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원성 글.그림 / 이레 / 1999년 8월
절판


절을 하면은



오체투지
내 온몸 땅에 맞땋아
정신마저도 가장 낮은 곳으로 나를 던집니다.


땅속 깊은 곳으로 묻힐지라도
님 앞에서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내 깊은 사모는
나를 잊은 투명함으로
벌거벗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한숨으로
망상은 구슬땀으로


나를 던져 버리 고요함으로
나를 다시 보게 됩니다.
나를 알게 됩니다.


세상을 모두 담을 수 있었던 그 큰 마음이
옹졸해진 땐 바늘 하나 꽂을 자리 하나 없는
마음이 되는 그런 나를 알게 됩니다.


내 안에 님과 같은 우주를 열어 보일 때
거기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0쪽

슬픔에게



슬픔이라 일컫는 그대여!
안녕하신가?


그대를 애타게 기다려 온 나는
가슴이 여린 사람인가 보오.


가끔씩은 그대와 함께
삶을 엮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고맙게도 너무 자주 찾아 주니
정말 반갑구려.


내 성숙의 키를 자라게 하는 그대는
착한 마음의 소유자인가 보오.


또다시 그대 내게로 가깝게 온다면
기꺼이
기꺼이
눈물을 준비하고
행복스레 맞이하리다.- 124쪽

나는 웃어야만 한다



나를 보고 기뻐하고
나를 느끼고 맑아지려 하고
나를 안고 위안을 삼고
나를 그리며 희망을 가지고
나를 품어 꿈꾸어 살고
나를 알고 열심히 정진하고
나를 생각하며 행복해지고
나를 간직하고 착한 일 하려는 사람을 위하여
나는 웃어야 한다.


병이 들어 아파도
며칠 밤을 새워 힘들고 피곤해도
슬퍼도, 외로워도, 괴로워도
참아야 한다. 버려야 한다.


나를 모르고
나를 잊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웃어야 한다.- 127쪽

나를 바라보기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나는 언제나 겁이 많다.
싸움을 하면 옹졸했고
시샘이 많아 욕심도 많았다.
잠이 많아 부지런하지도 않고
기억력이 없어서 공부도 못했다.
잘 참지도 못해 끈기도 없을뿐더러
마음이 약해 눈물이 많다.
누가 내 약점을 알까 봐 위선을 떨었고
잘난 체하려고 가식적이었다.
남의 말을 듣기 전에 내 말이 앞섰고
내 생각대로 해 버리는 고집쟁이였다.
욕망은 생각에서 지울 수 있지만
외로움은 견딜 수 없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나쁜 것만 모조리 안고 있는
나를 보고, 나를 보고
나를 탄식한다.
나를 내보임으로써 집착을 버리고
나를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방법을
나는 선택했다.


나약한 인간이라 인정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고 싶지 않기에.- 128쪽

인연



우연이었다기보다는 인연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전생 쌓고 쌓은 숱한 날들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 첫 만남을 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분명 나의 큰 잘못 때문일 겁니다.
그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떠나야 하는 아픔으로 헤어질 것입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애별리고愛別離苦*
처절한 괴로움으로 더 이상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부처님이 설한 8가지 인간이 가지는 고통 중의 하나.
생노병사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구한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심신의 5가지 구성 요소로 인한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을 의미한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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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원성 글.그림 / 이레 / 1999년 8월
절판


해인삼매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푸른 이끼 낀 석간에 샘물이 맑고
찬 산에는 달빛이 희다.
텅 비어 아무 흔적 없는 마음마냥.- 162쪽

세상은 변해 간다



세상은 변해 간다.
자연은 그렇게 태어나고 죽고
늙어 가고 병들어 죽고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없는데
변함 없는 건 그 진리일 뿐인데
사람들은 나에게 변했다고 한다.


내 얼굴이 변해 가는 것
내 생활이 변해 가는 것
내 마음이 변해 가는 것
겉부터 속까지 변해 버리는
당연한 자연의 순리에
사람들은 내게 변하지 말아 달라 한다.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또다시 생각이 변할 당신의 마음은 돌아보지 않고
변하고 있는 당신은 챙기지 않고
타인에겐 변하지 말라 한다.


우리는 우리 서로의 변모해지는 모습에
더 탁해지더라도 더 맑아지더라도
언젠가는 완성될 자아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170쪽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세상을 달관한 눈빛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저 가슴 깊이 밀려오는 넉넉한 포근함에.
나의 괴로움에 지친 육체를, 영혼을 떠맡기고 싶다.


숨소리에 가슴을 기대면
그에게서 솔 향기가 베어 난다.
그곳에 쓰려져 깊은 잠이 들어도 좋아.


가득 찬 고향의 정겨움이
온갖 망상과 교만을 잠 재우고
솔바람의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그는
아늑한 안도감으로 나를 인도하지.


