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최지 발표 전,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아무래도 한국은 '개최의 상징성' 부분에서 밀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번에 카타르가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한국 가전업체 회사들은 미소를 지을 기회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카타르를 월드컵 본선에서 본다는 신기함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그 어마어마한 '오일 머니'로, 숨겨진 다크호스들을 귀화시키는 용병술도 '계속'발휘될 지 궁금하다.(알다시피, 카타르는 축구를 포함한 구기 종목에 귀화 선수들이 꽤 된다)   

 

2018년 개최지는 러시아로 결정되었다. BBC로 라이브를 봤는데,  영국 전 국가대표 앨런 시어러의 서운한 멘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국은 내심 많이 기대했는데, 의외로 BBC가 터뜨린 보도들이 악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는 듯하다. 러시아는 요즘 축구 실력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고, 언젠가 한 번은 할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개최를 한다. 

인터넷 상에서는 정치 쪽으론 꽝이지만, 축구 일에 관련해서 그 분은 '70원'이 아니라, 기대되는 사람, 일 잘 하는 사람으로 꼽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그 분이 거기서만 일하길 바랄 수도. 

덧붙임)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맞아, "로쟈의 러시아 월드컵 기행"같은 책 출간을 기대하며('인문학'적 축구 전문가인 정윤수 선생님과의 콜라보레이션은 기대되는 컨셉이다. - 로쟈님의 출판평론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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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시상식 같은 걸 즐겨보는 편이다. 음악케이블 채널인 엠넷이 주관하는 MAMA 또한 매년 챙겨보는 시상식인데, 올해는 특히 이 행사가 '마카오'에서 한다는 특수함 때문에, 더 관심이 갔다. 먼저 이 MAMA에 대한 상세한 내 소감을 말하기 전에, MAMA를 하던 즈음 '분열적인 내 상태'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연평도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터진 지 며칠 안 되어, 벌써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른 화제들이 오가고 있었고, MAMA 개최 또한 그런 화제 중 하나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좀 거칠게 말해서, 이번 MAMA를 통해 사람들은 "한국 가수들이 왜 이렇게 안 와? 망하는 것 아냐?(하지만, 봐야지)"라는 시선과 "오, 엠넷 이번에 가수들이 별로 참석 안 해서 망할 것 같더니, 해외 가수들이 좀 오네?(그렇지만 불안한 건 여전해)"라는 시선을 '오고 가며' 즐기고 있었다. 

이 시상식이 '마카오'에서 한다는 것, 그게 왜 특별하냐고 물을 경우, 이 시상식이 '한국 가수'를 위한 것이었다는 그 전통적 정체성을 챙기면 된다. 그러나, 조금씩 그 틈이 벌어졌고, 엠넷은 몇 년 전부터, MAMA를 '한국'이 아닌, '아시아'라는 큰 정체성 안에서 기획하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어색했던 지점, 그리고 이번 해에도 여전히 어색한 지점은, 과연 MAMA가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리드할 만한 강점이 있었는가?이다. 사실 그것을 실제로 담당하는 것은 활동을 하는 가수들이었기 때문에, MAMA에게 필요한 건 그런 가수라는 실제 행위자들의 인기를 얼마나 잘 '구성'하고 '기획'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잘 기획했다면' 이건 가수들의 '인기 덕분'에 업혀갈려는 엠넷의 '꼼수'라는 투덜거림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상황이 반대였다면, 엠넷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무능한 문화적 기업이 된다. 

