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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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번째 생일 이후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우리 대륙에서 몇 달 동안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던 19××년** 어느 봄날 오후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가에 위치한 집을 나와 혼자 꽤 멀리까지 산책을 갔다 (박종대 역) 



구스타프 아센바흐, 또는 50회 생일 때부터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로 불린 그는, 유럽 대륙에서 몇 달 동안 불길한 조짐을 보여 온 19××년[1] 어느 봄날 오후,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가에 있는 자신의 집을 나와 혼자 꽤 멀리 산보를 했다 (홍성광 역)



작품의 첫 문장이다. 여기서 19xx년은 1차대전의 불길함을 나타낸다고 하고, 아센바흐라는 이름 역시 어떤 조짐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이 첫 문장은 제목에서도 직접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이 죽음 혹은 불길함을 암시한다고. 대충 읽으면 뭐 첫문장부터 중언부언하나 싶은데, 구스타프 아센바흐 가운데 폰이 붙은 건 귀족 작위가 붙었다는 그런 의미로서, 작품 내내 흐르고 있는 거짓과 속임수라는 의미와도 통하는 게 있다. 원래는 귀족이 아니었는데, 글을 잘 써서(?) 귀족 작위를 받은 뭐 그런 뜻으로 이해했다.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날 문득 삶에 브레이크를 거는 어떤 순간들이 올 때가 있다. 이 책이 쓰여진 100년 전에는 사실 TV나 영화 인터넷과 같은 매체가 끊임없이 소비를 부축이고 자극하는 때가 아닌지라, 일탈을 꿈꾸는 일도 흔치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도시 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성공한 작가 아센바흐가 베네치아로 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길에서 이방인인 듯한 이국인을 보고 나서다.


그것은 떠돌아다니는 불안감 같은 것이자, 먼 곳에 대한 청춘의 갈망이자, 생생하고 새로우면서도 오래 전에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 현대문학 단편선 토마스만 편


발작처럼 일어난 훌쩍 떠나고 싶은 격정적인 욕구는 그를 성공으로 이끈 그의 자기규율과 이성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떠나기에 이른다. 그동안 감정을 가혹할 정도로 억누르고 차갑게 식혀온 아센바흐가 그것도 이성보다는 감성이 억제보다는 충동으로 더 잘 표현되는 베니스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향후 그곳에서 있을 사건을 예건하는 전조로 보인다. 


여행길에 오른 후, 아센바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몇 사소한 사건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 중 가장 강렬하게 그의 심리를 설명하고 소설의 주제와도 관통하는 부분은 염색과 화장으로 교묘하게 나이를 감춘 늙은이가 젊은이들과 함께 호탕하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는 그 늙은이의 추한 기만에 경악을 느낄만큼 혐오하는데, 결국 그 모습은 작품 내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훗날 그가 타지오를 욕망하면서 결국 그 늙은이와 다를 바 없이 염색을 하고 화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베니스에서 맨 처음 마주친 곤돌라 사공 역시 공용 보트를 이용하려는 그를 속여 직접 리도로 향하는데, 후에 면허증이 없는 가짜임이 드러난다. 가장 커다란 거짓말은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도시의 침묵이다. 호텔 지배인, 악사,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콜레라 발생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긴다. 즉 작품 전체에는 아센바흐가 마주하고 있는 거짓과 속임수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아센바흐는 그것을 알아차리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오히려 그 거짓에 묘하게 끌려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거짓으로 가득찬 베니스에서 그는 예술적이고 충동적인 욕구를 발견한다.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 타지오가 있다. 호텔과 해변에서 그는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매일 만나는데, 그에게 끌리는 욕망은 동성애적이고 말초적인 것인지 단순히 아름다움에 끌리는 예술적인 것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는 없으나,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시에서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분명 스토커인데,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눈길만 스칠 뿐인, 스토커임을 증명할 길도 없는 난해한 스토커이다. 


암시와 상징이 곳곳에 깔려있지만, 실제로 타지오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주치고, 소년을 몰래 따라다니고 관찰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불안한 내면을 따라 읽을 뿐이다. 알고 보면 별 내용도 없는데, 토마스 만의 소설 중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고, 읽으면 읽을 수록 그 속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듯해 박종대 버전으로 한 번 더 읽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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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토마스만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주말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를 읽었다. 두 권 모두 중편인데 전자책으로 모아놓은 세트에 겹치기로 중복되어 있어서 골라가며 읽을 수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가 들어 있는 전자책은 세 권으로, 문예출판사 버전은 <토니오 크뢰거>를 표제작으로 환멸, 트리스탄, 마리오와 미술사까지 총 네 개의 중단편이 들어있다. 열린책들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표제작으로 글라디우스 다이(1902) , 트리스탄(1902) , 굶주리는 사람들(1902), 토니오 크뢰거(1902), 신동(1903), 힘든 시간(1905), 벨중족의 혈통(190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 까지 총 7편이 들어있고, 마지막으로 현대문학에서 나온 토마스만 단편집 여기서 언급된 것 외에도 키 작은 프리데만 씨 행복에의 의지,타락,죽음,어릿광대,루이센,토비아스 민더니켈이 더 들어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판으로 민음사의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도 더 언급할 수 있겠다.




























