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2017 서재 결산 배너가 있어서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더니, 역시나 탈락이다. 이달의 평가단 제도가 없어진 이후 확실히 활동이 위축된 것도 사실이지만, 책읽는 시간 자체가 많이 줄었다. 나름 2017년을 결산해본다면, 온라인 서점가에 종이책의 정가제가 정착된 이후 개인적으로는 전자책 위주의 구매활동에 정착했다. 김영사와 열린책들, 다산북스 와이즈베리 등의 출판사 평가단 혹은 서포터 등등 의 리뷰어 활동을 간간히 했으나, 다산북스의 VVIP 나나검 활동 여부 응답에 의사 표시를 안한 무심함덕에 짤린 이후 서점 기반의 리뷰 역시 모두 끊었다. 자발적 강제적 책읽기의 종말의 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작 그 출판사 활동이란 것도 뭐 2016년과 2017년에 몰려 있으니, 책일기인생에 있어서는 잠시 해봤다에 불과할 것이다.   


전자책은 대여와 할인 등 여러가지 이벤트가 많아 읽는 재미보다 사모으는 재미에 더 빠지게 된다. 덕분에 가벼운 책들도 꽤 샀는데,  쉽게 읽히는 만큼 바로 잊혀지기 쉽상이라 리뷰를 쓰지 않으면 읽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또 나중에 읽는 책들이랑 내용이 헷갈릴 것 같아서, 리뷰부터 써두어야 싶은데, 역시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게 더 좋다. 써서 뭐하나.. 애드온 수입이 쏠쏠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아 쏠쏠했다는 것의 의미는 심리적인 것임, 한 때 동사의 맛 같은 경우, 책한권 사서 한줄 평 하나 달랑 올렸는데  100원 씩 수십건이 적립돼서, 잘 하면 (그래 봐야 약 40% 정도?) 본전도 빼겠다 싶던 시절도 있었으나, 요즘은 책들을 잘 안사는지 방문자가 없는 건지 영 재미가 없다.


이 분 특강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몇 번 봤는데, 무엇보다도 웃기면서도 가끔 슬프고, 아주 평범한 것들에 삶을 비유하는 게 기가 막혀서 책을 사봤다. 내용은 좋은데, 이런 책들의 특성이 다 그렇듯이 듬성듬성, 텍스트의 빈곤. 그러니까 너무 후루룩 읽힌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 엇? 신간이라고 해서 샀는데, 알고보니 2016년 책이구나 했는데, 전자책은 2017년 출간이다. 







이 책은 조금 읽다가 김창옥님의 책의 리뷰를 다 쓴 다음에 마저 읽기로 했다. 다른 성격의 책이기는 하지만 둘 다 뭔가를 가르치려 드는 책이라, 리뷰 쓸 때 쯤이면 두 개 책의 내용이 막 섞이게 될 까봐 그렇다. 실제로 자주 그런 일을 겪는다. 하나의 책을 다 읽으면 비슷한 류를 읽기 전에 리뷰를 쓰던지 아예 리뷰를 안쓰던지 해야 한다. 








리뷰 이벤트도 하고 해서, 서재 홈에서 자주 보던 책이라 읽기 시작했는데, 반 정도 읽으면서, 2차대전의 노르망디 작전의 미국측 병사 이야기를 일본 사람이 썼다는 사실이, 사실 소설을 누가 무얼 쓰냐에 문제 될 게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캐릭터들이 약간 일본풍의 느낌이랄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풍 만화적 캐릭터 혹은 히가시노 게이고 풍의 미스터리 적 느낌이 들면서 뭔가 오리지널로 입을 헹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009년에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는데, 종이 책은 교정 교열 이슈 때문인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던 걸로 알고 있다.  작년에 전자책으로 발간되어 세계문학 세트에 추가되었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때 읽었다. 지금에야, 전쟁 영화도 많이 보고 견문이 넓어져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적인 상상이 조금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그 때에는 훨씬 더 막막했기에 끔찍한 사실적 묘사의 단편들만 남아 있다. 이를 잡고, 쥐가 빵을 훔치고, 반토막이 된 병사의 다리가 머리 없이 뛰어가던 장면 같은 것. 지금 반 정도 읽었는데, 당시 읽었던 느낌보다 훨씬 더 풍부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전쟁의 실상 그 이면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비인간적 모습들.





