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당신도 고칠 수 있다 - 치매 진단과 치료, 예방법까지 상세히 다룬 치매 길잡이!
양기화 지음 / 중앙생활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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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60대의 젊은 나이에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후, 마지막 몇년간은 치매를 앓으셨다. 하루하루 약해지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슬프고 고통스럽다. 멀리 있어 더욱 애틋한 당신이었지만, 뇌졸증 이후 전화로 듣는 소식은 한번도 더 나은 것 희망적인 것이 없었다. 걱정할까봐 제대로 잘 알려주지 않기에, 돌아가시던 마지막 해에는 고속버스러 5~6시간 거리를 두어달에 한번씩 가야 했다. 갈때마다 상태는 조금씩 조금씩 나빠질 뿐이었다. 희망이 없는 삶. 그것이 치매이고, 그것이 뇌질환이다. 돌아가시고 나면 잊힐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남의 슬픔이 씻길줄 알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에 비하면 오랜 동안 조금씩 고통받던 모습에 늘 죄책감이 들고, 나의 먼 미래가 아닐까 두렵다. 


엄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다행히 뇌졸증이나 심장마비는 아니었다. 아직도 원인을 찾고 있는 중인데, 기억이 많이 흐려셨다. 함께 병원을 다니면서 엄마가 많이 늙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건 뭐건 예방이 제일이라는데, 블로그 이웃님께서 책을 내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주문해야지 주문해야지 생각만 하고, 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읽어보려고 샀다. 받는 순간, 어머 이 책을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흔히들 방송과 소문을 타고, 이런 건 치매래 저런건 치매가 아니래 하는 자가 진단도 하고 우스개 소리도 많이 하는데, 나처럼 노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꼭 비치해놓고, 수시로 부모님들의 상태를 살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얘기하다보면, 부모님들 연세가 있으셔서 여러 형태로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치매에 여러 종류가 있고, 원인과 결과도 다르다. 그러므로 연로하신 부모님을 둔 경우라면, 코딱지만한 상식으로 섣불리 자가 진단을 하며 괜찮다 괜찮다 했다가 시기를 놓치는 것보다는, 치매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다. 치매에 대하여 궁금했던 모든 것들이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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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7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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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덴마크 왕자 햄릿>은 이미 선왕인 아버지가 죽은 후 삼촌이 왕위를 계승받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죽음이 삼촌이었음을 알게 뒤는 과정, 복수의 칼날과 삼촌의 또다른 음모와 계략,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등이 반전을 거듭하며 발생하는 복잡한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큐언의 현대적 재해석은 복잡한 플롯과 다수의 등장인물이 생략된 채 살인 사건의 진행에 집중한다. 존과 별거중인 트루디와 존의 동생 클로드가 벌이는 존 살해 사건을 태아의 시선으로 잡았다. 세익스피어의 대본이 살해 사건 후에 일어나는 아들의 복수극과는 달리, 이 소설은 핵심 내용으로만 보자면 햄릿의 현대판 프리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햄릿의 가장 큰 주제인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아들이 태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의식이 생겨나려면 뇌가 여러 감각기관에 의해 자극을 받아 뇌신경이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태아가 받는 자극이라고는 이해할 수 없는 태외 세계의 소음과 땅콩껍질같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둔 자궁 뿐이다. 어머니의 혈액을 통해 공급되는 영향 성분들도 태아의 상태에 얼마간 영향을 줄 것이다. 햄릿의 재해석답게 태아는 배속에서도 생각이 많다. 의식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차원의 추리와 상상력과 느낌은 성인의 언어로 대변하지만, 실제로 태아의 경험과 희미한 의식은 출생과 동시에 전혀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면서 망각 혹은 다른 차원의 의식 속으로 증발할 것이다. 전생의 기억(만일 있다면)이 잊혀지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 망각의 강이 흐르듯 태아적 의식이 우리가 알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알수 있는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로 빠져나옴과 동시에 연속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태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은 그 언어를 이해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며 태아의 출생후 스스로의 사고와는 유리될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돌이켜본다면 선왕 사후의 햄릿만큼 목숨이 위태로운 자리가 없다. 왕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자가, 선왕의 자식이 살아있을 동안 마음 편할 수 없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유배시키고 교살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은가.  단종은 존재만으로도 수양대군의 왕권을 위협한다. 햄릿 역시 마찬가지다. 선왕의 유일한 적통 적자이며, 추종자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햄릿이 설사 선왕 살해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해도 왕권장악의 음모와 실행은 햄릿을 죽여야 완성될 것이다.


