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의 라이벌 - 감성과 오성 사이 석학인문강좌 46
이태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석학인문강좌 시리즈는 주제가 참 좋고 내용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청중들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져 편안하게 읽힌다.

표지 디자인을 좀더 세련되게 바꾸면 훨씬 더 독자들에게 많이 읽힐 것 같다.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이라는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참 좋다.

특히 박수근과 이중섭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중섭 그림이야 워낙 유명하고 직관적으로 강렬한 감동을 주지만, 사실 박수근 그림은 너무 소품이 많고 비슷한 스타일이라 크게 관심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박수근의 작품이 주는 미적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흑백 도판이라 무척 아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가 그린 유화들의 색감이 얼마나 조화롭고 따뜻한지 새삼 알게 됐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수묵화 비교도 참 좋았다.

컬러 도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김정희 예술론에 대한 비판은 무척 신선했다.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을 읽으면서도 너무 지나친 찬사는 아닐까 의아했는데 역시 저자도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고루한 부분을 지적한다.

국제화라고 보기에는, 그가 접했던 청나라 문인들도 당대 일류가 아니었고 예술가로서의 작품보다는 문인화가로서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예술론과는 맞지 않는 듯 싶다.

진경 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그림이, 실경을 그대로 그렸다기 보다는 중국이 아닌 우리 산천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과장과 변형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향을 표현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오히려 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이는 가히 조선 최고의 화가라 할 수 있는 김홍도였다.

그야말로 진정한 환쟁이로 현대적인 의미의 화가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책에서는 정선에게 김홍도가 배웠다고 되어 있던데 이 책에서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정선은 김홍도 같은 화원, 즉 직업적인 화가라기 보다는 고위 관료들과 어울린 정통 양반이었기에 작품 세계의 결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중앙 정계에서 활약한 김정희 역시 정선이나 김홍도 등과는 전혀 다른 예술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정약용이나 박지원을 성리학을 넘어선 이들로 묘사하는데, 그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약간의 개성은 있을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근본적인 성리학자였고 그 틀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상깊은 구절>

5p

작품의 감상 또한 창조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개입되기 때문에, 예술은 눈과 손의 원초적인 감각행위인 동시에 이성작용으로 완성되지요. '창작'이나 '감상'이라는 예술행위 하면 감성적 측면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림을 읽거나 해석할 때는 이성으로 마무리되거든요. 이처럼 작품의 구상부터 붓을 떼고 마무리하기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물론이고,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 단계에서도 오성과 감성이 함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단순히 한 개인이 느끼고 즐기는 방향으로만 흘렀다면, 예술이 인문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동시대는 물론이려니와 후대 사람들과도 함께 미를 공유하면서 예술이 인문학 영역에서 큰 위치를 차지해 왔지요. 인문학이 인간을 탐구하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류사회에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바로 화가, 곧 예술가 아닐까요. 보통 예술가라고 하면 동물적인 몸의 반응과 직관이 남들에 비해 조금 더 예민하고, 자유의지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감정을 앞세워 행동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만큼 예술가에게 자율성이 부여되고 창조성은 배가되지요. 

55p

강세환은 정선의 과장 방식에 대하여 "평생 익힌 대로 필법을 휘둘러 바위의 형세나 봉우리 형상의 구분 없이 한결같이 열마준법으로 어지러이 그려냈기에 '사진'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라며 현장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적 평가를 남겼지요.

105p

정선은 실경의 리얼리티를 뛰어난 직관으로 구성하여 누구나 공감할 '진경'산수화를 창조하였습니다.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이들의 회화형식을 대표하지요. 그 중심이념은 물론 성리학이었을 터이고 정선이 易理 를 원용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증언도 맞물립니다. 또 정선이 고위관료서 당시 집권층인 서인, 노론계 문사들과 친밀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136p

김정희는 까다로운 안목에 걸맞게 지필묵과 문방구류도 명품을 선택했고, 그것들의 사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正道 를 지켰던 것 같습니다. 최고와 완벽을 추구하는 귀족적 인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71p

얼마나 썼길래 1000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을까요. 이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단순히 감성에 의존한 게 아니라 엄청난 훈련과 투혼으로 이루어진 업적임을 시사합니다. 물론 스스로가 글씨 쓰기를 크게 즐기고 일상화했던 삶이 밑바탕에 깔렸겠지요. 추사체의 위대함과 자랑거리는 바로 그런 장인정신에 있습니다.

