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 구효서 장편소설
구효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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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과거, 두 시점의 화자가 교차로 서술한다. 현재의 화자는 갑자기 사라진 친구 시게하루의 행방을 쫒는 야마가와 겐타로다. 과거의 화자는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하숙을 하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요코다. 겐타로는 함께 만주와 관련된 검색어를 찾아 정리하는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시게하루의 행방을 찾는다. 시게하루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 요코가 쓴 글로,  앞서 말한 두 명의 화자 중 하나다. 요코의 글은 다시 두 개의 시점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 글을 배우면서 쓴 글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쓴 글이다. 오코의 첫번째 글은 양아버지의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어린 시절과 15세의 위악속에서 윤동주를 관찰한 모습, 그리고 윤동주가 잡혀간 이후 그를 통해 비춘 자신의 모습과 성장 등을 이야기한다. 겐타로는 시게하루를 찾는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그 글을 찾은건데, 거기에는 간도 항일 운동의 폭력적 양면성과 역사의 일면이 숨어 있고, 나라를 잃은 사람이 말을 함께 잃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는 내용이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두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변화하고 성장한다. 


양아버지의 지속적인 성폭력으로 위악만 남은 16세의 어린 요코는 조선 학생인 윤동주가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사실을 이용해 오히려 무례하게 군다. 동주는 요코의 무례와 관심에 아랑곳없이 친절하게 대하는데, 그러다가 요코는 동주가 조선말로 시를 쓰는 것을 주목한다.  이후 요코는 윤동주의 연행과 죽음을 통해 영토를 빼앗긴 자에게 모국어의 의미를 반추하며 자신이 멸망한 종족 아이누족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 뿌리를 찾는 삶을 산다. 이런 내용은 그가 남긴 뭉치에 서술되어 있는데 그 글뭉치는 자신이 집을 나와 윤동주가 사는 하숙집에서 처음으러 가타카나를 배우면서 쓴 버전과 그가 아이누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말과 글을 배워 아이누어로 쓴 내용 두 버전으로 되어 있다. 일본어로 된 버전은 막 말을 배운 아이가 쓴 것처럼 문법적인 형식을 갖추지 못했고 아이누어 버전은 그 첫번째 버전의 글을 상세히 글의 형태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본 열도에는 다수 민족 말고도 완전히 다른 말과 전통,별개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모양인데, 아이누족은 17세기 이전까지는 일본인들과 무역을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었지만 점점 힘을 잃어 19세기말 20세기 초에는 일본인의 아이누족 말살 정책으로그 뿌리가 근간부터 흔들리게 된듯 싶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했던 요코는 훗날 이름을 다시 아이누족 이름으로 바꾸고 아이누족의 언어와 민속학을 공부하여 이미 사어가 되어가고 있는 아이누족의 언어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예전의 상처받고 위악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아이누에 서럽게 빠져 있었다. 원통하고 슬플수록 묘한 에너지가 차올랐다.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아이누어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현재의 화자가 그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죽은 후이며 결국 그녀가 평생을 찾고자 했던 것은 윤동주가 경찰에 잡혀가서 강압작으로 일본어로 번역해야 했던 그의 시라는 것이 밝혀진다. 요코가 윤동주의 시를 찾는 이유는 그 시들을 버리기 위해서다. 그가 쓴 시는 원본이 조선말로 쓰여졌지만 그를 수사하기 위해 조선말을 읽을 수 없는 경찰이 총뿌리를 겨누며 강압적으로 번역시킨 거다. 요코는 그 시가 한글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일본어로 번역된 채 세상에 나가는 일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 것이다. 

현재의 나는 요코와 윤동주에 대한 이러한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다. 처음, 이 소설은 화자인 겐타로와 그의 단짝 친구가 만주라는 검색어를 도서관에서 검색하고 정리하는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전개되는데 처음엔 뭔가 수상쩍어 거절했던 겐타로를 홀로 두고 시게하루가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미궁속으로 빠지고, 그것이 둘이 하던 만주에 대한 검색 알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검색과정에서 그가 남긴 자취를 통해 시게하루가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추적하고 있었는지를 추적하기 위해 일본 얼도를 횡단하다시피 하여 결국 요코의 자취를 만나게 되고 또한 그를 통해 일본인이라 믿고 있던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한국어를 배우고 이 책을 한국어로 쓴다는 내용인데. 이렇게 미스테리 형식으로 진행되다보니 장르 소설은 아닌데 장르 소설 식으로 진행되고 여러 명의 화자가 나로 이야기 되고 그게 헷갈릴까봐 작품내에서 다시 설명하곤 하니 구성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산만하고 복잡하다고 느꼈다. 