하루키가 좋아하면 똥이라도 살 기세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출판계의 하루키 숭배 현상은 조금 이해할 수 없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비롯한 여러가지 미스터리 소설 시리즈를 광고하면서 하루키가 좋아했던 책이라는 광고가 그 대표적인 에이다.  하루키가 수십번 읽었다는 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마케팅 효과라면, 이 책을 과연 좋게 평가해야 할 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하루키가 안읽었어도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주인공 필립 말로는 하드 보일드 소설의 평균이 되었다는데, 암튼 이 책을 읽다가 2017년도 출간 책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주춤하는데, 내가 뭐 문학의 무슨 주의니 하는 거 잘 모르는데 하드보일드는 또 뭐야 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확실히 알겠다.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지를 안알라줌 하는 게 하드보일드인 거 같다. 중간 정도쯤까지 읽었는데, 쓸데없는 설명이 없고, 뭔가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게 몰입이 비교적 잘되는 편이다. 



노통브의 소설은 문학세계사와 열린책들에서 주로 나오는 거 같은데, 열린책들은 신간을 주로, 문학세계사책은 시간이 좀 된, 더 많이 알려진 책들이 주로 있다.  장편이라 하기엔 매우 짧은 편이고 누벨라 정도의 양이다. 노는 날 몇시간 만에  다 읽었다. 내용 중에 제목에 있는 '적'과 '화장'을 설명하는 대화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제와서 다시 보니 뭔 뜻인지 잘 모르겠고, 저 제목은 적응이 잘 안된다. 분할된 자아와 죄의식에 대해 다룬다. 



 






보트 위의 세 남자는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웃긴 책이다. 읽는 내내 킥킥거리며 돌아다녀서 미친 X로 보였다. 자전거를 탄 세 남자는 보트 위의 세 남자만큼 끊임없는 웃음을 자아내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재밌다. 1/2 정도 읽었는데, 아껴서 읽는 중이다.  이 때 영국 남자 셋이 자전거 여행을 간 곳은 독일로서 생각해보니, 1차 대전이 시작하기 전이다. 두 국가 사이에는 나름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겠지만, 세 영국 신사(?)들은 아랑곳 않고 잘 정돈된 독일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책 제목의 질문에 대한 내 스스로의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 이다. 모든 문장은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것의 의미를 따져가다보면, 이상하지 않은 평균적인 삶은 없으며, 문장 역시 그렇다. 엄청 이상한 문장을 표준의 이상한 문장으로 고치는 것,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독성과 의미 파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해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평범한 하나의 문장이 얼마나 게으르고 불분명한지 알 수 있다. 간간히 읽고 있는데, 아직 조금 더 남았다. 같은 저자의 동사의 맛도 있는데, 이런 책은 글을 조금이라도 쓰는 사람들이라면 붙잡고 서서 묻고 싶다. 이 책 왜 안사세요? 






여기까지가 비교적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의 목록이다. 더 오래 전에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하거나 리뷰를 못쓴 목록은 훨씬 많다. 시작만 한 책도 읽은 책으로 쳐주는 거 없나. 이렇게 열심히 쓰면 내년에는 달인이 되려나. 아놔 플래티넘 등급, 영화할인권, 다이어리, 머그컵... 그게 공짜가 아니었던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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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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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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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강의 -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
조주연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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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게 아니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조선 영정조 시대 최고 수집가 석농 김광국의 수집가 정신을 칭송하는 이 말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살짝 비틀어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인용하여 유명해진 말인데, 원문  석농화원의 발문을 쓴 당대의 문인 유한준이라고 한다. 이 책 <현대 미술 강의>의 저자 조주연이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말인데, 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미술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유흥준 버전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특히 현대 미술을 접할 때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함의 무지에 비애를 느끼기까지 한다. 이건 무얼까, 무얼 뜻하는 걸까. 왜 이런 걸 전시하는 걸까. 무얼 보라는 걸까. ‘아는만큼 보이는’ 게 예술이라면 알지 못하는 건 보아도 보이지 않는 걸 말한다. 우리는 때로 미술관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예술품을 더듬으며 마음으로 감상하려 애쓰지만 알려 한다고 해서 다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려 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 미술만큼 작가의 의도와 평론가의 해석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도 드문 듯하다. 음악을 들으면 느낄 수 있고, 좋은 그림이나 예술품을 보면 느낌의 전환을 이끌어 내므로, 알지 못해 보지 못한다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저 말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지만, 유독 현대미술에서만큼은  크게 공감된다. 


