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구절>



사유하지 않음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 p35~36.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상대가 친구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다. 문제는 도와 주려는 자신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움이라는 것의 의미는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한 쪽에서 생각한 그 ‘도움’이 상대방에겐 ‘도움’이 아닌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는 상대방이 고맙게 여기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옷 정리를 하다가 키가 커진 아들들이 입지 못하는 옷들을 모아 이웃집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해진 옷도 아니고 다만 크기가 맞지 않아 버리기 아까운 옷이었으므로 당연히 받는 사람이 고마워할 줄 알았다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이웃 사람이 그 옷들을 받는 걸 거절하더라는 것이다. “난 우리 애들한테 남이 입던 옷 안 입혀요.”하는 냉정한 말로써 그 불쾌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을 듣고는 그 친구는 멍해졌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우리 애들이 입지 못하는 것들을 추려서 이웃에게 갖다 주곤 했기 때문이다. 어디 옷뿐이랴. 우리 애들이 학년이 바뀌어 쓰지 못하는 동화책이나 참고서까지 갖다 주곤 하는 나로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내게서 받았던 그 사람도 어쩌면 언짢은 걸 억지로 참고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또 이런 얘기도 들었다. 한 친구가 어느 모임에 갔다가 모임이 파해 귀가할 때였다. 자신만 빼고 모두들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차가 없는 자신을 위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를 배려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정말 그 마음은 고마웠다고 함)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이 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문제였다. 그 친구는 차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자각되면서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해 줄 때는 꼭 그 사람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진리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잘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에서 저자 정희진은 사유하지 않음이 폭력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또는 타인)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린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너와 내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성차별을 비롯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등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로 인해 상처가 생기는데, 그 차별이란 것도 결국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불쾌하거나 상처 받는 일은 거의 ‘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한다. 무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달라서 말은 가까이 있지 않아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 독기를 품어낼 수 있다. 가령 자신에 대해 누군가가 심하게 험담한 사실을 제삼자의 전화통화로 전해 받고선 괴로워할 수 있다. 그래서 무기보다 말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친절로써 한 선의의 말인데도 마치 험담처럼 상대방에게 마음의 병을 앓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인간관계가 좋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서로 같은 처지에 있어 보지 않은 각각의 타인들이다. 또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열등감을 갖고 있기 쉽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의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주위엔 결혼하지 않은 것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학벌 열등감이나 외모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또 가난함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는 부분에 대해선 타인이 무심코 던진 말도 민감하게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에게 어느 대학 졸업했냐고 물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은 자신의 생활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다. 만약 방송을 통해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한다면, 직장인은 내일 출근시 우산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산 장수는 내일 얼마나 우산이 팔릴지를 기대하며, 비가 새는 집에 사는 이는 내일 지붕이 샐 것을 걱정할 것이다. 지붕이 샐 것을 근심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비 오는 날의 낭만을 얘기하며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늘어놓는다면 그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알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또는 세상)에 대해 사유를 게을리 함으로써 약점 있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게 되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다. 열등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열을 가리는 우리 사회의 산물이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열을 가려야 하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타인을 위해 ‘사유’하는 일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그 사유로 인해 타인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예전보다 줄어든다면 그것은 좋은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걸 의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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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09-08-2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앓다가 시간이라는 약으로 인해 아물고 상처엔 딱지가 앉게 되지요. 딱지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놔두면 되는데 긁어부스럼을 만들기도 하고 다시 덧나게 하기도 하여 한참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살기도 하지요. 한번더 생각한 뒤에 말하고 행동해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09-08-29 00:14   좋아요 0 | URL
그래요, 조심해야겠단 생각 들어요.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걸 새삼 느끼며 살게 돼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요하겠죠.
 


논술은 생활 속에 있다


대입시험에서 논술이 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이 많다. 여느 과목과는 달리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닌 논술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도 있다. 이는 논술이 우리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잘 몰라서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논술을 접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아이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시청에 빠져 있어서 어머니가 이렇게 묻는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니?” 어머니의 이 질문을 논술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는지 그 이유를 논술하시오.’ 라고 고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결혼 적령기의 딸이 결혼할 상대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사윗감인 남자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내 딸과 결혼하면 어떻게 살 건가? 그리고 자네의 직업관에 대해 말해보게.” 이를 논술문제로 표현하면 ‘결혼생활과 직업관에 대해 논술하시오.’와 같이 된다.


어디 이뿐인가. 제품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체에 취직한 회사원도 논술과 접하는 일이 많다.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회의 시간에 팀장이 회사원들에게 말한다. “어떤 신제품을 만들면 좋을지 발표해 보시오.” 또는 “그 제품의 장단점을 설명해 보시오.” 이 모두가 논술로 답변해야 되는 물음들이다.


이렇듯 논술은 우리 생활 속에 있다. 학생들이 논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대입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문장력과 사고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 생활에서 논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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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옮겼습니다. 물론 제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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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7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될까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학급에서 한 번이라도 일등을 해본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뿐만 아니라 목표의 기준점이 뚜렷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뒤로 또 일등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 그 자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기가 된다. 이때 자신이 이룬 성과는 높을수록 좋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초등 3학년인 딸애의 일기 지도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엔가 일기를 잘 써서 많이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숙제라서 마지못해 일기를 쓰던 아이가 정성들여 쓰게 된 것이다. 자신감이 생겼는지 일기를 쓰고 나선 내게 자주 묻곤 하였다.


