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꼭 봐야 할 100점의 명화 - 내셔널 갤러리에서 테이트 모던까지
제프리 스미스 지음, 안혜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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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정리하는 기분으로 다시 읽었다.

저자의 말대로 순위를 정하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해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것 같다.

도판이 작은 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런대로 인쇄 상태가 좋고, 미술관 별로 정리가 되어 있어 다양한 그림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번역상의 자잘한 오류들이 많은지 좀 놀랍다.

분명 역자 서문에서는 본인이 미술사를 전공했다고 나왔는데도 기본적인 그림 제목 번역도 틀린 곳이 많아 전공자가 번역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전공자가 역자인 경우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역주까지 따로 달아서 설명하기 마련인데 너무 간단한 고유명사들이 틀려서 황당하다.

이런 오류들을 확인하느라 독서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


<인상깊은 구절>

125p

이렇듯 완벽을 추구하는 철저하고도 섬세한 베르메르의 작업 방식은 서양 미술에 있어서 가장 찬사를 받는 작품을 탄생시킨 비결이기도 했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완벽하게 조화되었으되 어딘가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구도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뒤흔들어 놓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움직임이 정지된 바로 그 순간의 신비로운 고요함과 장엄함을 잘 살려냈다. 자칫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상적인 순간의 모습은 베르메르의 섬세한 묘사에 힘입어 일상의 순간을 초월해 예술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129p

샤르댕은 베르메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매우 정돈되고 단순화된 배경을 선호했다. 그러나 샤르댕은 이 전통을 그만의 독특한 프랑스 스타일로 소화해 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가 담아낸 단순한 일상의 풍경은 시간이 멈춰진 장중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샤르댕이 사용한 단순화된 구도는 로코코 양식의 부셰와 같은 화가들이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는 매우 기묘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그의 작품은 살롱에서 매우 유명해져 스웨덴의 여왕이나 루이 15세를 포함한 왕족이나 부유층들이 그의 작품을 구매하기에 이른다. 

147p

작품의 제작 연도에서 알 수 있듯, 퓌비 드 샤반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같은 시대에 활동을 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야외에서 순간의 색채를 묘사하는데 주력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그의 작품을 비교해볼 때 퓌비는 같은 시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떨어진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인상주의 화풍을 제외하고도 많은 화파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19세기 후반 예술가로서 파리에서 상당히 부유한 삶을 영유했지만,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퓌비의 작품이 예술계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그는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173p

휘슬러는 배터시 다리를 사실 그대로 재현하는 데 구애 받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예술 지상주의적인 미학 운동에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의 사조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나 묘사, 그리고 도덕적 관념에 구애받는 대신 예술의 심미적인 측면, 즉 구도와 색채가 조화를 이루는 순수한 미적 측면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휘슬러는 당시에 만연했던 예술 지상주의적 관점을 추상적인 요소와 함께 이 작품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오류>

15p

1547 샤를 5세의 군대에 의해 프리드리히 공작이 체포됨으로써, 궁정화가의 지위를 잃음

->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가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사로잡았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19p

1874 제임스 휘슬러 <파랑과 빨강의 야상곡>(추락하는 로켓)

-> 1874년에 발표한 <추락하는 로켓>이라는 부제가 붙은 휘슬러의 작품 원제는 "Nocturne in Black and Gold" 로,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21p

살롱 도톰(파리 가을전)에서 전시실 한 칸이 르누아르의 작품으로만 전시

-> Salon d'Automne 살롱 도톤으로 써야 할 것 같다.

31p

고갱이 네덜란드 출신의 어린 여인, 메테 소피 가드와 결혼함

-> 고갱의 부인은 덴마크 출신이다.

1897 펠릭스 발로 <봄>

-> Felix Vallotton 이므로 펠릭스 발로통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49p

1666 클로드 로랭 <아침>, 상트페트르부르크

-> 1666년에 발표된 로랭의 작품은 "Morning in the harbour"로 항구에서의 아침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71p

디르크 보우츠 <거장 돌로로사>

-> 디르크 보우츠의 "Mater Dolorosa" 로 슬픈 성모 정도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왠 거장?

97p

부르고뉴의 공작인 필립 더 굳의 서자, 부르고뉴의 필립 공의 궁정화였던 것으로 추정됨

-> Philip the Good 은 선량공 필립으로 번역해야 하고, 그의 서자 부르고뉴의 필립은 공작이 아니라 주교이다.

99p

인스부르크에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를 완성함

-> 프랑수아 1세라고 하면 프랑스 왕을 떠올리기 쉬우므로, 페르디난트 1세라고 표기해야 할 듯하다.

