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은 생활 속에 있다


대입시험에서 논술이 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이 많다. 여느 과목과는 달리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닌 논술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도 있다. 이는 논술이 우리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잘 몰라서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논술을 접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아이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시청에 빠져 있어서 어머니가 이렇게 묻는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니?” 어머니의 이 질문을 논술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는지 그 이유를 논술하시오.’ 라고 고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결혼 적령기의 딸이 결혼할 상대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사윗감인 남자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내 딸과 결혼하면 어떻게 살 건가? 그리고 자네의 직업관에 대해 말해보게.” 이를 논술문제로 표현하면 ‘결혼생활과 직업관에 대해 논술하시오.’와 같이 된다.


어디 이뿐인가. 제품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체에 취직한 회사원도 논술과 접하는 일이 많다.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회의 시간에 팀장이 회사원들에게 말한다. “어떤 신제품을 만들면 좋을지 발표해 보시오.” 또는 “그 제품의 장단점을 설명해 보시오.” 이 모두가 논술로 답변해야 되는 물음들이다.


이렇듯 논술은 우리 생활 속에 있다. 학생들이 논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대입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문장력과 사고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 생활에서 논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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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옮겼습니다. 물론 제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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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7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될까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학급에서 한 번이라도 일등을 해본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뿐만 아니라 목표의 기준점이 뚜렷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뒤로 또 일등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 그 자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기가 된다. 이때 자신이 이룬 성과는 높을수록 좋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초등 3학년인 딸애의 일기 지도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엔가 일기를 잘 써서 많이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숙제라서 마지못해 일기를 쓰던 아이가 정성들여 쓰게 된 것이다. 자신감이 생겼는지 일기를 쓰고 나선 내게 자주 묻곤 하였다.


“엄마, 그때 칭찬한 일기처럼 이번에도 잘 썼어?”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잘 쓴 일기의 기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일기보다 못 쓴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더 잘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기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잘 쓴 독후감을 만들어주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잘 쓰는 기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하나의 기준점이 생겨서 더 좋은 것이다. 독후감을 잘 쓰려면 우선 정독해야 한다. 책을 꼼꼼히 읽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며, 읽다가 모르는 낱말은 국어사전으로 찾아야 한다. 이 작업을 아이와 엄마가 함께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잘 쓴 독후감을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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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잘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일간지에 실렸던 글이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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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 부제 : 고 노무현과 엄행수


이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5월 23일) 소식을 접하며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높은 권좌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자살하는 죽음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은 생애를 살았을 것이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최근 어느 일간 신문(5월 14일자)에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게재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구는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가 주도한 것으로, 미국 하버드대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남학생 268명의 일생을 72년간 걸쳐 추적해 본 것이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을 한때 겪었음을 알아냈다. 하버드 엘리트라고 해서 다 좋은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던 것. 이 연구에서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그 첫째가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였고, 교육과 안정적 결혼, 그 밖엔 금연ㆍ금주ㆍ운동ㆍ적당한 체중 등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행복의 조건의 으뜸이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고통을 견디는 능력’의 유무를 말할 것이다. 이 연구에 근거해서 생각할 때,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중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때 이어졌던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고통에 견디는 능력이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물론 자살의 원인은 본인만 아는, 더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


박지원 저, <예덕선생전>이란 작품에 매력적인 인물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엄행수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똥을 져 나르는 일에 종사한다. 그는 남이 그에게 고기 먹기를 권하면 ‘허허, 목구멍을 지난 다음에야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르면 그만이지, 하필 값비싸고 맛 좋은 것만을 먹을 것이 무어냔 말이오’하고 사양하며, 또 새 옷 입기를 권하면 그는 ‘저 넓디넓은 소매돋이를 입는다면 몸에 만만치 않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다시금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 아니오’하고 사양한다. 그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 삶에 불만이 없고 분수를 지키며 평화롭게 산다.


또 한 사람은 선귤자인데, 그는 남들이 모두 무시하는 엄행수를 존중한다. 그에 의하면, 엄행수는 하는 일이 더럽고 신분은 미천하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의롭기 때문에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엄행수를 ‘예덕 선생’이라고 부른다. 선귤자는 말한다.


“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차린 음식이 너무나도 먹을 것이 없을 땐, 반드시 이 세상에 나보다도 못한 가난뱅이가 있음을 생각했네. 그러나 이제 저 엄행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무엇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 없겠지.”


엄행수는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는 챙겨야 할 가족이 없으니 가족으로 인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명예도 없다. 그러므로 근심도 없다. 그저 배고플 때 먹는 한 끼의 식사와 달콤한 밤잠이면 충분한, 그런 삶을 산다.