MAMA라는 시상식 그리고 거기에 포함된 공연 조건이라는 내부의 지점을 따져보자면, MAMA는 그 퀄리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MAMA를 보던 네티즌들도 음향 상태의 훌륭함, 가수들의 퍼포먼스를 뒷받침하는 무대 디자인 등엔 합격점을 주었던 것 같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참여가수들의 퀄리티. 여기서 이견이 생기는데, 일본의 '퍼퓸'이나 '케미스트리'를 아는 팬이라면, "오 굿", 그리고 상세하게 음악을 듣진 않지만, '한국계 최초, 빌보드차트 1위"라는 수식어를 사회에서 일상의 수다거리로 챙기는 '정보원' 정도의 대중에게, 미국에서 온 '파 이스트 무브먼트'의 참가는 "베리 굿"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앞에서 제기했듯이, 이 시상식이 한국 가수들의 '잔치'가 아니었냐,는 그간 누적된 대중들의 인식 그리고 그것을 깨보려는 엠넷의 기획 의도 간에 벌어진 틈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틈을 한국 가수들이 출연하여,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크게 환호를 받을 때, 그리고 비-한국 가수들이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약한 호응을 받았을 때라는 제법 역설적인 상황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발견에는 유치하지만 그래도 무시못할 하나의 가정이 있다. 한국이 과연 다른 나라에서 얼마나 인지도가 높을까,라는 그 '인터넷 관용 표현'말이다. 그 표현에 스며든 틀에 따르자면, 케미스트리나 퍼퓸, 그리고 파 이스트 무브먼트는 엄청난 환호를 받아야 했지만(국력 혹은 나라의 인지도에 비례하여), 그들은 시상식에서 그렇게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큰 환호를 받았던 것은, 원더걸스, 2PM, 지 드래곤, 태양 등등이었다. 좀 거칠긴 하지만, 케미스트리, 퍼퓸, 파 이스트 무브먼트는 하나의 '문화적 들러리'같았다고 할까. 시상식에도 이런 면면은 이어졌다. 다 알다시피, 이러한 시상식에서 수상을 한다는 건, 내가 보기엔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들 고생했다는 의미에서 주는 '일 년 짜리 공로패'정도를 나눠먹는 수준 아니겠는가)  

이러한 '수상 과정'속에서 재미있는 건, '아시아'라는 정체성의 기호. 그 기호 안에 포함된 한국이 '아시아'라는 기호를 일종의 하위 범주로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시아'라는 부분이 들어간 상 내역에는 그 '아시아'라는 기호를 살리기 위해, '비-한국 지역' 가수들에게 수상이 돌아갔다. 이것을 한국의 우수한 문화적 힘이라는 (말도 안되는) 의미로 해석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차라리, 엠넷이라는 기업이 주도하는, 그 시장의 구획 아래 설정된 하나의 미디어 이벤트, 그리고 이벤트 과정 속에 나타난 결함들을 메워보기 위해 급히 치장된 시상식의 장면들은, "이런 시상식을 통해 한국이 아시아의 문화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징후"도, "이것 봐, 한국은 아직 멀었어"와 같은 냉소도 다 비껴가는 듯 했다.  

나는 오히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바로 '한국의 문화적 현실 그리고 아시아와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MAMA를 통해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한국 가수가 나왔을 때, 환호성을 질러댄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리고 그 사실을 수긍하기 위해 각종 연예 관련 매체에서 접한 카라와 소녀시대의 열풍 담론을 되새기며, MAMA가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그건 섣부른 판단이라는 것으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되려, MAMA가 '아시아'라는 기표의 실체를 더 확보하고 싶다면, 그 '아시아다움'에 대한 상세한 문화적 실천과 지식의 교류가대중들 사이에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했을 때 발생하는 '아무것도 아닌 상황'은 한국이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와 '한국' 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설정한 결과물이 된다. 그러나, 이번 시상식엔 그런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촌스럽게 그 '한류'라는 징후 하나만을 믿고, 상당히 어설픈 '문화로 맺어진 각 국의 관계성'을 강조해보려했지만, 실패했다.  