103p

1350 루카스 크라나흐 디 엘더 <파리스의 심판> 카리스뤼에

-> 카리스뤼에가 어딘가 한참 찾았다. Karlsruhe 즉 카를스루에다.

104p

남편이 죽은 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는 브뤼셀로 가서 헝가리인인 메리 숙모와 살았다.

-> 헝가리인 마리아가 아니라 헝가리의 러요시 2세에게 시집 간 Maria von Osterreich 이다. 합스부르크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으로, 헝가리의 마리아라고 번역해야 한다. 헝가리인이 아니다.

113p

카라바조는 그 중 한 점은 거부되었지만 <산 마태오의 외침>과 <산 마태오의 순교>는 잘 그려진 것으로 받아들여졌음

->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로, 성 마태오의 소명이라 번역해야 한다. 외침이라니, 정말 전공자가 번역한 게 맞을까?

116p

카를 1세는 많은 작품을 사들인 수집가로 유명했는데

-> 영국의 찰스 1세를 가리킨다. 영어식으로 번역해야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같은 인물을 찰스 1세로 표기해서 헷갈린다.

137p

<베르나르 가를 행진하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완성함

-> 베르나르 가를 행진하다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원제는 "Napoleon Crossing the Great Saint Bernard pass" 이다. Great St. Bernard pass 는 길거리가 아니라 알프스 산맥에 있는 험준한 통로이다. 보통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으로 번역한다. 

141p

터너, <다이도 빌딩 카르다고>

->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다.

143p

터너가 가장 존경한 화가는 풍부한 색채로 빛의 효과를 그려내던 클로드 모네였으며, 존경해 마지 않던 그를 뛰어 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는~

-> 터너는 1775년 출생해 1851년 사망했다. 모네는 1840년생이다. 터너가 존경한 이는 자신이 죽을 무렵 아직 화가로 데뷔하지도 않은 모네가 아니라 클로드 로랭이다. 정말 전공자가 번역한 게 맞을까?

145p

1824 <찰스 5세 내정자의 파리 입성과 루이 13세의 서약>이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음

-> <찰스 5세 내정자의 파리 입성> 과 <루이 13세의 서약>은 다른 그림이다.

그리고 "Entrance of Dauphin, future Charles 5, to Paris"  가 원제로 "미래의 샤를 5세인 왕세자의 파리 입성"이라 번역해야 할 것 같다. 찰스 5세 내정자는 또 뭔가?

149p

에드워드 부르메 존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 Edward Burne-Jones , 즉 에드워드 번 존스이다. 부르메 존스라니. 

151p

27살의 젊은 고흐는 자신에게 권총을 발사했고,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남

-> 37세에 사망했다.

165p

12월 초 밀레이는 1850년에 모자가게 점원으로 근무하며 그와 만나 이 그림이 완성되고도 한참 후인 1860년에 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시달을 오필리아의 모델로 작업을 시작했다.

-> 엘리자베스 시달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부인이고, 존 에버릿 밀레이는 러스킨의 부인인 에피와 결혼했다.

166p

이 <최후의 심판의 날>은 세 작품으로 이뤄진 최후의 심판 시리즈 중 하나로 천국의 모습은 왼편에, 최후의 심판이 중간, 그리고 이 작품이 오른편에 위치한다.

-> 이 작품은 트립티크로 되어 있는데 중간 그림의 제목이 "The Last Judgement" 이고 오른편이 "The Great Day of His Wrath"이다. 그러므로 신의 분노의 날, 혹은 진노의 날이라고 하면 더 확실하게 전달이 될 것 같다.

170p

리차드 대드 <펠러의 대성공>

-> 이 작품의 제목은 "The Fairy Feller's Master-Stroke" 이다. 펠러가 사람 이름인가 했더니만,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요정 나뭇꾼의 절묘한 솜씨>로 번역되어 있다. 즉, feller 나뭇꾼이라는 뜻이었다. 정말 이렇게 밖에 번역이 안 되는 것일까?

175p

조르주 쇠라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 "Bathers at Asnieres"  즉,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다.

191p

마티스는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과, 베네치아의 로자리오 예배당의 장식을 시작했고 죽는 순간까지 이 일에 전념함

-> 베네치아가 아니라 프랑스의 방스에 있는 로자리오 예배당이다.

225p

1635 피터 폴 루벤스 <사냥하는 샤를 1세의 초상화> 파리

-> 아무리 찾아봐도 1635년에 완성한 <Charles 1 at the Hunt> 즉, 사냥하는 찰스 1세의 초상화, 특히 파리의 루브르에 있는 작품은 루벤스가 아니라 반 다이크의 그림이다.