모더니즘은 재현의 거부로부터 시작되고, 그 시작점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까지 누드화의 고전주의 전통을 깬 이 그림 속의 누드 여성은 신화 속의 여신이 아니라 현실 속의 창녀였고, 관람자를 도발적으로 쏘아보고 있으며, 풍만한 입체감이 살아나는 명암대신 날카로운 색채 대비를 사용했다. 이것은 3차원 공간을 묘사하는 세계의 재현을 떠나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회화 자체의 평평한 미적 구성으로의 이동이다. 이를 기점으로 미술은 3차원 세계의 재현을 떠나 대상의 시각적 효과를 탐구한다. 


일시적인 빛, 순간적인 인상, 인상주의의 탄생과 심화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화가들, 모네, 고흐, 쇠라, 세잔, 고갱으로 이어진다. 인상주의의 그림들이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상주의의 그림에서 재현의 흔적을 없앤 것은 아니다. 색채와 선을 묘사의 기능에서 분리시켜 특유의 표현적 효과를 냈고,  이미지들은 ‘묘사의 노역에서 풀려’났다. 여기까지가 초기 모더니즘이다. 저자는 이 초기 모더니즘을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미술’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설명하고 있다. 아는 것이 없어도 보이고, 느끼고, 좋아하고, 모으고 싶어지는 그림들은 오히려 사진처럼 재현해낸 고전주의 그림들보다는 우리가 인상주의라고 뭉뚱그려 알고 있는 재현을 거부하기 시작한 시도의 정점인 듯하다. 


전성기 모더니즘은 마티스와 피카소를 통한 ‘재현 체계의 전복’으로 이어진다. 마티스는 ‘색채와 선을 묘사에서 해방시킨 후 새롭게 재조합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색과 선은 무언가를 묘사하지 않고 그림이 된다. 인상주의를 고루 실험하고 야수주의와 분할주의를 거친 마티스는 <삶의 기쁨은>를 통해 형식, 양식, 주제의 세 가지 면에서 기존 그림에서 탈피했다. 형식 면에서는 대규모의 순색 사용으로 원색간의 과격한 충돌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왜곡한 점, 양식 면에서는 서양 미술의 모든 원천들을 원래의 양식이나 크기와 무관하게 등장시킨 점, 주제 면에서는 목가풍 장르화의 바탕에 성차의 교란을 통해 인체를 사디즘적으로 공격한 점 등이다.  피카소는 단일 원근법을 폐기한 후 대상을 여러 개의 작은 평면으로 잘게 부스는 분석적 입체주의로서 전성기 모더니즘을 대표했다. <칸바일러>를 보면 초상화의 원형은 완전히 사라졌고, 인물의 형상은 작은 평면들로 산산이 쪼개어 후진하여 가라앉은 반면 배경은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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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1906 캔버스에 유채,176.5x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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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의 초상>, 1910


이로써 그림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순수한 미적 구성으로 나아간다.  순수 추상은 입체주의 콜라주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입체주의 콜라주는 그림의 재료가 아닌 재료를 뒤 섞는 것으로 입체주의의 유산을 계승하지만 새로운 효과 하나를 추가했는데 그것이 ‘도상적인 것의 파괴’다.  미술이 언제나 형태의 유사성인데,  브라크가 창안하고, 피카소가 뒤따른 입체주의 콜라주는 유사성에 기초한 재현의 회화와 결별하고 관계의 차이를 바탕으로 의미 작용이 일어나는 언어 기호의 조건을 미술에 도입한다.   유사하게 그리지 않는 미술은 이로써, 기호로 전환했다고 해석된다. 말처럼 어려운 현대화의 알쏭달쏭이 시작되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창안한 절대주의는 더 어렵다. 그것은 지시 대상 없이 조형 요소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바탕으로 의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고 하는데, 캔바스를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놓은 검은색 사각형에서 어떤 암시를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연역적 추상). 반면 몬드리안은 회화가 세계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긴장과 균형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구성을 찾는다(구성적 추상). 