트루디와 클로드가 노리는 것은 존의 재산이다. 대저택을 소유한 시인 존은 트루디와 별거할 때 집을 양보했지만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며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한다. 그러나 존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아내 트루디는 형의 동생 클로드와 연인 사이이고, 어서 그 낡아빠진 저택을 처분하여 현금을 차지하고 싶다. 현대의 과학수사 시대에 둘이 꾸미는  흉계는 치밀하지도 않고 실행력과 스피드만 갖췄다.  태아는 뱃속에서 그 모든 것을 목격한다. 이미 삼촌과 같은 배를 탄 어머니가 아버지와는 다시 합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무사히 태어나 보살핌을 받게 되려면 어떤 쪽이 유리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클로드도 태아의 출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알고, 살해 계획이 성공했을 때, 그리고 체포되어 구속되었을 때 등의  모든 상황을 상상한다. 넛셀 속의 태아는 무능할 뿐이다.


아버지의 상실과 클로드와 어머니의 역겨운 관계에 좌절한 태아는 탯줄로 목을 감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죽고자 하는 의식은 의식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고 의식이 빠져나가면서 자살하고자 하는 의식도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자살이 힘든거다. 죽고자 하는 의식을 살아 있는 의식이 붙잡아야 하는데, 의식이 죽으면서 죽고자 하는 의식마저 함께 죽으니 탯줄로 스스로 목을 조이는 일은 실패한다. 태아는 앞으로 출생 후 둘 중 하나의 운명이 됨을 알고 개탄한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어디론가 보내지던가,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서 태어나 감옥에서 유아기를 보내게 되던가. 그 무엇도 원치 않은 일이지만,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영겁의 우주 속에서 순간적으로 반짝였던 80 평생 자신의 삶이 쓰게 될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는 거다.


전체 사건이 태아가 듣고 느끼는 시각으로 조명되었기에, 세 사람 모두의 마음이 무엇인지는 단지 태아가 감지하는 마음으로만 알 수 있다. 만삭이 된 어머니는 낡아빠진 대저택을 돼지소굴처럼 만들고, 썩은 냄새를 피우고 집안을 엉망으로 한 채, 만삭의 상태로 클로드와 섹스를 한다. 어머니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와 뉴스를 통해 세상을 아는 태아는 그럴 때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종반의 긴박한 상황으로 치닫자, 그 절망적 상황에서 태아가 할 수 있는 일, 배 속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이 있음을 깨닫...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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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05-25 21:11   좋아요 2 | URL
그런데 희안하게도 고대 중국에서는 선양이 미덕이었대잖아요? 존경받기 위해서 선양하고 거절하고 이러기를 몇차례씩 하는 허세가 중국인의 의식 속에 있는동안 왕권을 빼앗을 명분을 만드는 일도 참 피곤했겠어요 ㅋ

AgalmA 2018-05-2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요. 모성이야 몸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유대를 느끼기 쉽지만 부성 거기다 아버지를 위한 복수 감정을 태아가 가진다는 게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라캉 거울단계를 거쳐 자아 인식을 뚜렷이 가지는 게 인간인데...

CREBBP 2018-05-25 21:1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상한 거는 소설 자체가 이상하죠. 대체 태아가 의식이 있다는 설정부터 말도 안되니까요. 더더군다나 세살 돌아가는 소식도 다 알고 지식도 많죠. 저렇게 바깥 소식도 다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채로 태어나면 뭐 초중고 교육은 필요도 없겠죠 ㅋㅋㅋ

AgalmA 2018-05-25 21:15   좋아요 0 | URL
책을 읽어야 작가 논리에 동의할지 말지 결론나겠군요ㅎㅎ

CREBBP 2018-05-26 12:22   좋아요 0 | URL
이게 읽을 때는 태아의 시각이라 뭔가 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뱔점을 낮게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정말로 낯선 방식의 새로운 시도였다는 생각과 함께 오 작가가 대단해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지더라구요
 






























국내에 가장 다양한 번역본이 나와있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햄릿이 아닐까 싶다. 알라딘 상품 페이지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키워드로 뒤져보니 상품 검색 창에 12페이지에 걸쳐 상품 목록이 나열된다. 한 페이지당 20권씩 나열되니까 240 종이 있다는 소리다. 그 중 일부는 어린이 책, 일부는 이북과 같은 판본, 그리고 특별판 개정판 등등이 있으니 절반 정도로잘라도 여전히 많다. 가장 많이 팔린 건 1998년 민음사 (최종철 옮김) 판이다. 아마도 개정판을 안찍고 예전 가격을 유지한 덕에 검색창의 왕좌를 지킬 수 있던 거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열책과 펭귄클래식과 문예판 세 가지가 이북으로 있는데, 이것 저것 바꿔가며 읽었다. 일장일단이 있어서였다. 


