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중독적'으로 집착했던 통치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내 믿음을 철회하는 중이다. 나는 '통치성'이 직관과 수사의 기획이 궁핍했던 권력 비판/비평에 유의미한 시선을 제공했다고 그 의의를 수긍한다. 그러나  통치성이 비판하려는 권력의 새로운 형태와 그 형태의 효과를 수용하는 이들의 비극, 그 사이가 여전히 뭔가 유사-논리적으로 보이는 듯한 언어로 채워져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쉽게 말해서, 그 권력의 새로운 형태와 권력의 밑에 있는 일반 시민의 삶-아픔이 바로 직결된다는 그 가설 안에서 볼 때, 통치성의 주창자들은 '새끈하고 매력적인'시선을 두터운 실증적 연구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충분한 연구적 대안을 내어놓고 있진 않다는 생각이다. 즉, 통치성이 주창하는 권력의 효과와 실제 시민들이 느끼는 삶의 비극이 서로 상관된다고 하는 그 연결고리가 취약하다는 걸로 정리할 수 있겠다. 오히려 통치성이 주목하는 그 권력 비판의 섬세한 시각이 권력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진부한 통치성 비판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아.. 이것..참 푸코 선생 조금만 더 살지 말이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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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11-05-10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앱솔루틀리 어그리입니다. 푸코는 오히려 그의 저술에 일관된 탈형이상학적 권력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의 관점에서 볼 때 더 이론의 활용외연이 넓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0 11:00   좋아요 0 | URL
게슴츠레님 반갑습니다. 저도 말씀하신 부분에 동의합니다. (그나저나 블로그의 포스가 ㅎ ㄷㄷ 이던데요!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게슴츠레 2011-05-1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같은 게 있나요? ㅋㅋㅋㅋㅋ그냥 찌질터인데요 뭐 ㅎㅎㅎ 오히려 그 포스가 뭔지 제가 궁금하네요. 저야말로 얼그레이효과님보면서 아 그냥 이리 썼으면 될걸 그러고 있습니다. 종종 뵙도록하지요.

얼그레이효과 2011-05-11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시는 분야 그리고 생각하시는 지점이 다양하시던데요^^ 저는 워낙 얕아서 큰일입니다. 종종 뵈어요!!

lowbudget 2011-05-2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댓글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사실 저 역시 얼그레이효과님의 비판에 극구극구 동의합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건 저들이 제대로 했나 안 했나를 비판하는 것보다 우리들이 얼마나 제대로 할 수 있냐인 것 같아요. 사실 솔직히 통치성 공부하면서 효과님이 말씀하시는 "두터운 실증적 연구"를 저들한테 기대하지 말고 "우리들"이 하면 되는 것 같아요.우리들이 직접 하지도 않고 저들의 연구가 한계를 갖는다고 말 할 때 여전히 우리들은 먹던 음식 질렸다고 불만하는 것에 그치는 것 같거든요.

얼그레이효과 2011-05-24 14:4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저 짧은 글에 제 모든 논리가 완벽하게 구현되었다고는 보지 않아서요. low님의 그 이후 연구를 통한 실천에 대한 부분은 동의합니다. 저는 아마 이 글에서 통치성 연구를 통해 사회비판의 언어를 만드시는 분들에게 느끼는 너무 시니컬한 뉘앙스? 그런 것에 대한 반감을 더 표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지금 해봅니다. 저는 이제 공부길을 접었지만, 가끔 이 블로그 들려주셔서 low님께서 좋은 대안 공유해주시면 고맙겠다는 생각합니다. 좋은 덧글 고맙습니다.
 