227p

와토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된 후 그 기념으로 <카테라 섬의 순례>를 그림

-> "Pilgrimage to Cythera" 카테라 섬이 아니라 키테라 섬의 순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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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ter를 master로 보셨나봄요^^;; 이런 오류가 많으면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데 아쉽네요ㅡ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
윤용이 지음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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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으려고 했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됐다.

앞부분은 도기, 뒷부분은 자기에 관한 이야기고 역사와 맞물려 설명한다.

개념 정리가 명확해서 좋다.

도기는 도토, 즉 진흙으로 1000도 이하에서 만든 질그릇, 자기는 자토로 1200도 이상에서 만든 사기 그릇이다.

어떤 흙으로 만들었는지, 몇 도에서 구웠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유약 색깔에 따라 나타나는 청자의 색이 다르다.

분청사기는 뭔가 했더니, 사기가 곧 자기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 좋은 흙을 써서 거친 질감을 감추기 위해 분장을 한 자기가 바로 분청사기이므로 저자는 개념 정리를 위해 분청자라고 부른다.

분청자라고 하니 청자라는 속성이 정확히 드러나는 듯하다.'

질그릇은 신석기 시대부터 실생활에 사용해 왔지만 제사를 드리는 제기와, 불교 의식에 쓰이는 공양구로써 질적 발전을 이룬다.

진흙으로 만든 질그릇이 삼국시대까지만 있고 없어져 버린 줄 알았더니, 조선 말까지도 실생활에 많이 사용됐다.

어려서 집에 있던 장독이 바로 질그릇이다.

제일 흥미로운 지적은, 고려 청자의 시작이 바로 오월국에서 넘어온 중국 장인들의 기술 전수였다는 사실이다.

5대 10국 시절에 강서성의 도요 주변을 지배했던 오월국이 망한 후 그 유민들이 고려로 넘어와 개성 일대에서 청자를 굽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논리를 확대시켜 중국 학자들을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광종 무렵으로 추정한다.

맨날 일본에 기술 전수한 얘기만 하지 중국으로부터 받은 얘기는 못 들어 봐 신선했다.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기술이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문화 선진국으로부터 전수받아 발전시켰던 것이다.

차가 전래되면서 다완으로 청자가 쓰여 더욱 많은 자기가 만들어졌다.

고려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간 것도 시대의 미감이 변했기 때문이지 청자 만드는 기술이 퇴보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다른 책에서도 청자보다 백자가 훨씬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를 본 적 있다.

청자에 무늬를 넣는 상감청자는 고려의 개성적인 공예품으로 중국과는 다른 미감을 선사한다.

박물관에서 진행한 교양강좌여서 그런지 알기 쉽게 도자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준다.

도판이 선명해서 감상하기 좋았다.


<인상깊은 구절>

187p

한국의 초기 벽돌가마가 중국의 사룡구 가마터의 퇴적 층위 중 960~982년 사이에 형성된 층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중국과 한국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연구 결과를 통해 그 당시 중국의 월주요 청자 제작자들이 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주요 장인들은 고려로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도기를 만드는 고려의 장인들을 훈련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4p

우리의 청자 제작은 광종 연간 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월주요 장인들의 귀화로 중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이주한 장인 집단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주변에 자기를 제작할 만한 흙이 나는 지역을 우선 선정하여, 중국 청자의 제작 기법을 고려의 도기 장인들에게 전수했을 것입니다. 초기에는 이곳에 중국식 벽돌가마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강남 지방과 달리 춥고 기온차가 심해서, 겨울이 지나면 가마가 무너져 여러 차례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이에 고려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가마가 만들어지는데, 바로 남부 지방의 진흙가마입니다.

207p

요리의 발달은 석탄을 생활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석탄의 강력한 화력은 중국 각 지역 음식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산해진미를 담기 위한 다양한 그릇의 제작도 활발해집니다.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가진 휘종 황제가 다스리던 이 시기는 그야말로 중국 문화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은 도자기의 나라입니다. 1100년을 전후한 송대의 도자기는 중국 도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물로 평가됩니다. 