전부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았는데 못읽고 있다가 우연히 펼쳤더니 중단편 분량이라 얼씨구나 시작했는데, 처음 읽는 토마스만이 뭔가 잡아끄는 듯한 힘이 있어서 <<토니어 크뢰거>>를 읽게 되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경우는 더 그런데, 두 권 읽고 작가의 전체를 언급하는 건 무리지만 두 권 모두 스토리상으로만 보면 사실 크게 드라마틱한 내용이 없이, 주인공의 자아가 일으키는 내적 상태와 욕망 갈등을 산문처럼 쓰고 있다. 따라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는 작가일 거 같다. 내 경우, 먼저 읽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계기로 그 작가의 뭘 읽어도 후회 않을 안심 작가 목록 같은 거에 자동 등록되었다. 헤르만 헤세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 독일 작가도 많은데, 토마스만을 굳이 찾아읽게 되지 않았는데, 그 유명한 헤세도 제대로 읽은 게 없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실 단편 소설에서 어떤 대단한 스토리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100~200페이지 분량의 중편이라서, 나름 지지부진하게나마 스토리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결정적인 반전이 사소한 외부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의 내면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스토리는 사건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만들어낸다. 읽기에 집중이 요구되었다. 100년전의 소설 답게 내면 묘사는 세세한 풍경 묘사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주로 여행중이어서 이국적 혹은 낯익거나 낯선 풍경에 내면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토니오 크뢰거의 14세 16세 그리고 중년의 현재로 시간이 쪼개져있으며 단막단막 쪼개져서 공간적 배경이 바뀐다. 14세 소년 남국적 외모와 이름을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금발 소년 한스를 사랑한다. 16세가 되어 사랑한 잉게는  이성이지만 한센과 마찬가지로 금발에 강철빛 눈을 가진 밝은 세계, 의심하고 고뇌하지 않는 밝고 쾌활한 세계에 속해있다.크뢰거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뮌헨은 남국이라 부르고, 유럽의 북쪽과 출생에서 소년 시절까지를 보낸 덴마크와의 국경 도시 루벡을 북국이라 부른다. 이러한 분류는 애초에 토니오 크뢰거가 사랑했던 대상들이 푸른눈과 금발, 이성, 쾌활함, 상냥함 등으로 자주 분류되는 북쪽을 상징하고 남쪽은 그 반대의 대척점으로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속에서는 소시민과 예술인을 남북으로 가르고, 이성과 열정, 쾌활함과 우울함, 냉정함과 광기 등의 속성을 심는다.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우울한 예술가 성향의 크뢰거지만 정작 자신이 동경하는 것은 금발머리의 환하고 순정적이고 착한(?)것들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어쩌면 자신이 반쪽은 혈통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속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을 그 세계와는 정반대쪽의 세계에 속해있으며, 이제 그 속된 세계가 자신이 속한 예술가의 세계에서는  때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안다. 


시를 쓰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크뢰거는 조금씩 그 대단하던 가문이 쇠락하면서, 자신 역시 그 금발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가서 이제 대단한 문학가가 되어 있고, 그의 옆에는 연인인지 지인인지 애매한 관계의 예술가가 예술가들의 세계와 대화의 창이 되고 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고뇌하고, 슬퍼하고, 밝은 빛 아래 어둠을 보고, 그것들을 열정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제 그 세계에서 인정받았고, 자신이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돌려졌던 푸른눈의 금발의 세계는 이제 잊어도 좋을 위치에 있다.  그럴까.


이제 그는 여행을 하고 있다. 자신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 자신을 알아보지만 존재감이 없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그 도시 주변을 맴돌며,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자신이 떠나온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어 경찰에 잡혀갈 뻔한 상황을 떫떠름하게 여기며 발트해를 여행하는 크뢰거는 고독하다. 예술가에게 고독은 형벌처럼 따라다니는 짐일까. 어쩌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도 그렇고, 아마도 내게 이 두 소설이 꽂힌 이유는 작가의 고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화에서조차 그는 소통하다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침잠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꺼내놓는 창구일 뿐이다.  대화에서조차 타인의 말은 자신의 말에 대한 반향으로 읽힌다. 그는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북쪽 출신의 대단한 가문의 아버지와 그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남쪽 출신의 정렬적인 예술가 기질의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간다.


