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까지도 많은 애국시민들은 광장에서 떨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수많은 시민들이 굥거니가 돌아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싸우며 분노하고 있었다. 4월 4일에 다행히 탄핵이 만장일치로 인용되어 잠시 숨을 돌리려던 참에.


우원식 국회의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개헌”이었다. 그가 주말 사이 돌연 꺼내든 개헌론은, 탄핵 인용이라는 역사적 순간과 기묘하게 어긋난다. 그것은 시민의 승리를 뒤로 하고, 기성 정치권이 다시 중심 무대로 복귀하려는 신호처럼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그 모임에 모인 이들의 면면이다. 탄핵기각을 주장했던 학자들, 국힘당 의원들 (심지어 오세훈까지도), 그리고 이낙연·김부겸 같은 구세력들까지 모여 마치 "포스트-윤" 체제를 설계하겠다는 듯한 태도는 분노를 자아낸다. 마치 시민은 단지 사건을 통과시키는 배경에 불과했다는 듯이.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왜 지금, 그리고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논의되느냐이다.

한국 정치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프레임은 특히 진보가 정권을 잡거나 하면 언제나 개헌의 명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그 제도를 제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제도는 뼈대일 뿐이다. 뼈대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식과 태도가 제도를 규정한다. 윤석열 정권의 문제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타이밍에 개헌을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제도개혁이 아니라 권력재배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논의한다. 그러면서 대통령 중임제를 슬쩍 거론한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과는 멀고,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권력 나눠먹기의 전시장이 되기 십상이다 마치 일본처럼. 한국의 국회가 지금 그 책임을 감당할 정도의 품격과 신뢰를 갖추었는가? 오히려 국민의 정치 불신을 더 고착화시킬 위험이 크다.


우원식 국회의장을 향해 사람들이 “개헌수괴”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원래 추미애가 맡았어야 할 국회의장 자리를 가져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의장직 수행 내내 점잖은 씹선비질을 반복하면서 고구마같은 정치인으로 비쳐졌다. 그런데 이번 탄핵 정국에서 마치 본인이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서는 모습은, 시민의 투쟁 위에 올라선 권력자의 자의식처럼 보인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헌이 아니다. 기억의 복원과 방향의 재확인이다.

탄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아직도 다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내란동조세력이 군, 경, 검, 법원, 언론, 행정부에 넘쳐난다. 거기에 국힘당은 대놓고 탄핵을 방해했고 재판 내낸 굥을 옹호해온 바 해산되어야 마땅하다. 굥거기와 그 주변부에서 권력과 돈을 나눈 사람들도 처벌되어야 하는데 아직 명확하게 제대로 수사된 것이 없다. 내란대행 한떡수나 최모가지 그리고 관련자들은 지금도 승진하고 요직에 알박기를 하고 있는 지금 '개헌'이라니.

개헌은 대선이 다 끝나고 모든 수사와 처벌이 이루어지고 사회와 경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 다음에, 아니, 시민들이 원할 때 논의할 일이다. 


감이 떨어진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지만 질이 아주 나쁜 놈들이 모여서 아주 저질스러운 작당을 모의하고 있는 것 같다. 우원식도 김경수도 김부겸도 똥도 개똥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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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4-08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려고 그러나 봅니다. 아직 잔존 내란 세력이 꺼지지 않은 잔불처럼 저리 호시탐탐 세력을 키우려고 하는데 진보는 또 사분오열 찢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화가 나네요. 쓰신 글귀 중 시민이 단지 사건을 통과시키는 배경에 불과했다는 말이 참 아픕니다.

transient-guest 2025-04-09 01:06   좋아요 0 | URL
탄핵인용이 되자마자 저러니까 너무 황당하고 한심합니다. 요처에 박혀서 알박기한 놈들 천지에 심지어 계엄을 미리 알고 가족을 피신시킨 주범들 중 하나가 헌재 재판관 후보로 지명된 위헌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 말이죠. 시민들이 몸으로 막아서 지킨 나라를 자기들끼리 나눠가지려고 하네요
 