그러한 실패는 한편으로 대단한 뮤지션을 '섭외'했다는 정도로 하나의 '성과'를 냈다고 으스대는 태도를 느끼게 했고, 나는 여기서 한국에서 이런 태도를 가장 잘 취하고 있는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한국과 아시아의 문화적 관계성을 더 꼼꼼하게 연구하고 챙긴다는 것도 하나의 '문화적 외교 실력'이라고 한다면, 엠넷의 이번 모습은 'G 20' 개최로 한국과 세계의 관계성을 '성공적으로' 조명했다고 자찬한 채, 정작 '연평도'라는 자국 영토의 문제로 인해 중국과 미국의 눈치만을 살피는, 이 정부의 외교 현실을 떠오르게 했다.  어쩌면 좀 과장된 연관성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적 요인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과 함께 만들어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런 문화를 기획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호화스러운 기획과 퍼포먼스를 실행한다해도, 그러한 껍질 안에 들어있는 열악한 본질을 덮을 순 없다고 본다. 엠넷은 참 열심히 준비했다고 하지만,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다. 정권 초기, 공무원의 조기 출근 강조와 해외 순방과 같은 '열심의 산물'들을 읖조리는 어떤 정부와 닮아서, 더 암울하다. 둘 다 '시장'을 천명한다고 하는 쪽인지라, '열심히 연구한 줄 알았더만..쯧쯧' (엠넷이나 mb나 둘 다 ''문화와 교류"라는 것에 대해 너무 안이한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주도'라는 이름이 교류인 줄 안다. "g20 우리가 주도했네", "우리가 마카오에서 이 행사 주도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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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과의 씨름을 어느 정도 끝냈다. 꿀맛 같은 휴식이란, 표현을 나에게 쓰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씨름한 영향인지, 밖에 나가서 차 한 잔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원래 마음이 안정되면 외출할 때 들고 다니는 책도, 뭔가 안정된 상태에서 골랐는데, 이번엔 들쑥날쑥이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손에 안착한 것은 목수정 선생의 [야성의 사랑학]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를 보았다.  

사람이 뭔가를 늦게 경험하게 되면, 참조가 되는 '평가의 소리'들이 있다. 내가 최근에 잡은 책 한 권, 본 영화 한 편. 둘 다 어느 정도 출시일과 개봉일이 좀 지난 후 였기 때문에, 난 자연스레 '평가의 소리'를 꽤 빽빽하게 듣고 '본-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이란 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앞에서 좋은 소리를 해놓으면, 나의 본 경험이 실망스럽더라도, 어느 정도 좋은 경험을 했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려는 습성이 있는 듯하다. 책을 평가하고, 영화를 평가하는 사람도 물론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그랬을 때, "생각보다...(난 별로던데..) ..생각보다...(난 괜찮던데).."란 말을 쉽게 꺼내고, 그것에 대한 '입바른' 근거를 대기보다는, 일단 남이 해 놓은 소리에 자신의 것을 겹치기가 일쑤인 것이 우리네 삶. 그러면서도, 그러한 평평한 면을 울퉁불퉁만들고 싶은 것도 우리네 삶이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목수정 선생의 [야성의 사랑학]은 생각보다 야성적이지 않았고,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는 생각보다 부당하지 않았다.   

 

 

 

 

 

 

 

 

 

1

[야성의 사랑학]이 가진 메시지는 당연히 우리 사회가 귀기울여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책 속의 모습이 지나치게 산만한 아이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메시지를 상쇄시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었다. 비록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연구서도, 그렇다고 경수필도 아닌, 자율적인 글의 공간 안에서 도출된 저자의 '야성적인 기지'의 공간이라 칭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가장 '핫'했던 혹은 트렌디한 사례들의 수집을 정리하고, 그것을 점검하는 저자의 '풍성한 열정'이, 보다 집중적이고 신선한 사유를 동반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챙겨본 한국 사회에 대한 열의는 인정하면서도, 그 열의의 수집 속에 나오는 결어들이 수집 과정에서 보여준 만큼의 열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쪽으로 계속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오히려 목수정 선생이 사랑과 경제의 측면에 더 중심점을 잡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봤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예전에 내 블로그 이웃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었던 요즘 남자들의 섹스리스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지점. 그것을 오늘날 경제적 삶과 연관시켜 볼 때 나타나는 한 사회상이라고 더 확실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문제화'시켜볼 수 있던 것. 이 지점은 이 책의 좋은 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케이블 tv에 나오는 [러브 스위치]나 드라마들을 보고, 여전히 '원 나잇 스탠드'에 불을 키고 달려들어 여자를 꼬시고, 섹스로 점수를 매기는 남자들을 두고, "남자는 다 그렇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다른 한 켠에서, '성공불감증'과 동반되게 자라나는 '자지불감증'('자지'라는 표현은 어릴 적 내가 잘 보던 뉴에이스 국어사전에 엄연히 나오는 표현이니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본다. 그래서 쓰겠다) 에 걸린 20대 후반 남성들의 모습도 유심히 사회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책 속 내용에도 언급이 되는 부분이지만,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애'의 과정 속에 다가오는 육체 간의 접속은 마냥 즐겁진 않은 것이고, 남성 또한 이런 불행의 영역에 속해있을 수 있다는 점은 비단 남/녀 구분에서 오는 불행과 행복이 누구에게 더 많은가의 차원이 아닌, 거시적인 맥락의 통찰을 필요로 한다. 특히, 이러한 불감증이 나는 비단 중년의 비애만이 아닌 점점 나이가 내려가는 상황. 특히 20대들의 '섹스리스' 또한 우리 사회가 '혈기왕성한 세대인 데 무슨..."이라고 단정짓지 말고, 그 깊은 속내를 들추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결국 목수정 선생이 '야성의 사랑'을 위해 권유하는 것은 '문화적 연인관계'를 위한 노력의 구축이다.문화라는 영역 안에서 서로의 사고를 공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언어들에 감화를 받을 수 있는 감성과 이성의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일상에 뿌리내릴 때, 저자는 이 시대가 '야만적 사랑'이 아닌 '야성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덧붙임) 남자들이 군대 안 가는 연예인 비난할 시간에, 자신을 위한 문화적 수양을 더 쌓아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시간을 더 갖는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모자란 남자'도 좋아하는 것이 사랑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건 좀 냉정하게 말해서 '희생'을 낭만적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 남자들의 이런 문화적 수양과 에로스에 대한 간접경험을 더 하고 싶다면, 옴니버스 영화 [오감도]의 장혁 파트를 볼 것.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2  