처음에 열린책들 버전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나와 문예버전을 읽다가 또다시 이해가 안되는 버전이 나와 현대문학 버전을 읽다가 했는데, 비교를 해보려고 퍼온 부분을 공개해보면 이렇다. (스포에 해당되기 때문에 주의).


내 그대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스스로 반문했다. 천만에,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스, 너도 그렇거니와 금발의 잉게, 너 역시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일을 했던 것은 그대들 두 사람 때문이었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 너희들이 그 속에 섞여 있지나 않을까 남 몰래 돌아보곤 했다……. 네가 네 집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약속했던 《돈 카를로스》를 이제 읽어보았느냐? 한스 한젠, 그런..고독해서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시(詩)와 우울을 넋 잃고 들여다보다 네 맑은 눈을 흐리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해서 너와 같이 자라나고, 마음을 곧고 즐겁게, 그리고 순박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게, 신(神)과 사람들과도 뜻이 맞아 순진하고 행복한 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인식(認識)과 창조의 고뇌라는 저주를 벗어나 복된 평범함 속에 살고,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문예출판사 /강두식역)


내가 너희를 잊었을까? 토니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게 너도! 내가 글을 쓴 것도 너희 때문이야. 나는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혹시 너희가 그 자리에 없는지 몰래 주위를 살피곤 했어. 한스, 예전에 너희 집 정원 문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돈 카를로스』를 읽었어? 읽지 마외로워 눈물을 흘리는 왕이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어? 너는 시와 멜랑콜리 같은 것으로 눈을 흐리고, 바보 같은 꿈에 젖을 필요가 없어…… 아, 너처럼 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너처럼 자라고 싶어. 너처럼 성실하고 쾌활하고 소박하고 올바르고, 질서에 잘 따르고, 신이나 세상과도 아무 갈등이 없고, 천진하고 행복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잉게 너를 아내로 맞아 한스 너 같은 아들을 낳고 싶어.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랑하고 찬양하고 싶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세계문학 단편선 03 토마스 만> (토마스 만 저, 박종대 역) 중에서

내가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물어보았다. 아니, 한 번도 없었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에, 너도 결코 잊은 적이 없었어! 그래, 내가 작품을 쓴 것은 바로 너희들 때문이었지. 그리고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몰래 주위를 둘러보면서 너희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지…. 한스 한젠, 넌 너의 정원 문에서 나에게 약속했던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말거라! 네가 그걸 읽기를 더는 요구하지 않아.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넌 우울한 시 따위를 보느라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겨서는 안 돼….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 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거우며 소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신과 세상 사람들의 동의를 받으며 자라나, 아무런 악의가 없고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구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열린책들 세계문학 020> (홍성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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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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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근대의 여명이 트고 신이 떠난 자리에 부재한 질서를 회복하고 싶어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신이 우주와 그 가치의 질서를 관장하고 악에서 선을 가르고 모든 사물에 뜻을 부여했던 곳을 서서히 떠나버릴 때, 돈키호테는 집을 떠났고 이제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지고의 심판관 이 부재하는 이 세계는 돌연 무시무시한 애매성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의 유일한 진리는 인간들이 나누어 갖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실들로 흩어져 버렸다. 이리하여 근세가 탄생되었고 그와 더불어 이 세계의 영상이자 모델인 소설 또한 탄생되었다(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소설의 기술』(책세상, 2004) 16~17면. - 『돈끼호떼』, 매혹과 환멸의 서사시 (신정환)에서 재인용)


1권이 어마어마하게 성공을 거둔 후 돈키호테는 10년만에 후속편으로 세상에 재등장한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고, 돈키호테 못지 않은 온갖 모험으로 재산과 건강 모든 것을 탕진하고 어렵게 살아가던 그가 저작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무수한 해적판이 유럽은 물론 대서양을 건너간 이후에도 세르반테스는 크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게 없는듯 하지만, 작품의 성공은 성공이고, 돈키호테가 쌓은 명성을 통해 작가 세르반테스가 차기 작품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만은 확실한 것이다. 2편에는 당대 문학계에서는 아마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새로운 장치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1편에서도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임을 부정하고, 시데 아메테라는 무어인이 전하는 이야기를 역자를 시켜 번역해서 전달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이러한 액자식 구성은 흔히 보는 구성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고 지나갔는데, 2편에서는 한발이 아니라 아주 멀리 멀리 더 나아간다. 2편의 등장인물로서 돈키호테는 1편에 이어 동일한 캐릭터와 연속성을 지닌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가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다름아닌 전편의 독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대개는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인물에 몹시 흥미를 느끼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전편에 비해 처절한 육체적 개고생은 뒤따르지 않는다.  전편의 독자가 후속편의 등장인물이 되어 나타나고, 돈키호테의 모험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의 진행을 조정하고 있는데다가 전편의 이야기에서 모순되거나 얼버무린 부분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전편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기이한 동거가 계속된다. 