햄릿의 고뇌는 선왕의 모습으로 나타난유령의 말을 얼마나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로 시작된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의 작품인데, 한맺힌 유령이 나타나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사연을 얘기하는 방식은 마치 동양 괴담 같은 걸 연상시킨다. 햄릿과 당대의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를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선왕이 죽은 후  태자가 왕위를 계승받는 우리 상식과 달리 애초에 햄릿이 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받지 못했는지는 설명도 암시도 없는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더욱이 그는 어린 아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햄릿의 불만은 숙부의 왕위 계승보다, 정절을 지키지 않는 어머니를 향한다. 그는 왕위에는 관심도 없다. 햄릿의 여성 혐오의 화살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무 죄도 관습도 어기지 않은 자신의 약혼녀에게까지 향한다. 더욱이 포틴브라스를 무찌른 선왕과 비교할 때 현재 왕인 숙부는 간교하고 무능한 인간이다.   ‘돼지우리 같은 침대’에서 혐오스러운 인간과 침실에서 함께 뒹굴며, ‘나의 생쥐’라는 호칭을 쓰는 두 사람의 관계는 햄릿에게 추악할 뿐이다. 


DNA의 절반을 공유한 어머니는 숙부보다 훨씬 가까운 핏줄이고 혐오의 끝엔 사랑이 맞닿아 있는 애증의 대상이다. 게다가 선왕(의 유령)은 자신을 배반하고 숙부와 바로 결혼해버린 왕비의 안위를 햄릿에게 부탁한다. 유령이 되어서조차 우뚝 선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 숙부와 놀아난 어머니.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햄릿형 인간이라 하면 흔히 우유부단형으로 말해지곤 하지만, 그가 아버지의 복수를 유예하는 까닭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왕좌를 차지한 숙부가 유령이 말한대로  진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 확신이 없다. 아니 꿈에서, 혹은 환상 속에서, 죽은 부모가 나타나 누가 죽였다 라고 말하면 바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나. 살아있는 생생한 증거가 아니라 유령의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나, 시대가 중세면 유령이 해결사인가.


햄릿은 신중했을 뿐이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미친척을 하고 돌아다니며 고도의 심리전술로 왕의 의중을 떠보지만, 이로 인해 사건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가족 관계의 비극적 복수전에 끌어들이고, 계략과 반전의 드라마틱한 전개를 제공한다. 왕은 햄릿이 미쳤는지, 미친척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미친짓에는 왕의 범죄 행위를 알고 있는듯한 암시가 곳곳에 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왕은 햄릿의 친구이자 신하들을 스파이처럼 활용하지만, 생각과 의심이 많은 햄릿이 그들에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그가 택한 방법은 선왕의 살해사건과 유사한 세네카의 연극을 왕과 왕비 앞에서 공연함으로써, 그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대사를 듣고 나서도 그의 숨은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 경우, 우리가 보았던 것은 악마였을 것이고, 내 상상력이 불칸의 모루처럼 흉악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유있는 탐색전이 끝나고 결정적으로 숙부의 살인이 확인된 후에도 그는 실행하지 못한다. 공연을 계기로 선왕 살해의 심증을 굳힌 햄릿의 우유부단함이 가장 크게 부각되는 곳이 바로 왕이 공연을 박차고 나가 홀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복수의 기회를 날려 보내는 장면이다.


