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이 탄 배가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때는 17세기 효종 때다. 그들 일행 30여명은 잠시 제주에서 지내다가 왕명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 왕의 근위병이 되어 비교적 잘 대우받았지만 탈출을 시도하다가 걸려서 몇개의 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져 지방 각지로 보내진다. 지방에 있는 동안은 부임하는 지방 목사에 따라 처우가 달라졌으메 때로 풍족하고 자유가 있을 때도 때로 먹고 살기 힘들 때도 있었다.


하멜의 기록은 독자의 흥미를 겨냥한 여행 모험담이 아니었다.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으로, 글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고 서문은 설명하고 있다. 즉 돈을 받으려고 업무 일지를 착실하게 쓴 것이 이렇게 기록 유산으로 남은 거다. 당대 조선의 문화, 관습, 사회, 정치, 제도와 민심에 이르기까지,  꽁꽁 채워 걸었던 조선의 민낯을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낯선 이국땅, 듣도 보도 못한 문화 속에 13년간 억류되어 살아가면서 온갖 감정의 폭풍을 경험했겠으나 그가 느낀 감정과 사색은 글 속에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보고 듣고 겪은 사실에만 집중한 기록이기에, 전통 문화보다는 서구의 문화와 사상에 더 가까이 있는 현재의 우리가 당대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어느 정도는 닮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책은 서해 문집의 <하멜 표류기>으로 2003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다. 이 책 이전에도 두 권의 하멜 표류기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오긴 했지만 원전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기보다는 황당한 흥미 위주의 모험담이 덧붙여진 것이어서 하멜 원전과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은 후에 네덜란드 학자가 식민지 관계 기록을 조사하다가 하멜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 정본을 발견하여 출간한 것(후틴크 판, 1920년)의 영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중역이기는 하지만 하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충실한 기록이며 원전과 영역 과정에서 달아놓은 주석을 함께 실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국외 연구를 엿볼 수 있었다. 따라서 서문은 당대 영역본을 현대 영역본으로 옮긴 영어 역자와 한국어 역자 두 사람의 서문이 모두 실렸다.

이 책 출간 이후, 2017년 보물창고에서 출간된 하멜 표류기가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후틴크 판의 영역본을 중역하였고, 목차를 보면 <서해문집> 판과 큰 차이가 없다. 삽입된 삽화와 자료 그림과 주석, 그리고 번역에서 오는 차이가 주된 차이일 것 같다. 


하멜일지의 원제목은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이다. 겔파르트는 제주도고 당시 그들은 제주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지는 시간순으로 주요 사건을 비교적 정확하게 그들에게는 발음조차 낯설었을 조선의 각종 지명 인명 제도와 문화 관습명 등을 포함해 날짜별로 기술하고 있다. 언어가 전혀 안통했을테지만 당시 이미 벨테브레라는 자가 수십년전 표류되어 조선에서 관직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고 조선에서 오래 살아서 처음에는 모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으나 곧 자유롭게 네델란드어를 구사하면서 조선의 정책상 일단 들어오게 되면 나갈 수 없음을 설명하고 이후에도 통역을 맡아 초기 의사소통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생활사는 주로 그들 이방인에게 크게 주의를 끈 부분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금했던 부분의 생싱한 기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행 중 숙식에 대한 기록과 주석은 이렇다.

‘여행자들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여관은 없다. 여행자들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비록 양반 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자기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놓는다. 그러면 집주인은 즉시 이것으로 밥을 지어 반찬과 같이 나그네를 대접한다. 여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나그네들을 맞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군소리도 없다.? - 
(미주 : 환대는 가장 신성한 의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식사시간 중에 방문한 사람에게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중대한 수치일 것이다. 여기저기 먼 곳을 걸식하며 다니는 가난한 사람은 채비를 잘 할 필요가 없다. 밤이 되면 그는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호텔 |주막|에 가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는데 어떤 집이든지 행랑채는 방문하는 사람이 묵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그 집에서 그날 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그리피스, 조선, 1905, 288~289).’