돈키호테가 세번째 모험을 떠나게 되는 계기는 자신의 무훈이 책으로 출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삼손 카라스코 학사와의 대화가 발단이 된다. 


자기가 무삐른 적들의 피가 아직 칼날에서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자기의 기사도 무훈들이 인쇄되어 돌아다니게 한 사람들이 있다니 말이다. 여하튼 그는 어떤 현자가 자기를 좋아해서건 아니면 싫어해서건 마법을 이용하여 그것을 인쇄시켰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비루하고 비쩍 마른 말들을 보면 저기 로시난테가 간다라고 말할 정도로 누구나 돈키호테를 읽고,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있다는 말들을 듣는다. 여기서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작품의 헛점들을 스스로 공개하는데, 거기에 대해 동조하기도 또한 해명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작품속에는 작가 자신이 쓴 내용을 혼동하여 불일치하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얼버무린 부분들이 많은데(예를 들어 도둑맞은 당나귀는 누가 훔쳤었는지 또 어떻게 찾았는지, 산초가 발견한 금화는 되돌려주었는지 안했다면 후에 무엇을 했는지 등) 하도 곁가지들이 많아서 읽을 때에는 크게 눈치채지 못했데, 2편에서 1편에서 삼손 학사의 입을 빌어  이것이 해명되기도 설명되기도 하는데, 웃기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망증으로 인한 이러한 불일치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그러한 불일치는 역자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주어서 알수 있었다). 독자들의 의견 중에는 1편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돈키호테의 모험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여러 단편들에 대해 다루는 것에 대한 불만도 들어 있었으며, 2편에서는 돈키호테에 대해서만 오롯이 집중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비치는 부분도 있다. 


삼손 학사가 돈키호테에게 책 소식을 전하면서 1편에 대한 이런 저런 해명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돈키호테는 작가가 혹시 후속편을 쓸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데, 이에 대해 삼손은 후속편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많기에 작가가 그 후속 이야기를 찾고 있으며,  이야기를 '발견'하는 즉시 인쇄에 넘길 것이라는 의견을 낸다. 이 때 밖에서 로시난테는 울음 소리를 내고, 삼손을 소개해준 산초는 덩달아 흥분하고, 돈키호테는 이를 징조로 여겨 또다시 모험을 떠날 결심을 한다. 삼손에게서는 여정의 코스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출간되려면 먼저 발견되어야 하고 그것이 발견되려면 먼저 자신이 여행에 나서서 무훈을 만들어야 하는 인과 관계 성립을 위해서는 다시 여행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한편 여행중 그는 가짜 돈키호테 후속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위작의 곳곳에서 캐릭터와 사건의 모순 및 불일치 등을 찾아내어 깨알같이 디스한다. )


하지만, 이제 돈키호테는 무명의 이달고가 아니다. 가는 곳마다 그가 무훈이라 믿고 사람들은 미친짓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쌓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영웅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그에게 칼을 휘둘러 귀를 베거나 매질을 하지 않으며, 그의 미친짓들에 더욱 부채질을 하며 그것을 즐길 뿐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키호테가 기사도 모드가 아닐 때의 모습에서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질과 방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식견에 반해 수많은 주제에 대해 토론한다. 돈 디에고 데 미란다라는 신사는 그가 사자 우리를 열어 사자와 담판을 벌이려 하는 완전히 정신나간 '편력 기사'이지만 이내 자신의 아들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 문학에 대한 대단한 식견을 알아채고 놀라 아들을 만나게 하려고 집으로 데려간다. 4일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신사의 아들에게 높은 학식과 박식함을 보여주었음은 돈키호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첫 단계일 뿐이다. 