참회하고 있을 때 죽이면 천국에 갈 터이니 진정한 복수가 아니라는 이유는 참으로 기독교다운 발상이다. 선왕은 참회할 기회도 없이 죽어 지옥을 떠도는데, 선왕을 죽인 숙부를 이 순간 죽이면 그는 천국에 갈거라는 그의 숙고는 결정장애적 경향을 충분히 보여준다. 게다가 그 순간은 선왕의 시해 사건을 확인하는 격정적인 순간이며, 다시 또 왕이 홀로 있을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유령의 말을 듣고 어차피 복수하기로 작정했다면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 맞으며, 다른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백가지 이유를 들어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왕을 죽이는 건 반역이다. 그가 어떤 계략으로 왕이 되었건 현재 왕이기에 왕을 죽이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르며 성공한다고 해도 바로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다. 그러니 적자인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도록 제대로 복수하려면 세를 규합하여 제대로 역모를 꾸며야 한다. 허나 계속 느끼는 거지만 햄릿은 자기 자신이 왕이 되는 일 자체에 별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햄릿과 신하와 하인들을 시켜 햄릿의 의중을 떠보고 급기야는 햄릿마저 살해하고자 하는 왕의 계략이 서로 엇갈리며 엉뚱한 사람이 죽어 나가고 피해자가 속출한다. 오필리아는 햄릿이 사랑한 여인이지만 왕의 고문 플로니어스의 딸로 햄릿에게는 적의 딸이나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왕의 고문 폴로니우스의 가족이다. 첫번째로 희생된 사람은 폴로니우스로,  왕이 햄릿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왕비에게 햄릿을 잘 구슬려 심문(?)하게 하고, 그들의 대화를 몰래 지켜보다가 변을 당한다. 폴로니우스의 가족은 권력의 최전방에서 햄릿의 집안 식구들 못지않게 깊게 연루되어 개인개인이 모두 다른 이유로 죽게 되는 비극의 가문이다.


오필리어에게 구애했던 햄릿은 유령을 만난 후 오필리어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넘어서는 대우를 하는데, 그 전에 오필리어는 먼저 가족들에게 햄릿이 바람둥이이며, 너에 대한 모든 찬사와 달콤한 사랑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니 그의 모든 구애를 물리치라고 조언한다. 딱한 오필리어는 구애를 물리칠 기회도 별로 없이, 미처버린(미친척 한) 햄릿에게 먼저 가혹한 말폭탄을 받는다.  햄릿의 혹독하고 매정한 말로 끝난 실연의 슬픔을 이겨내기도 힘든 오필리아에게 아버지는 햄릿에게 살해되고, 햄릿은 영국으로 떠나게 된 사실 등등이 모두 겹쳐 드디어 미친듯 행동하다가 결국 익사하는데, 오필리어의 죽음은 자살과 사고의 중간 정도에 있다. 실수로 떨어졌으나, 그대로 드레스를 날개처럼 펼치고 물 위에 누워 그 옷들  물을 흡수해 빨려들어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으니 말이다.