 

 

 

 

 

 

 

 

제발. 이제 이런 책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것은 문화연구자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냐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통해 읽고 싶은 것이 과연 '교재스러운' 흔적일까? 이것은 '비판'이란 태도와 '언론학계의 실적'이란 현실을 묘하게 매개하고 있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이 시대를 향한 처방전이다. (난 비판의 무용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비판의 센스가 없음을 탓하는 것이다)특히 언론학에 계신 미디어/문화연구자라고 불리우는 많은 교수님들은 언론학 카테고리에 가서 지금까지 나온 책들을 쭉 보라. (제목과 목차만이라도 보라) 비판커뮤니케이션이 세울 칼날은 원래 그 비판커뮤니케이션이 대상으로 했던 언론학이라는 학문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언론학의 위기'를 말해야 하지 않는가? 언론학에는 왜 영웅적 학자들이 등장하지 않는가?란 심도 깊은 반성이 포함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지금 대중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그 욕망을 추리하려는 노력을 함께 가져보려는 태도를 글로 표현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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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됩니다 한밭 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 윤제림, <가정식 백반> -

 

# 1. 어쩔 수 없는 선택

5월 5일 어린이날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밝아지는 이 날씨를 '차도남'컨셉 커튼 닫기로 촤악 막아버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근데 별로 한 것도 없이 배가 꼬르륵. 요즘은 '취업 우울증'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더욱 싫어졌다. 절친인 동무가 나를 불러주는 애칭, '전단지 할배'를 떠올리며, 서랍 속 전단지를 꺼낸다. 족발,보쌈,냉면,치킨,피자,회,찜닭. 할배모드로 혀를 쯧쯧 차며 어떤 메뉴 컨셉의 부재를 탓한다. 이 컨셉의 명칭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대신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이 필요하다. '엄마가 차려주신 그 잡채, 그 된장찌개, 그 고등어조림, 그 콩나물 무침..' 그러다가 입 밖으로 한 번, "에이씨..우리 동네는 왜 이렇게 가정식 백반 잘 하는 데가 하나도 없는 거야"라며 신경질을 낸다. 어쩔 수 없이 츄리닝 하의를 벗고 청바지를 대충 벨트도 하지 않은 채 입는다. 곱슬머리가 고정시켜 놓은 산만한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모자를 쓰고, 눈꼽을 좀 떼고 운동화를 꼬깃꼬깃. 그리고 슬그머니 엘리베이터를 탄다. 아, 1층에 내려갈 때까지 누가 중간에 타면 안돼. 눈을 감는다. "오늘은 삼각 김밥 유통 기한 안 지난 것 남아 있겠지?"

 

 

# 2. 동네에 정겨운 한식당 많나요?  

경기도 B시로 이사온 지도 어느덧 햇수로 7년째다. 그동안 내가 여기에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내가 자주 다녔던 단골 한식집이 대부분 망했다는 것이다. 보통 '자취'를 하는 남자들을 소개팅에서 만나면 그런 남자들이 여자들의 "그럼 요리 잘 하시겠네요"란 진부한 질문에, "뭐 김치볶음밥은 기본이구요. 스테이크도 좀 할 줄 알고, 찌개 종류는 잘 하죠.."이렇게 진부한 대답을 하지만, 사실 그런 자취생이 몇 명이나 되려나. 대부분 부시시한 눈 정리하고 1,500원짜리 '원조김밥' 1 줄과 자제하려 하지만 잘 안되는 탄산음료 1병 드링킹, 아니면 삼각김밥 몇 개에다 한 개만 끓이면 배가 아쉬워하는 라면 두 녀석으로 이렇게 끼니를 채운다. 그것이 질리면 찾는 곳이 동네 가정식 백반집일텐데. 내가 사는 B시의 이 동네는 이제 가정식 백반집이 한 곳 남았다(모두가 '엄마의 맛'이라 칭하며 포스를 자랑하는 한 곳). 사실 한 곳만 남은 것은 아니다. 두 곳 정도가 더 있는데, 이 집은 사실 좀 있으면 망할 것 같다(이유는 정말 맛이 없기 때문에). 사실 좋은 '가정식 백반'을 사 먹기도 시켜 먹기도 '두려운' 요즘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내 식습관 투정보다는 어떤 사회학적인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연구 더듬이'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예전부터 있었다.  