이후 부자 카마초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그들의 꼬이고 꼬인 애정관계를 풀어주고, 마찬가지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새로운 신혼 부부의 집에서 몇일을 머무는데, 2부의 클라이맥스는 이후 사냥을 하던 공작 부부와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공작집으로의 초대와 그 공작 부부가 꾸미는 재미있는 계략이다.  그들 부부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상태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고, 엄청난 무대장치와 인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환상을 현실 속에 실현시켜줌으로써, 그들에게 미친짓을 부축이며 그것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며 즐거워한다. 이로써 뭐든 이해가 안가는 것을 마법사의 탓으로 돌리곤 했던 돈키호테와, 이를 이용해서 주인을 속여먹던 산초마저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산초는 1부에서도 돈키호테 다음으로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이지만, 그의 어리숙하면서도 나름 꾀부리는 독특한 캐릭터는 2부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특히 공작부인의 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섬을 약속한 돈키호테를 대신하여 산초에게 어떤 마을을 섬이라고 말하며 통치를 맡기고, 믿기지 않게도 몇일 동안 그 섬을 훌륭하게 통치하는 저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중심에 둘시네아에 대한 돈키호테의 사랑이 있다. 그녀는 사실상 알돈사 로렌소라고 하는 농부의 딸이다. 1부에서는 돈키호테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산초는 더더욱 더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여, 돈키호테가 무찌른 모든 것의 영광이 바쳐지는 그 돌시네아가 뚱뚱하고 힘센 농부의 딸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키호테와 산초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1부에서 돈키호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 시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붙여서 찬양하는 여성들이 모두 실제로 있는 인물들은 아니지. 자네는 ...책이나 로만세나 이발소나 극장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성들이, 모두 살과 뼈를 가진 정말로 살아 있는 여자들이며, 그녀들을 기렸고 기리고 있는 그 사람들의 진짜 연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지. 다들 시의 소재로 쓰기 위해 만들어 낸 인물들인 게야. 자기들을 사랑에 빠져 있거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지어낸 여인들이란 말일세. 그러하기에 나도 저 알돈사 로렌소라는 그 착한 여자가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면 되는 거라네. 가문 따위는 중요하지가 않아. 의복을 내리기 위해 가문을 수소문하러 갈 것도 아니잖은가.


즉 알돈사 로렌스는 시적 영감을 위해 사용된 뮤즈다.   실존하는 알돈사 로렌소의 외모, 가문, 행동, 이름까지 모두 버린 후에 둘시네아라는 대단한 가문의 기품있고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을 탄생시키고 그녀를 열열히 사랑하며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1편에서 산초는 그녀에게 전달해주기로 한 편지를 가지고 가지도 않은 채 신부와 이발사를 만나 돌아와서는 만났다고 얼버무리고 거짓말을 하는데, 2편에서는 돈키호테가 그녀를 찾으러 간다. 둘시네아는 알돈사 로렌스로부터 창조된 환상이며, 만일 그녀를 만난다면 그의 환상은 깨지게 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을지언데, 그는 부득불 그녀를 만나러 마을로 들어서고, 그녀의 집이 어디에 있느지도 모르는 산초는 꾀를 내어, 길가던 농부들을 둘시네아라고 알려주는데, 만일 실제 인물인 알돈사 로렌소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지 않았을까. 특히 돈키호테는 그녀를 본 적이 4번 정도 있다고 했는데, 그 때의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과, 실존과의 차이는 이 길에서 만난 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 어떻게 극복할까. 


well. 마법이 해법이다. 때는 바야흐로 중세가 저물고 근대의 여명이 밝아온 16~17세기였으며, 철학과 과학혁명은 이제까지 굳건히 믿고 있던 절대 진실의 세계가 거짓이었음이, 이제까지 천년이 넘도록 지켜온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모두 미친짓이었음을,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증명된 것과 객관적인 것만 확실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혼동 속에 빠져 있음이 유럽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던 중이었고, 그 때의 스페인은 세르반테스가 전쟁중 접한 다른 세계와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세르반테스와 세익스피어는 같은 해 같은 날 죽었다.  1616년 4월 23일. 이 날은 책의 날이기도 하다. 죽기 1년 전에 이 책을 내놓았으며 그 한 해 전에는 위작인 가짜 돈키호테 후속편이 등장하기도 했다. 설명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마법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시대가 중세였다면 근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설명되고 규명해야 진실이되는 시대이며 돈키호테는 그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과거를 붙잡고 장렬히 전사한다. 그에게 새로운 진실을 대면한다는 것은 곳 패배이자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둘시네아라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만들고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사랑에 대한 진실된 모습을 은유로 보요주는 최고의 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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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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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고전이 되는 이유는 당대의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 시간이 흐르고, 문화와 사고와 기술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담아내서다.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나, 그 일부를 쓰는 것'이라는 르네 지라지의 평가는 돈키호테가  수백년동안 전세계인에게 읽혀오는동안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찬사 중 하나다. 이런 수식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돈키호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아는 사람이란 돈키호테가 풍차에게 달려들어 싸우는 무모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인간상을 알고 있을 뿐, 돈키호테의 복잡한 캐릭터가 이루어내는 유쾌하고도 장대한 모험을 모두 읽고 이해한 독자는 크게 많지 않을 것으로 장담한다. 그 첫번째 이유는 원작의 두께가 워낙 두껍워서 일단 손에 잡아 시작하기도 어렵고 다 읽기도 어렵다. 다른 이유는 어린이용 축약버전이 워낙 많아, 누구나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또한 그 축약된 내용이 마치 단순한 동화 이상의 것이 아니어서 크게 흥미를 못느끼게 하는 면도 있을 것이리라. 또다른 이유로 그토록 유명한 돈키호테의 완역본이 2권 모두 국내에 소개된 지가 비교적 최근의 일이어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완역본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 안영옥 교수가 2014년 번역 직후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조선일보 인터뷰) 당시 국내에 원문을 직접 번역한 책은 시공사(박철 번역), 창비(민용태) 번역 두 권이고, 두 권 모두 문제를 지적했는데, 시공사본은 당시 1권만 번역되어 있었으며 1권도 뒷부분은 ‘허술’했다는 평가, 창비본은 의역이 많다는 점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당대 스페인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실하게 반영하는 번역본이 되도록 애썼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인데, 독자로서는 주석이 많아 몰입에 방해되는 요소도 있지만,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식문화에서 객주집 풍경, 당대 유행하던 속담(산초의 인용력 막강), 사회적 통념과 문화 제도 전반에까지 엄청나게 많은 민속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것은 현대에 쓰여진 역사 소설을 읽을 때 드는 졸렬한 의심들, 과연 그 때 이런 저런 게 있었을까 그 때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을 없애주고 당대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점에서 이 번역서의 충실한 원문 번역과 엄청나게 많이 제공되는 열린책들 방식의 주석처리를 높이 평가한다.