폴로니우스 살해 사건으로 인해 추이는 다시 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여론을 잠재울 구실로 왕은 햄릿의 신하이자 친구였던 두 사람에게 친서를 들려 햄릿을 영국으로 파견(?)한다. 하지만 그들이 영국 왕에게 도착해 보일 친서는 그 자리에서 햄릿의 목을 치라는 내용이다. 햄릿의 치밀함은, 그들이 지닌 친서를 바꿔치기함으로써, 또다시 두 사람의 희생을 낳고, 홀로 살아 돌아온 햄릿과 마주친 왕은 이번엔 해외에서 돌아온 폴로니우스의 아들 레어테스를 이용하여 햄릿을 죽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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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0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0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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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골 기숙 학교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해맑은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되는 작품에는 곱고 하얀 쌀밥에 섞여 씹힌 작은 모래 알갱이처럼 돌출된 단어 하나가 서걱서걱 굴러다닌다.  뭔가 옳지 않아 하는 기운이다. 어린 소년 소녀들의 우정과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거기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섬뜩한, 비운이 감돈다. 아이들은 학대되거나 방치되지 않고 비교적 잘 돌보아지고 있는 듯하고, 창작 활동, 그룹 놀이, 교환회 같은 사건에 조명을 비춘다. 평화 속에 감도는 이상한 긴장감은 첫째, 아이들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이유, 둘째,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과정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훗날 이미 이들 일부가 죽었음이 혹은 죽음의 단계에 있음이 간간히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되면서 현재 시점에서 생존해 있는 캐시의 미래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현재 어떤 단계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일화들 각각은 기억이 반추하는 의미,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어떤 식으로 자각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체 이야기가 집중하는 것은 절친이었던 캐시와 루스 토미 사이의 사랑과 질투와 우정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지점의 섬세한 세부 사항들이다. 그러한 일화 속에서는 과거에서는 미래였을 현재를 암시하는 징조와 상징들이 드문 드문 포진해있지만, 이 해맑은 기숙 학교의 아이들의 관심사는 사소한 인간 관계와 선생님들이 강조하는 작품활동 뿐이다. 헤일셤이라는 장소는 그곳에서 성장한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장 후에 만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동경할만한 이상적인 장소다. 목구멍에 가시처럼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이질적 단어 '기증'은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그 맥락이 형체를 갖추면서 점차 이야기의 중심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기증은 여전히 아이들, 성인 직전 아이들, 혹은 성인이 되었을 때조차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애가 타고 끓어오르는 건 오히려 이야기 바깥에 있는 독자다. 아이들의 존재 목적, 정해진 운명의 정체가 온전한 문장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면서, 설마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던 의심이 확증으로 변하는 순간의 충격은 책을 끝까지 다 읽을때까지, 그 이후까지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생명체를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거나 비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서사는 SF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익숙한 소재다. 그것이 클론이라 해도 전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 서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것이 독자를 경악케 한다.  기증이라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독자에게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매우 낯선 방식이다. 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앞에서 분노하거나 저항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심하게 좌절이라도 해야 할 문제를 제쳐두고 사소한 우정 속에 켜켜히 박힌 갈등과 사소한 기억과 의도를 따지며 관계적 감정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몰두하기에 충격과 걱정과 염려는 독자 스스로의 몫이다. 클론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장기 제공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무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용서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해진 삶 밖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는 것은 어떤 물리적 수단도 아닌 의식이었다. 은폐와 암시가 시간을 타고 천천히 성인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식의 강,  만들어진 운명을 천명으로 알고 안주하는 인간의 태만, 무기력. 어찌보면 인간은 태곳적부터 사피엔스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부터 이렇게 시스템의 권력이라는 맹목적 허구에 길들여지는 것이 전체 종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을테지만, 다시 보자. 이게 인간이다. 가축을 잔인하게 취급하고, 동물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 노예를 부렸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노동자를 기계취급한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루시 선생님이 분노했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장도 마담도, 아이들의 성장을 담당한 개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엄격한 교장은 아이들의 복지와 보호를 위해 교장으로서 할 일을 했고, 제롬비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스하게 보살폈고, 마담은 마담대로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작은 손으로 그리고, 만든 '최고'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아이들을 최상의 상태로 돌보고 성장시키지만, 아이들의 존재 목적에 기생하는 제도권의 수혜자들이며, 아이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루시가 분노하는 것은 반인륜적 클론 농장과 기증  제도가 아니라, 헛된 꿈을 꾸도록 내버려두는 아이들의 성장 환경이다. 캐시가 '네버 랫미 고' 노래를 들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아기를 떠나보내는 엄마를 상상할 때, 아이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마담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은 성교 교육 시간에 자신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에 공허감을 느낀다. 캐시가 베개를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듯 '네버 렛미 고' 속에 투영하는 건 떠나가는 아기이며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아기이다. 태어날 수 없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존재할 수 없는 아기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노래를 투영하는 모습은 슬픔 넘어의 것이며, 이룰 수 없는 막연한 동경일 뿐이다. 하지만 마담의 시선에 비친 캐시는 성장하자 마자 곧 생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이며 자신이 가진 한 차원 더 깊은 세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마담은 불붙은 막대 끝을 기어가는 개미를 보듯 캐시를 보며 한없는 연민에 눈물 흘리지만, 캐시는 인간의 자신(들)을 향한 그러한 슬픈 감정을 잘 모른다. 훗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라도 그들은 기증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DNA 원본을 향한 호기심과 동경같은 것의 차원을 결코 넘지 못한다.

클론들의 삶은 정해져있다. 그들의 비극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이 장기제공용이라는 비인륜적 의무를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간병인으로서 거울처럼 똑같은 무수히 많은 죽음, 죽음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기증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집행이 유예된다는 사실에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즉 성장이 끝나면 바로 기증을 마친 클론들의 간병인이 되어 자신이 겪게 될 똑같은 고통과 세네번까지의 반복적인 죽음을 수년간 수없이 많이 겪은 후에야 비로서 기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간병인으로서의 생활을  비참하게 이어가며 겨우 5년의 삶을 유예한 루스는 기증의 시간이 다가오자 '기쁘게' 받아들인다. 11년을 간병한 주인공 캐시 역시 다르지 않다. 기증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고 기증이 유예되는 유일한 길은 간병인의 연장이지만 간병 자체가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제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위로하는 일이다.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간병 기간을 축소시켜 어서 임무를 끝내고 '할 일'을 완수하는 일보다,  삶이 곧 죽음이지만 그래도 헤일셤의 친구들이 대부분 생을 마친 후에도 아직 '살아'있으니 죽음을 통한 삶의 유예는 위안인가.

