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아니 많이 끔찍한 상상. '자유주의 우생학 비판'에 대한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문득 학부 시절, 영화 시나리오로 써보려고 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로쟈님의 페이퍼 속 내용에서 전제가 되는 건, 일단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나옴으로써 시작되는 것인데, 내 이야기는 어머니의 배 안에서만 진행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봤던 <이너 스페이스>란 영화가 좀 모티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크로넨버그 스타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지금은 '사장된' 이야기) 

장르는 SF인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근데 좀 어설프니까 양해를) 과학적 발전이 점점 이루어지면서, 낙태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 시도된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아이를 지워야 하는 것에서, 이제 '뱃 속의 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오게 한다는 취지'의 실험이었다. 이 시기에 아이는 뱃 속에서 점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빨리 신장되고, 아이는 자신에게 공급되는 '양분'에 의해, 내가 이후 이 부모의 삶에 함께하면서 '좋은 삶'을 살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사고한다. 그리고 아이의 뇌 속에 어머니가 아버지와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두 사람의 사회화 경향, 교육받은 정도, 등등을 아이가 뱃 속에서 수집 /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대략 임신 4개월 정도의 판단 기간을 통해, 아기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게 되고, 만약 자신에게 좋은 삶의 배경을 제공해주지 못할 것 같으면, 아기는 스스로 어머니의 뱃 속에서 목숨을 끊는다. 실험이 성공하고, 사회에서는 논란이 가중된다. " 낙태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생명과학의 전환!"이라는 옹호론과 "좋은 삶에 대한 선택권이라는 포장에 가려진 생명 경시"라는 비관론이 대등하게 펼쳐진다.  

이 논란 속에서 사회 분위기는 뒤숭숭해진다. 특히 실험 결과의 발표 이후, 빈곤층의 출산율 저하가 급격히 이루어진다. 사회에서는 비관적 분위기가 횡행한다. 아이를 가져도 결국 이 아이가 우리의 삶을 판단하고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라는 뉴스 인터뷰 속 시민의 모습이 잡히고, 그런 말,말,말 들이 겹쳐진다. (여기까지 생각해본 이야기. 이런 끔찍한 미래는 오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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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0-09-1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자면 태아의 자살을 허용해야하는가의 문제로군요..ㅎㅎ
자살을 허용하면 자유주의적 우생학이 되는 것이고 자살에 반대하면 공동체주의적 생명윤리주의자가 되는 것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9-11 14:32   좋아요 0 | URL
후자의 몫까지 판단을 확실시하고 이야기를 상상해본 것은 아니었는데, yoonta님이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시는군요.^^ 좀 깊이 고민해보겠습니다.

눈팅하다가 2010-12-28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재미있지만 어려운 소재군요.

전 전체적으로 굉장히 급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유독 낙태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본인의 선택권이 존중되지 않는 생명의 박탈행위는 어쨋거나 살해다.' 거든요.
네, 아무리 태어난 후 걷게 될 아이 자신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꺼라 '예상' 될지라도,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않는게 더 낫다고 생각 될지라도, 그건 아이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 자신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고 심지어 자살을 택하게 되더라도, 본인의 의사결정이 배제된 '낙태' 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그 생각을 다방면으로 확장시키면 저런 시나리오도 나올 수 있겠군요.
 

 

환대[歡待] :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환대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거처의 확고한 존재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또는 그보다 진정한 환대는 오직 비호-부재의 해체로부터, 자기-집 부재의 해체로부터만 개화할 수 있는가? 어쩌면 집 없는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환대를 베풀 수 있을지 모른다." 

                                                                                                       -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중에서-

 좋은 책의 좋은 구절을 딱 잘라 가져오는 것이, '좋은'에 담긴 뜻, 즉 책 속의 수많은 해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리 밝혀둔다. 그리고 그것을 무릅쓴 양해를 구한다. 나는 문득 오늘 롯데와 삼성의 경기 후, 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그리고 일찍이 감명깊게 짚어놓은 구절들을 하나, 하나 되짚어 보았다.  

누군가에게 환대를 표시한다는 것은, '나'의 안정성과 '너'의 불안정성을 확인하는 의례일지도 모른다. 내가 처한 기본적인 환경이 불안한데, 당신을 기분 좋게 맞이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의 집에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 들어오는 누군가가 '떠도는 자'였을 때, 나에게 요구되는 것,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안전'과 '안정'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두 요인을 충족시킬 사물을 배치하고, 구입하며, 그것을 활용하여 당신에게 건넨다.  