240p

고려와 문화적 기질이 달랐던 원나라는 기본적으로 고려 청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고려 말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 세력들인 권문세족은 원나라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청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약해지면서 제작 기법 면에서 보다 손쉬운 방법을 쓰는 등 수고를 줄이려고 하였습니다. 상감청자에서 분청자로의 자연스러운 이행 과정은 14세기, 원이 주도했던 세계 도자의 흐름 안에서 중국적 요소를 새롭게 수용하고, 전통적 바탕 위에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혼란상을 극복하는 발전적 흐름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고려 지배 세력의 변화와 함께 가장 직접적인 고려 청자의 쇠퇴 원인은 왜구의 침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분청자로 이행하는 과정은 바꿔 말하면 전국에서 활발하게 도자기가 만들어지고, 실용화되고, 보편화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청자의 질은 점점 낮아집니다. 즉, 고려 청자가 비로소 서민의 일상을 담는 실용기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287p

신진사대부들은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청렴결백한 군자상을 제시하였습니다. 따라서 황희와 같은 관리들이 청백리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등 청빈한 군자상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왕실이라 하여 화려함을 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실 또한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목면의 재배로 무명옷이 실생활에 널리 보급되었던 것도 사대부들이 추구하던 이상에 맞는 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사대부들의 가치관에 들어맞는 것으로, 무명옷의 순백 색감은 사람들에게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종 연간인 15세기 전반 조선의 문화는 집현전의 학자들이 이끌어 갔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였고, 특히 공자와 맹자가 살던 춘추전국 시대의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사용되던 그릇의 기형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에 심취해 그 본질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중국 고대에 사용하던 그릇에 대한 연구 역시 중국 문화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해지면서, 중국 백자에 대한 선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고대를 숭앙하는 복고주의가 결국 조선을 근대 사회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가? 일부 문화계의 흐름이 아니라 국가 정책으로 저런 복고주의를 고수했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312p

당시의 사대부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옷에 현혹되기보다는 소박하고 흰 무명옷을 낡고 헤질 때까지 빨아서 다시 입는 번거로움을 수고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청렴결백의 사상과도 일치하며, 사물의 외양보다는 그 속에 담긴 본래의 이치를 깨달은 후에야만 결백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성리학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자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특별한 장식무늬 없이도 그 외형과 백자 고유의 빛깔에서 나오는 새하얀 아름다움을 추구한 듯합니다.

318p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조선의 사발이 일본의 다도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일본인들의 가치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 다완은 약간 어리숙하고 모자라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정감이 드는 순박함이 있습니다. 조선 사회가 추구했던 성리학의 청빈하고 소박한 미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일본인들도 공감했던 모양입니다. 



<오류>

36p

지구의 역사는 약 45억만 년이라고 말합니다.

-> 45억만 년이 아니라 45억 년이다.

이 땅에 처음 생명체가 탄생한 시기가 대개 5만 년 전으로 보며

-> 첫 생명체 탄생은 5만년이 아니라 대략 35억년 전후이다.

드디어 7800만 년 전에 척추동물이 등장합니다.

-> 척추동물은 대략 4억 8천만년 전에 나온다.

86p

고구려의 미천왕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근초고왕이었습니다.

-> 근초고왕이 죽인 고구려의 왕은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이다.

201p

고려가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시기는 문종(재위 1450~1452) 연간인 1051년 이후입니다.

-> 괄호 안에 재위한 임금은 고려가 아닌 조선의 문종이고, 고려 문종은 1046~1083년에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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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화자기 -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
황윤.김준성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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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을 수가!

전에 읽었던 책인데 최근 중국 청화자기에 대한 번역서를 읽고 좀 어려워서 쉬운 책으로 다시 보려고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하고 도판 질도 좋아 감탄하면서 읽었다.

자기에 대한 설명보다도 중국 역사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와 닿았는데 저자가 역사학 전공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뒷부분에 참조 서적을 보니 역시나, 내가 감탄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나왔다.

아마도 이런 책들을 요약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자기의 변천사는 물론, 역사의 발전 과정도 너무나 흥미롭게, 그것도 본질적인 설명을 곁들여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 같은 무역국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땅덩어리가 워낙 넓고 물자가 풍부했으므로 안정적인 유교적 농업국가를 지향했다.

전통사회에서는 그것이 잘 작동했지만 유럽이 바다로 배를 띄우면서 치고 나가자 전세가 역전되어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몰락하고 만다.

청나라까지만 해도 중국의 자기는 세계 최고였고 완벽을 향해 나아갔으나, 결국 근대화 이후 서양 자기에 밀리고 말았다.

중국 문화권 아래 있었으면서도 서양의 팽창정책에 맞춰 변신한 일본의 경우가 매우 특이한 사례 같다.

보통 조선처럼 함께 찌그러지기 마련인데 말이다.

도판이 너무나 선명하고 중국 자기의 아름다움에 말 그대로 넋을 잃었다.