교회는 진리를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대형교회는 더 이상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
신약의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지만, 그 운영 방식은 구약의 권위주의적 체계를 답습하고 있고, 심지어는 구약 말씀을 맥락 없이 끌어다 쓰며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목회자 세습은 가문 중심의 종교 권력을 공고히 하며, 비판은 곧 사탄의 공격으로 간주되고, 신도들에게는 “교회는 항상 핍박받는다”는 내러티브로 책임 없는 순종만이 요구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26)

그 결과,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회개의 공동체도, 섬김의 자리도 아니다.
그곳은 예수의 이름을 앞세운 체제이며, 권력에 안수기도를 해주던 과거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전두환에게 안수기도를 하고 광주의 피에 침묵하던 교회는, 지금도 다른 이름의 권력에 기대며 침묵하거나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타락했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허울 아래, 진정한 성찰과 정의의 외침을 가로막는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27)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영적 맹인을 세워 그들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태복음 15:14)

더 무서운 건, 그 맹인을 따라가는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가로막는 교회를 떠난다.
믿음에 냉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진심이기 때문에 위선과 정치적 구조를 감당할 수 없어서 조용히 등을 돌린다.
예수는 여전히 진실하지만, 교회는 그 진실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이제 묻고 싶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그 길 끝에, 정말 예수가 계신가?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교회는 또 다른 무기를 꺼내 든다.
그것은 ‘죄의식’이라는 이름의 사슬이다.
회개하라고 외치며, 사람들의 연약함을 죄로 단정하고, 실수와 감정, 삶의 흔들림을 신앙 부족으로 몰아간다.
그러면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너는 부족하다”, “믿음이 약하다”,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말을 반복한다.
신도는 용서를 구하는 존재이기를 강요받고, 의심하거나 상처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이 죄의식은 죄를 씻어주는 복음이 아니라, 죄를 이용해 통제하는 체제의 도구로 변질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이 구조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게 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만든다.
종교가 삶을 회복시키는 힘이 아니라, 영혼을 억누르는 무기로 쓰일 때,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정신적 감옥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지만,
지금 교회는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죄의식에 가두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오늘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1980년대에 이미 '서울 예수'라는 책은,
모 목사와 당시 종말주의복음으로 급성장하던 그의 교회를 대입하여 한국 교회의 성장 이면에 감춰진 권력 지향적 구조, 재정 불투명성, 맹신과 체제 충성의 신앙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 책에 나오는 풍경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오히려 더 정교해졌고, 더 당당해졌고, 더 복음처럼 포장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체제의 정점에 선 이들은 오늘날 억대 연봉을 받고,
교회 재정으로 고급 차량, 운전기사, 비서, 가족의 유학과 해외 체류,
심지어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까지도 손에 넣는 이중 구조의 삶을 당연한 듯 누리고 있다.
예수의 이름을 들고 설교단에 서지만, 그 삶은 어느 기업 CEO보다 더 안정되고 더 세속적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8)

예수는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가진 것을 세습하고,
고난은 설교하되 자신은 고난 없는 특권을 누리며,
자녀에게는 십자가가 아니라 미국 시민권을 물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구조에 이의를 제기할 때,
그들은 성경을 들어 비판을 막는다.

“주의 종을 손대지 말라.” (시편 105:15)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름이라.” (로마서 13:1–2)

이런 구절들은 원래 선한 리더십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그들은 이 말씀을 이용해 비판을 억압하고, 권위에 절대 복종하라는 도구로 왜곡한다.

“너희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패하는도다.” (마가복음 7:13)

그 순간, 성경은 진리의 검이 아니라 권력의 방패가 된다.
그리고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 아니라,
비판 없는 충성과 침묵의 공간,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플랫폼이 되어버린다.

