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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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곗살은 없고
뼈로만 된



관절마디가 둥글고
심줄이 질긴



동네에서 힘이 제일 셀 것 같은
방앗간집



설희씨 아버지와 설희씨
피댓줄 와당탕탕 돌아가는 곳에서
쌀겨 뒤집어쓰며 일을 해서인지
목소리가 크다 칼칼하다



흥왕리, 동막리, 여차리
벼 낟알 도맡아 빻아왔는데
방앗간 기계들을 세운다 하니



방앗간 참새들은 어디로 떠날까
방앗간 참새들도 다른 참새들보다
울음소리가 크고 칼칼할까-110~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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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그리움
손택수 엮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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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1951~)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150~151쪽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를 동정하는 일도, 밤을 지새운 거미의 필사적인 그물짜기에 공감하는 일도 고통스럽기만 하다. 잠자리를 구출한다면 거미에게 죄를 짓게 될 것이고, 그대로 두면 잠자리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아야 하니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을 것이다.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는 판단 정지의 상태. 흔들리는 건 숲 전체만이 아니라 시인을 포함한 우주 전체다. 허리를 굽혀 거미줄이 다치지 않도록 지나가는 건 '채 해결 안 된' 생명의 질서를 그 자체로 존중한다는 뜻일 게다. 잠자리나 거미처럼 살펴야 할 식솔들을 거느린 마흔아홉 사내의 외로움이 문득 눈부시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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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09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리를 구출한다면 거미에게 죄를 짓게 될 것이고, 그대로 두면 잠자리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아야 하니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을 것이다.>에서 공감이 간다... 그렇다고 잠자리를 죽게 놔 둘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봤다면 어땠을까... 먼저 난 거미를 무척 싫어한다.^^;;; 하지만 나비나 나방 파리가 거미줄에 묶여 있다면... 그냥 보고 못 갈 것 같다...
 
선천성 그리움
손택수 엮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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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현(1932~)




어느 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 위해 담장가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 넝쿨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지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하다 참 신기하다 감탄을 연거푸 했지만 그놈 청개구리를 제(題)하여 시조 한 수를 지어 보려고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끝내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劫)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108쪽

청개구리가 놀라 폴짝 뛰어오른 담장이 시인에게도 있다. 청개구리와 시조 사이의 담장. 절간 안과 절간 밖 사이의 담장. 넘을 수 없는 그 담장이 절망을 부른다. 하지만 절망이 있기에 새로운 꿈이 탄생한다. 끙끙대던 시조 형식을 버리면서 청개구리 할딱이는 숨소리가 바짝 다가왔다. 다 찬미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청개구리처럼 화들짝 도약하는 말. 담장 안과 밖이 모두 청개구리빛으로 푸르다.-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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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그리움
손택수 엮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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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1921~1968)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에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14쪽

용인 사는 김현경 여사를 찾았다.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시인의 아내는 시인의 유품과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세간의 평이야 어떻든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단 하루도 같은 느낌으로 산 날이 없었다고, 늘 어디선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고. 여사가 말한 새로운 바람이 이 시의 '아픔'이 아닐까. 봄도, 여자도, 능금꽃도 아픔을 통해 봄이 되고 여자가 되고 능금꽃이 된다. 모든 생명 활동이 그렇다. 그러니 사랑을 한다는 건 고통을 품는 가슴을 갖게 된다는 거다. 아픔을 느낄 줄 아는 통점을 퇴화시키지 않고 간단없이 연마한다는 거다. 일을 마치고 돌아서는 내게 미망인은 말했다. 그 사람은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나는 '먼 곳으로부터 먼곳으로' 불어가는 바람소리에 한참이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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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 희망엄마 인순이가 가슴으로 쓰는 편지
인순이 지음 / 명진출판사 / 2013년 1월
품절


나는 바다보다 산이 좋다. 산에만 가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치유된다는 기분을 느끼거든. 아마도 어릴 적 강보다 산에서 뛰놀았던 기억이 많기 때문인가 봐.
찔레 새순이랑 싱아 꺾어 먹고, 까마중 따 먹고, 새 둥지에서 새알 꺼내 구워 먹고..., 사계절 언제 가도 산에는 늘 재미있는 일이 널려 있었어.

요즘에는 등산을 해. 등산로가 시작되는 산 아래에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북적하지. 저 멀리 보이는 정상에 곧 다다를 수 있을 것처럼 의욕과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사람들 말이야.
평지였다가 울퉁불퉁했다가 나무뿌리가 가로지르기도 하고 바위가 가로막기도 하는 등산로를 따라 산으로 오르다 보면 내 몸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려. 가슴이 답답해지고, 발목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삐걱거리고, 엉덩이 근육이 경직되기도 해.
그래도 계속 가다 보면 점점 숨이 차오르며 이마와 목 뒤로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오다가 금세 비 오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지.
그 땀을 닦아낼 무렵이면, 지금까지 아프다고 소리치던 내 몸 여기저기서 이상하게도 편안하다고 느껴진다. -123~125쪽

평소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곳들이 조금씩 이상 증상을 호소하다가 그제야 제대로 풀린 거지.
그즈음이면 처음 등산을 시작할 때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아. 한두 명씩 듬성듬성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 다시 숨을 고르고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다 왔겠지 싶으면 다시 또 나타나는 오르막길,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올라가면 다시 끝도 안 보이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도대체 어디가 정상이야?'




포기하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정표. 앞으로 몇 킬로미터만 가면 정상이라는 이정표가 늘어지는 다리에 힘을 보탠다.


그렇게 몇 시간 후면 눈앞이 시원해지면 더는 오를 곳이 없는 산 정상에 이른다. 배낭을 벗어 내려놓고 듬직한 바위에 기대고 서면, 시원한 산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며 지친 허파에 생명력 넘치는 새 공기를 가득 채워주지.
그때, 눈에 보이는 또 다른 산의 정상들. 나는 또 한 번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정상에 올라야 다른 정상이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123~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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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0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순이는 나랑 비슷한 것 같다...
나도 어릴 적에 산에서 자라서 그런지 바다보다는 산이 참 좋다.
산열매도 많이 따 먹고...
글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