결국 자신이 하던 일은 , 제국시절 부정과 속임수로 돈을 모아 현재 일본 최고의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그룹 대표가 그의 과거를 지우려던 일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조부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낸 시게하루가 그들과 타협하여 자신의 현재를 바꾸려는 의도로 무언가를 했음을 후에 알게 된다. 역사 소설같은 부분도 있고 미스터리 같기도 하다. 잘 알려지지 간도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운동과 혈투 등을 담고 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너무 많은 걸 의도적으로 담아내려 한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처음부터 미스터리하게 진행되어 어떻게 풀릴지 궁금했는데 또 그게 술술 풀리지 않고 자꾸 얘기가 엉키기만 하다가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 앞에, 성큼 다가가게 하는 서사였다.  

"말과 말의 영토가 잊히고 소멸된 시간만큼이나 오랜 소급과 회귀의 여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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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들에 비해, 전승으로 기록된 버전이 몇 안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에다 이야기는 12세기 중세 아이슬랜드의 음유시인 스노리 스툴루손이 쓴 것으로 근대 이전까지 유일한 에다 이야기여서 에다(Edda)로 불렸었는데, 1600년대에 운문으로 기록된 고대 게르만 신화집들이 아이슬랜드의 교회에서 발견된 이후 스노리의 에다는 산문 에다로 불리우고, 새로 발견된 고대 운문 신화집을 운문 에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국내에는 북유럽 신화의 1차 사료로, 산문 에다를 번역한 이 책 <에다 이야기>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운문 에다를 번역한 <에다> 두 권 뿐이다. 이 밖에도, <베어울프>, <덴마크인의 역사적 이야기>  <니벨룽엔의 노래> 및 북유럽 영웅 서사시들이 있는데, 역자 설명에 의하면, 이 책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입장서 가공되어 있거나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영웅의 이야기(지그프리드와 베어울프)를 중심으로 하기에,   온전하게 게르만 신화 를 전달하는 신화적 가치를 가진 책은 두 개의 에다에 집중된다고 한다.  





고대의 세계관 속에서, 하늘과 대지와 지하 세계가 똑같이 중력의 법칙을 받은 것처럼 성을 짓고, 공간을 창조하여 인간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증오하며 살아간다. 하늘 높이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 천정이 있고, 그 위에 어떤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같다. 그 이름도 멋진 아스가르드는 아스 신들이 사는 성의 이름이다. 신들도 두 개의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바나헤임에 살고 있는 반(Vanr) 신족이고 또 하나는 아스(Ass)신 족으로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토르는 아스신족 출신이다. 또한 하늘에는 신보다 한 계급 낮은 엘프들이 엘프하임에 살아간다. 반면 지상에는 인간과, 거인, 난쟁이들이 각각 미드가르드, 요툰하임 니다벨리르에서 살아가는데, 신, 인간, 거인들은 자기들끼리 살아가기는 하지만 서로 교류(주로 싸움질)한다. 지하세계는 죽은자들의 세계로 헬, 니플헬, 니플헤임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인들이 죽으면 지하세계로 가지 않고 최고신인 오딘의 궁성 발할로 가서 낮에는 전쟁 연습을, 밤에는 먹고 마시며 파티를 하며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이 죽은자들의 군대는 이름이 에인헤레르로 불린다. 태초부터 전투에서 죽은 자들이 발할로 가면, 그곳에는 그 군사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으며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진다. 이렇게 그 공포스런 ‘죽은자들의 군대‘는 <반지의 제왕>과 <왕좌의 게임>에서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요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데, 신화는 그들의 식생활까지 묘사한다. 수퇘지를 솥에 삶아 먹이면 저녁이면 그 수퇘지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반면 오딘의 주식은 포도주로 음식을 먹지 않고 포도주만 마신다.) 


