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출간기념회"

파란여우님, 책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전 28일자 조선일보 북스면에 실린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닉네임을 보니 제가 들어온 적이 있는 블로그여서 반갑더군요. 앞으로 좋은 소식 많이 있길 바랍니다. 저도 같은 블로거로서 파란여우님이 블로거의 파워를 보여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생활칼럼>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며칠 전(10월 5일) 일간 신문에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온 81세의 노인이 숨져 있는 것을 그의 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기사가 났다. 딸은 직장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다가 추석을 맞아 뵈러 와서 노모의 시신을 보게 된 것이다. 경찰은 시신의 부패 정도로 보아 2개월 전에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그동안 많이 있어 왔다.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가 죽은 지 한참 지나서야 사람들에게 발견된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의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건조하고 삭막한 현시대 삶의 한 단면을 보는 듯싶다.


프란츠 카프카 저, <유형지에서>라는 소설이 있다. 유형지로 새로 부임한 신임 사령관의 초대로 탐험가가 유형지에 오게 된다. 사령관이 탐험가를 초대를 한 것은 이곳에서 집행되는 사형방식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자문을 얻어 이곳의 처형제도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탐험가에겐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다.


이곳에 끌려온 죄수는 야간 보초를 서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과 이를 상관에게 들켰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불공평하게도 죄수에게는 어떠한 변명을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단지 판사인 장교의 독단적인 판결로 사형이 집행된다. 장교는 이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사형 집행이란 뾰족한 바늘이 죄수의 등에 죄명을 새기는 그런 기계 속에서 죄수가 죽어가는 것. 그것도 12시간 동안이나 고통스런 고문을 받다가 죄수가 죽게 되면 그를 구덩이 속으로 처넣는 것이다.


탐험가는 이곳 유형지의 비인간적인 제도와 비인간성에 대해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 자신은 유형지의 주민이 아니므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줄 알면서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 남의 일이라며 관심을 갖지 않는 이런 탐험가의 모습은, 홀로 사는 사람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부패될 때까지 몰랐던, 이웃에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초라한 오두막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성실한 어부이지만 다섯 명의 자식들이 먹을 빵조차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었다. 어느 날 “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았소.”하며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우리 이웃 여자가 죽었어요.”하고 말한다. 죽은 여자는 과부였고 역시 가난하였다. 이어서 아내는 어젯밤에 죽은 것 같고 어린 두 아이를 남겼다고 덧붙인다. 아내는 직접 그 과부의 집에 가서 그녀의 시체를 보았던 것이다. 과부가 죽었다는 말에 남편은 “저런! 저런!”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에게 아이가 다섯인데, 그렇다면 일곱이 되겠군. 저녁은 가끔 먹게 되겠군.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참! 낭패로군!”하고 말한다.


그런데 아내는 과부의 시체가 있는 그 집에서 나올 때 무엇을 가지고 나왔었다. 무엇을 훔친 것이다. 그것을 남편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가슴이 뛰고 걱정이 되었다. 그것을 모르는 남편은 그 애들이 죽은 사람 곁에서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며 그 애들을 데려다 키우자고 말한다. 그런 남편에게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커튼을 젖히며 답한다. “자, 그 애들이 여기 있어요!” 그녀가 훔친 것은 바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었다. 아내도 그 가여운 애들을 키울 생각으로 이미 자기네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이것은 빅토르 위고 저,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다.


타인에 대한 가장 큰 죄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아 넘기는 무관심. 또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웃의 불행에 관심이 없는 무관심. 이런 무관심은 사회를 해치는 ‘악’이 아닐까.


어느 집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보고도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집 잃고 울고 있는 어린애’를 보고도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이웃에서 불길하고 수상한 울음소리를 듣고도 남의 일이라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나는 나에게 물어 보았다.


내가 인정 메마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있다. 

 

 ......................................................................................................