추상 표현주의는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와는 다른 방식을 개척하여 순수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대표 주자는 잭슨 폴록이다. 폴록은 미술의 변방 미국 뉴욕을 탁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폴록의 그림을 여행 중 미술관에서 몇 번 본 적 있는데, 그 엄청난 크기에 압도되었고, 아무리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며 뚝뚝 흘린다고 해도, 내가 하면 평생을 시도해도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제서야 아직까지 각인된 그림의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었다. 기억 이미지 혹은 무의식의 이미지라는 해석,  자연의 그림이자 비밀스럽고 거대한 풍경이라는 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젤이라는 도구의 틀을 벗어났다는 해석이다. 즉, 수직적 시각장 회화를 수평적 회화로 전복했다는 것이다. 전후 뉴욕에서 이런 류의 시도를 하는 화가들이 더 있었고, 클리퍼드 스틸은 표면의 질감에 대한 촉각적 탐색을,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는 회화의 표면을 얇게 펴서 질감의 촉각적 연상을 없애고 색채와 개방성의 문제를 돌파할 길을 찾아낸다. 색채가 그 자체로서 독자적 발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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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벨 아트 뮤지엄(Fortworth, USA)

여기까지가 1부 모더니즘의 주요 테마들이고, 2부는 순수 미술을 거부하는 반예술 아방가르드, 3부는 반예술의 역설 혹은 곤경으로 표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아방가르드는 대전 전의 취리히 다다, 베를린 다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전후 미국의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팝을 포함한다. 아방가르드는 페터 뷔르허(1974)에 의하면 예술의 자기비판이다.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어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접속하여 다양한 비판적 반응을 일으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포스트팝으로 나뉘고, 포스트 미니멀리즘은 대상과 형태를 넘어선 과정 미술, 신체 미술, 장소 특정적 미술이 이에 해당되고, 포스트 팝은 언어와 사진의 개입이 관여하는 개념미술, 제도비판 미술, 차용미술 등이 해당되는데 이 마지막 포스트팝이 특히 흥미로왔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성기 모더니즘까지는 이해가 가능했고, 2부 아방가르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제외하고는 더욱 난해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신체미술의 경우 역겨운 생각마저 들게 하는 예시들이 있었고, 다시 최근에 가까울 수록 다시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복귀하는 느낌이었다. 


강연 형식으로 쉽게 설명되어 있는 책인줄 알았는데, 여러 미술 비평가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매우 밀도높게 비교하면서 현대 미술의 흐름을 저자 특유의 관점으로 배치하였다. 저자가 그린버그 전공이라고 하는데, 그린버그의 비평과 그 비평에 대한 또다른 비평 등이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략이나마 알수 있게 해주었는데, 미술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문장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며, 미술전공자나 학술적인 서적으로는 밀도 높고 깊이 있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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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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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재난 소설로 읽히지 않았다. 재난 소설이라면 재난은 극복되어야 한다. 재난 소설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대재난이고 그 재난은 휴머니즘으로 극복한다. 거대한 재앙이 물밀듯 밀려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비극이 산처럼 쌓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살아있는 인류애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한두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로 다시 평화를 찾는다. 이 소설이 재난이 아닌 것은 그들에게 닥친 재난이 극복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사를 채우는 방식이 차갑게 인류의 본질을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장르 소설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반대한다. 

 

우리가 종교처럼 믿고 있는 인류애라는 것의 본질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소설에서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나타난 탄압과 학살, 은폐의 자취를 흐름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인간-개 상호간 바이러스를 개가 퍼트리는 바이러스로 잘못 이해하는 일은, 재난을 다루는 방식을 정의한다. 인간이 개에게 퍼뜨려서 개가 죽어나간다고 해서 개를 위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개가 매개자가 되어 인간에게 퍼뜨린다는 전제가 개의 학살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재난을 다루는 방식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슷한 소설로, 카뮈의 페스트가 생각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죽어간다는 사실, 도시가 폐쇄되었다는 사실은 두 소설에서 매우 비슷한 요소이다. 28은 사실감이 높다. 바이러스가 막 퍼져가는 도시에서 고립된 채 아비규한 속에 처한 생생한 현실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수의사는 수의사대로 개는 개대로, 모두 피해자이다.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도시민이 모두 다 죽기를 기다리며 정부에게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 긴 시간들이 세월호의 알레고리로도 읽혔다. 저런 상황에서 국가에서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통신을 끊고, 국경수비대가 도시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공공연히 죽이는 일조차도 허락되는 세상이 과거 어떤 정권이라면 있을 법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은 떨쳐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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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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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라고 알려졌던 것들 - 의식, 본능 억제, 거울이미지, 수학, 언어 등은 다른 동물도 가지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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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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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징징대는게 페미니즘은 아니다.  불공평하다고 억울하다고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게 페마니즘인 시대는 지났다. 여성 주인공이 기존의 남성이 해왔던 영웅적인 전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고 해서 그게 페미니즘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페미니즘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상속에서 자각하지 못했던  불합리한 울타리. 여성이라는 틀. 그것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해주는 것.먼저 태어나 부당한 세상에 저항했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선거권을 인권을 동등한 권리를 쟁취했던 선배들이 덜부순 것들 혹은 도저히 부술 수 없어 보이는 뿌리박힌 인습들 그런걸 알아가기 하는 게 페미니즘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런 사상들을 글을 통해 전달하기는 쉽지만, 삶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소설을 통해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소설을 통해 주제의식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지겨운 계몽이나 선동 문학이 되기 쉽다.   