일단 인구통계학적인 측면을 잠시만 흉내내어 보자면, 내가 살고 있는 B시 S동은 유독 직장인들과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사는 원룸지역이라고 그 특성을 요약할 수 있다. S동은 특히 인천과 서울 가는 방향을 매개하는 지역이라, 버스와 지하철 교통이 나름 잘 발달되어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그런 가운데 주목해 볼 것이 소비의 특성인데, 음식 소비의 경우 주류를 포함할 때 술집과 고깃집이 먹는 장사 가운데 거의 9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1할이 떡볶이와 튀김 파는 노점상, 동네 피자 몇 곳, 횟집 몇 곳, 중국집 몇 곳 정도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이 자주 찾는 두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가정식 백반집이 있다.  

가정식 백반 소비에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면, 가정식 백반집이 요즘 증가하고 있다는 내용이 종종 발견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서구의 패스트푸드에 질린 직장인 등등이 엄마의 솜씨를 그리워한다는 둥으로 요약되어, 그 판매의 변이 실렸는데, 사실 그것은 '현 시기의' 가정식 백반집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치우쳤다. 내가 우려하는 건 바로 올해 서른 살이 된 나. 그리고 나를 포함한 1981년생, 1982년생 00학번, 01학번 세대들이 한 40대 정도나 50대가 되었을 때 과연 어머니의 손맛을 경험할 수 있는 한정식집을 동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일단 '우리 세대'라고 거칠게 요약하긴 부담스럽지만, 직장 생활 혹은 학교 생활로 인한 나름의 '식습관의 사회학적 구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삼각김밥이나 편의점 도시락, 그리고 한솥도시락 등의 매출이 점점 증가한다는 기사를 보는 가운데, 사람들의 식습관을 보면 매 끼니가 밥과 국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사라지고 있다. 대신 '아/점'이라든지, '점/저'문화의 발달로  그 문화를 구성하는 하루의 '맛난 한 끼'라는 컨셉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러면서 또 동네마다 주목해서 보는 건 각종 반찬가게의 성행이다. 물론 그렇게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내가 속한 S동은 직장인들이 퇴근할 때가 되면 그야말로 난리다. 아주머니들은 반찬을 담아주느라 정신이 없고, 손님들은 "아니, 이 집 반찬 여러개 맛있게 잘하더니..왜이리 메뉴 개발을 안 해.."라며 타박을 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직접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하는 것보다 '사 먹는 게'싸다는 소비 기대의 효용성이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 3. 한식의 세계화? '한식의 서민화'라는 또 다른 아이러니의 발생 

