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중의 유럽미술관순례 2 - 루브르를 천 번 가본 남자 윤운중의 유럽미술관순례 2
윤운중 지음 / 모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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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은 너무 유명한 파리와 런던의 미술관이라 식상했던 반면 2권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유럽의 여러 나라 미술관들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바티칸 박물관 투어편의 민박 아주머니 이야기가 애틋했다.

한인 민박에서 일하는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 민박집에 매여 있어 하루도 못 쉬는 걸 보고, 자신이 로마를 떠나는 날 민박집 주인에게 사정하여 이 아주머니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투어를 시켜 준 것이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로마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 여러 미술관과 명소들을 모시고 다니고 도록도 한 권씩 선물로 드렸더니 다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 일찍 세상을 떴다는 게 정말 가슴아프다.

저자는 미술관 가이드라는 직업을 정말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삶을 살았던 분 같다.

빈, 벨기에, 네덜란드 미술관들은 아직 못 가 본 곳이라 다음에 꼭 가보고 싶다.

이번 편의 그림들은 밝은 색채가 많아서 그런지 도판 상태가 훨씬 좋고 같이 실린 사진들도 볼만 하다.



<인상깊은 구절>

453p

열일곱 살 무렵에 빈에서 명성을 날리던 클림트를 만나려고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그를 만나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당시 클림트는 실레의 드로잉을 보고는 "재능이 있군. 재능이 아주 많아"라며 그의 천재성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후 실레는 클림트의 작품에 깊이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와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해간다. 클림트와 실레는 에로티시즘이나 젠더에 대한 관심에서 분명히 공통적인 예술 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클림트는 도발적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이를 품위 있게 표현하려 했고, 아카데미나 평단과 불화를 겪기는 했지만 시대가 허용하는 표현의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실레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생각과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솔직하고도 분명하게 이를 표현했다. 그러다보니 클림트의 그림은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오늘날 수도 없이 복제되어 인테리어 장식으로도 각광받지만, 실레의 작품은 너무나 적나라한 표헌으로 대중적인 인기보다 소수 애호가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데 그쳤다.


<오류>

17p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다.

-> 밀라노 칙령은 313년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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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운중의 유럽미술관순례 1 - 루브르를 천 번 가본 남자 윤운중의 유럽미술관순례 1
윤운중 지음 / 모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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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여행 전에 정리하는 기분으로 재독했다.

그 때는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부담스러웠는데 다시 읽으니 쉽게 금방 넘어간다.

책에 언급된 그림들을 거의 알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려다 보니 도판이 어쩔 수 없이 부실하다.

전체적으로 너무 어둡고 크기가 작아 감상하기에는 부적절하지만 대신 다양한 작품들이 나와 유럽 미술관 가기 전에 읽으면 괜찮을 것 같다.

특히 루브르와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유물들 소개가 좋았다.

그런데 재밌는 게, 나도 루브르 가기 전에 NHK 다큐를 유튜브로 봤는데 책에 똑같은 내용이 나와 있었다.

참조 목록에 그 다큐가 있는 걸 보니, 역시 원전은 하나이고 끝없이 인용하면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독자에게 읽을 만한 책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내고 얼마 안 돼서 젊은 나이에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 읽으면서 숙연한 마음도 들었다.

젊은 시절을 박물관 가이드로 보내고 두 권의 책을 내고 홀연히 세상을 뜬 저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봤다.

흔한 말 같지만 인생은 참 무상하다.


<인상깊은 구절>

239p

세잔에게 조형적 질서란 서구회화의 근간인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기하학적 구성과 색채의 배합만으로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유년시절의 죽마고우이자 날카로운 비평으로 파리 화단을 주름잡은 에밀 졸라마저 그의 회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만큼 세간의 무시에도 묵묵히 한길을 걸은 세잔은 훗날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전설이자 우상이 되었다. 피카소는 "세잔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나는 그의 그림을 자주 보았고 여러 해 동안 연구했다.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경의를 표했다.


<오류>

366p

아멘호테프 3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린 저 유명한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이고,

-> 아멘호테프 3세의 아버지는 투트모세 4세이고,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은 아멘호테프 2세이다.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2세->투트모세 4세->아멘호테프 3세로 이어진다.

444p

그의 부왕인 헨리 7세는 랭커스터 가 출신이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1세는 요크 가 출신이었기에

-> 헨리 7세의 부인은 에드워드 4세의 딸로, 요크의 엘리자베스이다.

엘리자베스 1세라고 하면 여왕을 가리키는 말이라 요크의 엘리자베스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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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유럽편 - Fly to the art, 잠들어 있던 예술의 영혼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개정판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차문성 지음 / 책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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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구판으로 읽었을 때는 프랑스 편이 빠져 있었는데 신판에 실려 있어 파리 가기 전 정리하는 기분으로 재독했다.

유럽의 많은 미술관들을 설명하려다 보니 도판의 부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행히 본문에 나오는 작품들은 워낙 유명해 다 아는 것들이라 읽기 불편하지는 않았다.

미술관의 회화에 국한되지 않고 대영박물관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유물이나 터키 유적지 등도 같이 언급하고 있어 도움이 됐다.



