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길고양이 - 제8회 푸른문학상 동화집 미래의 고전 21
김현욱 외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대개 익숙한 것에 더 친근감을 느낀다. 책도 그렇다. 인지도가 있는 작가가 새 책을 내면 금방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신인이 책을 내면 여간해서 알기 어렵다. 그런데 쉽게 접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이 책이 그렇다. 매년 출판사에서 새로운 작가상을 받은 작품을 모아 책을 내기 때문에 독자는 가만히 앉아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다른 출판사들이 장편 위주의 작품을 선정해서 책을 내는 반면 푸른책들은 단편모음집을 주로 낸다. 내부 사정이야 어떤지 모르겠으나 장편보다는 단편모음집이 훨씬 많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2010년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 모음집이다. 

문제아로 취급받는데 이골이 난 욱삼이가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첫인상을 강하게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도무지 먹히지 않는다.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하고 지저분한 행동을 해도 선생님과 아이들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아니, 칭찬을 한다. 이제 욱삼이는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문제아라는 딱지를 벗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서 겨드랑이에서 날개를 펼친다는 이야기는 그동안의 이야기와 선뜻 연결되지 않는다. 중간에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나왔을 뿐인데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자신의 문제에 더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뭐, 나야 일개 독자일 뿐이지만 마지막에서 약간 김빠졌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어른들의 감정싸움 때문에 친구와 신경전을 벌이는 이야기와 도서관에 길고양이가 들어와서 무엇을 했을까 궁금하게 만들었던 이야기 등 다양한 작가답게 소재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제각각 다른 맛을 풍기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게 또 이런 책의 묘미기도 하다. 통일성이 느껴지는 한 작가의 책과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 다만 대상 독자의 연령대가 다양해서 읽는 동안 여러 연령대를 왔다갔다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다. 

개인적으로 <슬픔을 대하는 자세>가 기억에 남는다. 자칫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끝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의 사랑과 정민이의 고민과 방황, 싸한 아픔까지. 그리고 때로는 아프더라도 현실을 인정해야 상처를 덜 받는다는 진리까지 다양한 메세지가 전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험 괴물은 정말 싫어! 작은도서관 31
문선이 글.그림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둘째는 시험기간만 되면 회사 다니면 시험 안 봐도 되지 않겠느냐며 아빠가 부럽다는 말을 달고 산다. 회사 다녀도 시험 보고 학교 다니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매 시험기간만 되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긴 시험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기에 시험을 괴물이라 칭하는 준석이 말에 아이들은 선뜻 동의할 것이다. 어린이가 시험을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정리한다는 차원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모는 몰라도 학부모는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씁쓸하지만 그게 바로 현실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호기심이 많고 창의성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일수록 초등학교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다는 게 보편적인 평가다. 실제로 둘째 친구 중에도 창의성이라면 저리가라 할 정도였던 아이가 학교에서 규격화된 규율을 어려워하는 걸 보았다. 준석이도 그렇다. 오죽하면 '1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주변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가서 공부 잘 하는 서현이 엄마랑 친하게 지내면서 준석이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 많던 호기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학원을 뺑뺑이 돌고 오면 파김치가 되니 무슨 호기심이 생기겠는가. 

그러다 우연히 이상한 시계를 발견하고, 그 시계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준석이와 친구들에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만약 준석이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시계를 발견해서 미리 예측가능한 것들만 모면하는 방식이었다면 그저 그런 동화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비록 시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들과 공부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문제를 함께 풀어보고 스스로 부딪쳐보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에는 스스로 풀어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작가가 가장 염두에 뒀던 부분도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경찰관이라는 요소가 있어서 저학년들에게는 훨씬 재미있게 다가갈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굳이 시간경찰관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어른의 잣대로 바라본 것임을 깨닫는다. 가끔 나는 유치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의외로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걸 보며 내 기준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시계가 깨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으로 뒷마무리를 했다면 다른 이야기와 그다지 차이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 즉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가끔 이게 과연 요또래 아이들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 또한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기에 그냥 넘어가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아빠, 숲의 거인
위기철 지음, 이희재 그림 / 사계절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내용이 내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중에 '아하!'하고 무릎을 칠 때의 그 상쾌함이란. 그렇다면 이 책은? 솔직히 제목만 보고도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갔다. 어느 방향의 이야기겠구나 싶었다. 다만 각 등장인물들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정도가 새로웠다고나 할까. 

제목을 보니 문득 <나의 계곡>이 생각난다. 워낙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라 그림과 내용은 대충 기억이 나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 한참 뒤진 뒤에 알아냈다. 나도 모르게 그 책을 읽었을 때의 감흥을 기대했나 보다. 그런데 애초부터 둘은 차이가 났다. 이 책은 글이 꽤 있는 동화책 형태고 <나의 계곡>은 그림책이니 둘을 수평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처음 책을 만났을 때의 느낌만은 비슷했다. 

화자인 어린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히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얘기다. 어린이 책이니 설마 둘의 연애사에 초점을 두 않았을 테고,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하며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살짝 궁금하다.  