13년이라면 참으로 긴 세월이다. 식습관을 비롯하여 의식주 모두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낯설고 불편했을 터이지만 탈출을 원했던 이유로는 자유에의 갈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주된 것이다. 한편 조선인의 입장에서 거의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인데 사회 자체가 폐쇄되어 있어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은 일반인에게도 제한이 있었던 당시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곳 등을 마련해주고 탈출 시도 전까지는 왕과도 알현하고 관직에까지 오르는 등 비교적 좋은 대우를 했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노예로 팔아먹었거나 잘 해봐야 누가 거들떠도 안봤을텐데 말이다.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원전에 가까운 이 책을 알게 되어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 서해문집의 같은 시리즈, <열하일기>를 읽을 때는 사상가가 쓴 책이라 연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생각으로 걸러진 18세기 중국을 통해 당대 조선 학자의 사고관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반대로 17세기 동쪽 끝 나라에 대해 새카맣게 무지한 외국인의 시각으로 보는 조선은 또다른 역사의 한 뷰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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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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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탐사 이야기 마션에 이어, 아르테미스는 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달에서 벌어지는 범죄 이야기라는 말을 듣자 궁금증이 발동했다. 대체 무슨 이유가 달에 사람을 살게 만들까. 공기도 없는 달의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간다는걸까. 우주복을 입고 살 것도 아니고. 이런 궁금증이 전작에서 보여준 앤디 위어의 스타일이 하드 SF이기 때문에 더욱 커진다.  


미래의 어떤 별에 사람이 착륙했다고 가정하고 그 기술적 디테일과 당위성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제공할 의무가 없는 공상과학소설류가 아니라 현재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소들로 소설 속 배경을 촘촘하게 채우는 앤디 위워의 스타일은 마션에서 이미 현대 우주과학기술의 현주소를 가늠해볼 수 있을 만한 상세한 묘사를 제공했기에 이번 작품은 또 어떤 동기가 달에 사람을 살게 하고 그 곳에서의 삶을 이유있게 그려낼까를 그토록 궁금하게 만든다. 


쉽게 집중할 수 있고 쪼가리 시간에 조금씩 읽어도 비교적 내용 연결이 잘된다. 물론 마션 못지 않은 기술적 디테일이 동반되어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도 있지만 위워의 또다른 장점이 이런 기술적 설명에 공을 들여 친절하다는 데 있다. 소설 읽으면서 화학 농업 뭐 이런 걸 공부하는구나 하고 피식했었는데 이번에는 과학보다는 공학 기술 공부 시간이다.  특히 용접에 대해 많이 주워듣게 된다. 어려운 용어만 잔뜩나열한 채 자기도 아는지 모르는 지 모르게 써서 대충 얼버무리는 게 아니므로 비록 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운 많았지만 기술적 설명도 꼼꼼히 읽었다. 기술적 설명을 대충이라도 알아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우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중력에 적응하기 위해 달에서는 출산과 성장기 때의 거주가 금지되어 있다. 이 제도가 현재는 정착되었지만 주인공 재즈는 어릴 때부터 달에서 거주하고 있는 토속 달인(?)이다. 용접 기술자인 아버지의 작업실에 남친을 끌어들여 불을 낸 후로 집을 나와 포터 일과 불법적인 일을 합쳐 생활하고 있지만 캡슐형의 비좁은 거주지를 벗어나기 위해 큰 돈을 벌고 싶다. 지구에서 오는 수화물을 배달하면서 간간히 수입이 금지된 물건의 밀수로 돈을 벌지만 그녀의 꿈은 길드 소속의 가이드 시험에 합격하여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중고로 구입한 우주복이 말썽을 부려 시험에 떨어지고 만 후 우연히 단골 사업가에게서 큰 제안을 받는다. 알미늄 공장의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소를 돔에 독점계약한 회사를 차자하가 위해 일하는 로봇을 고장내는 임무다. 

마션에서도 돔이 주요 무대였고, 아르테미스에서도 돔이 주요 무대다. 달라진 건 돔의 스케일이다. 작은 돔 하나에 대여섯명이 고작 몇주를 견딜 수 있는 산소공급장치가 주무대였던 마션과 달리, 달에 간 아르테미스의 돔 스케일은 도시 규모다. 우주선에 실어간 압축 산소로 공기를 연명하던 마션 때와 달리 아르테미스에서는 공기를 달에서 직접 생산 공급한다. 돔은 여러개가 각자 다른주거 환경을 제공하며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와 가난을나누고 있다. 돔들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돔 바깥쪽 달 표면에 나가려면 우주복도 있어야 하고 절차가 복잡하다. 지구에서 여행온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가이드 길드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돔 바깥에 들락거리고 보통은 나갈 일이 거의 없다. 통근 열차와 관광 열차가 주로 그들을 태우지만 직접 땅을 딛고 싶어하는 여행객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가이드이고, 가이드의 수입이 짭짤하자만 시험에 떨어진 재즈는 화장실이 딸린 방다운 방을 갖고 싶은 소망을 범죄의 댓가로 제시한 현금의 유혹으로 이루려고 한다.