다만 미래의 차원에서 접근했을 때, 한식은 나름의 이중적인 문화적 범주로 소비될 것 같다. 하나는 최근 국가에서도 밀고 있는 '한식의 세계화'같은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국가 브랜드 차원에서 고안해내는 VIP식 한식 메뉴, 그것이 갖는 미학적 쾌감과 상품성 등. 다른 하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친근하고 이웃같고 집에서 먹는 느낌이 든다는 '한식의 서민화'다. 그런데 사실 '한식의 서민화'라는 것은 모순이 될 수 있는 표현이다. 원래 한식은 우리와 같은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최근 문화부장관이 호텔에서 몇 만 원짜리 김치찌게,된장찌게를 누가 먹겠냐로 시작한 한식 폄하를 곱씹어보면서 한식의 세계화라고 하는 담론에 가려진 '한식의 빈곤'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한식의 세계화'라는 담론이 포함시키고 있는 것, 그리고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무얼까? 이런 맥락에서 '한식의 서민화'라는 이 모순된 용어는 아마 우리 세대가 4,50대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쉽게 말해서 한식이 정말 우리가 예전처럼 쉽게 찾고 즐길 수 있는, 그리고 가족과 함께 먹는 그 맛으로 보존가능한 식문화로 남아 있을까? 우리는 이제 그런 식문화를 느끼려면 김밥천국 같은 곳에서 파는 여러가지 잡다한 유사 메뉴로 그 느낌을 경험하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과연 우리 세대에 우리의 밥을 챙겨줄 몇 천원짜리 가정식 백반집 아저씨, 아줌마가 탄생할까? 나는 '한식의 세계화'라는 담론이 갖는 저 국가 브랜드의 욕망 속에서 정작 우리 동네의 현실은 어떤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난제 하나. "그렇다면 당신이 손수 만들어 먹으면 될 것 아니요?"라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요즘 내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거시적인 차원도 고려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선 요즘 한국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문제이지만 이상기후 현상 등 외부 조건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음식 재료값의 들쑥날쑥모드다. 관련기사들을 찾아보면 이상기후로 인해 신선채소값이 올라 그것을 대용할 간편메뉴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은 우리도 일상을 통해 체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 직장과 여가의 문제다. 직장 내 노동 강도와 그것으로 인해 과중되는 스트레스, 또 업무 외 행동의 부담으로 인해 미래 세대가 앞으로 직접 요리를 하여 먹을 시간의 보장 여부, 그리고 그것에 신경을 쓸 여부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인 차원으로도 고민해 볼 문제다. 여기에는 "아. 넌 여자애가 요리도 못하냐", "야, 요새 요리하는 것에 남자/여자 구분이 어디 있냐"라는 갈등으로 소비되는 심리적 피로도도 함께 계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지금은 잘 찾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예전부터 "어휴,..저 복잡한 메뉴를 어떻게 다 해 먹어"라고 생각한 음식메뉴들이 인스턴트 형태로 대형마트에 다양한 메뉴로 더 진열되어 소비자를 유혹할 가능성은 커진다.    

 '지금' 가정식 백반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들에서 나는 미래의 불안함을 느낀다. 이런 불안함을 지적으로 고민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이런 생각하다가 배고픔을 잊을 수도 있고 ㅋ) 『음식인문학』(주영하, 휴머니스트,2011)이란 책이 나온 것도 어떤 측면에서 이런 지적 고민이 더욱 더 증가하리란 걸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싶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해석은 각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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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5-05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호텔에서 김치찌개를 팔면 격이 떨어진다네요...
한식세계화?...그저 꿈은 아닐지

얼그레이효과 2011-05-05 23:45   좋아요 0 | URL
어린이날 잘 보내셨는지요?^^ 문화부장관 수준이 참...그렇죠. 어떻게하면 팔아먹을까 마인드..그래서 인디영화도 '관변'인디영화로 만들려던 속셈도 있었고 말이죠...그건 아마 인촌이 형님 시기였죠.에효.

비로그인 2011-05-06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정식 백반'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도 궁금해지는군요. 어쩐지 억지로 만들어진 말 같아서요. '가정식'이라고 했으니 외식문화가 발달한 뒤일 테고(집에서 먹는 것처럼 해주겠다!) '백반'이라면 예전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명절에나 구경할 수 있는 나름 '귀한' 상차림이었을 텐데...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인지 가끔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이란 걸 시켜 먹을 때면 '뭐야, 우리집은 평균 가정도 못 되는거야?' 하고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답니다 ㅋㅋ^^

얼그레이효과 2011-05-06 09:3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용어와 한국적 맥락. 그런 것도 고민해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pjy 2011-05-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불러주든 간에 그 백반집이 제발 멀쩡하게 유지되면 좋겠습니다만,,이미 다니던 곳들은 대부분은 없어졌습니다요~
뉴스에서 말하는 건 다 딴동네 이야기입니다 ㅡ,.ㅡ;
요새는 백반집 가야되는 상황에 몰리면 기사식당을 좀 알아보고 댕깁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06 13:59   좋아요 0 | URL
기사식당류 김치찌개...기사식당류 부대찌개의 그 맛이란...#_# pjy님도 저랑 유사한 경험을 하셨군요.