중요한 건 삶이 아니라 삶에 대응하는 방식


엄행수의 삶을 통해서 보면 행복의 조건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밝듯이, 불행 속에서 더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역설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에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인생길로 갈라놓는다.


명예가 실추되는 일로 또는 다른 불행한 일로 큰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그러한 시련을 새 인생을 사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이렇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자살로 죽느냐 굳건히 이겨내고 사는냐의 선택이 바로 삶에 대응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은 부족함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미 반성과 뉘우침으로 얼룩져 불행해진 사람에 대해선 그 누구도 마음의 돌을 던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리석은 행동으로 괴로워 할 때가 있는데, ‘난 왜 이리도 어리석을까’하면서도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내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모습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번 전직 대통령의 자살 사건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동안 있어 온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명예 훼손과 같은 일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추락한 자의 비애를 ‘자살’로 마무리한 그들의 고통스런 마음을 헤아려 보며 엄행수가 떠올랐다. 그를 통해서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밑바닥의 삶이어서 오히려 불행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행수는 행복의 조건 따윈 갖추고 있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불평 없이 사는, 아름다운 덕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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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무엇을 단정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깨달음은 ‘독서’가 준 선물이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은 결국 살면서 갖게 될 이런 저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이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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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일기는 접속사·반복어 수 적어


어머니들이 아이 교육에 있어 관심을 많이 두는 것 중의 하나가 ‘일기 쓰기’일 것이다. 일기를 잘 쓰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나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기를 잘 쓰는 아이가 될까,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어머니들을 위해 한 가지 요령을 전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일기를 쓸 때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왜냐하면 등의 접속사를 많이 쓴다. 문장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써야 할 때가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접속사를 많이 써서 문장이 산만해지는 것은 좋지 않다. 접속사의 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문장이 좋아진다. 예를 들면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만났다. 그래서 반가웠다.’와 같은 문장은 이렇게 고친다.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만났다. 반가웠다.’ 더 간결한 문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좋은 문체는 간결체라는 것을 기억하여 접속사를 줄이는 훈련을 해보는 것이다.


또 ‘감기가 들었다. 왜냐하면 우산을 잃어버려 세차게 오는 비를 맞았기 때문이다.’의 문장은 이렇게 고쳐 보자. ‘감기가 들었다. 우산을 잃어버려 세차게 오는 비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없앰으로써 문장이 더 세련되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엔 반복어를 없애는 것이다.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고 봄보다는 가을이 좋다’의 문장에서 ‘좋다’라는 낱말이 중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봄보다는 가을이 좋다’로 수정함으로써 더 좋은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낱말이 생략되는 부분에 반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중복되는 낱말을 없애고 다양하게 낱말을 사용할수록 글은 좋아진다.  

 

-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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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두 갈림길 - 부제 : 앗! 할말없음


내년이면 큰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게다가 올해 둘째 딸아이마저 중학생이 되었다. 조그맣다고 꼬마 취급을 해 온 막내인데, 요즘 부쩍 커서 키가 나와 비슷해진 딸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딸들의 성장이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쓸쓸한 감회에 잠기게 된다. 딸들이 커갈수록 나는 그만큼 나이를 먹는 것이니 머지않을 나의 노년기를 예감하게 되어서일까.


문득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옛날 어머니도 나의 성장에 흐뭇하면서도 당신은 조금씩 인생의 무대 뒤로 사라지는 듯한 쓸쓸한 기분이 들었으리라. 그러면서도 지금의 나처럼 딸의 성장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도 싶었으리라.


딸들이 ‘뜨는 해’라면 나는 ‘지는 해’가 되는 셈이다. 거울을 볼 적마다 나의 ‘늙음’이 느껴져 우울해지기도 하는데, 이것이 어머니답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의 성장과 나의 늙음으로 기쁨과 슬픔의 갈림길에 놓인 것만 같다.



그 갈림길에서 요즘 갖게 되는 화두가 있다. 어떤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학식이 풍부하기보다 지혜롭고 바람직한 어머니가 되고 싶은데 도무지 자신이 없다. 자식을 키우면서 올바른 생각을 모색해야 할 때마다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우선 딸의 이성 문제만 해도 그렇다.



어느 날 둘째아이가 이성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남녀 공학 교실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아이는 사고방식 또한 나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평소 나는 그것을 염려하던 터라 처음엔 이성 교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했다. 왠지 남자친구를 만나러 다니면 성적이 떨어지고 나쁜 방향으로 빠질 것만 같아서였다. 이성 교제를 반대하고 나서 육체적 순결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혼전에 순결을 잃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것, 남자들은 순결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 결혼한 뒤에도 여자의 과거사로 인해 결혼생활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 등을 들려주었다.