당시 먹는 일은 생존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터여서 먹는 일에 관련된 일화가 많고, 토르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토르가 로키와 함께 염소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길을 떠나, 어느 농부 집에서 하루 묵었을때 전차를 끌던 염소를 잡아 먹고는 망치 묄니르로 그 염소를 다시 살리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염소는 낮에는 썰매를 끌고 밤에는 살신성인 잡아먹혀 식량을 대주고 아침이면 다소 살아나 똑같은 노동과 희생을 반복한다.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이 일화의 포인트는 토르가 농부에게 뼈를 발라 먹고 불 위에 던지라고 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뼈를 골수까지 파먹어서 생기는 결과에 있다. 당연호 자기 말을 잘 들었을 줄알고 담날 주문으로 염소를 살려내자, 염소 중 한마리가 다리를 절게되는 게 토르에데 발각되기 때문이다. 골수를 파먹은 사실이 들통나자 농부와 가족은 죽음의 위협울 받는다.


유일신을 믿는 가치관이 2천년간이나 지배하고 있던 서유럽 문화가 마치 유일신 만큼이나 유일한 진실인양 세계화된 이래로, 다양한 층위의 세분화된 세계관 속에서 다원적인 종족들의 탄생과 삶,  종말, 그리그 그 이후의 세계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북유럽신화는 매력적인 판타지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하늘과 땅 사이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 사이의 다리는 영화 <토르>에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멋지게 해석되었는데, 신화 속에서는 무지개 다리이며 무스펠의 아들들이 진군해올 때 무너진다. 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세계의 종말을 뜻한다. 


에다 이야기에서 종말은 끊임없이 환기되는 테마이기도 하다. 라그나뢰크라 불리는 이 사건은 <왕좌의 게임>의 모티브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데, ‘먼저 무시무시한 겨울이 닥치‘면서 시작된다. 그 후 ‘눈이 하늘 사방에서 내리고 강력한 서리와 매서운 바람이 지배‘하고 ‘태양은 더 이상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 ‘온 세상에서 살육이 난무하는 참상이 뒤따르는‘ 세 번의 겨울에 탐욕에 눈이 멀어 친인척과 부모 자식을 서로 죽인다. 늑대와 뱀의 시대가 와서 태양과 달을 삼키고, 하늘이 굉음을 내며 쪼개지고 무스펠의 아들들이 몰려오면 비프뢰스트 다리가 붕괴되고 세계수 위드그라실이 진동하면 에인헤례르들도 무기를 들고 싸우나 결국 오딘도, 토르도, 로키도 늑대도 적도 아군도 모두 서로 싸우다가 전멸하고 불탄다는 예언이 도처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 종말 이후에 바다에서 육지가 솟아오르고 비다르와 발리라는 듣보잡신이 살아있을 것이며, 토르의 아들들이 살아 돌아와 토르의 망치를 소유하고 숲에 숨어있던 두 명의 남녀가 살아남아 종족을 번식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 예언된다. 현재는 파괴로 향해 가고 있고, 그 파괴와 종말 뒤에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우주 역시 끊임없는 순환 속의 한 부분임을 상기시킨다. 



크게 1부 궐피의 홀림과 2부 스칼드의 시 창작법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궐피의 홀림은 스페인의 왕인 궐피가 아스족에 대해 알고 싶어 아스가르드로 여행을 떠나 세 신들을 만나 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고, 문답식으로 되어 있다. 2부 스칼드의 시 창작법은 말 그대로 음유시인들이 시를 짓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는 신화로서는 굉장히 낯선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내 생각에 스칼드들이 노래하는 내용이 신화들이고, 그 노래 가사들을 어떻게 창작해야 하는지를 가르키는 교과서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신화랑 무슨 관계냐 하면,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것이 신화를 단순하게 읊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서사시의 형태로 노래하는 것이므로, 이 노래 가사를 어떻게 창작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신화의 내용을 알아야 하고, 신화에서 말해지는 각종 은유에 대해 알아야 된다. 