pjy 2011-05-06 15:57   좋아요 0 | URL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네 뭐네해도~ 가장 손쉽게 1인분에 고기주는곳은 그곳뿐ㅋㅋ 맛있는! 기사식당 엄청 좋아해요^^

2011-05-06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11-05-09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기사식당의 계급성'이랄까?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던 중이었는데요. ^^

얼그레이효과 2011-05-09 11:05   좋아요 0 | URL
앗 바람구두님 반갑습니다!^^ 기사식당의 계급성. 흥미로운데요~ 즐찾한 바람구두님의 블로그 들어갔는데, 바람구두님의 '아카이브' 구축 능력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문화망명지를 처음 알고 나서.."와..어쩜 이렇게 정리를 잘 하시나.."감탄했었는데요..혹 노트 필기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훔쳐보며 감탄한 기분이라고 할까요.^^
 

 

 

 

# 1  

개콘 <생활의 발견>이 화제라고 한다. 사실 이 코너가 지향하는 개그 컨셉이 그리 색다른 것은 아니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두 분 토론>처럼, '생활을 읊는 개그'는 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 같다. 어쩌면 <생활의 발견>은 이런 개그 컨셉이 대중들에게 가장 잘 먹힌다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코너인지 모른다. 개그맨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그란 것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같아서 우리가 배를 잡고 웃는 장면이 결국 우리의 삶 그 자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임은 여전히 신기한 대목이긴 하다. (나처럼 '진지함'세포가 온 몸에 박혀서 타인을 웃기려는 능력이 없음을 '자학'하는 사람에겐 그 신비감은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개그를 평할 때, 우선 '일상성'이라는 용어를 갖다 쓰면서 그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90년대스러운 것'같다. 다만 '일상성'이란 용어가 그동안 한국의 영화비평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달라진 위상을 갖게 되었는지 검토해 보는 것은 내가 <생활의 발견>과 같은 개그 컨셉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줄 것 같다.  

 

# 2 -1

한동안 한국의 영화비평계는 '일상성'이란 용어를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렴풋이 내가 이 용어에 대한 궁금함을 갖고, 이 용어가 자주 들어간 한국 영화를 찾아보던 때가 199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영화잡지를 뒤적거리면서 나는 '일상성'이란 용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 줄 몰랐지만 이 용어가 자주 들어가 있는 영화들을 보면서 "아..이런 게 일상성인 것인가" 수준으로 그 용어를 '어림짐작' 알고 있다 생각했다. 이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알지 못하고 같은 진부한 죄책감 놀이에서 벗어나 당시 이 용어가 반영되던 영화 특성에 대한 담론을 살펴보면 우리의 '지루한' 삶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그런데 그것을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는 '나'가 받는 어떤 놀라움, 작은 재미들에 대한 재치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이 용어가 흥하면서 영화배우들이 우리처럼 손톱을 깎고, 기계치인 아버지에게 텔레비전 트는 방법을 알려주고, 서로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들이 '소소하게' 펼쳐지는 상황 같은 것이 더 미세하게 다른 영화들에 퍼져 나갔다. 누가 일기를 써보라고 하면, 그 일기에 "오늘 나는 아침부터 뭐 했고, 점심엔 뭘 했고..."같이 적는 것처럼. '일기'같은 영화들이 한 때 유행이 되었다.  주류의 이런 정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전염'처럼 계속 확산/전파되어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범'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일상을 낱낱이 보여주기, "아, 맞어 정말 우리 이렇게 살잖아"라는 말이 나오게끔 만드는 장면을 재현하기가 저널리즘 영화비평계의 찬사를 구할 수 있는 수단, 미래의 박찬욱, 봉준호를 꿈꾸는 이들이 한국의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입상할 수 있는 '창의'로 간주되기도 했다. 