그림보다 더 영롱하고 완벽한 균형과 대칭을 이루는 기형물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자기는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에 비해 너무 장식성이 강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잘 몰라서 한 소리였던 것 같다.

우아함과 빼어난 기형, 그리고 선명한 발색 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자들의 문장력이 좋아 좋은 내용을 어렵지 않게 잘 전달한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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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택한 미술
이언 칠버스 외 엮음, 박유진 외 옮김 / 지식갤러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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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이 크고 두꺼운 책이라 어떻게 읽나 약간 긴장했는데, 도판이 대부분이고 설명도 지루하지 않아 편안하게 읽었다.

무려 구석기 시대 벽화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긴 미술 역사를 다룬 책들은 연대 나열인 경우가 많아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비교적 짜임새가 있고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68000원이라는 책값이 이해되는 수준의 도판이라 감상하기 좋았고, 도서관에 비치가 되어 있어 감사하다.

영국에서 간행된 책이라 그런지 책에 실린 명화들이, 영국 미술관 소장품들이 많았다.

확실히 자국에 명화들이 많아야 직접 원작을 보고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현대 미술 쪽은 소략되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22p

이집트 회화는 당대의 세계관 내에서 전적으로 기능적이었다. 미술가들은 엄격히 정해진 일련의 기준에 따라 주어진 대상을 능숙하게 묘사하면 그만일 뿐, 독창성이나 미학적 고려, 자기표현 등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화가들은 다른 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위가 썩 높지 않았고, 아마도 팀을 이루어 작업했을 것이다. 이집트인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대부분의 예술적 열정을 사후세계 준비에 바쳤다. 이런 작업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노력과 비용은 예술의 황금기였던 제 18왕조의 왕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웅장하고 화려한 벽 장식과 보물로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24p

현대인의 눈에는 이집트 무덤의 부장품이 호화롭고 예술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집트인은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의식에 포함된 모든 요소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 즉 사후세계에서 사자를 보호하고 거행한다는 목표에 따랐다. 그림도 사실적으로 보이거나 미적인 즐거움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자를 위해 마련된 의식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런 관습은 거의 고대 이집트의 역사 전반에 걸쳐 유지되었다.

32p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성기에 제작된 회화와 조각은 서양 문명의 기본 토대를 이루었다. 후세에 와서는 이 시기를 모방하기도 힘들 만큼 탁월한 업적을 남긴 시대로 회상했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미술품은 고상하고 당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보여, 그 뒤를 이은 조악한 양식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와 로마인은 놀랄 만큼 자연주의적인 정원 풍경화나 정물화에서든 사실성을 포착하려는 열정을 공유했다.

42p

서로마에서는 기독교 화가들이 성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미술작품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찬양하며 자연주의, 감정, 상상력을 드러냈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이런 접근방식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기독교 미술은 신과 직접 소통하는 수단으로 양식화되고 엄숙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되었다. 자연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미술가에게 일말의 독창성이나 자기표현을 기대하는 일도 없었다. 대신 미술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가장 훌륭한 성상(icon)을 최대한 정확하게 모사하여, 그 성상의 영향력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었었다. 러시아의 가장 신성한 성상인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수세기에 걸쳐 수없이 반복적으로 모사되었다.

 동로마에서는 교회가 일체감을 유지하고 이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심각한 쟁점 중 하나는 성상의 사용 문제로, 일각에서는 성상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성상 금지령이 철회된 후에도 성상의 내용과 양식이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어떤 미학적 관심사보다도 신학적 정확성이 중요시되었다. 

 이 그림은 비잔틴 미술의 특징적인 양식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다. 납화법을 이용해 인물에 풍부한 광채를 더했지만, 화가의 관심사는 심미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이다. 그의 주된 목표는 '신의 어머니'로서 성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성서에서 말로 전하는 바를 성상에서는 색으로 전달한다. 그것은 신의 현현, 즉 신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 787년, 제7차 공의회, 기독교예배에서 성상 숭배를 복원하는 결정에 관하여-

79p

인문주의는 내세가 아닌 현세에세 인간 개개인이 성취한 바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중세 기독교 정신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일탈을 나타냈다. 

 종교적 감수성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13세기의 수사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신봉자들이 촉발했는데, 그들의 설교에서는 예수의 고통과 인간성을 강조했다. 고전의 부흥과 아울러 그런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 미술은 더 사실적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경외감과 신비감을 조성한 비잔틴 미술의 양식화된 신 이미지와 달리 예수의 진짜 인간성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기독교적 이미지를 일부러 인간의 실세계와 동떨어져 보이도록 신비롭게 묘사했지만, 지오토와 두초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기독교 이야기를 사실적이며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술적 장면에서는 물질계가 갈수록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감정적이며 극적인 새로운 현장감이 더불어 나타났다.