차를 일구어 내는 손끝에서는 고요히 깃들고
산길을 걷는 뒷모습에는 수행의 무게가 느껴지는
그에게서 밀려오는 넉넉한 포근함에
그대로 나를 떠맡기고 싶다.- 188~189쪽

옷에 대하여



못 먹으면 잘 입기라도 해야지.
뱃속에 든 음식이야 알 바 아냐.
남이 속을 헤집고 보기라도 할 건가.
우선 보이는 게 옷이야.
상대방의 시선이 닿는 곳이지.
멋들어지게 못 입으면
별나게라도 입어야 해.
속에 든 거 없는 것들이나 그렇다지.
돈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마음만은 부자인걸
첫인상마저 궁상 흐르긴 싫어.
잘 입자. 세련미라면 더 좋고.
깨끗하게 다림질해 빳빳하게
잘 입자.
기죽는 건 죽음이야.
초라해지긴 정말 싫다구.
골빈 놈이라 해도 어쩌누.
지혜롭지 못할 바엔
겉으로라도 화려한 척하자.
깨침 있는 그 어느 날까지.- 196쪽





나는 공기가 되었다.
세간의 온갖 소리가 스치우고
탁함과 더러움도 투영되어 버리는
바람과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잊혀진 우주의 공간 속으로


단지 어루만질 수 있다한들 깨어지지 않는
차라리 색色이 함께했다면 존재임을 의식할 수 있었던
그런 공기가 되어 버렸다.
시간도 공간도 의식할 수 없는 여행
수천 년 전 호흡해던 또 다른 나의 삶들을
하나 둘 관조하면서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소리하지 않는 속삭임으로
내 육체에 스며들면
잔잔한 어둠 속에 정지한 내가 있다.
선.-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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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아름답게 거듭나는 사람도
늘 달라지는 사람일 테지요
마음도 삶도 사랑도 아름답게.

후애(厚愛) 2013-07-28 21:24   좋아요 0 | URL
네^^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안 달라질까 생각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 달라지고 하네요...
제 주위에서만 그런가 봅니다.^^;;;
좋은 댓글 항상 감사드려요~
 
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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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산길을 걷는다



벼랑을 가로지르는 계곡 비탈길,
등 꺾여 놓여진 철판다리 건넌다
터벅터벅 걸음을 뗄 때마다
밑으로 텅텅 떨어져 찍히는 발자국
시린 물고기를 타고 떠내려간다



꽁꽁 언 바위에 기대어 쉬어가기도 하면서
가파른 불명산 등허리를 탄다
돌계단 밟고 총총 따라 오르던 물소리
통나무다리 지나 헤어진다
좁은 길 안쪽으로
바람을 쓸어내리던 싸리나무 가지들,
먼저 도착해
우화루 앞마당에 쌓인 눈을 쓸어놓았다



땅속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는 화암사 동종
아픈 밤이면 스스로 울기도 했다지? 구리연꽃잎에서
나온 가냘픈 용이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얼었던 손 녹이며 고드름 떨구는 극락전,
단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이 보송보송하다
햇살 고운 툇마루에 앉은 나는
막 녹기 시작한 손과 발의 간지러움을 즐긴다
딱 그만큼,



얼었던 마음도 간지럽게 녹아내린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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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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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로 묶어 띄운
메주 씻어 채반에 널었다
주둥이 큼지막한 독을 골라
찌끼 우려내어 닦아두고는



빨간 함지박에 감천 약수를 붓고
천일염 한 됫박씩 되어 녹였다
달걀이 엽전 크기만큼 떠올라서
널찍한 덮개 닫아 먼지 막았다



병술년 음력 정월 스무닷새
말날(午日)아침에 장 담근다



꽃망울 툭 불거진 매화나무집
장독대에 독을 걸고 메주 안친다
무명천에 거른 맑은 소금물
독 어귀까지 남실남실 채운다 둥실



떠오른 메주에 소금 한줌 더 얹히고
참숯 두 개 고추 대추 여섯씩 띄운다



장독대 식구가 셋이나 늘어
왼새끼 꼬아 금줄을 친다
장 담그는 공부 가르쳐주는
쥔집 할매의 잔소리가 여기서야 그친다-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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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6-0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할머니가 장을 집에서 담갔는데 옆에서 거들고 배우고 했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난다

숲노래 2013-06-0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독 식구도 늘고
소쿠리와 바구니 식구도 늘고
살가운 식구들
하나둘 예쁘게 늘어나겠지요
 
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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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신안 장산도서 온 가시내
갯벌 같은 사투리 질퍽질퍽 쓰는 가시내
소리공부 한답시고 도망쳐나온 가시내
뭍에 나가 헐 짓거리가 그리 읎다더냐
소리 배와서 기생질헐라고 그라냐
아부지와 인연 끊은 독헌 가시내
밥상머리 떡 허니 밀고는 소리를 헌다
춘향가도 수궁가도 흥부가도 아닌
무신 청승이 나서 상여소리를 헌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차 어노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 어안이 벙벙하다
지 아부지 눈감았다는 소식 듣고서야
소리공부 접고 장산도로 들었다는 가시내
아부지 살아생전 한번도 못 들려준 가시내
꽃상여 타고 먼 길 갈 적에야 상여잡고
첨이자 마지막 소리 올렸다는 가시내 그 소리가
상여소리였다고 소짝새처럼 우는 가시내
죄다 물범벅으로 울려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섧게 웃어쌓는 장산도 가시내-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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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6-0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산도 아가씨 마음을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