시문학의 본질은 (비유적) 언어와 운율이고, 표현하는 방식에는 사물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 방식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방식, 그리고 케닝이라고 하는 이름의 앞에 형용사를 붙이는 방식이 있다고 전한다. 예를 들어 토르는 오딘의 아들, 시프의 남편 같은 사실적인 표현 외에도, 아스가르드의 수호자, 거인의 적 등으로 불린다.  스칼드의 시 창작법에는 이렇게 어떤 사물이 왜 어떤 (관용적)표현으로 불리게 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금이 에기르(바다)의 불, 시프의 머리카락, 글라시르의 나뭇잎,  풀라의 머리띠, 수달의 배상금 등으로 불리는 이야기들이 차례차례 소개되다가,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하는 안드바리 저주의 실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로키가 아스신들이랑 세상 구경을 가서 놀다가 수달로 변한 한 농부의 아들을 돌팔매질로 죽여서는, 한 농부의 집에 가서 요리해달라고 맡겼는데 알고보니 죽은 수달이 그 농부의 아들이었다. 이 신들이 자신들의 필사기 무기로 무장을 하지 않으면 힘이 없는데, 농부는 화가나서 그들을 급습하여 붙잡았고, 목숨을 구걸하자, 수달 가죽을 다 덮을수 있을만큼의 금을 요구했다. 오딘은 로키를 검은 엘프들의 땅으로 보내 난쟁이 안드바리에게서 금을 탈취하고 마지막 남은 반지마저 빼앗자, 안드바리는 그 반지를 소유한자에게 저주를 내렸다. 이후 농부의 아들들은 농부를 죽이고 형제들마저 자기들끼리 싸워 죽이는 등 반지를 탐내는 자들에게는 계속 불운이 겹친다. 


이 저주의 반지 이야기는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생각나는 시구르드의 반지 이야기로 이어진다. 농부를 죽인 아들 형제 중 한 명인 레긴은 형 파프니르에게 밀려 도망가 대장장이가 되어 뵐승왕의 아들 시구문드(지그문트)의 아들 시구르드(지그프리트) 를 맡아 길렀고, 자기 형의 금을 차지하기 위해 그람이라는 강력한 칼을 만들어 주고 부추겼다. 파프니르의 심장을 구워먹고 새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생긴 시구르드는 레긴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죽여버린다. 이후 시구르드가 마법에 빠져 잠든 부른휠드를 깨워주었는데, 이 책에는 둘 사이의 러브라인이 보이지 않지만, 결국은 시구르드와 시구르드의 부인, 부른휠드와 부른휠드의 남편 이들의 관계가 복잡한 러브라인과 탐욕 속에서 소용돌이 치며 서로 죽고 죽이는 불행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배반하고 상처받고 싸우고 공멸하는 이야기들이다. 결국은 그 모든 번영과 영광과 행복을 뒤로 하고, 궁극의 시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란 걸 춥고 긴 겨울을 보내며 만들어 나가던 북유럽인들은 알고 있었다.  스칼드의 시 창작법을 읽으면 운문 에다는 훨씬 읽기가 어려울 것 같다. 여러 시들의 예시를 보면, 은유와 비유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해석을 읽을 수 있게 해놨을테니 다음 번엔 <운문 에다>를 읽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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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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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투 운동의 본질을, 이 책을 통해 조금 이해하고 동감하는 시선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극히 오츠 다운 방식의 묘사가, 강하게 몰입시키고, 그 몰입에 따른 감정의 이입과 심리적 체험이 바로 피로감으로 나타난다. 그들》을 읽으면서도 느낀거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질적 문화와 이질적 심리가 차근 차근 다가오며 그들 속에 있던 느낌을 공유하고, 그렇게 되면 비슷한 류의 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갖게 되는 방관적인 제3의 관찰자 입장과는 달리, 심리적 밀착감을 느끼게 되면서 그들의 인생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온갖 상처들을 같이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들마치 안읽은 책처럼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뇌의 은밀한 트라우마의 말소 같은 작용이 아니었을런지.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서사가 풍부하고 서늘한 사건이 펑펑 터지는데 문체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낯설다. 번역이 한 몫하는데, 요즘 아무리 번역가가 흔해서 오역을 지적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글들이 넘쳐나기는 해도,  출발어와 도착어의 관계가 1:1 대응관계가 아닌 이상 번역이 창조의 일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역자가 사용한 말의 어미들, 어순들, 고른 단어들 이것들이 만들어낸 조합은 오츠의 소설을 명성 만큼이나 강하게 전달하는 것 같다. 혹, 문법적으로 틀리다거나 문장이 뭔말인지 모르겠다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가끔 그렇게 느낀 문장들이 있었지만, 번역된 문체 자체로만 보더라도 충분히 독창적이고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그들>에서도 그랬고, 오츠가 창조한 인물은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 극단을 걷는다. 1990년대 안젤리나 졸리가 앳된 모습의 리즈 시절, 렉스 역을 맡은 영화와 그보다는 훨씬 나중에 만든 영화 클립들이 유튜브에 뜨는데 졸리의 아우라가 작품 속 렉스를 충분히 카리스마있게 재현해냈겠으나,  소설 속 화자가 묘사하는 신비하고도 위험하고 그토록 매혹적인 느낌을 얼마나 잘 살렸을지 클립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렉스라는 인물의 상징성은 피상적으로는 전투적 페미니즘적인 역할로 보이지만, 당대(50년대 배경)의 페미니즘이 만연된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었음을 고려할 때, 가히 사회의 악을 힘으로 맞서는 모습과도 연결되지만, 결국 자멸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던, 그래서 역사에서조차 사라져버린 수많은 민란들도 생각났다. 그녀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폭스파이어를 조직하지만, 서서히 조직의 힘을 깨닫고, 제도(자본주의)와 사회와 불화하는 동안에도 사회와 제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채 혹은 깨달아서 더욱 극적인 행동으로 치닫는다.  