분명 우리에겐 틀에 박힌 여성의 이미지가 있는데 때로 그것아 문화적 틀 내에서 시대의 도덕이나 윤리 같은 걸로 몇겹씩 곱게 포장되어 있다.  그러한 문화와 착붙이된 여성에게 요구되는 이미지의 틀은 때때로 인간의 자유와 펑등과 정의를 지속적으로 훼손함에도 불구하고  부수기 힘들다. 내 세대의 퀘퀘묵은 성적 순결 문제가 그랬었고, 아직도 진행중인 시부모와 친정 부무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의무감의 차이가 그렇다.  더 말하자면 끝이없다. 시대가 결혼과 동시에 여성에게는 가사와 육아와 시가에 대한 의무가 차곡 차곡 쌓이며 차례를 기다린다. 이런 문제들은 이미 수없이 일상 속에서 제기되는 것이어서, 기존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맥락으로 이해될 필요성도 있다.  불만과 성토의 장이 된 커뮤니티,  미러링이란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왜곡하는 곳까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은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악용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시 여성에게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시대가 요구하는 성적 역할은 지배적 성이 결정했다. 힘이 센 남자가 힘이 덜센 여자를 지배하는 전통은 더이상 힘이 세상살이를 결정하지 않는 문명의 시대에 와서 정교하게 다듬어져 윤리와 도덕과 문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의 틀을 부수는 데는 시대가 이건 도덕이야 라고 부르는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그 의심은 갈등을 부른다. 뭐야 여자가. 왕세자와 유명 철학가덜의 청혼도 마다하고 과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자유와  인권의 상징인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여성 수학자 히타피아가 머리털이 뽑히고 굴껍질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끝에 죽임을 당한 이유는 분명히 그의 성과 관련이 있다. 


