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두 갈림길 - 부제 : 앗! 할말없음


내년이면 큰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게다가 올해 둘째 딸아이마저 중학생이 되었다. 조그맣다고 꼬마 취급을 해 온 막내인데, 요즘 부쩍 커서 키가 나와 비슷해진 딸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딸들의 성장이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쓸쓸한 감회에 잠기게 된다. 딸들이 커갈수록 나는 그만큼 나이를 먹는 것이니 머지않을 나의 노년기를 예감하게 되어서일까.


문득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옛날 어머니도 나의 성장에 흐뭇하면서도 당신은 조금씩 인생의 무대 뒤로 사라지는 듯한 쓸쓸한 기분이 들었으리라. 그러면서도 지금의 나처럼 딸의 성장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도 싶었으리라.


딸들이 ‘뜨는 해’라면 나는 ‘지는 해’가 되는 셈이다. 거울을 볼 적마다 나의 ‘늙음’이 느껴져 우울해지기도 하는데, 이것이 어머니답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의 성장과 나의 늙음으로 기쁨과 슬픔의 갈림길에 놓인 것만 같다.



그 갈림길에서 요즘 갖게 되는 화두가 있다. 어떤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학식이 풍부하기보다 지혜롭고 바람직한 어머니가 되고 싶은데 도무지 자신이 없다. 자식을 키우면서 올바른 생각을 모색해야 할 때마다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우선 딸의 이성 문제만 해도 그렇다.



어느 날 둘째아이가 이성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남녀 공학 교실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아이는 사고방식 또한 나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평소 나는 그것을 염려하던 터라 처음엔 이성 교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했다. 왠지 남자친구를 만나러 다니면 성적이 떨어지고 나쁜 방향으로 빠질 것만 같아서였다. 이성 교제를 반대하고 나서 육체적 순결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혼전에 순결을 잃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것, 남자들은 순결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 결혼한 뒤에도 여자의 과거사로 인해 결혼생활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 등을 들려주었다.


순결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다른 걱정이 뒤따랐다. 만에 하나, 딸이 어떤 이유로 순결을 잃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순결의 상실로 인해 지나친 열등감으로 괴로워하거나 어떤 죄의식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딸이 성인이 되어 진실로 사랑하는 연인과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나서 그 상대방과 이별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잘못으로 순결을 지키지 못할 경우도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그땐 정말 난감한 일이다. 실제로 성추행을 당하여 자살하는 여성도 있지 않은가. 이것은 순결 교육의 부작용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순결이 생명을 버릴 만큼 소중한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순결을 강조할수록 그것을 지켜내지 못해 생기는 심적 고통을 극복할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요즘 혼전에 동거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아마도 딸들이 결혼 적령기에 있을 쯤이면 동거문화가 더 확산될 것이다. 신문을 통해, 이미 프랑스에서는 동거가 결혼에 버금갈 정도로 제도화하여 있으며,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이 자유롭고 분방하게 크는지라 순결성이 사라지는 시대가 올 거라는 말도 있다.


이에 따라 성에 대한 우리 기성세대들의 의식이 변해야 한다고들 한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부모는 그렇지 못한 젊은 세대와 큰 충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딸의 책가방에 피임약을 넣어 주어야 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충격적인 목소리도 들려온다. 순결을 못 지킬 바엔 여식이 불행하게 미혼모가 되는 것은 최소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소리로만 여겼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어머니로서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엔 친구 문제에 대해서도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언젠가 둘째아이가 친구 둘을 데리고 집에 왔다. 전화도 자주 하는 친구들인 걸로 보아 딸과 친한 아이들 같았다. 엄마로서 나는 그 애들이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길 바랐다. 그런 애들을 닮아서 딸애도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싶었다. 그 애들이 가고 나서 궁금하여 딸에게 물었다. 걔들은 공부 잘 하니?, 반에서 몇 등 하니? 하고 물은 것이다. 다음 순간 성적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옛일이 기억났고 부끄러워졌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한 친구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의 어머니가 내게 성적을 물으셨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친구에게 다짐을 받기라도 하듯 말하였다. 그것은 ‘공부 잘 하는 애와 놀아야 너도 잘 하게 된다’는 뜻의 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어머니가 좋게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날 내가 바로 그런 어머니가 된 것이다.(앗! 할말없음, 첫 번째)


내 물음에 딸아이가 대답하였다.