(스포일러 有)

지난 주말에 본 [부당거래]는 이런 장르에 잘 나오는 대사식으로 말하자면, '잘 빠진'작품이었다. 그러나, [슈퍼스타 k]의 이승철처럼 평가를 내려본다면, 뭐 "감동은 주었지만, 감탄을 주지 않았다.."와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씨네21' 기자들, 평론가들은 다 높은 점수를 주었던데, 개인적으로 너무 후한 점수를 준 게 아니었나 싶었다. 이제 이렇게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라는 메시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타나는 정의롭다고 '가정된' 영역의 혼탁함이 사회적 술수이자 장르영화의 술수가 되면서, 그 술수가 많이 눈에 익고, 그만큼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장르 영화의 장점이자 한계가 아닐까 싶다. 장르는 우리에게 늘 기대치라는 것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영화의 사회적 언어이지만, 그만큼 이 사회나 영화나 '진부한 장르의 틀'에서 놀고 있구나,라는 생각 또한 쉽게 들도록 하니 말이다. 

영화가 중반부까지 황정민 - 류승범 - 유해진의 3각구도 안에서 팽팽한 끈을 만들었다가, 갑자기 유해진의 죽음부터 발생되는 반전과 설정들은 오히려 이런 장르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추구하는 '정당한 재미'를 위해 사회적으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의 부당함만을 키운 것으로 귀결된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사회학자 로익 바캉이 [가난을 엄벌하다]에서 제시했던 '기업화된 경찰'이란 대목을 이 영화에서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경찰 또한 '공권력'이란 영역 안에, 그 어떤 이윤 추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순수한 집단으로 간주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측면을 극복하고, 경찰 내부의 '기업화된' 모습들, 경찰의 '집행'이 아닌, '경제 행위'로서의 측면을 부각시키려 했다.  