이 글과 관련한 책들


프란츠 카프카 저, <유형지에서>

빅토르 위고 저, <가난한 사람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속의 구절>


                        왜 안경 쓴 신부는 없을까



요즘 안경 쓴 여자가 예뻐 보인다는 김용건 씨


며칠 전, 한 일간지 사이트(chosun.com)에서 ‘안경 쓴 여자’에 대한 글을 보았다. 탤런트 김용건 씨가 쓴 글이었다. 그는 안경 쓴 남자는 멋있는데, 안경 쓴 여자는 별로더라, 하는 얘기를 사람들로부터 종종 들었다면서 자신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요즘은 안경 쓴 똑똑한 여자들이 예뻐 보인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듣는 앞에서 ‘똑똑한 여자는 싫다’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답답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흔히 드라마 속에서 똑똑하고 못생긴 여자의 배역에 안경을 쓰게 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주인공이 미모의 여자임을 나타낼 땐 절대 안경을 씌우지 않는다. 이것은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여자는 얼굴이 못생겼음을 나타내고, 안경은 그런 전달을 위한 소품임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안경이 주는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세뇌시킨다.


내가 안경에 대한 시각을 교정한 것은 순전히 딸 덕분이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난 그 일에 무척 속상해 했다. 그런데 만약 안경을 쓰게 된 게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가정해 보니 그건 속상할 것 같지 않았다. 여기서 난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남자는 안경을 써도 괜찮고 여자는 안경을 쓰면 약점이 된다는 사회통념에 물들어 있었던 셈이다. 남자는 외모보다 경제적 능력을, 여자는 능력보다는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인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웨딩드레스 입고 안경 쓴 신부는 없다


안경은 학구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우리 사회는 학자적인 남성을 선호하는 반면에 학자적인 이미지의, 안경 쓴 여성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결혼식장에서의 신랑과 신부의 모습은 이를 증명한다. 안경 쓴 신랑은 흔히 볼 수 있는데 안경 쓴 신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안경을 썼다면 아마 화젯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 딸아이의 안경 건으로 내가 속상했던 것도 ‘여자’가 안경을 써서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먼훗날 결혼적령기의 딸이 안경으로 인해 약점이 있는 신붓감이 될까봐서 염려했던 것.


여자는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여자로 존재


일찍이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이란 저작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그녀는 남성이 씌운 ‘여자다움의 굴레’를 단호히 거부하며,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미국의 흑인문제가 따지고 보면 백인문제이듯이, 여성문제도 실상은 남성문제”라는 그녀의 주장을 ‘안경 문제’에 대입해 보면, 안경 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결국 남성의 잘못된 인식이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잘못된 인식에 의해 안경을 쓰는 여성이 안경 쓰지 않는 여성보다 좋지 못한 신붓감이라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또 후천적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예전의 20대 여성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된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지만 이젠 거기에다 ‘취업도 잘 해야 된다’라는 말이 추가된 지 오래다. 이젠 반반한 얼굴만이 여성의 경쟁력인 시대는 지났다. 남성들도 배우자감으로 여성을 볼 때 여성의 직업에도 큰 관심을 갖고 유능한 여성을 만나 맞벌이 부부로 살기를 희망하는 추세다. 여성에 대한 이상형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보는 시각도 ‘똑똑한 여성이라 싫다’가 아니라 ‘똑똑한 여성이어서 좋다’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경 쓴 여자에 대한 인식도 자연히 변해야 한다.



요즘 컴퓨터와 텔레비전으로 인해 시력이 나빠져 안경 쓴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그 중의 반은 여학생들이다. 이들이 미래에 안경으로 이해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건 불공평하고 불행한 일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지금과 달랐으면 좋겠다. 안경 쓴 여자도 안경 쓴 남자처럼 학구적으로 보여 전혀 약점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하여 결혼식장에서 안경을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걸까.



................................................................................................................................


<후기>

2003년에 ‘안경 쓴 여자’라는 수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위의 글 중 일부가 그 수필의 글과 중복되었음을 밝힙니다.


...............................................................................................................................


이 글과 관련한 책들의 구절


<1> 프랑스의 페미니즘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하다.”

“미국의 흑인문제가 따지고 보면 백인문제이듯이, 여성문제도 실상은 남성문제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중에서 - 

 


 

 

 

 

 

 

 

<2> 영국의 페미니즘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합니다.”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무슨 이유로 남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여성은 그다지도 가난한가?”