처음으로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토록 직접적으로 빈번하게 언급하고 앞뒤 맥락이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음에도 나는 아이들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 '듣고 있으나 듣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았으나 말해졌고, 말해진 모든 것들은 어느새 아이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빈틈을 차곡차곡 채웠다. 루시 선생님은 그들이 '듣기'를 원했다. 어쩌면 생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랐을 지도. 자신들의 운명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온전한 문장으로 듣는 그 충격적 순간조차 그들의 관심은 사실보다 루시 선생님의 감정에 더 집중한다.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았으나, 듣지 않음은 듣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무심히 쌓여온 정보들이 마침내 한데 모아져 정확하게 삶과 운명을 정의해도 격정적 상태를 겪지 않고 순응하게 한다. 헛된 희망들은 여전히 꺼진 재 속에 남아 있는 불씨처럼 잔재해있지만, 자신의 근원자(원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 사랑의 증명이라는 동화같은 전설이 유예해줄 것이란 순박한 믿음과 추론 뿐이다. 

이미 결정된 미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대신 기증을 위해 흠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매일 강조되는 학교에서 은연중에 기증이라는 단어가 의식의 어두운 장막 속에서 거주하며 조금씩 수용을 향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작품을 걷어가던 외부인 마담의 주저하듯 두려워하던 시선이 어쩌면 외부인들과의 벽을 더욱 단단히 높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장을 마치고 외부로 나가 외부인의 세계에 살면서도 그들은 외부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무엇이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체험해보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누군가는 기증을 위해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캐시가 헤일셤 시절의 우정과 코티지 시절의 갈등과 이별 그리고 간병과 기증의 시간동안 다시 만나 엇갈린 사랑과 교활한 우정을 반추하고 용서받는 시간들로 채워나가고, 기증이라는 몇번의 수술과 고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죽음이 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지도 모른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순간에 충실해야 할 세부적 감정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헤일셤은 특별한 곳이다. 이 특별한 헤일셤이라는 장소가 또다른 이슈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클론들이 오로지 목적만을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사육된 것과 달리 헤일셤의 아이들은 당대 인권운동 바람을 맞은 곳이었다. 마치 오늘날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 복지가 이슈화되는 것처럼, 장기제공자들에게도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권리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던 시절, 많은 단체의 후원과 사회적 지원으로 인해 헤일셤이 설립되어, 그곳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교사들의 보살핌과 교육과 창작활동을 보장받은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성장을 마친 후에도 헤일셤 출신이라는 명패는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본인들에게도 자랑스레 추억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가 된다. 캐시가 기증자들을 헤일셤의 지인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헤일셤 출신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며, 진실된 사랑이 증명되면 집행이 3년간 유예된다는 소문도 헤일셤 출신만 해당된다. 인간과 클론 사이의 계급관계 특권의식이 다시 클론들 사이에서 출신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비련의 주인공들의 운명을 미리 알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그들이 헛된 꿈을 꾸는 걸 막지 않고, 들었으되 듣지 못하게 은폐하는 것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토록 '많이 들었으되 듣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아이에게 루시처럼, 화를 내며 너희는 청소부도 트럭 운전사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여길 나가자마자 곧 간병인이 되고, 기증을 하여 짧은 생을 마치리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그토록 잔인하게 전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처럼 해맑게 키우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훗날 봇물 터지듯 쏟아냈던 에밀리 교장의 말의 홍수가 헤일셤의 설립과 폐쇄, 아이들에게 작품활동이 격려되고 마담이 가져가는 작품과 갤러리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는 듯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에밀리가 하는 말의 이면에는 단 한가지 주목할만한 진실이 있다. 헤일셤이 아니었다면 동물처럼 사육되었을 너희를 위해 우린 최선을 다했다고,  별 관심도 없어보이는 캐시와 토미에게 쏟아붓는 그 모든 고백의 핵심은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도 예술도 창작열도 그 무엇도 집행 연기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기증 이외의 삶은 3년이 아니라 단 3개월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며, 그 누구의 어떤 권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성역이다.  이미 세번의 기증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엉터리 소문들과 더 엉터리 추론으로 만들어낸 겨우 3년이 되었을 희망. 평생을 사랑했지만, 교활한 우정이 찢어놓은 그 사랑 앞에서 남겨진 조각 시간들,  예리하게 가슴을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 그들의 죄는 들었으되 듣지 못한 것이다.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는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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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환상 문학의 원형 혹은 영감이 된 북유럽 신화는 아쉽게도 그 원전이 많지 않다. 문제는 많지 않은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문제다. 많은 고대 신화를 가진 문화권에서 글이 존재했던 것과 달리, 북유럽 '야만인'들에게 문자는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들어왔기에, 기독교 이전 문화에서 흥하던 버전의 신화는 사라져 없어졌고, 기독교의 영향하에서 묘하게 섞인 형태로 신화가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에다이야기>의 역자가 한 말인데, 유일신 사상이 뿌리박힌 후라면, 신화 내에서 신들 사이의 권력 질서도 유일신 사상의 영향을 받아 대표신의 존재 같은 것들이 부각되는 형태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 더 오래전에 노래하던 스토리들과 현재까지 남아있거나 발견된 스토리 사이의 갭을 가늠하지도 상상할 수도 없음이 아쉬울 수밖에. 