순결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다른 걱정이 뒤따랐다. 만에 하나, 딸이 어떤 이유로 순결을 잃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순결의 상실로 인해 지나친 열등감으로 괴로워하거나 어떤 죄의식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딸이 성인이 되어 진실로 사랑하는 연인과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나서 그 상대방과 이별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잘못으로 순결을 지키지 못할 경우도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그땐 정말 난감한 일이다. 실제로 성추행을 당하여 자살하는 여성도 있지 않은가. 이것은 순결 교육의 부작용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순결이 생명을 버릴 만큼 소중한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순결을 강조할수록 그것을 지켜내지 못해 생기는 심적 고통을 극복할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요즘 혼전에 동거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아마도 딸들이 결혼 적령기에 있을 쯤이면 동거문화가 더 확산될 것이다. 신문을 통해, 이미 프랑스에서는 동거가 결혼에 버금갈 정도로 제도화하여 있으며,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이 자유롭고 분방하게 크는지라 순결성이 사라지는 시대가 올 거라는 말도 있다.


이에 따라 성에 대한 우리 기성세대들의 의식이 변해야 한다고들 한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부모는 그렇지 못한 젊은 세대와 큰 충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딸의 책가방에 피임약을 넣어 주어야 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충격적인 목소리도 들려온다. 순결을 못 지킬 바엔 여식이 불행하게 미혼모가 되는 것은 최소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소리로만 여겼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어머니로서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엔 친구 문제에 대해서도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언젠가 둘째아이가 친구 둘을 데리고 집에 왔다. 전화도 자주 하는 친구들인 걸로 보아 딸과 친한 아이들 같았다. 엄마로서 나는 그 애들이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길 바랐다. 그런 애들을 닮아서 딸애도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싶었다. 그 애들이 가고 나서 궁금하여 딸에게 물었다. 걔들은 공부 잘 하니?, 반에서 몇 등 하니? 하고 물은 것이다. 다음 순간 성적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옛일이 기억났고 부끄러워졌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한 친구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의 어머니가 내게 성적을 물으셨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친구에게 다짐을 받기라도 하듯 말하였다. 그것은 ‘공부 잘 하는 애와 놀아야 너도 잘 하게 된다’는 뜻의 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어머니가 좋게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날 내가 바로 그런 어머니가 된 것이다.(앗! 할말없음, 첫 번째)


내 물음에 딸아이가 대답하였다.


“다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애들이야, 근데 내가 공부 못하니깐 걔네들 엄마가 나를 싫어할지도 몰라.”

“…….”(앗! 할말없음, 두 번째)


딸의 친구 중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 애에 대해 가정환경이 어떠한지 자세히 묻기도 한다. 혹시 그 어두운 면이 내 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그것만을 염려하는 것이다. 밝은 애를 사귀면 좋겠다고 말하는 내게 이번엔 딸이 묻는다.


“엄마, 그럼 걔는 누구와 사귀어야 돼?”

“…….”(앗! 할말없음, 세 번째)


자식에게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옳은데, 나는 개인의 이득만을 중시하라는 뜻을 은연중에 전했던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만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난 딸들이 정이 넘치는 따뜻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어머니로서 나는 두 가지의 갈림길을 자주 만난다. 과거에도 만났고 앞으로도 수없이 갈림길 앞에 있게 될 것이다. 기혼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만큼이나 좋은 어머니가 되기도 어려운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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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착각을 하며 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에라도 ‘진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끝까지 ‘진실’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또 알아야 할 것은, 어느 부분에선 나도 끝까지 모르는 ‘진실’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친정어머니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서, 좋은 어머니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딸의 친구에 대해서, 개인이기주의에 대해서, 이성 교제에 대해서, 순결에 대해서, 피임약에 대해서, 동거문화에 대해서,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 그리고 갈림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에 골몰할 수 있는 게 ‘글쓰기’의 좋은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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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해♥ 2009-05-1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저지해예요^^
학교컴퓨터시간끝나고시간이남아서블로그들렷어요~
앞으로도자주들릴게요~

페크pek0501 2009-05-12 17:56   좋아요 0 | URL
반가워 지해야. 논술수업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어엿한 대학교 2학년생이라니...시간 빠르다. 대학생활은 재밌겠지? 내가 보낸 이메일로 보면 블로그의 화면이 작을테니 블로그의 주소를 복사 붙이기 이용해서 다음 사이트에서 검색해서 큰 화면으로 보도록 해. 즐겨찾기 해 놓으면 편할 거야.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