돈키호테의 모험담 속에는 돈키호테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책속의 책이다. 서재를 떠나 편력 기사가 되어 모험을 찾는 일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길을 떠나게 된 자신만의 사연이 있다. 많은 재산을 가져 모든 남성들에게 구애를 받고 있지만 산양치기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여자 목동 마르셀라와, 그녀에게 구애하다 상사병에 죽은 남자목동 그리소스토모 장례일에 벌어진 소동이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는 돈키호테가 모험중 만나 신세를 진 목동들과 그리소스토모의 친구 양쪽에서 서로 다른 두 시점으로 전달된다. 같은 사건을 상반된 서로 다른 시선으로 전달되는 형식의 문학적 장치가 다름 아닌 모험담 속의 아주 지극히 일부로 나타나는 것이다. 


장례일이 되자 구애를 뿌리쳐 그리소스토모를 죽게 했다는 온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마르셀라가 직접 나타나 당차고 똑똑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다. 목동 마르셀라는 순결과 미적 아름다움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시대적 지표에 여성의 가치가 결정되던 암흑기와 같던 중세 말기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대상화된 여성에서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여성을 대변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혼자만의 방과 생활할 수 있는 돈을 꼽았는데, 이미 세르반테스는 마르셀라 이야기에서 시대가 옭아맨 그 조건으로부터 해방된 조건과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비록 그녀의 자유를 지켜줄 부와, 그녀의 존엄을 지켜줄 ‘시대적 미’가 본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닌 태어날 때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여성의 자유라는 조건에 스스로 한계를 긋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여성이 재물을 가지고 결혼을 하면 남성이 접수하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자연을 즐기며 산야에서 산양치기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당대의 여성상에서 해방시킨 마르셀라는 돈키호테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설의 위대함을 돈키호테의 전조적 인간상을 통해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돈키호테만큼이나 상식을 깨는 마르셀라지만 두 사람의 본질은 상반된다. 이미 유행이 지난 기사소설과 편력 기사 쪽으로 퇴보적이고 비논리적이고 행동과 감정이 먼저 앞서는 원조 의리의 사나이 돈키호테와는 달리 진보적이고 논리적인 마르셀라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차갑다. 


“순결을 지키려 하는데, 남자들에게서 순결을 지키기를 요구하면서, 또 그것을 잃도록 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아시다시피 전 재산이 있으며 남의 것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저는 자유로워 남에게 속박되는 것이 싫습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도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자를 속이고 저자에게 구애하지도 않습니다. (...) <나는 비록 못생겼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양쪽이 똑같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같아야 되는 법은 없습니다. 아름답다고 다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떤 아름다움은 눈을 기쁘게 하지만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아름답다고 다 사랑하게 된다면 어느 쪽에 마음을 둘지 몰라 헤매고 다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수없이 많으니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며,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나무들과 물에게 제 생각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혼자 떨어져 있는 불이며 멀리 놓아둔 칼입니다. 저를 보고 사랑을 느낀 사람들에게 저는 말로써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희망으로 지탱된다면, 저는 그리소스토모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을 준 적이 없으므로 …”



돈키호테는 대개 괴짜이거나 미쳤거나 의협심과 정의심에 불타는 등의 말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 제한적 단어들은 그의 캐릭터가 그만큼 눈에 잡히게 단순하고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을만큼 확실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때로 캐릭터가 복잡 미묘한 그의 모습을 만날 때도 있다. 초반에는 계속 비슷비슷한 바보짓이 끝까지 계속되나 싶어 미리 지루해지기도 하고 단순하고 용감무쌍하고 실패에도 꿋꿋한 정신승리를 보여주는 맛이 간, 인간의 면만 드러나 평면적으로 느껴져 축약본에서 본 것 이상을 느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돈키호테와 산초,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말과 당나귀까지 합세해 이 네 개체가 세트를 이루며 만들어내는 코믹하고도 눈물겨운 이야기에 점점 빨려 들어가다가 후반에는 더욱 다양한 인간들의 이야기와 함께 깊이 있게 그의 내면을 탐색해볼 수 있었다.