 시에나와 피렌체 두 화파 모두 계속 비잔틴 미술의 초탈성과 경직성에서 멀어지며 더 훌륭한 자연주의, 표현력, 인간성을 추구했다. 14세기 말에는 유럽 궁정들 간의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국제고딕이라는 새로운 궁정풍 양식이 출현했다.

55p

많은 이교도 부족들이 주류의 고전기 미술과는 전혀 다른 생동감 넘치는 문화를 자랑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도기 및 프레스코화를 지배하던 자연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교도 부족의 장인들은 무기와 장신구처럼 작고 휴대가 간편한 물건에 관심을 기울렸다. 회화가 전면에 나선 것은 오로지 기독교로 개종하여 종교적 텍스트가 필요했을 때뿐이었다.

65p

스테인드글라스가 중시되면서 벽화를 그릴 장소는 줄어들었지만, 필사본의 수요는 여전히 높았다. 새로운 후원자들이 등장했고, 특히 부유한 귀족의 궁전에서 주문이 많았다. 이들은 역사와 로맨스 등 보다 다양한 범위의 세속적인 주제들의 작품을 원했고, 종교 문헌도 초심자용의 <성무일도서> 처럼 기존과는 다른 종류를 요구했다.

101p

피렌체나 베네치아와 달리 로마는 은행업, 제조업, 상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순례자들을 그 도시로 끌어 모아 부를 창출하려면 교황의 권위가 필요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말에 따르면, 로마는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이전된 후 '허물어지고 황폐'해졌다. 하지만 또다시 교황의 영구적 근거지가 된 로마는 15세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교황들은 로마가 옛 영광을 되찾도록 그 도시를 회복시키는 일에 힘썼다.

 바티간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변 지역이 재건의 초점이었다. 재산세 감면이 건축 붐으로 이어지면서 빌라 파르네시나 같은 화려한 별장과 대저택들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무수한 의뢰를 받은 미술가들은 그 새로운 장소들을 장식했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자연의 명료하고 정연하 묘사를 목표로 삼은 데 반해,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들은 자연을 관찰하되 우아하게 다듬고 이상화한 이미지 보여준다. 철저히 현실에 입각한 자연주의는 완화되고, 우아함을 중요시하는 태도로 대체되고, 형태와 색의 온건한 변환을 통해 미묘하게 표현되었다. 그런 변화를 개시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장자리와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스푸마토'라는 유화 기법을 개발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수학적으로 계획한 선 원근법이 가장 중요했지만, 전성기 르네상스에서는 '공기' 원근법이 특징이 되었다. 미술가들은 멀리 있는 물체가 지평선 쪽으로 갈수록 더 흐릿하고 파랗게 보이게 하는 대기의 작용을 오랫동안 모방해왔지만, 레오나르도는 '공기 원근법'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그것의 회화적 용법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158p

많은 화가들이 이런 파격적인 기법을 모방했으나 카라바조가 보인, 안정적으로 구도를 잡는 동시에 웅장하면서도 대담하고 강렬하면서 엄숙하게 묘사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었다

227p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날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를 읽고, 훌륭한 그림을 보아야 한다."

(괴테의 이 말은 문화적 인간의 정의이고,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토다)

234p

모리스 드니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보다 암시를 중시했다. 드니의 작품은 추상 미술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그는 작품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는 색들로 뒤덮인 평면이다."

248p

"기쁨은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못하지만 자연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에서 생기는 듯 보인다." - 에드먼드 버크

(예술의 숭고미, 장엄미 같은 의미일까?)

 난파선에 대한 두려움은 에드먼드 버크가 서술한 숭고함에 관한 이론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즉 보는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에서 재해나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을 감상하는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재난 현장을 그림으로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우리가 가학적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자연에 대한 두려움, 장엄함, 고양된 감정 등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323p

당대에는 입체주의를 과학과 철학의 진보적 이론을 해석하거나 논평하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이 유행했으나, 피카소와 브라크는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그러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입체주의가 당시 변화하는 풍토에서 자양분을 얻은 것은 분명했지만, 피카소가 단언했듯이 "입체주의는 회화의 한계와 제약 속에서 머무를 뿐,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단 한 번도 혁명적인 사상이나 기술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고안해낸 기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지만, 그들이 그린 대상은 화가들이 늘 그래왔듯이 풍경, 사람, 악기,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었다. 두 화가 모두 미술상으로부터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릴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공개시장에서 작품을 팔아야 했으므로 좀더 눈길을 끄는 주제를 택할 때가 많았고, 입체주의에서 파생한 미래주의나 보티시즘 화가들은 항공 같은 소재에서 영감을 얻었다.