그 오용은 이제 목사 개인을 넘어서,
정치적 독재자까지 하나님의 권세로 덧칠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일부 목회자들이 **헌법적 질서를 훼손한 권력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 “기름부음 받은 자”**라 부르며
그들을 향한 비판을 신앙적 대적 행위로 몰아가는 현실을 목격했다.

독재적 통치, 언론 탄압, 법치 파괴조차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되고,
“그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공공연히 설교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그리고 그는 결코 권력자에게 무릎 꿇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는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느냐?” (요한복음 5:44)

예수는 여전히 진실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 진실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묻는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그 길 끝에,
정말 예수가 계신가?


교회가 죄를 덮는 장소가 되어선 안 되며,
회개 없이 용서받는 흉내를 연출하는 가짜 신앙의 무대가 되어선 더더욱 안 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바로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 전 검사장이 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고,
회개는커녕 오히려 피해자인 서 검사를 좌천시킨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7)

나는 믿는다.
믿음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건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자기기만이거나,
신을 이용한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가짜 회개를 목격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 전 검사장이 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으며
통성으로 회개(?)의 쇼를 벌이는 동시에,
정작 피해자였던 서 검사는 좌천되고 불이익을 받았다는 점이다.


교회는 죄를 고백하고 회복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교회는 죄인을 감싸고 피해자를 침묵시킨 면죄부의 무대가 되었고,
회개는 고백이 아니라 연출이 되었으며,
용서는 책임 없는 형식으로 전락했다.

그가 정말 회개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 검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행한 악을 명확히 고백하며,
그로 인해 받은 모든 이득과 자리를 내려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는, 그 행동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얹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왜곡하는 방식이다.
회개는 회피가 아니고,
믿음은 연기가 아니며,
용서는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


바울이 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은,

곧 우리 삶에서 이렇게 완성된다.

  • 믿음은 말씀이다.
    진리 위에 서서 보는 눈,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

  • 소망은 신앙이다.
    아직 보이지 않아도 끝을 믿는 영혼의 용기.

  • 사랑은 행위다.
    말이 아니라 손을 내미는 것. 기도만이 아니라 걸어가는 발걸음.

말씀과 믿음과 행동이 하나일 때,
우리의 세상은 그 자체로 천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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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07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랜스 님 서재에서 기독교 관련 글을 볼 줄이야...크리스천 이신가봐요..
저는 교회의 실상을 안 이후 발길을 뚝 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어요..학국의 대형교회는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고 신자 하나하나를 전부 돈으로 봅니다. 그래서 개척을 한 교회의 목사는 자기 아들에게 대물림을 해 주죠. 자기가 만든 회사이고 십일조와 헌금이 매년 수십억이 나오는데 미쳤다고 다른 목사를 초빙하나요? 한국 교회는 전부 양아치 조직입니다.

자끄 엘륄의 <뒤틀려진 기독교> 추천드립니다~

2025-04-07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25-04-08 01:36   좋아요 1 | URL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간혹 교회다니시는 분들 중에서 심하게 기운 분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인정 않기도 하죠. ㅎㅎㅎ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교회가 너무 거대해지고 사기업화 된 것 같아요. 성장주의 복음주의의 폐해같습니다. 말씀하신 책은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신은 믿고 신부님은 존중합니다만 저도 사람을 보면서 종교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성당제도로 신부님은 3-5년마다 바뀌니까 좀 별로인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갑니다.ㅎㅎ 신부라고 해도 사람이 별로면 그냥 그의 역할에 대한 존중이 있을 뿐 사람을 ‘무오‘로 보거나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2025-04-07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8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25-04-07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경유착보다 험한 것이 정종유착이고 경종유착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사회가 참 아이러니한 것이 자본주의가 들어와도 세계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기독교가 들어와도 가장 타락해 버린다는 것이죠. 부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물신숭배가 종교마저도 수단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transient-guest 2025-04-08 01:40   좋아요 0 | URL
7-80년대 불어닥친 성장주의 복음주의 광풍에 우리 특유의 무속적인 기복신앙을 팔아먹는 지금 대형교회 원로먹사들이 탓이 크죠. 시장바닥에서 빈민운동하고 천막교회하다가 신도들이 부자가 되면서 함께 부자가 된 먹사들이 많은데 그때와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을 비교할 지적인 능력이나 자정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 아픈데 병원 안 데려가고 기도하면 낫는다는 수준,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수준이니 뭘 바라겠습니까. 전 천주교인이라서 그런 꼴은 좀 덜 봐도 되니 다행입니다. 간혹 가톨릭사제들 중에도 저런 스타일이 있는데 전 아주 비판적으로 봅니다.
 