“다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애들이야, 근데 내가 공부 못하니깐 걔네들 엄마가 나를 싫어할지도 몰라.”

“…….”(앗! 할말없음, 두 번째)


딸의 친구 중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 애에 대해 가정환경이 어떠한지 자세히 묻기도 한다. 혹시 그 어두운 면이 내 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그것만을 염려하는 것이다. 밝은 애를 사귀면 좋겠다고 말하는 내게 이번엔 딸이 묻는다.


“엄마, 그럼 걔는 누구와 사귀어야 돼?”

“…….”(앗! 할말없음, 세 번째)


자식에게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옳은데, 나는 개인의 이득만을 중시하라는 뜻을 은연중에 전했던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만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난 딸들이 정이 넘치는 따뜻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어머니로서 나는 두 가지의 갈림길을 자주 만난다. 과거에도 만났고 앞으로도 수없이 갈림길 앞에 있게 될 것이다. 기혼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만큼이나 좋은 어머니가 되기도 어려운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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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착각을 하며 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에라도 ‘진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끝까지 ‘진실’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또 알아야 할 것은, 어느 부분에선 나도 끝까지 모르는 ‘진실’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친정어머니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서, 좋은 어머니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딸의 친구에 대해서, 개인이기주의에 대해서, 이성 교제에 대해서, 순결에 대해서, 피임약에 대해서, 동거문화에 대해서,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 그리고 갈림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에 골몰할 수 있는 게 ‘글쓰기’의 좋은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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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해♥ 2009-05-1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저지해예요^^
학교컴퓨터시간끝나고시간이남아서블로그들렷어요~
앞으로도자주들릴게요~

페크pek0501 2009-05-12 17:56   좋아요 0 | URL
반가워 지해야. 논술수업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어엿한 대학교 2학년생이라니...시간 빠르다. 대학생활은 재밌겠지? 내가 보낸 이메일로 보면 블로그의 화면이 작을테니 블로그의 주소를 복사 붙이기 이용해서 다음 사이트에서 검색해서 큰 화면으로 보도록 해. 즐겨찾기 해 놓으면 편할 거야. 또 보자.
 


1. <잘난 척 글>-당선 공지 2009


제 블로그에 있는 글 중에서 평가 받은 글이 있어 알립니다.

바쁘신 분들은 다음의 글 중에서 뽑아 보시기 바랍니다.


1.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의 책 리뷰가 다음 사이트에서 블로거 리뷰 중 추천베스트 1위로 선정 - 3월 31일

2. <광고 속의 성차별>의 책 리뷰가 다음 사이트에서 우수 리뷰로 선정 - 3월 29일

3.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의 책 리뷰가 이주의 다음블로거뉴스특종10으로 선정 - 3월 5주

4. <결과는 알 수 없다>의 생활칼럼이 이주의 다음블로거뉴스특종10으로 선정 - 4월 1주

5. <역지사지(1) - 부제 : 받는 것도 호의>의 생활칼럼이 이주의 다음블로거뉴스특종10으로 선정 - 4월 3주 

5월 4일에 추가로 알립니다

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책 리뷰가 다음 사이트에서 우수 리뷰로 선정 - 4월 27일 

7. <젊음의 탄생>의 책 리뷰가 다음 사이트에서 블로거 리뷰 중 추천베스트 1위로 선정 -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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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좋은 칼럼이란?>



=어떤 게 좋은 칼럼입니까.


프리드먼=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반응 중의 하나를 받는 칼럼입니다.


첫째, 독자가 ‘그건 몰랐네’라고 느끼도록 지식을 주는 칼럼.


둘째, ‘그렇게는 생각 못했네’라고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주는 칼럼.