“엄마, 그때 칭찬한 일기처럼 이번에도 잘 썼어?”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잘 쓴 일기의 기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일기보다 못 쓴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더 잘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기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잘 쓴 독후감을 만들어주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잘 쓰는 기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하나의 기준점이 생겨서 더 좋은 것이다. 독후감을 잘 쓰려면 우선 정독해야 한다. 책을 꼼꼼히 읽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며, 읽다가 모르는 낱말은 국어사전으로 찾아야 한다. 이 작업을 아이와 엄마가 함께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잘 쓴 독후감을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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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잘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일간지에 실렸던 글이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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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 부제 : 고 노무현과 엄행수


이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5월 23일) 소식을 접하며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높은 권좌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자살하는 죽음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은 생애를 살았을 것이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최근 어느 일간 신문(5월 14일자)에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게재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구는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가 주도한 것으로, 미국 하버드대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남학생 268명의 일생을 72년간 걸쳐 추적해 본 것이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을 한때 겪었음을 알아냈다. 하버드 엘리트라고 해서 다 좋은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던 것. 이 연구에서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그 첫째가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였고, 교육과 안정적 결혼, 그 밖엔 금연ㆍ금주ㆍ운동ㆍ적당한 체중 등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행복의 조건의 으뜸이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고통을 견디는 능력’의 유무를 말할 것이다. 이 연구에 근거해서 생각할 때,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중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때 이어졌던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고통에 견디는 능력이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물론 자살의 원인은 본인만 아는, 더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


박지원 저, <예덕선생전>이란 작품에 매력적인 인물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엄행수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똥을 져 나르는 일에 종사한다. 그는 남이 그에게 고기 먹기를 권하면 ‘허허, 목구멍을 지난 다음에야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르면 그만이지, 하필 값비싸고 맛 좋은 것만을 먹을 것이 무어냔 말이오’하고 사양하며, 또 새 옷 입기를 권하면 그는 ‘저 넓디넓은 소매돋이를 입는다면 몸에 만만치 않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다시금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 아니오’하고 사양한다. 그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 삶에 불만이 없고 분수를 지키며 평화롭게 산다.


또 한 사람은 선귤자인데, 그는 남들이 모두 무시하는 엄행수를 존중한다. 그에 의하면, 엄행수는 하는 일이 더럽고 신분은 미천하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의롭기 때문에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엄행수를 ‘예덕 선생’이라고 부른다. 선귤자는 말한다.


“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차린 음식이 너무나도 먹을 것이 없을 땐, 반드시 이 세상에 나보다도 못한 가난뱅이가 있음을 생각했네. 그러나 이제 저 엄행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무엇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 없겠지.”


엄행수는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는 챙겨야 할 가족이 없으니 가족으로 인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명예도 없다. 그러므로 근심도 없다. 그저 배고플 때 먹는 한 끼의 식사와 달콤한 밤잠이면 충분한, 그런 삶을 산다.



중요한 건 삶이 아니라 삶에 대응하는 방식


엄행수의 삶을 통해서 보면 행복의 조건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밝듯이, 불행 속에서 더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역설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에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인생길로 갈라놓는다.


명예가 실추되는 일로 또는 다른 불행한 일로 큰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그러한 시련을 새 인생을 사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이렇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자살로 죽느냐 굳건히 이겨내고 사는냐의 선택이 바로 삶에 대응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은 부족함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미 반성과 뉘우침으로 얼룩져 불행해진 사람에 대해선 그 누구도 마음의 돌을 던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리석은 행동으로 괴로워 할 때가 있는데, ‘난 왜 이리도 어리석을까’하면서도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내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모습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번 전직 대통령의 자살 사건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동안 있어 온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명예 훼손과 같은 일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추락한 자의 비애를 ‘자살’로 마무리한 그들의 고통스런 마음을 헤아려 보며 엄행수가 떠올랐다. 그를 통해서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밑바닥의 삶이어서 오히려 불행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행수는 행복의 조건 따윈 갖추고 있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불평 없이 사는, 아름다운 덕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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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무엇을 단정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깨달음은 ‘독서’가 준 선물이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은 결국 살면서 갖게 될 이런 저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이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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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일기는 접속사·반복어 수 적어


어머니들이 아이 교육에 있어 관심을 많이 두는 것 중의 하나가 ‘일기 쓰기’일 것이다. 일기를 잘 쓰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나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기를 잘 쓰는 아이가 될까,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어머니들을 위해 한 가지 요령을 전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일기를 쓸 때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왜냐하면 등의 접속사를 많이 쓴다. 문장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써야 할 때가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접속사를 많이 써서 문장이 산만해지는 것은 좋지 않다. 접속사의 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문장이 좋아진다. 예를 들면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만났다. 그래서 반가웠다.’와 같은 문장은 이렇게 고친다.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만났다. 반가웠다.’ 더 간결한 문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좋은 문체는 간결체라는 것을 기억하여 접속사를 줄이는 훈련을 해보는 것이다.


또 ‘감기가 들었다. 왜냐하면 우산을 잃어버려 세차게 오는 비를 맞았기 때문이다.’의 문장은 이렇게 고쳐 보자. ‘감기가 들었다. 우산을 잃어버려 세차게 오는 비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없앰으로써 문장이 더 세련되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엔 반복어를 없애는 것이다.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고 봄보다는 가을이 좋다’의 문장에서 ‘좋다’라는 낱말이 중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봄보다는 가을이 좋다’로 수정함으로써 더 좋은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낱말이 생략되는 부분에 반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중복되는 낱말을 없애고 다양하게 낱말을 사용할수록 글은 좋아진다.  

 

-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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