덧붙임) 영화를 보고 난 후, 주양 검사 역할을 맡은 류승범이 일부러 실제 검사들의 생활상을 공부하지 않고, 자신만의 캐릭터로 녹여내려 했다는 이야기를 같이 본 친구에게 들었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황정민'의 캐릭터가 영화 중반부 이후 쳐지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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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은 잘 끝내신 모양이죠? 다행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글은 꼼꼼히 읽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댓글부터 쓰네요 ㅋㅋ
힘들게 쓰셨는데 좋은 결과 있길 바라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11-16 23:25   좋아요 0 | URL
잘 끝내진 않았지만, 나름 선방은 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아서 손을 이리저리 봐야 할 것 같아요. 후와님 잘 지내시죠? 알라딘 블로그에 간만에 들어와서 포스트도 제대로 못 읽었내요. 조금만 지나면 밀린 글들 다 읽겠습니다..^^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늘빵 2010-11-1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남자들이 군대 안 간 연예인들, 또는 방위로 빠지는(?) 연예인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건,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야 한다, 는 식의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고 봐요. 같이 구렁텅이 경험을 해야 한다는 거죠. 편법을 쓰거나 백을 써서 안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야 하는데 아직 안 간 이들이 대상이 되는 건, 아무나 다 치니깐, 내가 한 번 친다고 더 아프겠냐, 뭐 이런 심보. ^^ 징병제로 바꾸면, 쓸데 없이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없을 텐데 말여요.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군대를 없애야 한다고 보지만, 이게 어렵다면, 징병제로 바꿔서 취업난도 해결하고, 이렇게 상처주고 상처받는 일도 없어질 텐데. 글보다 뭐 이런 생각이 나서 달아봅니다. ^^ 논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이 얼그레이님 포함 주변에 몇 있네요. 어서 완료하고 탈출하시길.

얼그레이효과 2010-11-16 23:27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의 '궁극적으로~'그 단락처럼 세상이 바뀌길 바라지만,.,아직은 어렵겠지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프락사스님도 날씨 추운데 건강 잘 챙기시구요.

빵가게재습격 2010-11-1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셨군요...기다리고 있었나이다...^^ 고생하셨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11-16 23:28   좋아요 0 | URL
재습격님, 간만입니다.^^ 제가 슬쩍 둘러보니, 열공하시던데요.ㅎ 들려주셔 고맙습니다. 영화에 관련된 해외 원서들 읽은 것, 여유 생기면 블로그에 종종 리뷰로 공유하겠습니다.! 건강 챙기시구요!

2010-11-28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9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논문 마지막 정리로 도통 책을 못 읽었다. '읽었던 책'을 또 읽고, 또 읽고. 그러면서 문득 생긴 '지겨움'이 일종의 구취처럼 느껴질 때까지, 또 그렇게 여러 글자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지만, 세상을 '읽는 것' 또한 게을리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가장 가슴에 와 닿는 풍경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연금 정책 반대 시위'다. 이런저런 소식통들을 접해보니, '프랑스적 저항의 전통'에 맞게, '10대들의 분노'가 포커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어느새 '진부한 부러움'이 된 듯한 표현. "아,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우리나라 십대들, 이십대들은 게임방 가기 바쁜데.."와 같은 비교는 하고 싶진 않다. 차라리, 그런 비교 자체로 시작되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어떤 맥락에서, 이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 '차갑게, 냉엄하게'볼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암튼, 결국 이것은 '교육'의 문제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교육의 뿌리'라고 하는 말이 더 적확할까.  

 

 

 

 

 

 

 

 

'근대'라는 개념이 성립되면서, 그 근대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사람의 '발명'이란 줄을 놓지 않았던 필립 아리에스 같은 학자들의 의견을 나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청소년'이란 건, 지금 이 순간, '그저 그 시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젊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 이것은 우리가 '앎'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지혜가 아닐까. 

우리의 아이들은 늘 '관리'받아왔고, 또 그렇게 '돌봄'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있다는 시선 아래 놓여져 왔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조숙함'을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한편으론 그러한 '조숙함'을 하나의 유희적 대상으로 다루어 왔다. 아이들의 똑똑함은 그 스스로의 독립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결국 '어른'이라는 선에 다가올 즈음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는 '신기함'으로만 치부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조숙함'이란 표현은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저들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른들의)시위'에 동참한다 말인가!"라는 말 자체는 거부되어야 한다. 오히려 이런 시선이 조장하는 건, 그들의 의지에 그 어떤 의미를 덧붙임으로써, 그들이 '어른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거북한 통과의례의 형성이다.  

내가 진정으로 저 시위에서 부러운 것은, '잘못된 것'을 고쳐보겠다 나서는 사람들의 실천, 또 실천이다. 일단 실천 그 자체에 대한 부러움만이 가득하다. 고로, 저 풍경에서(그 어떤 세대적 강조 같은) 신기한 것은 없다. 아직, 인간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살만한 자격이 있다는 감사함, 그 하나의 확인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스스로의 책임감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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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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