193p

김정희는 제자들에게 정선이나 심사정처럼 그림공부를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그림이 송,명의 고전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제시한 그림이 주학년의 작품들입니다. 김정희가 직접 만난 주학년의 회화는 송~명대 이후 남종문인화풍의 갈필로 그린 피마준 작품으로 남종산수화풍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주학년은 중국화회사 관련 도록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도 걸러 도판 하나 찾기 힘든 화가입니다. 김정희는 자기가 만난 화가가 중국의 전부라고 인식했던 셈이지요.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 흔히 일류가 아닌 삼류와 접하기가 쉬운데 그 경우 중 하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즉 김정희는 삼류의 외래문화로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지요. 그러니 원교체에 대한 불만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나 문인화풍에 눈길이 갈 리가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의 서화 창작론을 토대로 김정희 스스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업적이지요.

195p

정약용이 형사나 사실 표현을 강조한 화원이나 직업화가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고, 그림다운 그림으로서 회화의 '기능'적인 면을 우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진정한 회화의 가치가 사의나 문기를 중시하는 여기적 '취미로서의 그림'이 아닌 전문 화가들의 잘 그린 '業 으로서의 그림'에  있다고 여겼지요.

205p

김정희의 '완당 바람'은 19세기 문예계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18세기 회화의 신경향에 대한 반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문인화가는 물론 화원이나 중서층 서화가들까지도 김정희식 서권기, 문자향에 경도될 정도였지요. 이들의 남종화풍은 간결하고 감각적인 필치와 수묵 처리로 회화성을 구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에는 북산 김수철, 석창 홍세섭 등 기괴론에 어울리는 독특한 개성주의 작가들이 부상했지요. 결국 '완당 바람'은 19세기에 사실주의 회화를 퇴조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사실정신, 그리고 이광사의 조선적인 서체 등 국풍의 문예를 잠재운 19세기 김정희 예술에 담긴 철저히 고고한 격조의 귀족 취미와 후대에 미친 큰 영향, 그리고 시대조류 방향에서 어긋나는 비현실적인 미감에 대하여 술회하였습니다.

 장승업은 중국의 고사인물도와 기명절지, 화조, 영모화 등을 즐겨 그려, 이미 그 주제가 시대정신이나 18세기 조선풍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하지만 필묵을 다루는 데 있어 수준급 기량을 발휘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33p

이상범은 제1회 선전에 출품하면서 일본화를 직접 익히려 이듬해인 1923년경 일본을 다녀오지요. 나는 우연히 1930년대 일본 교토지방의 전시회 팜플렛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범의 <초동>을 비롯한 당대 산수화풍이 거기에 나온 삼류 화가들의 그림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이상범이 일본의 유명한 일류화가의 그림보다 당시 조선인이 잘 모르는 삼류화가의 그림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요. 지금도 공모전에 나오는 작가들이 유명하지 않은 외국의 스타일을 베끼는 경우가 종종 불거지기도 하지요.

287P

고희동이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자신이 이 혜택을 이용해 특례입학자로 갔다는 설이 있지요. 그의 그림들을 보면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처음부터 회화적 역량이 떨어진 화가라고 판단됩니다. 일본에서 유화를 배워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수묵화가로 전향했는데, 이마저도 회화적 수준이 낮았지요. 실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기보다는 원로라는 정치적 위상을 갖는 데 그쳤습니다.

291p

한국문화에 내재된 야수파적인 혹은 표현파적인 기질이 선명히 드러나네요. 흥과 신명이 넘치는 한국인의 가슴에 야성이 가득차 있는 것일까요. 자극적이거나 거칠면서 단순한 형상을 선호하는 민족입니다. 서구 모더니즘 사조에서 표현주의가 큰 갈등 없이 쉽게 젊은 화가들에게 소화된 연유도 그러한 데 있지 않을지요. 

348p

박수근은 이중섭처럼 격정적이지도 않았고, 시대를 심하게 앓던 화가도 아니었지요. 그림도 잘 팔리는 편이어서 인정된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노동을 통해 만든 예술작품을 팔아서 내 삶과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는 역할을 할 수 있었지요. 때문에, 박수근은 이중섭보다 크게 유복했다고 봅니다. 이중섭이 자기 그림이 안 팔리는 현실에서 "나는 밥 먹고 살 인간이 못 된다"며 삶을 포기하려 거식증까지 걸렸던 데 비하면 더욱 그러하지요.

