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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택한 미술
이언 칠버스 외 엮음, 박유진 외 옮김 / 지식갤러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판형이 크고 두꺼운 책이라 어떻게 읽나 약간 긴장했는데, 도판이 대부분이고 설명도 지루하지 않아 편안하게 읽었다.
무려 구석기 시대 벽화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긴 미술 역사를 다룬 책들은 연대 나열인 경우가 많아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비교적 짜임새가 있고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68000원이라는 책값이 이해되는 수준의 도판이라 감상하기 좋았고, 도서관에 비치가 되어 있어 감사하다.
영국에서 간행된 책이라 그런지 책에 실린 명화들이, 영국 미술관 소장품들이 많았다.
확실히 자국에 명화들이 많아야 직접 원작을 보고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현대 미술 쪽은 소략되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22p
이집트 회화는 당대의 세계관 내에서 전적으로 기능적이었다. 미술가들은 엄격히 정해진 일련의 기준에 따라 주어진 대상을 능숙하게 묘사하면 그만일 뿐, 독창성이나 미학적 고려, 자기표현 등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화가들은 다른 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위가 썩 높지 않았고, 아마도 팀을 이루어 작업했을 것이다. 이집트인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대부분의 예술적 열정을 사후세계 준비에 바쳤다. 이런 작업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노력과 비용은 예술의 황금기였던 제 18왕조의 왕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웅장하고 화려한 벽 장식과 보물로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24p
현대인의 눈에는 이집트 무덤의 부장품이 호화롭고 예술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집트인은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의식에 포함된 모든 요소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 즉 사후세계에서 사자를 보호하고 거행한다는 목표에 따랐다. 그림도 사실적으로 보이거나 미적인 즐거움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자를 위해 마련된 의식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런 관습은 거의 고대 이집트의 역사 전반에 걸쳐 유지되었다.
32p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성기에 제작된 회화와 조각은 서양 문명의 기본 토대를 이루었다. 후세에 와서는 이 시기를 모방하기도 힘들 만큼 탁월한 업적을 남긴 시대로 회상했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미술품은 고상하고 당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보여, 그 뒤를 이은 조악한 양식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와 로마인은 놀랄 만큼 자연주의적인 정원 풍경화나 정물화에서든 사실성을 포착하려는 열정을 공유했다.
42p
서로마에서는 기독교 화가들이 성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미술작품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찬양하며 자연주의, 감정, 상상력을 드러냈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이런 접근방식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기독교 미술은 신과 직접 소통하는 수단으로 양식화되고 엄숙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되었다. 자연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미술가에게 일말의 독창성이나 자기표현을 기대하는 일도 없었다. 대신 미술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가장 훌륭한 성상(icon)을 최대한 정확하게 모사하여, 그 성상의 영향력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었었다. 러시아의 가장 신성한 성상인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수세기에 걸쳐 수없이 반복적으로 모사되었다.
동로마에서는 교회가 일체감을 유지하고 이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심각한 쟁점 중 하나는 성상의 사용 문제로, 일각에서는 성상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성상 금지령이 철회된 후에도 성상의 내용과 양식이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어떤 미학적 관심사보다도 신학적 정확성이 중요시되었다.
이 그림은 비잔틴 미술의 특징적인 양식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다. 납화법을 이용해 인물에 풍부한 광채를 더했지만, 화가의 관심사는 심미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이다. 그의 주된 목표는 '신의 어머니'로서 성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성서에서 말로 전하는 바를 성상에서는 색으로 전달한다. 그것은 신의 현현, 즉 신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 787년, 제7차 공의회, 기독교예배에서 성상 숭배를 복원하는 결정에 관하여-
79p
인문주의는 내세가 아닌 현세에세 인간 개개인이 성취한 바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중세 기독교 정신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일탈을 나타냈다.
종교적 감수성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13세기의 수사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신봉자들이 촉발했는데, 그들의 설교에서는 예수의 고통과 인간성을 강조했다. 고전의 부흥과 아울러 그런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 미술은 더 사실적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경외감과 신비감을 조성한 비잔틴 미술의 양식화된 신 이미지와 달리 예수의 진짜 인간성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기독교적 이미지를 일부러 인간의 실세계와 동떨어져 보이도록 신비롭게 묘사했지만, 지오토와 두초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기독교 이야기를 사실적이며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술적 장면에서는 물질계가 갈수록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감정적이며 극적인 새로운 현장감이 더불어 나타났다.
시에나와 피렌체 두 화파 모두 계속 비잔틴 미술의 초탈성과 경직성에서 멀어지며 더 훌륭한 자연주의, 표현력, 인간성을 추구했다. 14세기 말에는 유럽 궁정들 간의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국제고딕이라는 새로운 궁정풍 양식이 출현했다.
55p
많은 이교도 부족들이 주류의 고전기 미술과는 전혀 다른 생동감 넘치는 문화를 자랑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도기 및 프레스코화를 지배하던 자연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교도 부족의 장인들은 무기와 장신구처럼 작고 휴대가 간편한 물건에 관심을 기울렸다. 회화가 전면에 나선 것은 오로지 기독교로 개종하여 종교적 텍스트가 필요했을 때뿐이었다.
65p
스테인드글라스가 중시되면서 벽화를 그릴 장소는 줄어들었지만, 필사본의 수요는 여전히 높았다. 새로운 후원자들이 등장했고, 특히 부유한 귀족의 궁전에서 주문이 많았다. 이들은 역사와 로맨스 등 보다 다양한 범위의 세속적인 주제들의 작품을 원했고, 종교 문헌도 초심자용의 <성무일도서> 처럼 기존과는 다른 종류를 요구했다.