여자로 태어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불행한 환경인 것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고통받는다면, 그건 누구 잘못일까. 고통을 방어하고자 했던 그 시작의 단추를 다시 끼면, 그녀들의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무엇가 맞닿게 될까.

그 개새끼가 리타를 괴롭 힐 때는 그놈이 널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 해야 하는 거야. 왜냐 하면 그 좆같은 새끼는 할 수만 있었다면 분명 그랬을 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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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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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엔 그랬다. 나 혼자 행복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외면하고 받은 대가는 처절한 고독과 소외와 엄청난 죄책감이다. 오래전에 방영된 TV 드라마 모래시계 중 중 고현정이 쌀을 사면서 우는 장면이 있다. 현 시대의 가치관으로서는 그 울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쳐 오면서 똑같이 쌀을 사며 눈물 흘렸던 기억을 가진 나는 고현정의 울음을 함께 삼켰고, 그 장면을 쓴 작가와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내가 편히 밥을 먹으며 내 한 몸의 배를 채우는 동안 뜻을 같이 했던 동료는 지독한 고문 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생각. 그것은 밥을 먹고 실존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마저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그 땐 그랬다. 모두가 힘들었다. 싸우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싸우다가 포기한 사람도. 모두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선이 선명하고 뚜렷하게 그어져 있었고, 싸우지 않음은 그 선명한 선의 반대쪽으로 선회함을 의미했다.사회 참여라는 행위는, 단순히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추위와 싸우는 것과는 다른 양상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것은 인생의 시작 지점에서, 남은 인생 전체를 막 담보로 해야 하는 종류였다. 이러한 양상의 행위가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로 끌려가는 징집병들과 또 다른 점은, 그러한 선택이 자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과 학교와 제도권의 모든 힘은 그들의 행동을 만류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선택의 순간은 어느 한 두 시점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순간 순간 두려움이 거대한 파도처럼 수시로 밀려오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가 남은 용기마저 갉아먹는다.  그들을 붙든 것은 아마도 시대가 요구한 민주화의 열망이었다. 끝없는 갈등 속에서 투사와 소시민의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충은 청춘을 민주화 투쟁에 바친 사람들이 겪은 고충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이중삼중의 고초 중 하나다. 


영초언니와 같은 언니들을 몇 알고 지냈었다. 나는 내가 싫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쌀을 사서 꾸역꾸역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내가 싫어 하늘만 처다보면 눈물이 나는 데도, 수배중인 선배가 내가 혼자 살고 있던 집에 피신해왔다. 나는 내가 싫어 심술밖에 남은 것이 없는데, 나의 영초언니는 내가 학교간 동안 에너지가 남아돌아간다며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면서 고문을 앞둔 나날들을 '즐겁게' 지냈다. 즐거운 척 하는 것이 비겁한 마음을 더 아프게 찔렀다. 당시엔 앞뒤 생각없이 자신을 투신하는 단순성을 비하하는 마음가짐이 시대적 본질을 되새기는 것보다 편리한 심리적 선택이었다.  언니가 떠난 후 얼마나 지났을까, 법정에 선 언니가, 무어라무어라 외치던 소리를 기억한다. 민주화 투사들의 그 찬란하던 연설과 비교하면 허접하기 짝이 없었던 짧고 성의없던 (관영) 변호사의 변론도 기억한다.  


유시민은 첫사랑이라고 표현하였다. 첫사랑이 무방비의 심장에 충격스럽게 들이닥쳐 삶을 독점하는 이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3까지 권력이 선도하는 제도권의 교육 현장에서 세뇌되었던 그 모든 것이 모두 다 거짓이었음을 확인하던 순간 무섭게 빠졌던 첫사랑에 발동이 걸리는 이유 하나는 공포이고 또하나는 미래다. 겁쟁이는 가장 먼저 21세에 만난 첫사랑과 결별하고, 세속적 욕망이 강한 사람은 서서히 첫사랑과 결별하고,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자들, 정의를 위해서라면 온몸을 바칠수 있는 자들이 끝까지 남았다. 