341p

프로이트 자신은 초현실주의와 아무런 공감대가 없었고 이 운동과 결부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프로이트는 한 가지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미술가들과 결정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프로이트가 꿈에 집착했던 주된 이유는 정신분석가들이 충분한 기술과 경험한 갖추면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여 깊은 통찰과 치유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꿈이란 그 자체로 풍요롭고 복잡한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359p

다양한 잡지들이 넘쳐나는 거리 가판대, 현혹적인 포장과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슈퍼마켓,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타들을 내세운 화려한 영화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영화관 등을 통해 일반인들이 대중문화에 접근하기가 한층 용이해졌다. 이 새로운 경제적, 문화적 민주주의 속에서 일상생활이 대중적인 이미지들로 포화 상태에 이르다보니, 이제 이런 이미지들 자체가 화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놓고 경쟁할 하나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375p

지난 200년간 미술가들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변세계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기본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무수한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 결과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팝아트, 그리고 1960년대 이래의 설치, 비디오, 행위 미술 같은 한층 새로운 예술 형태들이 탄생했다. 이런 새로운 미술적 표현방식은 현대 미술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쳐 일부 비평가들은 더 이상 회화를 별도로 구분되는 범주로 보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회화를 그저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 스펙트럼 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회화를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 회화는 여전히 수많은 열혈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표현주의와 다다 이후 '사실적 차원'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사실주의 회화를 지칭하기 위해 '신즉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구상 회화는 무척이나 다양한 범위의 양식과 주제를 망라하여, 1천 년 넘게 지배적인 미술 양식으로 군림해왔다. 현대에 들어 구상 회화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 중 하나는 존 싱어 사전트다. 그가 초상화가로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 미술이 대두하고 있었으나, 그의 양식은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 같은 초창기 대가들의 작품을 반영했다.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은 사전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반 다이크"라고 표현했다

 1천 년 넘게 인간은 스스로 보거나 상상하는 바를 그리고 표현해왔다. 심지어 약 1만 5천 년 전의 수렵, 채집인들조차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놀라운 동물 그림들을 남겼다. 재현적인 그림들은 애초에 숭배, 오락, 장식, 지위 표시, 자료 기록 등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든 간에, 지금껏 알려진 거의 모든 문명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 들어 무수히 많은 새로운 예술 형태와 양식, 매체가 등장하는 와중에도, 주변세계의 일부를 그림의 형태로 보존하고 변형하며 창조해내려는 인간의 욕구는 여전히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오류>

201p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5살 된 손자 루이 15세가 잇다.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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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청화자기
마시구이 지음, 김재열 옮김 / 학연문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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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책바다을 통해 빌리게 됐다.

제목만큼이나 어렵고 지루해 보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흥미롭게 읽었다.

중국 번역서인 모양인데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가 많고 무엇보다 도판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책은 도판이 매우 중요한데, 중국 청화자기의 아름다운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질 못한다.

전공자들이 보는 수준이라 어려운 부분은 건너 뛰면서 읽었다.

당송 시대부터 시작된 청화자기는 원대에 성숙했고 명청대 만개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원대 대표적인 가마인 용천요의 청자들이 신안 해저선에서 발굴된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의 청화자기들을 보자면, 너무나 문양이 화려하고 빡빡하고 장식적이라 고려나 조선의 단아한 미감과 매우 다른 느낌이고 그래서인지 다소 어색하다.

인공미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유럽의 화려한 도자기와는 또다른 미감으로 단지 청색과 백색만 가지고도 이렇게 장식적인 자기를 만드나 감탄스럽기는 하다.

송나라 때부터 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해 원대에는 시박사 등을 운영하면서 도자기 수출로 많은 돈을 벌었고 명청대에는 아예 맞춤형으로 수출용 자기를 만들었다.

아랍 쪽에서 주문을 많이 해 아랍어가 새겨진 청화자기도 서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된다.

확실히 중국은 쇄국정책을 편 조선과는 다른 세계였던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26p

"당송 청화자기는 민요에서 구운 것이 많으며, 청화자기의 초급 생산단계이다. 아직 성숙되지 않아, 소성온도는 비록 1000도 이상이지만, 태질이 치밀도가 낮아 기공계수와 흡수율이 모두 원명 자기보다 크다. 조형은 정연하지 못하고, 유면은 현저히 거칠며, 투명도가 낮다."