101p
피렌체나 베네치아와 달리 로마는 은행업, 제조업, 상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순례자들을 그 도시로 끌어 모아 부를 창출하려면 교황의 권위가 필요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말에 따르면, 로마는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이전된 후 '허물어지고 황폐'해졌다. 하지만 또다시 교황의 영구적 근거지가 된 로마는 15세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교황들은 로마가 옛 영광을 되찾도록 그 도시를 회복시키는 일에 힘썼다.
바티간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변 지역이 재건의 초점이었다. 재산세 감면이 건축 붐으로 이어지면서 빌라 파르네시나 같은 화려한 별장과 대저택들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무수한 의뢰를 받은 미술가들은 그 새로운 장소들을 장식했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자연의 명료하고 정연하 묘사를 목표로 삼은 데 반해,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들은 자연을 관찰하되 우아하게 다듬고 이상화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철저히 현실에 입각한 자연주의는 완화되고, 우아함을 중요시하는 태도로 대체되고, 형태와 색의 온건한 변환을 통해 미묘하게 표현되었다. 그런 변화를 개시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장자리와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스푸마토'라는 유화 기법을 개발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수학적으로 계획한 선 원근법이 가장 중요했지만, 전성기 르네상스에서는 '공기' 원근법이 특징이 되었다. 미술가들은 멀리 있는 물체가 지평선 쪽으로 갈수록 더 흐릿하고 파랗게 보이게 하는 대기의 작용을 오랫동안 모방해왔지만, 레오나르도는 '공기 원근법'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그것의 회화적 용법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158p
많은 화가들이 이런 파격적인 기법을 모방했으나 카라바조가 보인, 안정적으로 구도를 잡는 동시에 웅장하면서도 대담하고 강렬하면서 엄숙하게 묘사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었다.
227p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날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를 읽고, 훌륭한 그림을 보아야 한다."
(괴테의 이 말은 문화적 인간의 정의이고,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토다)
234p
모리스 드니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보다 암시를 중시했다. 드니의 작품은 추상 미술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그는 작품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는 색들로 뒤덮인 평면이다."
248p
"기쁨은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못하지만 자연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에서 생기는 듯 보인다." - 에드먼드 버크
(예술의 숭고미, 장엄미 같은 의미일까?)
난파선에 대한 두려움은 에드먼드 버크가 서술한 숭고함에 관한 이론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즉 보는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에서 재해나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을 감상하는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재난 현장을 그림으로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우리가 가학적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자연에 대한 두려움, 장엄함, 고양된 감정 등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323p
당대에는 입체주의를 과학과 철학의 진보적 이론을 해석하거나 논평하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이 유행했으나, 피카소와 브라크는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그러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입체주의가 당시 변화하는 풍토에서 자양분을 얻은 것은 분명했지만, 피카소가 단언했듯이 "입체주의는 회화의 한계와 제약 속에서 머무를 뿐,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단 한 번도 혁명적인 사상이나 기술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고안해낸 기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지만, 그들이 그린 대상은 화가들이 늘 그래왔듯이 풍경, 사람, 악기,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었다. 두 화가 모두 미술상으로부터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릴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공개시장에서 작품을 팔아야 했으므로 좀더 눈길을 끄는 주제를 택할 때가 많았고, 입체주의에서 파생한 미래주의나 보티시즘 화가들은 항공 같은 소재에서 영감을 얻었다.
341p
프로이트 자신은 초현실주의와 아무런 공감대가 없었고 이 운동과 결부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프로이트는 한 가지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미술가들과 결정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프로이트가 꿈에 집착했던 주된 이유는 정신분석가들이 충분한 기술과 경험한 갖추면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여 깊은 통찰과 치유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꿈이란 그 자체로 풍요롭고 복잡한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359p
다양한 잡지들이 넘쳐나는 거리 가판대, 현혹적인 포장과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슈퍼마켓,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타들을 내세운 화려한 영화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영화관 등을 통해 일반인들이 대중문화에 접근하기가 한층 용이해졌다. 이 새로운 경제적, 문화적 민주주의 속에서 일상생활이 대중적인 이미지들로 포화 상태에 이르다보니, 이제 이런 이미지들 자체가 화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놓고 경쟁할 하나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375p
지난 200년간 미술가들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변세계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기본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무수한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 결과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팝아트, 그리고 1960년대 이래의 설치, 비디오, 행위 미술 같은 한층 새로운 예술 형태들이 탄생했다. 이런 새로운 미술적 표현방식은 현대 미술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쳐 일부 비평가들은 더 이상 회화를 별도로 구분되는 범주로 보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회화를 그저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 스펙트럼 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회화를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 회화는 여전히 수많은 열혈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표현주의와 다다 이후 '사실적 차원'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사실주의 회화를 지칭하기 위해 '신즉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구상 회화는 무척이나 다양한 범위의 양식과 주제를 망라하여, 1천 년 넘게 지배적인 미술 양식으로 군림해왔다. 현대에 들어 구상 회화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 중 하나는 존 싱어 사전트다. 그가 초상화가로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 미술이 대두하고 있었으나, 그의 양식은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 같은 초창기 대가들의 작품을 반영했다.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은 사전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반 다이크"라고 표현했다.
1천 년 넘게 인간은 스스로 보거나 상상하는 바를 그리고 표현해왔다. 심지어 약 1만 5천 년 전의 수렵, 채집인들조차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놀라운 동물 그림들을 남겼다. 재현적인 그림들은 애초에 숭배, 오락, 장식, 지위 표시, 자료 기록 등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든 간에, 지금껏 알려진 거의 모든 문명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 들어 무수히 많은 새로운 예술 형태와 양식, 매체가 등장하는 와중에도, 주변세계의 일부를 그림의 형태로 보존하고 변형하며 창조해내려는 인간의 욕구는 여전히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오류>
201p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5살 된 손자 루이 15세가 잇다.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