책이 흔치 않았던 당시 신화는 스컬리(음유 시인)들이 노래로 전해졌을 거다. 닐 게이몬의 서문에서 그나마 산문의 형태로 신화가 남아있을 수 있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음유 시인들이 신들을 지칭할 때 토르니, 로키니, 오딘이니 하는 형태로,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서구식으로?)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직접 이름으로 신들을 지칭하지 않았으며, 은유 환유 직유 등등의 비유로 그들을 지칭하였으므로 지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려면 설명이 필요했다. 그 은유의 뜻을 풀어 남겼기에 신화의 기록이 남겨졌다는 이러한 설명은 내가 을유의 <에다 이야기> 2부 스컬리들의  시창작법을 읽으면서 이게 뭐야 했던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물론 2부를 읽으면서 대략 닐게이몬과 비슷한 이유를 짐작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산문에다가 왜 그토록 불친절한 것인지가 더 이해가 된다. <에다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직접 소비되는 문학이 아니라 말하자면 도매점 같은 걸로 스컬리들이 신화를 노래하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하는 신화의 뼈대 핵심 이야기만을 써놓은 것이라는 추측이다. 전체 문맥을 이해하면 거기서 흥미로운 부분을 가져와 각색을 하고 운율을 맞춰 운문으로 노래하고 전달되고 아마도 그렇게 이야기는 시대와 시대의 경계를 통과해갔을 것이다. 


이 책에 있는 스토리들은 내가 북유럽 신화 책으로는 유일하게 읽었지만 또 국내 유이무이한 원전인 <에다 이야기>에 나와 있는 스토리들이 대부분이다. <에다이야기>에 뼈대만 앙상하게 붙어 있어 이야기의 완전한 모습, 그러니까 그 이야기속의 인물들의 생각과 의도와 성격 등등을 상상하기 어려운 반면, 닐 게이몬의 북유럽 신화는 그 뼈대에 이야기꾼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각 인물과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볼 수 있다. 왜 안그렇겠는가. 한 두 장에 쓰여진 이야기가 수십장의 페이지로 변모했는데, 프로페셔널한 작가인 닐 게이먼은 남아있는 운문 신화들과 해석, 사전들을 꼼꼼히 조사해서 찢겨져 나가거나, 공백인 상태였던 이야기와 행위의 틈새를 채웠고, 그 사이사이를 환상작가적 상상력으로 꼼꼼히 메웠다. 