 원명 시대의 성숙한 청화자기의 제작수준에 비해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청화자기는 당송에서 싹이 터서, 원대에 성숙하고, 명청에 성행하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전해져 쇠퇴하지 않아, 중국에서 가장 민족적인 특색을 가진 자기가 되었으며, 국내외에 그 영예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0p

부량자국은 전문적으로 제왕을 위해, 관부가 자기번조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의 설립은 경덕진 자업의 향상과 발전을 일으키는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또한 원대 통치자가 자업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원 조정은 일정한 기능을 갖춘 장인들을 보다 중시하여, 관공장은 기타 일체의 차역에서 면제하고 그 직업을 세습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또한 객관적으로 수공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셋째, 원 조정은 대외 무역을 중시하고 힘써 제창하여, 각종 수공업의 향상과 발전을 대대적으로 자극하여 추진하였다. 제자업은 일찍이 원조 이전에 이미 서역의 아라비아 국가와 무역 왕래가 있었다. 원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 정부는 대외무역을 강화하는데, 기본적으로 송의 제도를 따랐다.

 지원 14년(1277)에, 또 천주에 시박사를 설치하고 대외 무역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대외무역의 흥성발달은 의심할 바 없이 전국, 특히 이미 광대한 시장 제자업을 가진 경덕진에게는, 매우 커다란 촉진과 추진 작용을 일으켰다. 

53p

이런 대반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이슬람문화의 음식습관과 관계가 있는데, 통상 음식물을 대반에 담아 두고 여러 사람이 땅이나 탁자에 둘러앉아 공동으로 음식을 드는데 사용된다. 현존하는 전형적인 원 청화자기 중에 대반의 수량이 가장 많아, 국외 소장이 백점을 넘고, 국내는 단지 수점이 있다. 이는 이런 대반이 주로 이슬람지역에 수출하기 위해 생산된 것임을 말해 준다. 

203p

선덕 청화자기의 문양 중에, 일부 상당히 서아시아적 풍격을 가진 것이 있다. 이런 문양은 명대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으로, 응당 명초에 중동 제국과 왕래가 빈번하고 문화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컨대 어루존의 사격문, 서등의 화훼문 등등이, 모두 이슬람 지역의 금은기나 도기에 상견되는 문양이다.

262p

정덕 청화자기의 문양 방면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으로 만든 도안들이다. 정덕 청화자기상에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을 쓴 것은 당시 이슬람교가 성행한 것, 특히 정덕황제 본인이 이슬람 풍속을 숭상하고 그의 비와 자식들도 이슬람교를 신봉한 것과 밀접한 관계 있다. 이들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의 내용은 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와 알라신을 찬송하고, '코란' 속의 교의나 도자기의 용도를 설명한 것이다.

334p

둘째, 청대의 제왕, 특히 강희,옹정,건륭 3제는 모두 비교적 자기를 애호하였다. 강희 본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시하여, 저명한 법랑채 품종이 바로 강희시에 국외 채료를 도입하여 창소한 것으로, 분채의 대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옹정은 더욱 자기를 중시하여 제자공장들에게 중상(거액의 보너스나 상품)을 수여하는 방법을 채용하여, 자기질의 향상을 촉진시켰다. 건륭은 각종 공예품을 애호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들 모두가 관요자기의 생산을 신속하게 발전시켰다.

 셋째, 청초에 어요창을 회복하고,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조와 관리를 하게 하고, '관탑민소(관부에서 민요에 하청을 주어 제작시킴)' 방법을 추진하여 민요 생산의 발전을 꾀하였다. 신품종과 신기술이 끊임없이 생겨났으며, 고품질의 제품이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넷째, 청대 국외 수출자기의 수량이 거대해졌으며, 당시의 수출자기는 외국에서 지정한 기형, 문양, 유색, 채색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더불어 국내 자업시장이 날로 확대되어, 민요제작기술의 향상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자업생산 요인이 진일보하였다. 

404p

함풍, 동치, 광서, 선통 이 4조는 제국주의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경제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경덕진 관요자기의 생산은 쇠락의 경지에 처하였다. 민요 역시 대량 생산하지만, 다수가 조잡한 편이다. 다만 동치, 광서 양조에서 자희태후가 귀족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치가 극에 다다른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가를 아끼지 않고 자기번조에 힘을 쏟아, 크게 중흥의 기세가 있었으며, 관요생산이 진일보 발전하였다. 특히 광서의 관요기는, 품종과 수량을 막론하고, 만청 각조에서 번조한 관요자기 중에 수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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