“여덟 명의 아이를 길러낸 유모는 만 파운드를 번 변호사보다 세상에서 더 가치 없는 인물일까요?” - 버지니아 울프 저, <자기만의 방> 중에서 -  




 

 

 

 

 

 

 

<3> 미국의 페미니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성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왜 당신같이 좋은 여자가 결혼을 안했죠?’하고 묻는 데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신중한 태도로 살려고 하고 싶지 않게 되며, 또 그렇게 격려 받지도 못한다.”

“여자가 의식화되고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남성에게는 불리한 것이 아니다. 서로 인간이 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에 대한 헌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남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쁜 원칙과 싸운다.” - 베티 프리단 저, <여성의 신비>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속의 구절>


우리가 아는 것은 일부일 뿐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어 왕>은 리어 왕이 세 명의 딸들 중에서 효심 있는 셋째 딸의 진심을 모르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첫째 딸과 둘째 딸의 거짓말을 진심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큰 불행을 겪는 비극을 보여 준다. 역시 그의 작품 <오셀로>는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가 다른 남자와 밀통하고 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오셀로가 의처증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내를 목 눌러 죽이고, 나중에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슬픔과 회한으로 자살하는 비극을 보여 준다. 이 모두 진실을 몰랐던 대가였다.


리어 왕도 오셀로도 진실을 몰랐던 것은 그 대상의 일부만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상의 전체 중 어느 일부만 알았던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몰랐던 것. 리어 왕은 세 딸에 대해서, 또 오셀로는 아내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그저 그것의 일부만 알 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 무엇도 전체를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무엇을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다음은 브레히트의 시이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대동하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브레히트,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중에서





이처럼 언어가 어떤 대상의 본질을 알게 하는 데에 한계가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또한 그것을 아는 데에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소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바비큐 꼬치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연인들은 상대방의 어떤 요소들을 꼬치에 꿰고 나머지는 무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자는 자기의 연인 남자에 대해, 미남 - 큰 키 - 팝송을 좋아함 - 폐소공포증 - 솔직함 - 게으름 - 산책을 싫어함 - 검정색을 좋아함 등을 꼬치에 꿰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 대해 보고 느낀 것 중에서 그의 특징들만 골라내어 꼬치에 꿰어 그 상대를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대상의 일부만 알고 그 나머지는 모르면서도 마치 전체를 알고 있는 듯 착각하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오류를 범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총체적으로 알기보다 부분적으로만 잘 알고 있어서 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나 자신의 의외의 면에 대해 깜짝 놀라며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하고 의아해 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나는 그에 대해 잘 안다’라는 말은 ‘나는 그의 어떤 면을 잘 안다’로 고쳐 말해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데 누구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 

 

<후기>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와 친숙해져서 인터넷 악성 댓글에 대한 피해가 생기고 그것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된 바 있다. 최근엔 모 방송인의 싱글맘 생활에 대한 비난의 댓글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얻은 것에 대한 비난으로, 아버지가 없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쓴 글이었다. 이것을 보며 자신에 대해서도 총체적 파악이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입을 떼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싱글맘 중에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삶을 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또는 자식을 갖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였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그저 싱글맘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만 알 뿐이다.


누구든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선 무엇에 대해서든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직접 경험하기 전엔 그 무엇의 일부만 아는 것이므로.



 ..............................................................................................................................

  

<이 글과 관련한 책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지 2009-08-1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서^^ 글 잘 읽고 갑니다.자주 제가 쓴 것처럼 공감이 되거든요.

페크pek0501 2009-08-20 09: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글을 완성하고 나면 고쳐야 할 결함이 눈에 띄어 완벽한 글을 쓰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도 글을 쓰는 건 제 마음 설레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글의 결함이 생각나 수정하러 들어왔어요. 싱글맘 댓글 얘기는 이 글에서 사족인 듯하여 <후기>라는 글로 빼냈습니다.