하지만, 그 이전에 '떠도는 자'에게 우리가 본능적으로 내미는 것은 포도주와 빵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거기서 시작되는 환대 이전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이후 발생할 예상치 못할 장면, 그 불확실성. 그래서, 사람들에게 '환대'는 익숙한 자들이 익숙한 자들끼리 누려야 하는 사회적 의례가 되기도 한다. 그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다. '안정'의 표상이 타인의 몸을 뒤덮으면, 나는 '안전'의 표시로 그를 맞이한다. 그리고 나의 친절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질서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환대'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나와 너의 비대칭성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방인'과 '집없음'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환대'에 대해 다시 묻는다.  

나는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저 두 사람의 모습에서 '환대'의 어떤 기운을 느낀다. 단순히 '레전드'로 남을 은퇴를 앞둔 야구선수와 그의 팀을 상대한 외국인 감독이라는 장면 자체의 소비가 아니다. 한 사람은 평생 거주할 줄 알았던 '집'에서 잠시 방황을 하며, '집 없음'의 고달픔을 체험한 적이 있다(그리고 곧 집을 비워야 한다)[양준혁]. 다른 한 사람은 '타국'이라는 낯선 곳에 있으면서( 자신이 늘 거주할 줄 알았던 집을 나와 )3년째 '이방인'의 자리에 있다[로이스터].   

나는 여기서 '집-없음'이 자아내는 환대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이 선수가 정말 한국야구사를 빛낸 자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상징성을 알고 있는 외국인의 인사, 그리고 이제 곧 그라운드를 떠나는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한국 선수의 겸양된 태도라는 인상을 넘어,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환대'에는 우리가 모를, (그리고 그들 각자가 마음 속에 더 간직하길 바라는) 그들 각자의 삶에 대한 순식간의 회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은 텔레파시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차라리, 우리가 이 장면에서 '환대의 이유'를 밝혀내어, 그 명시적인 이유에 맞는 감동을 얽어내기보다, 그들에게 나왔던 '환대 그 자체의 기운'이 정작 숨기고 있는 내밀한 감정들, 그것이 정말 그들만의 것임을 이해하고 그들의 장면으로 남겨두는 게 환대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보다 삶의 고수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순히 '사람좋은'이란 표현에만 가둘 수 없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집-없음'에서 비롯된 환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안정과 안전에 대한 이질감을 견뎌낸 사람들만이 취할 수 있는 저 의례에서, 낭만을 넘어선 우리네 삶의 환대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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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0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멍하게 본 후, 멍하게 껐다. 아마 올해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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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010-09-0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최고의 명장면.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9-08 14:30   좋아요 0 | URL
네, 하루님 보고 울컥했어요.
 

(안 본 사람들에겐 스포일러가 될지도) 

슈퍼스타 K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최종우승자를 뽑는 회가 아니라 그룹 미션인 것 같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여기엔 정말 사회란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임팩트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단순히 합동과 분란, 이런 것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그 미묘함들. 착함과 악함 속에서 그 하나의 감정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의 설정. 참가자들은 아픔을 느끼지만, 우리는 여기서 인간 그 자체의 신랄함에서 오는 어떤 스릴을 느낀다.  

오늘 우은미 양이 떨어진 것에 대해 어이없어 하는 반응보다 우리가 더 공유하고 있는 건, 역시 저 친구는 노래를 잘 하지만, 결국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이다. 잔인한 상상이지만. 우은미 양이 우승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의 재능과 실력에 따라다니는 외부에 대한 그 꿈틀거리는 아쉬움을 '감동'이란 이름으로 포장할지 모른다. 결국 '감동'이란 것 자체가 '외모지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망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우리는 또 한 번 느낀다. 아. 우리는 인간이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우리는 인간미라는 의미와 너무나 멀게 떨어진 인간으로서의 '나'를 느끼면서, 내 스스로 만들어가는 가공된 인간미에 대해 치를 떤다.  그래서 때론 이 시대의 감동이란 비극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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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9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8-28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심사 위원들이 협의하는 내용을 보던 중, 희소성과 스타성이라는 말이 자주 오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우은미 양이 생각지 못하게 떨어지더군요. 외모가 안된다는 말을 스타성이라는 말로 돌려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가지 더 아메리칸 아이돌을 패러디한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심사위원들의 막말 컨셉도 패러디한 것 같더군요. 윤종신이 왜 깐족 대마왕인지 알았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29 15:53   좋아요 0 | URL
작가진에서 캐릭터를 잡아주려고 했던 모습이 느껴지더군요. 다만..사이먼 코웰 같은 맛은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좀 아쉬웠어요.
 