나의 영초언니는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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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6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을 속으로 언급할 때 투비알오투비라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To Be oR nOt To Be를 줄여서 쓰는 말줄임 코드였다. 이 냉소적이면서도 풍자적인 표현이 작가 자신을 잘 설명해준다. 


현재의 속도로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면 미래의 어느 날엔 분명 수명을 정복하는 날이 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늙는 것을 멈출 수 있는 날이 생길 것이다.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  내가 골골거리다가 조금 덜 사는 건 억울하지 않은데, 더 일찍 죽게 되면 미래의 다가올 어떤 중요한 변화를 더 많이 놓치는 게 좀 억울하긴 하다. 사놓은 책 다 못읽고 죽어도 억울하겠구나. 


이렇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일요일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비몽사몽 설교의 비논리성들을 차곡차곡 은유로 바꾸어 저항감을 죽이는 것처럼, 나는 의심한다. 인간이 인간의 수명을 정복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내 생애의 아주 짧은 동안 회의적인 것들이 마법처럼 바뀌어 그대로 생활이 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녹색 화면에 텍스트로 채팅 메시지를 주고받고 깔깔거렸던 시절,  어떤 미래에는 통신상으로 사진과 영화로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얼마나 회의적이었던가, 눈이 휙휙 돌아갈 변화를 겪고 나서도, 처음으로 와이파이가 되는 전자수첩으로 인터넷을 반나절 걸려 로딩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본다는 상상에도 코웃음을 쳤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다르지 않은가. 다른가. 매일매일 조금씩 더 인류의 수명은 늘어나고 있지만(하루 15분이라고 기억), 그것은 제3국의 질병 퇴치 수준이 끌어올려지는 효과라고, 불치병 정복에 힘입은 통계적 결과지 실제로 인간의 수명을 정복하는 일은 힘들지 않겠느냐 반문해본다. 아 모르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 수명을 정복한다면, 백살이고 이백살이고 삼백살이고 늙지 않고 사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백년법>이 비슷한 소재를 가진 장편 소설이라서 비슷하다고 했더니, 이런 소재는 별도의 쟝르고 분류할 수 있을만큼 흔하디 흔한 것인 모양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하고 가정하는 미래 소설들 말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아마도 큰 일이 날 거다. 기하급수적 인구증가에 따라 지구는 초만원이 되고, 포도송이처럼 오골오골 붙어살아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한, 사기꾼 멜서스가 아무렇게나 던졌던 예언이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커트 보네거트는 반대로 그 미래의 어느날 미국의 인구가 4천만으로 고정된 사회를 그렸다. 너무나도 아늑하고 식량은 풍부하고 인간이 자연을 해치지도 않는다. 수명 뿐만 아니라 늙음이란 것이 극복된 그곳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56세의 '어린' 남자가 와이프의 출산을 기다리는 병원 대기실, 세쌍둥이가 태어나려고 하는 그곳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냉소적인 화가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는 이렇게 잘 컨트롤된 사회를 내내 비아냥 거린다. 그리고 그렇게 잘 조화된 사회가, 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낙원인가 아닌가를 묻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 죽지 않고, 또 아기가 태어나는데 어떻게 4천만이라는 인구가 늘 그대로 유지될까. 그 천국 같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비밀은 자발적 선택에 있다. 이게 뭔소린가 하면서 읽어나가다가, 아 이런 상상을 한 작가의 천재성에 반해 버린다. 어느 시스템이든 저항과 불평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수십억 수백억을 넘어서던 인구를 4천만으로 고착시키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묘사되지 않는다. 어떤 흉칙한 역사가 결과적으로 '살기 좋은 낙원'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그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재생산의 권리는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인가? 결국 이 짧은 소설이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권리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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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3-2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의학관련 글에서 인간의 수명은 아무리 늘어도 120세는 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과연 지구 입장에서 인간이 좋을지는 의문입니다. 책 재밌겠어요.^^

CREBBP 2018-03-23 10:47   좋아요 0 | URL
단편이라 영문 버전도 텍스트로 쉽게 구할 수 있어요. 번역본은 출판사에서 무료 대여하는거 같은데 단편이라 원래가격도 5백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