 1957년 박수근을 힘들게 한 사건이 생깁니다. 국전에서 박수근 그름이 낙선을 한 것이지요. 사실 그 당시 박수근 나이면, 친구들이 다 국전 초대작가나 심사위원을 할 때입니다. 출품하기가 껄끄러웠을 법한데, 그럼에도 자꾸 작품을 출품했지요.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열등감 내지 학벌이 없는 점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요. 국전에서 큰 상을 받으려 했을 터인데, 심사위원들이 1857년에 낙선을 때린 것입니다. 국전 탈락은 박수근에게 큰 치명타였지요. 청빈한 기독교인으로 약주도 안 들던 박수근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이는 자기 몸의 손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백내장에 걸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말년 그림이 범벅이 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요. 내향적 인간의 전형이었던 이중섭이 개인과 시대적 아픔의 복합으로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듯이, 박수근도 잘 나가다가 얻은 개인적 외상이 회화 세계보다 몸을 치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안타깝다. 한국 최고의 화가로 숭앙받는 이중섭이 나는 밥 먹고 살 인간이 못 된다면서 거식증까지 걸리고, 그림값이 제일 높아진 박수근이 친구들은 국전 심사위원인데 거기에 작품을 출품하고 낙선됐을 때 그 좌절감이란... 인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모르겠다. 고흐만 안타까운 삶을 산 게 아니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그 괴로움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영혼이 있다면 훗날에라도 인정받고 있음에 위안을 얻으려나. 너무 마음이 아픈 대목이다)

365p

뉴욕 시절 작업일지에 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점화는 낯선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 그 외로움을 별들과 함께 달랬던 결과입니다. 한국의 자연을 연상하며 목 놓아 부른 김환기의 연가이고요. 비록 김환기가 뉴욕생활을 통해서 세계적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이미지를 영감으로 삼아 풀어 놓은 추상화는 20세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사에서 우뚝한 성과입니다. 어렵고 낯설어서 감상자를 유리시키는 보통의 추상화와 달리, 한국인의 마음에 편안한 공감을 던져줍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김환기의 추상화는 그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파란 색감과 달항아리, 하늘, 별 같은 소재들이 마음을 울린다. 뉴욕이라는 현대미술의 최첨단인 곳에서 작업했음에도 너무나 한국적인 감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류>

83p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과 4군의 풍경을 담은 <해신첩>, 선조가 그 화첩을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에게 선물한 일

-> 선조가 아니라 순조가 매형인 홍현주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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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한국 현대미술
정하윤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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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신간이 나왔을 때 도서관에 신청했던 책인데 이번에서야 읽게 됐다.

표지 디자인은 다소 맥빠지고 촌스럽지만 내용은 참 좋다.

다소 현학적이고 어려울 수 있는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 소개를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불리는 고희동부터 현역으로 활동 중인 이불, 서도호, 강익중 등 중견 미술가들까지 30인의 유명 화가들이 소개된다.

이중섭, 박수근, 이응노 이 정도까지는 직관적으로 공감이 되는데, 1970년대 이후 추상 미술부터 80년대의 설치미술로 넘어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느껴야 하나 여전히 모호하고 말 그대로 지적 유희라는 생각이 든다.

민중 미술가로 소개되는 오윤이나 신학철 등의 예술론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예술에, 특히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라는 말이 여전히 생명력이 있을까?

철지난 자본주의 비판론 같아 공감하기 어려웠다.

소비 사회를 풍자하면서 자신들은 최첨단 소비 생활을 영위하는 모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예술도 결국은 문화 엘리트들이 대중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닐까?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현대미술은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점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관람객에게 시적 감흥을 일으킬 수 있어야 예술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도판이 다소 어두운 색감이라 아쉽다.

<82년생 김지영>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2017년에도 남성이 100만원을 받을 때 여성은 68만원을 받는다고 비난하는 부분에서는 공감이 참 어려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정이 여전히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100만원을 받는 사람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68만원을 받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을 좀더 즐기기 위해서는 직접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테니, 한국 미술계의 규모가 더 커져서 좋은 전시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16p

고희동은 일본으로 유학가지 전에 한국에서 전통화를 배웠거든요. 게다가 문인 집안의 끝자락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고희동은 '문인화로서의 그림'이라는 개념을 먼저 정립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고희동은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했어요. 마치 옛 선비들이 혼란한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시서화에 몰두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고희동이 교육받은 서양화는 손의 기술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서양화에서 그림은 정신이 아닌 기술, 화가는 문인이 아닌 장인에 가까웠습니다. 고희동은 여기서 혼란을 겪으며 서양화를 그만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81p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아름답지도 않고, 도대체 뭘 감상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현대미술이 우리의 고정관념 속 미술과는 다른 점이 많지요