 

   

 

 

 

 

 

 

 

 

# 2-2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널리즘 영화비평계에서 '일상성'이란 용어를 미덕의 흔적이 아닌 퇴보하는 영화의 흔적을 찾고 싶을 때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느 시기, 어느 영화라고 다 지칭할 수 없지만 비평가들은 '일기'같은 영화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공교롭게 그런 시선을 접할 때 나 또한 '일기 같은 영화'에 진부함/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입맛'이 까다로워졌다고 할까. 일상을 스크린을 통해 '보고'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고 싶었다. 내겐 그 작품이 에릭 로메르의 <비행사의 아내>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스토리와 그 의미를 구구절절히 읊기 보단, 뭐라고 할까. 일상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지만 어떤 '정신착란적'인 행위들이 영화 속에 드러나는 것. "에이 또 그 이야기야?"와 "에이 설마 일상에서 저런 일이 있을까?"라는 그 질문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는 영화(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그래서 가끔 다시 찾아본다)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 3 

사실 요즘 흥하는 개그 컨셉을 보면 '정신착란적'인 캐릭터가 주는 야릇한 웃김은 없어진 것 같다. 대부분 웃겨야 한다는 강박 속에 나오는 것은 인기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그 자체, 혹은 그 자체를 보는 우리들. 마지막으로 그런 우리들이 겪은 미세한 에피소드를 그대로 보고 하는 개그가 뜨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가 전문적인 개그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건 건방지고 웃긴 일이지만, 적어도 이런 개그가 흥하는 데 있어 그 공감을 채우는 대중의 특성 같은 것은 나름대로 내 색깔을 칠해볼 수 있겠단 생각을 해 봤다. 난 그것을 '말적인 몸'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이고 싶다. 

'말적인 몸?' 요즘 개그가 '몸'이 아닌 '말'이 대세란 것은 다 느낄 것이다. (어쩌면 '몸개그'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은 '몸'을 통해 웃긴다는 영역이 그만큼 작다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짝짓기 프로그램이나 심지어 우리네 소개팅에서도 말로 웃기는 사람은 매력이 급상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이런 개그를 의식하고 내 개그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연구를 일상 속에 하기 시작했다. 유머러스함이 듬뿍 담겼다는 타인의 재주를 글자로 / 말로 확인하면서 우리가 평소에 해 왔던 일들을 남을 웃기기 위한 의도로 혹은 우연하게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일상 속 웃기는 이야기라며 글을 올리고 수많이 달린 덧글 속에서 자신의 웃기는 능력 있음/없음을 확인하는 것은 인터넷 언어가 글과 말의 중간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그 진부한 커뮤니케이션학적 관점을 대입시켜보는 것을 넘어, 일상 속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개그'의 코드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하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 

 

# 4  

사람은 입이란 신체기관이 있어 그 기관이 전담하여 '말'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끔 <생활의 발견>과 같은 컨셉의 개그를 보고 있자면 개그맨의 퍼포먼스 자체가 사람의 말과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개그맨 A는 남자 친구 역을 맡은 개그맨 B와 함께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을 '우리 처럼'시키며 삼겹살을 시킬 때 우리가 쓰는 생활의 언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의 몸짓은 내게 '몸'보다는 '말'로 느껴진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도 개그이지만 그들의 몸 전체가 '말'로 느껴진다는 기분이 보는 내내 들었다. 그러다보니 이 말이 주는 논리적인 치밀함이라고 할까? 개그맨 특유의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미리 배치된 그 논리정연한 치밀한 퍼포먼스가 '말 잘하는 사람'이 흔히 치는 개그 이상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그들이 인정받는 개그는 우리네 일상에서 당연하게 일어난다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부리고 싶은 욕심은 그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을까?에서 출발한다. 갑자기 터지는 작은 광기, 그러나 그 어색한 놀람 속에 이후 충분히 해석 가능한 행동들.  