셋째, ‘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생각을 당신이 제대로 썼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칼럼.


넷째, ‘당신과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겠어’라고 할 정도로 논란이 되는 칼럼.


다섯째,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칼럼입니다.


=그렇게 현장을 많이 다니면 책은 언제 읽나요.


프리드먼=항상 읽죠. 나는 퓰리처상 심사위원이어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영웅이나 롤 모델이 있습니까.


프리드먼=뉴욕 타임스 기자로 베트남전쟁 취재로 이름을 날리고 『베스트 앤드 브라이티스트』를 비롯해 좋은 책을 많이 쓴 데이비드 헬버스탬 같은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어요.


토머스 프리드먼 (56)

뉴욕 타임스의 인기 칼럼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 국제 문제 전문가로 국제 질서와 외교관계, 세계화와 통상 문제에 관해 쓴 칼럼들은 깊이와 대중성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태어나 브랜다이스대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에서 중동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UPI 통신 베이루트 특파원을 거쳐 뉴욕 타임스 베이루트 지국장과 예루살렘 지국장을 지냈고, 백악관 출입기자를 역임했다. 세계화에 대한 선구적 해석을 보여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1999년)와 『세계는 평평하다』(2005년)는 경제경영 분야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세 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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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나마나한 글을 쓰게 될까봐, 그것을 경계하며 글을 씁니다. 프리드먼이 좋은 글의 정답을 알려 준 것만 같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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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역지사지(2) - 부제 : 자기 중심적 사고


우리는 ‘자연보호’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훼손되는 일이 많아 생겨난 말이다. 자연의 소중함에 대해선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은 잘못된 말인 것 같다. 자칫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다. 말은 생각의 그림인 것이니까.


이미 이어령 저, <젊음의 탄생>에서 저자는 ‘자연보호’라는 말은 잘못된 말임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해 왔지 언제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 왔느냐는 것이다. 자연보호란 말 속에 이미 자연을 파괴하는 원인인 인간의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 사실 자연보호란 말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생긴 말이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궁극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생각에서 인간을 주체로 보고 자연을 객체화시킨 결과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에 익숙하다.


일례로 장애인에 대해 비정상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눈 것인데, 장애가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사고한 결과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백인 중심의 사고가 유색인종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이 역시 흑인 중심에서 보면 백인은 무색인종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말들에선 타인보다 나 자신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뜻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드러난다. 즉 강자가 되는 쪽의 말이 널리 사용된다.


자연의 일부인 곤충을 보는 시각에서도 인간 중심적 사고가 작용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매미의 삶에 대한 시각이 그렇다. 매미는 보통 유충으로 6~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낸 뒤에 지상으로 올라와 성충이 되어 1~3주 만에 죽는다. 즉 유충으로 길게 살다가 성충이 되어서는 짧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상에서의 짧은 생을 살기 위해 긴 시간을 지루하게 땅속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해석해 놓은 여러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매미의 중요한 삶을 땅 위의 삶으로 보는 인간 중심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매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삶은 이미 땅속에서의 유충으로서의 삶이라고 말이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게 그들의 운명이듯이 매미는 땅속에서 사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체 변이를 염두에 둔다면 매미가 지하에서 살기엔 성충으로보다는 유충으로 사는 게 환경에 적응하기 편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미가 지상의 짧은 삶을 위해 지하에서 긴 시간을 지루하게 보냈다는 것은 인간의 난센스. 매미의 삶의 전성기는 유충으로서의 삶일 수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 인간도 인생의 전성기는 장년기가 되기 전의 아동기와 청년기가 아닐는지.