<인상깊은 구절>

127p

고흐의 마지막 순간, 테오는 여동생 리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죽어가는 형의 침대 옆에서 빨리 회복되어 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했으나, 슬픔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며 죽기를 원했단다. 나는 형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잠시 숨을 가쁘게 쉬고 고통을 느끼며 그렇게 그는 눈을 감았단다."

399p

샤르댕의 정물화는 별개의 의미를 가진 개개의 사물을 한꺼번에 그림 속에 배열함으로써 각각의 사물이기보다는 하나의 생명력을 부여받은 사물로 바뀌게 된다. 그는 엄격한 조형성과 시정이 깃든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성한다. 특히 그의 작품은 빛을 통해 여과된 시각을 더욱 발전시켜 촉각적인 색감, 질감 등을 정물화를 통해 내면적 세계를 근대적 방향으로 전환하게 했다. 샤르댕의 영향을 받은 세잔은 사과, 식탁보, 유리컵의 어느 것에도 대상으로써의 인식보다는 개개의 사물을 자연에서 독립시켜 예술적 형태로 나아가게 한다. 만약 샤르댕이 없었다면 근대적 회화의 도래는 생각보다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307p

복잡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현대 작품도 몇 가지 트렌드가 있다.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현대화하는 역사적 표현방식과 사회현상의 적극적인 반영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현대미술은 과거 낭만주의의 주관적 관점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고 이해하는 것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오류>

262p

앵그르의 <무시아트 부인의 좌상> 등이 있다.

-> Madame Moitessier 무아테시에 부인이다.

373p

루이 14세의 전제 정치가 끝난 후 그의 아들인 루이 15세가 즉위하면서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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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 - 프랑스 혁명기의 다비드부터 자본주의 시대의 반 고흐까지
이동섭 지음 / 지식서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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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준비하느라 비슷한 책들을 많이 읽어 큰 기대 없기 고른 책인데, 기대보다 훨씬 괜찮았다.

저자가 파리에서 석박사까지 마친 미학 전공자여서 그런지 기술하는 수준이 다르다.

파리 여행 전에 읽으면 프랑스 근현대사를 미술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아쉬운 점은 도판이다.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지만, 명작 도판의 선명도는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모양이다.

출판사 나름의 노하우나 정성이 필요한 것인지, 여태껏 봐 온 책들 중에서 학고재와 민음사, 마로니에 북스 정도가 괜찮았고 그 외 대부분의 출판사는 표지나 그럴 듯하지 본문의 도판들로는 감상이 어려운 수준이다.

이 책도 본문의 내용은 괜찮은데 도판이 너무 어둡다.

다행히 본문에 언급된 그림들은 거의 실려 있고 새로운 작품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워낙 유명해서 거의 알려진 내용이었으나 마지막에 실린 루소의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일종의 일요화가인 셈인데 오늘날 당당히 오르세 미술관에 한 방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니 그 창의성이 결국 인정받은 셈이다.

소박파라고 약간 무시하는 어감이 드는데, 전문적 교육을 안 받은 건 고갱도 마찬가지였는데도 종합주의를 이끈 시대의 선구자가 됐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인상깊은 구절>

154p

"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쿠르베의 말은, 모든 그림에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의미이자, 사실주의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완전히 다른 '제3계급'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확신의 의미다. 

180p

이로써 회화의 아름다움은 현실을 그림으로 감상하던 재현미에서, 현실을 형태와 색채로 재해석해낸 조형미로 넘어갔다. 그림은 글보다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더 이상 아니었다. 입체의 현실을 평면의 캔버스에서 입체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회화에서 중요했던 것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마네의 또다른 근대적 면모다.

208p

"나는 일체의 즉흥성을 배제한다. 내 그림은 오로지 관찰과 옛 거장들의 작품을 학습한 결과."

드가의 저 말에서 핵심은 눈을 사로잡는 즉흥성보다 현실을 관찰하여 얻은 분석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말한 옛 거장, 즉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특징이다. 

293p

비록 그들은 가난한고 고된 일상을 살아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휴일은 마음껏 즐기고 있다. 당시 마흔에 가까운 나이의 자신도 모아둔 돈이 없을뿐더러, 그림을 팔아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렸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만큼 일하고 가볍게 사는 태도를 자랑스러워했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사르팡티에 부부의 화려한 아파트에 초대되는 걸 즐겼으나, 그와 같은 호화로운 삶을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몽마르트 주민 가운데 한 명으로 생각했고, 그들과 어울려 즐겁게 잘 살았다. 훗날에도 르누아르는 몽마르트르 사람들을 잊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그런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어서 파리 중심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르누아르는 몽마르트르를 아주 도덕적이거나 타락한 곳이 아닌, 노동자들이 사는 평범한 동네로 묘사했다.

325p

사과나 식탁,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물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화법의 차이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모든 대가가 그러하듯이, 세잔도 평범한 것을 다르게 그렸다.