옹달샘 2009-08-28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되는 글입니다. 나 자신도 나를 모를 때가 있는데 남을 완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모든 걸 안다면 시시할 것 같은 생각도 드네요. 연애하는 사이라면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09-08-29 00:16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글쟁이 친구! 상대에 대해 백 퍼센트를 알아버리면 사랑하기 힘들걸요. 인간의 검은 마음, 응큼함, 속물근성까지 다 알고나면 사랑의 감정이 생길까요. 아주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몰라두요. 아마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타인의 일부만 아는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도 빠질 수 있으니...
 

 

 

 

 

 

 

 


<책 속의 구절>



사유하지 않음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 p35~36.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상대가 친구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다. 문제는 도와 주려는 자신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움이라는 것의 의미는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한 쪽에서 생각한 그 ‘도움’이 상대방에겐 ‘도움’이 아닌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는 상대방이 고맙게 여기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옷 정리를 하다가 키가 커진 아들들이 입지 못하는 옷들을 모아 이웃집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해진 옷도 아니고 다만 크기가 맞지 않아 버리기 아까운 옷이었으므로 당연히 받는 사람이 고마워할 줄 알았다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이웃 사람이 그 옷들을 받는 걸 거절하더라는 것이다. “난 우리 애들한테 남이 입던 옷 안 입혀요.”하는 냉정한 말로써 그 불쾌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을 듣고는 그 친구는 멍해졌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우리 애들이 입지 못하는 것들을 추려서 이웃에게 갖다 주곤 했기 때문이다. 어디 옷뿐이랴. 우리 애들이 학년이 바뀌어 쓰지 못하는 동화책이나 참고서까지 갖다 주곤 하는 나로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내게서 받았던 그 사람도 어쩌면 언짢은 걸 억지로 참고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또 이런 얘기도 들었다. 한 친구가 어느 모임에 갔다가 모임이 파해 귀가할 때였다. 자신만 빼고 모두들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차가 없는 자신을 위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를 배려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정말 그 마음은 고마웠다고 함)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이 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문제였다. 그 친구는 차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자각되면서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해 줄 때는 꼭 그 사람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진리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잘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에서 저자 정희진은 사유하지 않음이 폭력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또는 타인)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린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너와 내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성차별을 비롯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등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로 인해 상처가 생기는데, 그 차별이란 것도 결국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불쾌하거나 상처 받는 일은 거의 ‘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한다. 무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달라서 말은 가까이 있지 않아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 독기를 품어낼 수 있다. 가령 자신에 대해 누군가가 심하게 험담한 사실을 제삼자의 전화통화로 전해 받고선 괴로워할 수 있다. 그래서 무기보다 말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친절로써 한 선의의 말인데도 마치 험담처럼 상대방에게 마음의 병을 앓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인간관계가 좋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서로 같은 처지에 있어 보지 않은 각각의 타인들이다. 또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열등감을 갖고 있기 쉽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의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주위엔 결혼하지 않은 것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학벌 열등감이나 외모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또 가난함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는 부분에 대해선 타인이 무심코 던진 말도 민감하게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에게 어느 대학 졸업했냐고 물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은 자신의 생활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다. 만약 방송을 통해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한다면, 직장인은 내일 출근시 우산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산 장수는 내일 얼마나 우산이 팔릴지를 기대하며, 비가 새는 집에 사는 이는 내일 지붕이 샐 것을 걱정할 것이다. 지붕이 샐 것을 근심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비 오는 날의 낭만을 얘기하며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늘어놓는다면 그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알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또는 세상)에 대해 사유를 게을리 함으로써 약점 있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게 되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다. 열등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열을 가리는 우리 사회의 산물이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열을 가려야 하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타인을 위해 ‘사유’하는 일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그 사유로 인해 타인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예전보다 줄어든다면 그것은 좋은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걸 의미할 테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옹달샘 2009-08-2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앓다가 시간이라는 약으로 인해 아물고 상처엔 딱지가 앉게 되지요. 딱지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놔두면 되는데 긁어부스럼을 만들기도 하고 다시 덧나게 하기도 하여 한참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살기도 하지요. 한번더 생각한 뒤에 말하고 행동해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09-08-29 00:14   좋아요 0 | URL
그래요, 조심해야겠단 생각 들어요.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걸 새삼 느끼며 살게 돼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