 그것은 현대미술이 '미술의 확장'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재료도 이전과는 다른 것을 쓰고, 형식도 과거와는 달리해서 '미술'이라는 틀을 계속 깨는 것이 현대미술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아닌 설치, 퍼포먼스, 비디오와 같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것이지요. 이런 시도가 가끔 지나치게 개념적으로 흐르면서 시각적인 감흥을 기대하는 대중으로부터 미술이 멀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승택은 시각적인 요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붉은색 천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휘날리는 모습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미술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바람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감상이 가능하니까요.

 이승택의 작품은 미술사적 의의가 있으면서도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고, 개념적이면서도 감각적입니다. 

199p

단색화 화가들도 한국적인 미술을 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단색화 작가들은 여백, 흰색, 수양, 정신성과 같은 보다 엘리트적인 전통에서 한국성을 찾았던 반면, 오윤과 같은 민중미술가들은 불화, 탈춤과 같은 민중의 문화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점이 큰 차이점입니다. 민중미술가들은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받고 괴로워합니다. 요괴들은 '맛기차', '비빔면', '아아차'와 같은 소비사회의 제품을 소비하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오윤이 이를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명확합니다. '외국자본의 제품이 판치는 1980년의 한국 사회는 사람을 괴롭게 한다. 그것은 마치 지옥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사회의 제품들을 누리고 즐기면서 살고 싶어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민중을 자기들 멋대로 재단하고 정의내리려는 선민적인 사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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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아시아.미국편 - Fly to the art, 예술과 문화사이에서 일상의 일탈을 꿈꾸는 시간산책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차문성 지음 / 성안당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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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편에 비해 <아시아,미국>편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술관들이라 무척 신선하다.

특히 동남 아시아의 미술관들은 이 책에서 거의 처음 접했다.

지난 번 이란 관련 책들도 재밌게 읽어서 아시아 지역들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태국이나 발리, 하노이 등은 그저 휴양지로만 알았지 이렇게 멋진 문화와 긴 역사를 가진 줄은 미처 몰랐다.

아쉬운 점은 역시 도판.

아마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만 올리려다 보니 도판의 질이 매우 떨어져 아쉽다.

나오시마의 지추 미술관은 사진을 못 찍게 하는지라 스케치로 대신 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면 여러 사진들이 나오니 기왕이면 저작권을 해결하고 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킬링필드의 끔찍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식민지 프랑스와 부패한 론놀 정권, 이를 비호한 미국에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부패하고 식민지배를 했다고 단 4년 동안, 그것도 자국민을 수만 명 학살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도 이를 좌시한 유럽 책임이고 인류 탓이다.


<인상깊은 구절>

363p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할 때 일정한 수입으로 안정된 생활이 필요한 만큼 이들이 작품을 구입함으로써 생계를 돕고자하는 개인적 후원과 컬렉터들의 수집활동은 이전에도 있어 왔다. 근본적으로 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된 전시의 공간이 필요하고 이러한 필요성은 미술관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점이었다.

 알프레드 바는 동시대 미술을 일반 대중이 쉽게 다가가도록 전시를 큐레이팅이하고 도록 발간, 포스터, 전시 해설문 등을 제작하여 관람자들의 관심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당시 전문적인 전시가 전무한 상태에서는 획기적인 기법으로 받아 들여졌다.

 영구소장품을 중심으로 미술관 전시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라는 측면에서 창의성 있는 작가를 발굴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MoMA 의 이러한 생각은 기존의 거대 박물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분명히 차별화된 것이었다. 



<오류>

61p

그림의 주제로 등장한 마리 앙리에트는 루이 15세와 레슈친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명의 딸 중 둘째였다. 이란성 쌍둥이였던 그녀의 언니 엘리자베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에게 시집을 갔지만~

-> 마리 앙리에트의 쌍둥이 언니 엘리자베스는 펠리페 5세의 아들인 파르마의 공작 필리포 1세와 결혼했다. 즉 며느리인 것이다.

103p

금나라의 침략에 의해 수도를 임암으로 옮긴 후에도~

-> 임암이 아니라 임안이다.