"패밀리 레스토랑"과 "김밥천국"의 대립 구도, 항상 계산지는 남자 곁에 두는 점원의 행동'에 대한 발견,  백화점에 가서 남자/여자가 보이는 구분된 행동 등등등 우리의 / 우리가 찾는 개그가 늘 '남녀탐구생활'같은 관점에  치중되어 있다는 건 이 상황 자체를 '웃김의 강박'을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는 일상 속 사람들의 강박은 아닐런지. 그 강박을 '웃겨야 함'을 업으로 하는 개그맨들이 더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어느 문화평론가의 글 제목처럼 "웃으라고 윽박지르는 세계"에서 우리의 일상을 빽빽하게 전하는 이 '말적인 몸'같은 개그를 통해 내가 요즘 웃고 있는 건 거기서 감지되는 '웃음'에 숨겨진 슬픔 때문이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해석은 각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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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의 '맛'이든, 고통의 '멋'이든, 둘 다 변태적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은 시간에 고의적으로 혹은 우연하게라도 '고통의  극한상태'를 나를 대상으로 느껴보게 하려는 이 변태같은 짓을 한 번 이상은 시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손톱을 건조한 공책 종이에 박박 긁어보는 것? 책을 정리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온 종이 모서리라는 칼날? 밍밍한 속을 멈출 수 없어 손가락을 입 깊숙이 넣고 마음껏 토하기? 이런 '고통의 순간'을 경험하면, 다시 이 순간을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이 만들어 놓은 '잔상'은 오래 가고 또 오래 간다.

꿈은 이 잔상이 실현되는 '곳'이다. 깨어 있음과 고통이 결부되었을 때 나오는 그 인간적인 두려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두려움. "두렵지 않아", "아니, 두려워"같은 '두려움'을 둘러싼 인간의 표현으로 인하여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꿈에서는 일단 부차적인 문제다. 꿈을 꾸고, 꿈 속에서 예기치 않은 고통의 순간들이 다가오면 인간은 무방비 상태로 꿈과 맞닥뜨릴 뿐이다. 그리고 깨어나서 '꿈-고통'을  자기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이야기'로 풀어보기도 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고통을 담아두거나 혹은 고통의 체감을 약하게 하려는 장치일 수 있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꿈과 대면했던 순간을 '인간이라는 존재'로 지켜냈다는 약간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 2

 

흔히 꿈은 우리가 살면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는 것, 혹은 우리가 살면서 일어났던 일들 중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대한 '삶 속의 반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꿈이 '고통'과 결부되어 있다면 우리는 꿈의 '위상'에 조용히 혹은 거창하게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감탄은 꿈에 대한 신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꿈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혹은 꿈과 현실의 상이함을 습관적으로 들며, 꿈을 현실에 복속시킨다. 현실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꿈은 현실의 부속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야. 그거 다 너 잘되라고 나온 꿈이야? 알지?" 여기서 꿈은 꿈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미는 현실에 부착되도록 조정되고, 꿈은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꿈은 꿈이어야 한다는 자리 찾기가 인간을 통해 실행된다. "정말 꿈만 같아"라는 '습관어'들 속에서 알 수 있듯이.

 

#3
 

그러나 그 '꿈만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꿈 / 현실'에 놓인 이 ' / ' 라는 경계가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쌓아 놓았던 막임을 알게 된다. 이 막이 붕괴되는 '현실'을 경험했을 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 버리는 순간은 혼란스럽고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이 혼란과 소란에 대해 정작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자책한다.  그러나 이 자책이 손 쉬운 '애도'와 '연민'으로 바로 직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불안전함을 시인하면서 그것이 곧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성찰'의 힘은 진부한 듯 하지만 배제할 수 없는 보약이라고 여전히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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