같은 책을 계속 붙잡고 조금씩 읽어가고 있다. My Bookstore이란 책인데 여러 작가들이 각자 최애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안타깝게도 이젠 사라진 서점들도 몇 개 있지만 많은 것들이 너무 빨리 변하고 사라지는 서부연안의 이곳과는 달리 좀더 전통이 잘 지켜지고 있는 듯한 다른 곳들의 경우 여전히 성업 중인 곳이 많다. 


이 책을 읽느라 다른 건 아예 들여다보지 못하니 이번 달에는 열 권을 채 못 읽을 것 같다. 40부터 앞으로 40년 동안 만 권의 책을 읽자고 시작한 원대한(?) 프로젝트가 시작 후 8년이 지나 9년에 접어든 2025년부터 휘청거리고 있다. 


게다가 책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늘 그런 것처럼 더 많은 책에 대해 알게 되어 찔끔찔끔 책을 구하게 되니 이 책을 읽으면서 주문한 책만 200불 어치가 넘는다. 그것도 아마존에서 대부분 구입해서 DC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충 봐도 스무 권은 되는 것 같다. 전부 영어로 된 책이니까 언제 얼마나 시간을 들여 읽을지 모르지만 책은 많을수록 좋다는 주의라서 괜찮겠지 싶다. 


책을 통해, 북튜브를 통해, 그 밖에도 이런 저런 경로로 알게된 책을 구하다 보면 지금처럼 많은 책에 둘러쌓인 삶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 결론은 열심히 벌고 아껴서 책을 보관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 지금이야 사무실에 대부분 보관하고 있지만 언젠가 일을 그만두게 되면 잔소리X100꺼리가 될 확률이 최소 120%는 될 것이니까 지금부터 뭔가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PS 난 병적인 미니멀리리스즘은 유행에 따른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미니멀리즘을 내세워 득을 본 사람은 그걸로 유명해진 일본의 모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미니멀리스트가 될 생각도 없거니와 나에게 그게 가능할 것이라 믿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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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을 연상시키는 듯한 가뭄이 이어진 2024-25의 겨울. 비가 너무 안 와서 손이 텄을 정도로 dry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계속 이어진다면 여름에는 물값이 오를 수도 있을 정도로 주변의 저수지들이 다 말라버린 상태였다. LA산불도 그렇고 이렇게 가문 겨울에는 이곳에서 더 윗쪽 동네들 또한 산불이 걱정되는 그런 나날들이 이어진 끝에 다행히 어제부터 강력한 물기운이 몰려든 것처럼 비가 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집에서 일하는 오늘은 하루 내내 재즈음반을 틀어놓고 작업을 하면서 빗소리와 함께 일을 하니 능률도 오르고 뭔가 분위기가 그럴 듯하다. 아쉬움이라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정도. 사실 이렇게 종일 비가 내리고 어두컴컴한 날이면 저녁 정당한 시간에 맞춰 와인을 마시거나 사케를 따는 것도 운치가 있을텐데. 하지만 술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제 화요일이라서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아 매우 아쉽다. 