186p

스페인 사람으로 필리핀에서 태어난 마리아 블랑코의 작품을 눈여겨 봐야한다.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발리에 살고 있다.

-> 본문에 소개된 화가는 마리오 블랑코의 아버지인 안토니오 블랑코이고 1911년생으로 1999년에 타계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아들이다.

412p

이 그림은 622 방에 있는 티에블로의 작품 중 가장 크고 훌륭한 작품이다.

-> 아무리 봐도 티에블로가 아니라 티에폴로인 것 같다.

424p

이곳 전시실에서 허무를 자연과 결합하여 형상화한 루이스 달과 유쾌한 화가 프란스 할스 등~

-> 루이스 달이 도대체 누군가 봤더니, 야콥 반 루이스달(Rusida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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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과 미술 - 서양미술의 갑작스러운 고급화에 관하여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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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물질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서다.

어려운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아주 흥미롭고 상업적, 특히 동서무역의 관점에서 본 르네상스 회화의 폭발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신선하다.

무엇보다 도판이 매우 좋다.

소장처나 크기 표시가 안 된 점이 아쉽지만 도판의 질이 정말 훌륭해서 한 권의 미술책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과연 저자가 서문에서 도판에 특히 신경을 썼다고 얘기할 만하다.

전문 연구자인 만큼 분석의 깊이가 남다르다.

다소 어려운 개념,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추구한 명도의 깊이라는 부분은 잘 이해를 못했다.

이번에 루브르 가서 <암굴의 성모>라는 유명한 작품을 봤는데 (모나리자는 줄서서 한참 기다려야 해서 못 보고 말았다) 색감이 너무 어두워 책에서 보던 만큼의 큰 감동이 없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어두운 분위기는 화가가 추구했던 것 중 하나라고 한다.

나도 항상 의문이 있긴 했었다.

왜 갑자기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미술의 수준이 확 올라갔을까?

저자는 수준에 더해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폭발했다고 한다.

그저 몇몇 천재 화가들의 탄생 덕분이 아니라 이 모든 회화혁명이 중세 상업혁명을 통해 거부가 된 상인들이, 귀족과의 차별화를 통해, 혹은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또 미술품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유럽의 상인들이 직접 안료를 수입하여 거래했기 때문에 그 식견이 탁월해서 (당시로서는 장인 수준이었을) 화가들에게 색채에 대한 까다로운 요구를 했고 이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회화의 수준이 확 올랐다는 점이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안료들의 수입이 활발해지는데 이것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미술을 통해 과시적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잘 아는 분야인 색채감을 까다롭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바로 "상인과 미술"이다.

거상들은 평민이나 귀족과의 차별화를 위해 미술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흑사병도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다.

"모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구가 유행일 정도로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일상화됐던 시절이라 중세인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 전에는 제단화 같은 공적인 미술품만 있었다면 추모 열기가 과해지면서 개인이 영혼 구제를 위해 캔버스화 등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게 용인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비단 거상들 뿐 아니라 하층민들도 작은 패널화라도 갖길 원했고 상인들은 미술품을 상품으로 인식해 대량 생산이 되면서 가격도 떨어지게 된다.


왜 자본주의 경제가 승리하게 됐을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질적 수준이 높아져 사회가 계속 발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에서처럼 단순히 우아한 선비의 취미 정도로는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기 어려운 것 같다.

상업의 발달이 예술의 발전을 견인했고 결국 사회의 흐름도 바꿔 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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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한 예술가들 - 걸작 뒤에 숨은 예술의 경제학
오브리 메넨 지음, 박은영 옮김 / 열대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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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다니던 도서관에 없어 미뤄두다 상호대차 시스템을 통해 드디어 읽게 됐다.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매우 학술적이고 유머가 돋보이는 책이다.

마치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를 읽을 때 느낌 같다.

예술가도 창조적인 "직업"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돈과 예술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도 8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평생을 돈 때문에 고민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티치아노 같은 대화가들도 돈을 떼먹는 군주들 때문에 그림값 지불을 간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던 걸 보면 그들도 우리 같은 생활인이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만 하더라도 예술가는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으나 반종교개혁 등으로 가톨릭이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후원하면서 많은 돈이 쏟아져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점차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해 갔다.

루벤스나 피카소 등의 예를 보면, 천재 예술가가 돈 문제에 답답할 리가 없다는 말이 이해된다.

사후에 유명해진 반 고흐가 매우 예외적인 경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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