중요한 것은 자연에 대한 이런 인간 중심적 사고가 인간관계에서 자기 중심적 사고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족이든 친구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상대방의 자기 중심적 사고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남에게 준 혜택은 크게 생각하고 자신이 남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작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친구관계에 있는 갑이란 사람과 을이란 사람이 동업하여 회사를 차렸다. 그런데 서로 자신이 회사를 위해 한 일만 생각하고 상대방이 한 일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갑은 내 자본금이 을의 것보다 더 많이 들어간 회사이니 내 덕이 크다고 생각하고, 을은 이 회사를 차리자고 아이디어를 맨 처음 낸 것은 자신이라며 자기의 덕을 크게 생각한다. 갑은 자신이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니 자기가 을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생각하고, 을은 회사에 수익을 올릴 중요한 계약을 자신이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업을 하면 깨진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현상은 단순히 두 사람이 만나는 친구관계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자동차를 타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는데, 한 쪽에선 자신이 점심을 샀으니 다음에 만나면 상대방이 점심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쪽에선 점심값보다 자신의 자동차 기름값이 더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자가 자신은 상대방에게 많이 베푼 것 같은데, 늘 돌아오는 것은 적게 여겨져서 손해를 본 느낌을 갖는다.


이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각자가, 친구가 있어 내가 즐거운 거라고 생각하고, 친구가 있어 내가 외롭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혜택이 어디 있으랴.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두고 ‘자연보호’를 외칠 게 아니라 자연의 혜택을 크게 생각해야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해서도 받은 혜택을 크게 생각할 때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될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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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글을 쓸 적마다, ‘이거 맞나?’, ‘이렇게 단정적으로 써도 되나?’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또 쓴 글을 읽을 적마다 고칠 부분이 자꾸 눈에 띕니다. 완결된 한 편의 글을 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위하며 글을 올립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약점은 있게 마련이라고, 다만 우리 인간은 ‘완성’을 향해 조금씩 나아갈 뿐이라고….

큰 깨달음을 주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것은 저의 욕심일 뿐, 그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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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09-06-0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 이 블로그를 알게 되어서 4편의 글을 읽었는데, 모두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네요~

페크pek0501 2009-06-05 14:25   좋아요 0 | URL
누구신지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글 쓰는 일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기가 어려운 작업인데,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 좋네요. 종종 들러 주세요. 글이란 어차피 공개를 위해 쓰는 것, 공개엔 당연히 평가가 뒤따르겠지요. 가끔 그 평가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신지님 덕분에 힘이 나는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생활칼럼>


역지사지(1) - 부제 : 받는 것도 호의


인간은 ‘편견의 노예’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굳어지면 그것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그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때 역으로 생각해 보는 발상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게 되는 시각을 객관화시켜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할 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을 어떤 처지에 놓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예로, 내가 연애하면 아름다운 로맨스지만 남이 연애하면 스캔들이 되는 것이다. 또 직장에서 내가 휴식을 취하면 재충전이지만 남이 휴식을 취하면 근무태만인 것이다. 이렇듯 자신에겐 긍정적 해석을, 타인에겐 부정적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자기는 인복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아무리 잘 해 줘도 상대방은 자신에게 잘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밥을 사 줘도, 차에 태워 운전하여 집에까지 바래다줘도 상대방은 말로만 고맙다고 할 뿐, 그것에 대한 답례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섭섭한 마음이 생기더라는 거였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때는 그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가 많다. 그저 선의로써 좋아서 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그것에 대한 답례가 없으면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은연중 보상을 받고 싶기 때문이며, 그것이 없으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바로 손익계산인 셈이다. 처음엔 좋아서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 결과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기주의가 도사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난 어떤 경험을 한 뒤엔 그것에 대한 생각이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한 친구가 남편이 회사에서 승진했다며 점심으로 한턱을 내겠다고 나를 포함해서 친구 넷을 어느 고급 음식점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내 몸도 고단해서 외출하기가 귀찮았다. 하지만 친구가 모처럼 하는 초대인지라 가지 않으려니 마음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오라는 시간에 맞춰 나갔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흔쾌히 그 경사스런 일에 축하를 해줬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생각한 것은, 축하를 해 주기 위해 이 귀찮은 외출을 실행한 나에 대해 그 친구가 고마워할까, 하는 것이었다. 즉 한턱을 낸 사람만 호의를 베푼 게 아니라 그것에 응해 준 나도 호의를 베풀었다고 여긴 것이다.


