient-guest 2013-01-18 00:52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은 가끔씩 그의 문체가 dry하다고 느낄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어떤 때, 무엇인가 click이 되면, 깊이 빠져들게 되더라구요. 문장도 특이하지만, 문장마다 그의 경험, 철학, 성찰 이런게 녹아들어가서 뭐랄까 감칠맛이 나요. 카잔차키스는 여러번 읽어야 비로소 좀 보일 것 같아요. long-term project이지요. 응원에 감사해요.
 
향료전쟁 가일스 밀턴 시리즈 1
가일스 밀턴 지음, 손원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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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구열강의 식민지시대의 전 단계였던 일종의 대항해시대에 육두구, 정향 같은 향신료의 독점무역을 위한 항로찾기탐험과 주요세력들의 다툼을 그렸다.  원산지에서 1페니에 불과한 육두구는 유럽으로 돌아오면 값이 수십/수백배로 뛰어, 육두구 한 주머니면 집 한채를 짓고도 남았다고 하니, 능력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을만 하다.  지금으로 치면, 위험한 아프리카 내전지역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는 것 이상 위험한 일이었을게다.  정확한 해도도 없고, 지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 적어도 현대의 기준으로는 - 거의 전무한 상황, 게다가 15-17세기만해도 괴혈병의 발병에 대한 문제 - 비타민 섭취 - 또한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영양실조와 거친 생활에서 오는 다른 전염병이나 풍토병으로부터의 보호가 전무했던 시대에, 미지에의 세계로 향항 장거리 여행이란 목숨을 거는 것이었을게다.  차라리 지구에서 달로 향하는 NASA의 우주선이 이 보다는 덜 위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돈'에 대한, 일확천금에 대한 유혹이 평범하지만 용감한 뱃사람들을 사로잡았고, 이들을 지원하여 상관을 개설하고, 꾸준한 무역기지를 원하던 상인조합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주요열강은 원주민과, 그리고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 거의 300년 이상 - 향료무역을 독점하고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 전쟁에는 원주민들과, 특이하게도 일본인들이 용병처럼 부려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칼 한자루에 목숨을 건 뜨내기 무사들과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활동하던 해적 - 왜구 - 들이 주요 공급원이 되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쓰면, 무엇인가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 혹은 내가 느낀 무엇인가가 나올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런 것은 없다.  책의 내용 자체가 그런 방향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지나치리만치 사건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기에 나 역시 별로 느낀 점은 없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보면 언제나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왜 조선의 지도층은 그 작은 땅덩어리안에서 공맹의 도를 논하고, 때로는 이에 목숨을 주고 받으면서, 오로지 '소중화'의 위치를 지키는 것에 만족했던 것일까?  정말이지, 왜란과 호란을 전후로 하여, 역성혁명을 거쳐 - 일반적인 왕가 및 지도층 교체방법 - 새로운 나라가 열렸더라면 무엇인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꺼운 책이지만, 글자의 크기도 그렇고 내용 구성자체가 매우 쉬운 읽기를 선사한다.  자투리 시간에 틈틈히 읽어도 하루 이틀이면 충분히 다 읽어내려갈만틈 무리가 없다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시대와 사건을 mix하여 연대가 불분명하게 서술되거나, 이와 비슷한 구성상의 난맥이 약간은 짜증날때가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면에서 굳이 점수라는 것을 매겨야 한다면 딱 이 정도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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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1-0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히 읽었는데 무엇인가 남는 것이 없는....그래서 내가 왜 이것을 읽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죠...^^

transient-guest 2013-01-09 01:47   좋아요 0 | URL
딱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래도 가끔 나오는 이런 계통의 일본 저자들의 책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ㅋㅋ

2013-01-14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5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5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5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