세르반테스 스스로도 밝힌 바 있듯이 훌륭한 이 책은 기사소설의 패러디 정도로 그것들을 비판하기 위해 쓰여졌지만, 읽다보면 기사소설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까지도 담겨 있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행동들은 그가 즐겨 읽은 기사소설의 영향으로 일축된다. 기사 소설이 터무니없는 모험담을 담고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주인공의 비상한 능력과 앞뒤 안맞는 엉터리 이야기들을 싣고 있는데 거기에 푹 빠진 돈키호테가 현실 감각 능력을 잃어버려 소설과 현실 사이의 분별력을 잃어버렸다는 설정이다. 신부와 이발사, 가정부와 조카 등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돈키호테의 미친짓의 원인을 기사소설로 지목, 책들을 주인 허락도 없이 다 태워버리는 지경에 이를 정도다. 그의 환상은 모두 기사소설에서 읽은 내용들이고, 그가 만든 기사도의 규칙도 모두 책에서 가져온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모든 잘못된 행동 마저도 기사 소설의 내용을 가져다가 합리화시키곤 하는데, 예를 들어 객주집을 성으로 알고 들어가서 신세를 져 놓고도 세상에 어떤 기사가 객주집에서 돈을 지불하느냐는 황당한 궤변으로 숙박과 식사비를 지불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길에서 만난 신부들이며, 이발사며, 상인, 공무원(?), 목동 등을 닥치는 대로 소설 속에서 본 시나리오에 대응시켜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고 무훈을 얻기 위해 상대해야 할 적으로 돌변시켜 공격을 하다가 반대로 얻어터지곤 한다. 돈키호테에서 풍차 이야기는 지극히 일부이고 그 이야기 자체가 1800 페이지 전체에서 1~2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모험은 내내 계속된다. 풍차가 거인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온통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씬으로 돌변한다. 초라한 객주집이 성으로 보이고, 객줏집 창녀들이 귀부인으로 보이고, 양떼들은 창과 칼을 들고 달려오는 군사떼들로 보이며, 이발사의 대야는 투구로 보이고, 뿐만 아니라 그는 싸움을 걸 때면 분별력도 없다.  그 때문에 돈키호테는 돌아다니는 동안 하도 두들겨 맞고 칼에 베이고 해서 온몸은 성한데가 없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돈키호테는 기죽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기사 소설의 일부들을 읊으며 합리화를 시키는 것이다. 정 설명이 안되는 것은 마법에 걸려서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돈키호테의 기행의 원인으로 기사 소설이 지목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안, 그런 기사소설들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있는데, 교단 회원과 신부와의 논쟁, 그리고 돈키호테와 교단의 한 회원과의 대화에서다. 특히 신부와 교단 회원과의 대화는 지금 이 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문학의 순수성과 상업성에 대한 논쟁에 대입해도 될만큼 동일한 사회 현상들을 담고 있다.


극이 이렇게 된 것은 극을 쓴 시인들의 잘못이 아니오. 왜냐하면 시인들 중에서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철저히 파악하고 있는 자도 있으니 말이오. 그런데 극이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변해 버린 탓에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면 극단 측에서 작품을 사지 않을 거라고들 하더군.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말이오. 그러니 시인은 자기 작품에 돈을 지불할 극단의 요구에 맞추려 하는 거요. 우리 나라의 그지없는 행운아인 천재가 쓴 수없이 많고도 많은 작품들을 보면 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거요.