사둔 책들 중 페미니즘과 관련된 소설이 하나 있어 앞부분을 조금 들여다 보았다. 이갈리아의 딸들, 아마도 메갈리아의 용어가 이갈리아에서 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구 문화에서  보조적 성으로서의 여성의 롤은 언어에 그대로 스며있다. 그 책의 첫페이지가 첫줄이 용어 설명인데 여성과 남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뀌었다.   wom(움)은  여성과 인간을 동시에 지칭한다. 영어의 man에서 대부분의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합성되어 spokesman, policeman 등의 단어가 나오는 대신 이곳은 반대로 spokeswom, seawom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성은 바로 여성 wom에 man 접두어가 붙어서 manwom이 된다. 그리고 남성은  페호라 부르는 성기 보호기를 찬다. 아무튼 이런 역설적 설정이 남성들에게 여성의 겪는 불공정함, 불편함 등을 간접경험하는 기회이기는 할테지만,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굉장히 불편해할 것은 뻔하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나는 지금 시점(남녀 갈등이 심화된 시점)에서,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남녀 양진영에서도 공격받지 않으면서도 할말을 하려면 어떤 말을 쓸 수 있을까 라는 것. 82년생 김지영을 쓴 작가처럼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대한 민국 평균의 여성의 삶의 일부(부당한 부분)를 도려내 마치 카메라로 다큐를 찍듯  찍고 편집하는 방법과  암시와 상징으로 모호하게 페미니즘를 나타내는 방법, 이 책의 단편들은 이 두 가지 중 하나다. 조남주의 <현남 오빠에게>와 최은영의 <당신의 평화>는 전자이다. 여자들끼리 모여 앉아 한 줌 얘기로 끝나는, 끝나고 돌아가면 모두가 각자 잊혀지고 다시 그 현실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현남 오빠는 지방에서 올라와 현남오빠와 캠퍼스 커플이 되어 현남오빠의 주도로 두 사람의 관계에서부터 주인공 여성의 삶과 미래까지 모두 결정되고 결국 결혼 코앞까지 갔다가 막판에 깨닫고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하고 통쾌하게 끝나는 내용. 이기적인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그가 베푸는  '보호'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심지어 자기 직업까지도 남성의 요구에 맞춰 결정하는 그런 멍청한 여성상이 21세기 지금 현실에도 존재하는 현대적 여성상이라면, 이건 남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런 남자에게 계속 의지한 여성의 잘못이 크며, 여성의 자각이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당신의 평화>는 대를 이어 인간대접도 못받는  마지막 며느리였던 정순이, 늘 외식하던 남편 생일날 결혼 예정인 아들 약혼녀를 집으로 불러 시켜먹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을 딸 유진이 묘사한 내용이다. 김이설의 <경년>도 비슷하게 주변의 있을법한 현실의 이야기인데, 고딩 아들의 문란한 성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아버지의 태도, 자신의 이중적인 잣대를 다룬다. 그 이중적 시선은 자기 아들로서 옹호하고 싶은 약간의 마음과, 여성으로 느끼는 남성의 성적 지위에 대한 불편함 등이 있다. 즉 이 세 작품은 여성의 틀을 깨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들이며,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는 여성들이다.


나머지는 첫 세 개의 작품과 조금 다르다. 여성이 주도적인 주인공이거나 여성의 위치에 처한 남성이 주인공이다.최정화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에서 주인공은 손에 습진을 앓아 장갑을 끼고 다니는데, 폐건물의 촬영을 맡는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폐건물에서 여자 치마로 보이는 게 떨어져 있어 그걸 치우다가, 하나씩 손을 대 말끔하게 치운 다음 사진을 찍는데, 그런 다음 장갑을 벗으니 자기 손의 습진이 다 나았다는 건데,  이 소설이 무얼 말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상황은 장황하게 묘사하는데, 결국에 아리송 작전으로 끝을 맺는 단편은 나랑 잘 안맞는 거 같다. 손보미의 <이방인>은  SF 추리 소설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권력과 타협하지 않아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소신있는 여성 수사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소설이 조금 특별했던 이유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제껏 모든 추리 소설에서 남성이 담당했던 내면적 고뇌와 외부의 압력, 그리고 반대성의 추종자(?)동료의 협업 같은 요소들을 그대로 여성 주도적 인물에게 투사하기 때문에, 어? 여성이었어? 하고 의외였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문학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고정시켜놓았는지를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역시나 가장 좋았던 소설은  좋아하는 작가 구병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이었다. 제목에서도 알다시피, 그리고 구병모적  판타지적 세계를 굉장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고 특유의 화려면서도 약간 엣스러운 만연체로 풀어나가는 동안, 내용은 다른 것과는 달리 남성이 주인공이다. SF적 판타지와 남성이 등장하면서도 페미니즘으로 태깅된 소설을 쓰는 아이디어 역시 높게 평가한다. 이 남성은 우연히 어떤 섬에서 개최되는 여성분장 미인대회에 출전했다가 봉변을 당한다. 그러면서 벗겨지지 않는 굽 높은 구두와 벗겨지지 않는 꽉 끼는 원피스를 입고, 귀신인지 홀로그램인지 정체모를 것들이 쏘는 화살 습격으로 도망가고 함께 출전한 남성참가자들은 이미 화살이 목에 박혀 죽는 다이나믹한 장면이 포진된 단편이면서도 흥미진진하고, 그러면서도  페미지즘적 메시지를 가장 명료하고 또한 정치적으로도 올바르게 전달하는 소설이다.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 역시 SF 계열인데, 인간도 아닌 어떤 생명체 클론이 우주 탐사를 위해 우주선에 태워져서 보내지는데, 알고 보니 임신했다는 얘기. 나름 흥미롭기도 한데, 김성중의 스타일과도 나는 잘 안맞는것 같다. 너무 심오한 주제와 암시가 심해서 피로감이 나타난다고 할까. 그래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대충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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