얼마 전개봉한 토르 라그나로크를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질좋은 리뷰를 통해 얻어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로키와 토르 사이가 티격태격 코믹하게 그려졌으며 제작사의 온갖 히어로들이 떼로 나와 플레이를 펼치는 면에서 어벤져스의 아류적 성격도 띤다고 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지나치게 상업적 추구에서 나온 결과로 재미 말고는 볼 게 없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면 오히려 북유럽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다. 어벤저스처럼 북유럽 신화는 수많은 영웅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이야기를 갖는다. 다른 신화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유일신 이전의 신들은 각 지역 혹은 문화에 따라 숭배하는 신들이 각기 다르고, 그들의 지역 혹은 문화의 흥망성쇠가 어떤 운명을 따라갔는지에 따라 신들의 스토리와 운명도 달리한다. 그러니까 (이건 내 상상) 많은 종족들이 흡수 통합되어 하나의 나라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믿던 수많은 신들 역시 하나의 스토리로 통합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패배자가 믿던 신들의 원형은 악한 신으로 굳어졌을 거야. 그러니 수많은 히어로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능력을 과시한다면, 토르 한 명에게만 집중되었던 이전 버전의 토르 영화보다 더욱 북유럽 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토르와 로키 둘이 티격태격 코미디같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닐 게이먼의 북유럽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 로키는 굉장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스(에세르) 신족 출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스 신들과 같이 살며 운명을 공유하는 경제공동체로 보이는데, 교활하고 못된 로키를 아스 신들과 어울리는 이유는 아스 신들이 뭐 멍청하거나(아스 신들이 멍청한 건 맞지만, 로키랑 같이 사는 이유가 멍청해서는 아니다) 혹은 자비로와서 갈 데 없는 로키를 맡아주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로키에겐 다른 신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능력이 있는데, 하나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문제해결능력이다. 이러한 로키의 특별한 능력이 신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진가를 발휘해 위기에서 해결해주기에 못된 짓을 업으로 일삼아도 참고 살아가는 한편, 신들 역시 피장파장 못되기는 마찬가지여서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못된 걸로 갈라설 필요가 없다. 로키의 탁월한 교활함이 멍청한 신들의 교활함을 보조하는 식이다.  필요할 땐 돕고, 심심할 땐 괴롭히고 못되게 구는 게 로키의 특성. 


신들이 노한 건 로키가 자신들보다 더 못돼서가 아니라 더 못되고 더 교활 혹은 영리해서다. 그는 하고 싶은 건 다 한다. 아름다운 금발인 토르의 아내에게서 머리카락을 뽑아가 하루 아침에 대머리를 만들어버리는 자잘한 일에서부터, 결국 자신을 유배시키고 라그나로크로 이어지게 하는 재앙들의 원인이 되는 발드르 살해 교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발드르가 불길한 꿈을 꾸자, 신들은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에게서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데, 너무나 여리고 사소해서 그런 다짐을 받지 않았던 겨우살이와 발드르의 눈먼 형제를 조정해 결국 그를 죽게 하기에 이른 로키가 헬에 가서 부탁부탁해 그를 살려내려는 노력에도 방해를 하고 다니자 결국 신들의 대노를 사서, 피해 도망다니다가 잡혀서 독뱀에게 죽게 되다가 그가 낳은 세 괴물들과 거인들이 힘을 합쳐 신과 대결하는 게 라그나로크이며, 그 대재앙에 해와 달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파괴된다.


북유럽신화에서 신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혹은 생명체들은 저마다 자신의 필살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 필살기들은 도구와 관련이 있다. 누구든 때려잡을 수 있는 토르의 망치 묠니르가 대표적인 예인데, 인류 아니 신류 대멸망의 날인 라그나로크때에야 그 중요성을 알게 되지만 아내를 얻기 위해 버린 프레이르의 명검, 세상의 온갖 정보를 전해주는 오딘의 까마귀 후딘, 죽은자들의 군대, 종이처럼 접었다가 펼칠 수 있는 무풍 지대에서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강력한 배 스키드블라드니르, 낮에는 마차를 끌고, 저녁엔 잡아먹히지만 다음날 되살아나는 토르의 염소 두 마리 등등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고, 이들 물건들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있다. 토르의 망치가 말해주듯, 이 물건들은 개인의 능력을 결정하는 중요 수단이며, 이들의 활약은 이야기 전개에 주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신화에서 라그나로크는 미래의 이야기이다. 신화 자체가 과거에 쓰여진 이야기이므로, 과거에서 말한 미래가 이미 지난 미래를 말하는 것인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먼 미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성경이나, 혹은 예언가들이 말하는 최후 심판 혹은 지구 멸망 같은 것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이며 아무도 알 수 없기에 결론은 해석과 믿음의 몫임에 비해, 라그나로크의 결말은 이미 지나간 일처럼 결정되어 있다. 이 결말은 모든 것이 파괴되는 재앙적 결말이지만, 낡은 것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사라진 후,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결말이고, 시작과 끝이 순환하는 세계관을 보여준다. 저자 닐 게이먼도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라그나로크는 과거의 일인가 미래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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