준코 오니시의 Piano Quintet Suite와 Jim Hall의 Early Albums Collection을 들으면서 남은 업무를 마무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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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2-05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가 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커피 끊기와 사투 중입니다. 오늘 지고 다시 마셨네요.

transient-guest 2025-02-06 01:43   좋아요 0 | URL
아침이 되니 해가 나서 춥네요. 내일과 모레는 또 비가 온다고 하니 조금 따뜻하게 지내다가 해가 떠서 물이 마르면서 다시 추워질 것 같습니다. 커피를 안 드시려고 하는군요. 저는 아침에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입니다. 하루 한두 잔 정도 마시는 것 같습니다.

2025-03-23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5 0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4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5 0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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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6 0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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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7 0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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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30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1 0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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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1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1 2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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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2 1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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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2 2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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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3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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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3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보통 퇴근시간이 늦어진다. 시도때도 없는 이곳의 traffic jam은 이미 내가 살던 시절의 LA와 OC를 뛰어넘은지 오래라서 보통 오후 세 시부터는 차가 밀리기 시작해서 저녁 일곱 시는 넘어가야 풀리기 시작한다. 같은 거리를 밀리면 4-50분을 천천히 고속도로 진입로부터 exit까지 갈 수도 있고 15분이면 가뿐하게 주파할 수도 있으니 일찍 나오는 것과 늦게 집으로 떠나는 것이 한 시간 안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금요일은 종종 사정이 더 나은 편이지만 이때는 또 주말이라서 일찍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그 나름대로의 러시아워가 심해서 2021년에 사무실근처에서 좀더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 후에는 늘 이걸 반복하고 있다. 사무실 lease가 끝나는 2026년 중반까지는 계속 이 짓을 해야하는데 그나마 그것도 사무실을 사는 곳 근처로 좋은 값에 옮길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걱정거리가 늘어감에 따라 책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예전엔 일이 없는 시기엔 줄창 책을 읽거나 운동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코로나로 인해 사실상 개점휴업상태였던 2020년을 버텼었다. 요즘은 힘도 빠지고 해서 당시의 루틴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새벽에 일어나서 5-6마일을 걷고 출근해서 일을 조금 하거나 책을 보다가 오후에는 덤벨 몇 개와 바벨 한 개로 이런 저런 운동루틴을 맨몸운동과 섞어서 3분할로 수행하고 더해서 허공격자를 적게는 300회에서 많으면 1000회까지 했었다. 그때의 정신상태는 각오와, 포기와 체념에 더한 순응에 가까운 하루를 보내면서 나태해지거나 나약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2021년부터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고 2024년까지도 일이 많았는데 그 탓인지 정신상태는 그저 일을 때워가는 것처럼 매우 타동적으로 하루씩 연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늘 절박한 심정이지만 그래도 이젠 이대로 잘 가면 뒷날 어느 정도로 은퇴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의 여유는 생겼다. 부자가 널린 이곳이고 5-6년 전에만 해도 쩔쩔 매다가 다니는 회사의 stock이 수직상승해서 갑부가 된 이들도 많기 때문에 내가 이룬 건 사실 대단하기는 커녕 이제 뭔가 '부'라는 것에 초입에 들어왔다고 할 정도?  게다가 나이가 옛 한국의 나이로는 쉰이라서 많이 늦은 편이긴 하다만 그래도 12년 전에 학자금융자를 잔뜩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만 불로 창업한 late bloomer치고는 나름 고생하면서 잘 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대로 3년씩 끊어서 3번의 round로 잡고 매 round마다 은퇴가 가능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꿈꿔본다. 천천히 한다면 어느 정도의 일은 계속 하고 싶다만 본격적인 AI시대가 되면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수많은 화이트컬러 직업들 중 하나라서 그저 다음 10년을 잘 버텨내기를 바랄 뿐이다.















다섯 시부터 조금씩 읽기 시작한 오늘의 두 권.


구글맵으로 보니 역시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40분으로 나오던 집까지의 소요시간이 18분으로 떨어졌다. 이제 슬슬 나가야겠다. 토요일에는 조금 더 넓은 unit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매일 부담이 심하다. 이건 이것대로 빨리 지나갔으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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