이 대화에서도 그렇지만 때로 돈키호테는 대화중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이면서도 깊은 사고를 펼친다. 따라서 그를 전적으로 미친 사람 취급할 수도 없다. 달리 보면, 기사도 정신이라는 그가 몰입한 세계에 대해서만 미친 것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온 몸과 정신을 쏟으며 열정을 다하는 사람을 ~에 미쳤다라고 얘기하는데, 그런 것이 심할 때에는 정신적으로 지나친 집착으로 평가하며 실제로 살짝 미친 사람 취급하기도 한다. 엄청나게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특정한 세계에 빠져 그것에 열정을 다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정도와 종류가 다를 뿐이지 넓은 의미에서의 돈키호테적인 인간상이란 흔하디 흔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키호테는 대략 이상주의자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내용으로 일축된다. 돈키호테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소설에서 한줄로 요약된 주제를 맞추는 정답을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돈키호테가 보여준 여러 그토록 다채로운 행동들 속에서 알지 못했던 인간의 모습을 만나는 일이고, 그가 한 말에서 공감을 찾아내는 일이다. 물론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그의 바람은 현실에서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미친 행위이다.  글이 쓰여진 때는 기사도 정신이 찬양 받던 시대 는 저물고 기사 소설의 인기도 급하락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기사가 되기에도 불충분한 하급계급 출신의 이달고인 그가 스스로를 돈 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거창한 이름을 부여한 후, 스스로 만든 투구와 갑옷을 입고 말라빠진 로시난테(말)과 조금 모자란 종자 산초를 데리고 모험을 나가는 일 자체가 기사도 정신과 당대에 한물 가긴 했지만 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대한 조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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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 - 맛, 공간, 사람
크리스토프 리바트 지음, 이수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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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에서는 대략 18세기 전후에 서구 유럽의 레스토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는 듯한데, 대조적으로 13세기 경 이미 활발하게 미식가와 맛평가글이 남겨진 송나라 때의 시식기가 함께 인용되어 있다. 시장의 달콤한 콩수프와 <송엄마>에서 파는 생선스프와  양고기 볶음밥, 수자궁 앞의 돼지고기 요리 등의 다채로운 요리와 맛집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서구 유럽의 이야기인지라, 동양의 이야기는 짧게 한 페이지로 끝나지만, 우리나라의 맛집 문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레스토랑과 식당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제까지는 식당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레스토랑은 조금 개념이 다르다.  사람들은 배고프면 식당엘 가지만, 레스토랑은 배고파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곳의 특별한 실내장식과 분위기와 그리고 서비스를 사러 가는 곳이다. 배고파 들어가서 후루룩 먹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빨리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곳이라면, 레스토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슨 책인가. 레스토랑의 역사? 아니다. 맛집 이야기? 아니다. 레스토랑 비평서? 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레스토랑 문화사도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음식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수많은 요리사들, 미식 비평가들, 혹은 미식 연구가들의 일화와 자료 모음 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밝히기로는 그들에 대한 정보는 모두 신문이나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저자도 인정했듯이 일화를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열거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으나 개별적 사례들의 모음이 가지는 몽타쥐 효과를 기대한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책을 다 읽으면 대략 레스토랑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그곳에 종사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의 일화들로부터 정보로부터 그려지기는 하는데, 감동이나 어떤 메시지를 기대할 수가 없고,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매우 흥미로운 정보를 얻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자료를 모으고 또 모아 연결하여 굉장히 힘들게 책을 완성시켰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굉장히 독특한 글쓰기이며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개별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와 일화로 지식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독자에게는 굉장히 흥미롭다. 그 누구의 이야기이든간에,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보다 생생하게 느껴지고, 감정이 이입되고, 또한 사실적으로 인식된다. 많은 이야기가 실렸을 경우에는 조금 혼란스럽기도 한데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또 조각조각 나누어서 실었다. 아마도 이야기의 조각을 맞추는 과정에서 시간의 경과와 각 인물들의 시간상의 싱크를 맞추기 위한 장치였을 것 같은데, 이 때문에, 자주 누가 누군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혼동스러웠다. 


분자요리의 대가 페란 아드리아의 엘불리 레스토랑(스페인), 헤스틴 불루먼솔의 펫덕에 얽힌 많은 스토리,  이와는 반대로 도시에서 80킬로미터 들어가야 하는 산골 구석에서 톱을 들고 직접 기른 양을 도축하여 제공하는 페비칸의 스토리가 흥미로왔다. 특히 페비칸은 겨우 14명의 좌석만을 가지고  운영하는 곳으로 <청결, 신선함, 단순함, 윤리>를 추구하는 생태 음식으로 철저하게 흙맛이 나는 자연 그대로의 로컬 푸드를 제공하는데, 세계 최고 레스토랑 19위까지 올랐다. 


전세계를 누비는 수많은 미식가들이 와서 먹고 잠까지 자고 가는 곳이다. 책은 또한 웨이트리스의 스토리도 많이 담겼다. 사회학 관련 연구자들은 웨이트리스를 조사(?)하기 위해 잠입 취재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이 남긴 스토리들도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그 깨끗하고 우아한 서비스가 펼쳐지는 식당 뒤쪽의 주방에는 쥐들이 들끓고, 썩은 음식들이 뒹굴며, 진상 고객의 음식에 침을 뱉는 일은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레스토랑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이야기들이 스며 있을까. 식당 종업원의 급여는 미국의 경우에백인이 대부분 차지하고, 연봉은 15만 (1억6천 정도? 우왕, 팁 포함일듯)  달러 정도라고 하는데, 유색인종은 그릇치우는 등의 일을 하며 약 1/5에 해당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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