그 일 이후로 내가 과거에 베풀었다고 생각한 한턱의 호의가 그 상대방에겐 부담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내 호의를 받아 준 상대방도 어쩌면 선심을 쓴 것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역발상을 하자 자연 그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되었고 답례가 없어서 생겼던 섭섭한 마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밥을 샀다면 그것을 맛있게 먹어 준 그에게 감사하고, 또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다면 그것을 고맙게 받아 준 그에게 감사할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괜스레 심통이 나서 상대방에게 만족감을 주기 싫은 마음에, 선의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그런 베푸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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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알 수 없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확신을 갖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는 걸 알았다. 세상일은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져서 차라리 확신을 갖지 않는 게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탈 때마다 고민하는 문제가 있었다. 차가 목적지에 닿아 택시요금을 내고 몇 백 원의 거스름돈을 받아야 할 때 이 거스름돈을 받아야 할지 말지였다. 미용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파마 값을 지불할 때 천 원 정도의 거스름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닥치곤 했다.


거스름돈을 아예 받지 않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을 봤다. 물론 그런 행동엔 약간의 자기과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상대방을 위해 적은 액수의 돈 정도는 양보하겠다는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는 듯하다. 내 고민은 그런 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돈을 받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나아가 바람직한 사회 만들기에 일조하는 행위인가 하는 점이다. 즉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화인가 하는 것이다.


혹시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잔돈을 꼬박꼬박 챙겨 받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없이 욕을 먹는 풍토가 조성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거스름돈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시선이 곱지 않을 수 있음을 환기할 때 잔돈을 양보하기가 주춤해진다. 또 한 가지, 거스름돈을 받지 않을 때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처지가 남보다 못해 고객이 잔돈을 받지 않는 거라고 여겨 불쾌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십 원짜리라도 거스름돈을 확실히 주고받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선의의 마음으로 행할지라도 그 결과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임을 잘 보여 주는 전설이 있다. 신라 때, 경주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과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 없이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 과부는 어느새 문천 건너 쪽에 정부(情夫)를 한 사람 두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아이들이 잠든 틈을 타서 시내를 건너 정부에게 갔다가 새벽이 되면 돌아오곤 하였다. 그 당시는 다리가 없었으므로 어두운 밤중에 그 시내를 건너가는 것은 고생스런 일이었다.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가 밤에 시냇물을 건널 때 크게 고생함을 생각하고는, 어머니를 도울 방도를 궁리했다. 그래서 서로 의논한 끝에 모두 힘을 합하여 돌을 놓아 훌륭한 다리를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안 과부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다시는 정부를 찾아가지 않았다.


이 전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들들의 효성스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어머니께 효도를 한 것일까, 불효를 한 것일까.


우선, 효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효심이 지극한 아들들임을 알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자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한 어머니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또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정부와의 결별로 더 이상 남의 눈을 피해 밤길을 다닐 필요도 없고 혼자서 비밀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에 따른 불편한 마음도 없앨 수 있었으니 아들들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효도를 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불효한 것일 수 있다. 첫째, 아들들이 다리를 놓아 어머니의 외도를 도움으로써 어머니를 더 부도덕한 존재로 만들었으니 불효일 수 있다. 둘째, 어머니가 아들들이 자신의 불륜 행위를 알았다는 사실에 몹시 부끄러워 괴로워했다면, 그것도 불효일 수 있다. 셋째, 어머니가 연인과 결별하게 된 결과도 생각하기 따라선 불효일 수 있다. 더 이상 설렘을 안고 정부를 만나러 갈 수 없을 테니 그 즐거움을 잃은 것이니까. 어쨌든 이 전설은 선의의 효심으로 시작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살면서 잘 판단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자신의 생각이 늘 옳다고 여기는 것도 자만이며 그 결과가 자신의 예상대로 나타날 거라고 믿는 것도 자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틀린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실수도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인정할 때 자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세상일의 결과는 알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나를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고 겸허하게 만들 것 같아서 내 기억의 창고에 고이 간직하기로 하였다. 정말 어떤 일이든 결과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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