327p

세잔은 자연의 형태를 버리고, 화가의 감각에 의해 해석한 형태의 자연을 그렸다. 이제 미술은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만든 조형의 질서로 재해석되었다. 마네로부터 시작된 꿈이 세잔에게서 이뤄진 셈이다. 세잔으로 인하여, 화가는 세상을 자신의 관점대로 해석하고 창조하는 새로운 종류의 절대자 위치에 올랐다. 세잔은 미술을가를 미술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현대 회화의 아버지로 기록되었다.

354p

반 고흐도 인상주의자처럼, 자연을 색채 현상으로 보았다.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했다. 마네와 모네 이후로 더 이상 회화에서 대상의 닮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 대상에서 비롯한 인상과 느낌을 어떻게 독창적인 스타일로 풀어낼 것인가에 화가들은 집중했다. 엑상프로방스의 세잔은 형태로 인상주의를 극복해나가고 있었고, 아를의 반 고흐는 원색의 새로운 결합 방식으로 모네를 넘어서려 했다.

365p

초창기 자본주의를 살았던 19세기 예술가들은 완전히 달라진 사회에 적응해야만 했다.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예술가들은 그동안 그들의 강력한 경제적 기반이었던 왕정과 귀족 등의 후원자를 잃게 되었지만, 화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다. 과연 누가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화가는 창작과 판매라는 까다로운 두 질문을 동시에 풀어야만 했다.

 반 고흐가 활동했던 19세기 예술가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시장의 헤게모니였다. 그림의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그들은,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시장이 없다면 그림을 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니, 시장은 필요했으나 시장의 논리를 거부해야 하는 이중성을 감내해야 했다. 

 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벌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삶, 그것이 모두가 원하는 삶일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거의 불가능한 바람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기 자본주의를 살았던 반 고흐의 고난이 지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프랑스 혁명으로 안착된 공화정은 결국 부르주아지를 위한 사회였고, 그들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어긋난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들로 처벌당했다.

373p

그는 그림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아마추어 화가로 불리는 이유이자, 생의 후반부까지 그의 그림에 조롱과 멸시가 따라붙은 이유다. 가난한 독학자였기에 루소는 오랫동안 무명 화가였고, 가난한 처지에 왜 돈 들여 그림을 그리냐는 주위의 비아냥과 비싼 취미 생활이라는 몰이해를 견뎌야 했다. 다르게 보자면, 루소는 세관에서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취미로 틈틈이 그림을 그리던 보통 사람인데,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자신의 방을 가진 놀라운 화가다.

 루소의 이런 고립된 처지가 그림을 독특하게 만들었다. 혼자 보고, 혼자 평가하고, 혼자 그리는 과정에서 미숙함을 수정하지 않은 채 미숙한 상태에서 완성도를 높였다.

386p

언론을 통해 부유층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 소개되면서 노동자와 중산층은 그와 유사한 것을 소비함으로써 대리 만족했다. 즉 부자들은 배를 타고 머나먼 이국으로 여행을 갔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을 보거나, 원숭이 같은 동물을 길렀다. 현실에서 직접 이루지 못하는 것의 대체물로서 루소의 그림은 아주 유효했다. 소재(밀림)와 화법(소박)의 결합으로 전형적으로 잘 그린 그림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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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미술관 산책 플러스 - 루브르에서 오르세까지 명화와 현대 미술을 만나다
최상운 지음 / 북웨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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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휴가 때 파리 방문 예정이라 관련 책들을 읽고 있다.

오래 전에 구판 나왔을 때 읽었는데 새로운 미술관들을 추가했다고 해서 신판으로 읽게 됐다.

도판은 비교적 선명한 편이고 파리의 여러 미술관과 주변 관광 명소들도 소개하고 있어 참조할 만 하다.

많은 곳을 소개하다 보니 미술관의 소장품에 대한 정보는 빈약하다.

까르띠에 재단 현대 미술관이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주 드 폼 국립 미술관 같은 현대 미술관 소개가 신선했다.



<인상 깊은 구절>

87p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 가셰 박사>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세기가 지난 후에 사람들이 하나의 '출현'으로 여길 작품을 만들고 싶어. 그래서 사진같이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과학에 대한 과시와 고양, 그리고 색채에 대한 현대적인 취향을 이용한 열정적인 표현으로 작업할 거야"라고.

211p

카미유의 동생인 폴 클로델이 예술가의 인생에 관해 한 말을 여기에 옮겨 본다.

"예술가란 직업은 극도로 위험하고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것을 견딜 수 있다. 그 직업이 축복이 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한없이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자신의 사랑하는 누나인 카미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이 분명하다.


<오류>

258p

루이 14세는 재위 기간만 무려 87년이고 섭정 기간을 지나 직접 정치를 한 것만 해도 54년이다.

-> 루이 14세는 1638년에 태어나 1715년에 사망했다. 그는 1643년 5세 때 왕위에 올라 77세에 사망했으니 재위 기간이 72년이다.

259p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여인

-> 루이 14세의 증손자는 루이 15세이고, 루이 16세는 루이 15세의 손자이다.

370p

지하에는 사진가 프랑수아 콜라(헝가리 출생 1904-1979)의 전시가 열렸다.

-> 헝가리가 아니라 슬로바키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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