엄마는 코끼리 통조림을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이것은 나중에 엄마가 아빠를 만나 숲으로 돌아가기 전까지의 엄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결혼해서 아이를 숲에서 기를 수 없다는 이유로 문명 생활을 하지만 거인이었던 아빠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고 숲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거인이었던 아빠가 엄마를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주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엄마가 아빠를 보호해준다. 그걸 남편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아빠는 숲을 대표하므로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고 확대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듯 곳곳에서 문명 생활이 편리하지만 얼마나 사람을 메마르게 하고 마음을 지치게 하는지 이야기한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엄마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냉장고가 없고 세탁기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고, 옷에 흙이 묻어도 살 수 있고 벌레가 많아도 살 수 있다고 외치며 숲으로 뛰어가는 엄마의 모습에서 작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니, 너무 의도가 뻔해서 한편으론 김 빠지기도 한다. 독자가 느낄 여유를 빼앗긴 듯해서. 

그나저나 솔직히 나도 숲에서 살고 싶다가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살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서 그냥 포기해버리고 만다. 옷에 흙이 묻거나 벌레가 많은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전자제품이 없으면 살 수 있으려나. 아무래도 이미 문명에 너무 길들여졌나 보다. 그래도 딱딱하고 숨 막히는 아파트 숲은 벗어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날씨는 창비아동문고 259
이현 지음, 김홍모 그림 / 창비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양한 동화를 읽다 보면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괜찮은 책을 만났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실망하는 책들도 있다. 이 책은? 물론 전자의 경우다. <짜장면 불어요>와 <우리들의 스캔들>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평론가가 아닌 일개 독자이기에 어느 부분에서,무엇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각각의 이야기 주인공에 몰입하며 읽다 보면 어느새 전체적인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된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억지로 작가의 의도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문득 느끼게 될 때의 그 느낌이란. 

제목답게 각 이야기의 소제목은 날씨와 연결된다. 그러면서 날씨와 각 이야기의 분위기가 무척 잘 어울린다. 날씨를 매개로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돌아가며 비추지만 그렇다고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즉 서로의 이야기가 연결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변명으로 만들지 않는다. 간혹, 한 사건에 대해 각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자칫하면 시각의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 서로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헌데 이 동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비록 가진 게 없지만 사람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동희네 가족과 남들이 보기에는 비뚤어진 문제아처럼 보여도 속마음은 여느 아이들과 다름 없는 종호네 이야기, 새침떼기에다가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사는 아이들을 얕잡아 보지만 결국 그 동네의 사람사는 맛의 매력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영은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감초처럼 모든 일에 사사건건 끼여들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아들만 귀하게 생각하는 상배할머니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인간적인 삶, 함께 사는 삶이 일맥상통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배할머니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동네 사람들에게 큰 힘을 주는 역할을 한다. 어느 한 인물도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모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이런 인물일 것이다'라는 예측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영은이와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 살아서 자매나 다름없이 자랐기에 영은이와 관련된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정아네 이야기도 있는데 돌이켜 보니 정아 이야기는 기억에 많이 남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정아 이야기에서 동희의 언니인 용희의 역할이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공부만 하는 이기적인 인물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아에게 세심하게 신경써 주는 모습을 보니 인상적이었다. 아니, 감동적이었다. 

동희의 문병을 억지로 왔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머리로는 주택가 동네를 얼른 떠나고 싶다고 하지만 가슴이 자꾸 머뭇거리게 만드는 영은이를 보며 우리네 옛 동네를 떠올렸다. 예전의 동네는 사람 냄새 나는 곳이었는데 지금의 아파트라는 것이 생기면서 그런 의미가 많이 사라졌다. 간혹 친하게 지내는 집이 있어도 그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공동체라서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품어줄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이웃과 현재의 이웃은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아이든 본인이든 연령대가 맞지 않으면 왕래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이웃의 냄새가 느껴져서 이 책이 더 따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9
패트리샤 맥코믹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오래전에 읽어 놓고 리뷰 쓰기가 겁나서 미루다 이제야 마음 잡고 쓴다. 무엇 때문에 리뷰 쓰기를 두려워하는 걸까 생각해 본다. 아마 딸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처음 읽은 것도 아니다. 부모가 딸을 빚 갚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경우도 보았고 잘 살게 해준다는 이야기에 속아 딸을 노예로 넘기는 경우도 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읽고 되새기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부모가 의도적으로 돈을 받고 딸을 넘긴 경우라면 부모를 실컷 욕하기라도 할텐데 라크슈미처럼 속아서 인생을 힘들게 사는 이야기는 더욱 안타깝다. 물론 라크슈미의 새아버지는 알면서도 모른체했으니까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인 아버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엄마의 무기력함과,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제도가 답답하다. 우리 사회가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라크슈미가 처한 현실보다는 훨씬 낫다는데 위안을 느껴도 되겠지만 그 조차도 라크슈미와 같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크슈미가 결국은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생겼다는 점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같은 공간에 있었고 라크슈미가 함께 떠나자고 해도 확신이 없었던 아니타는 그냥 남지 않았던가. 그곳에 계속 남아 있는 아이들은 과연 무엇에 희망을 걸고 살아야 할까.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소설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사람의 욕심은 과연 끝이 있을까. 뭄타즈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그것도 어린이를,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차마 시키지 못할 일들을 자신의 돈벌이에 이용하는 파렴치한 인간이 어느 곳에나 있으니. 뭄타즈는 그들의 사회제도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하튼 너무 화나는 이야기지만 당장 바뀔 것 같지 않아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