나도 한때는 '20대 필자론'에 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속하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보고, 지식인들의 동네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 '20대'의 영역에 들고 싶다는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무엇보다 20대를 잘 대변해야 하는, '강(强)-20대'여야 함을 의미했으며, 그 누구보다 '20대 티'를 내지 않는 '비(非)-20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부딪혀온 경험으로선) 

2

2주 전, 프레시안 북 웹진에 실린 노정태 군의 서평을 보면서(사실 그건 서평이란 형식을 빌린, 20대 필자론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도 더 강하게 읽혔다), 어떤 공감가는 대목들이 있었다. (그 서평을 읽으면서)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내 위치에서, 그동안 해왔던 일들,그리고 시도해봤던 경험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물론,이건 2학년 9반이 3학년 0반으로 진급한다는 숫자의 변화, 그리고 그것에 의한 문제의 절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좀 앞서가는 생각, 아니면 과장된 생각, 혹은 낭만적인 생각. 나는 '20대 필자론'이 생기면서 가장 걱정했던 점이 사실 '20대필자'들을 기특한 아이 취급하는 그 윗세대의 시선이 아니었다. 내가 우려했던 점은 정작 이렇게 주목받으면서 나오게 된 일정한 그 '군(群)'에 대한 20대들 본인의 불투명한 의혹들과 시기심들의 누적이었다.(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그 '군'에 대한 사회적 담론, 특히 언론이나 출판사들이 만들어놓은 그 담론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전자나 후자는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최근 이런 '20대 필자'들을 동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의심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만나는 사람들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들이 보여주려는 글의 '내부'보다는 '외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비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합니까?란 질문에서 나는 그 사람의 글에 대한 의견, 그 주고받음을 느끼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외부적'이었다. 결국 그것은 20대라는 위치와 그들을 조명해주고자 애쓰는 윗세대 지식인들과의 관계를 품평하는 것으로 환원되거나, 돌고도는 루머들에 대한 뒷담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의 최종판은 결국 명성이었다.(김예슬 선언을 둘러싼 그 반응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러면서 그 '명성'으로 모아지는 가운데 그들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적시켜온 어떤 훈련의 의미들은 '똑똑하니까' ,'책을 많이 읽으니까','글을 잘쓰니까'정도로 쉽게 축소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결국 같은 20대들에게 20대 필자들로 묶인 사람들의 글은 '일간지에 기고를 하는 우리 또래'(그러면서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촉망받는'이란 엠블렘을 단 또래)로 취급받고, 이 안에서 '글의 내부'는 "잘 읽었습니다..^^"정도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상황. 나는 이 안에서 또 하나의 단계를 본다. '불신'에서 '불안'으로. 이건 단순히 나보다 잘 나간다고 생각하는 그 사회적 형식을 취득한 자로서의 부러움과 시기심, 그 차원으로서 축소하는 문제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이것을 인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심리학적 위안'에 머무를 뿐이다. 오히려 나는 여기서 (과장된 생각이란 표현의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오늘날의 불안을 읽는다(김예슬 선언을 접하고 나서, 그 반응들을 둘러싼 당황스러움보다 더 깊은 우려).  사람들이 더 '사회학적'으로 되어가는 것. 사람들의 패턴을  쉽게 읽고, 평가하는 것. 그 안에서 그 패턴을 정형화시키고, 편리하게 무리로 집어넣어버리는 것. 이 안에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작품에는 '유망한','젊은'이란 수사를 던져주면 그정도로 족하지 않겠는가,라는 '예의없는 '기호 및 반응들의 난립. (결국 이런 반응 안에서, '유망한' 젏은'이란 기호는 '누구누구의 흉내를 내는~'으로 폄하/수렴되는 냉소적인 댓글들의 진수성찬) 

'나이- 명성'이란 외부의 기호에만 머무르다보면, 남는 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인데도, 그렇게 교회 내부 생활을 잘 아는 어른들 특유의 대화법, 그리고 뒷담화에 알맞는 소재주의식 비난'일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우리 세대들이 우리 세대들의 글을 '깊게'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있게 많이 썼으면 좋겠다. 이리저리 소심한 정리만 하지 말고, 또 너무 잘 보이려는 계획만 세우지 말고. 난 특히 아카데미 안에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속한 아카데미 안에서, 자신의 연구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자신없어하는 20대 연구자들이 보다 성실하게 그리고 밝게 자신의 노력을 보여주는 '성의의 기술'을 연마했으면 좋겠다. 출판사는 젊은 연구자들의 노력을 너무 얕보고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너무 주눅들어 있는 현실. 언론은 우리가 딱 그 정도의 나이이길 바라면서, 가끔은 그 정도의 나이를 벗어난 '할배'의 연륜을 보여주길 원하는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라고?"라는 반응을 나오게 하는 그 현실 사이에서. 이 기술은 보기 좋은 복수가 될 것이다. 자, 눈 밑에 점 하나 찍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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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5 0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5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5 0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