차근차근 준비하여 한방에 멋지게 일을 성사시키면 소설이 아니지. 막판에 실패하고 지구로 추방될 위기 속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 도시의 구석탱이로 숨어드는데 단순하지도 않은 이 사건 뒤에 엄청난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 재즈는 달에 사는 사람들을 지구에시도 악명높은 범죄조직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일에서 지키기 위해 정의의 편에 선다. 

흥미진진한 전개와 멀지 않은 미래에 있을 수도 있을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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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2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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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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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 참으로 모순적인 말이다. 어느 동물이 다른 동물과 같은가. 우리 인간 입장에서 느끼기에 다른 동물들끼리의 차이에 비해 인간-다른동물 사이의 차이는 두 생명체가 완전히 별개로 동떨어져서 각자 진화한 것처럼 생각되리만큼 크다. 우리 중 일부는 한 때 진화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여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건가 하기도 했다. 

어쨌든 원숭이와 유인원은 다르고 유인원과 인간 사이에는 태고적 공통 조상이 있었고 서로 다른 환경에 살던 그들이 환경에 적응하며 조금씩 진화하다가 후세를 낳을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그 공통조상들이 살던 시간에서 더욱더 까마득한 시간을 뒤로감기 해보면 원숭이들과도 그 공통 조상들 사이의 또다른 공통 조상이 있었을 것이며 그들 역시 환경에 적응하여 한쪽은 원숭이들의 공통조상이 또 한쪽은 유인원과 인간의 공통조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기원을 타고 올라가면 마지막 단계에서 최초의 단세포 원시 생물 혹은 단백질 비슷한 이상한 화학 유기물 같은 곳에 도달한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같은 39억년의 시간동안 진화하며 생존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들 중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 본다면, 모든 생명은 다 특별하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멸종하지 않은 채, 살아 남아 있으니까. 수도 없이 많은 생명체가 변화하는 환경에서 멸종하는 동안, 기어이 유전자를 변형하고 적응하여, 살아남았기에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특별하다. 

그럼에도 인간이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유일하게 사고하는 종이라는 보편적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사고 외에도 철학자들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별함을 다각도로 규정했고 자연과학은 번번이 그 특별함들이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지니고 있는 증거를 찾아내었다. 사고는 단지 그 중 하나뿐이다.

한 때 도구의 사용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 줄 철썩같이 믿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증거도 없이 철학적 상상에서 비롯되었을 그 허황된 믿음은 종교보다도 커서 우리 때는 교과서에 실렸고 그 틀린 정보를 잘못알고 있으면 작은 실패자가 되있다. 가령 까마귀가 막대기로 구멍을 파서 먹이를 먹는 걸 아는 시골 학생이 오 이건 자신있어 확실해 라며 시험 문제의 답에 도구의 사용이 인간만의 고유 특성이 아니었다고 적었다면 한 개인을 좌절에 빠뜨렸을 것이다. 이렇겨 획일적 교과서는 획일적 지식의 통일적 확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진실이건 진실이 아니건 관심없다. 교육은 인간의 계량이 목적이니까. 하지만 이젠 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 인간만이 도구를 쓸 줄 아는 건 아니라고. 도구를 얻기위해 또 다른 도구를 쓰는 수준높은 유인원의 예를 제외하더라도 동물은 많은 경우 도구를 이용한다.

이 책이 동물의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인간만의 특성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정신적 행위들을 동물 또한 지니고 있음을 연구하고 증명한 과학적 사실을 다룬다. 도구는 그 중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언어, 인지, 거울 인식과 자기 자신의 인식, 시간 인식, 덧셈 뺄셈을 비롯한 수학 계산 능력, 빠르고 긴 기억력 등 인간 인지의 모든 영역에서 동물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따로 혹은 같이 진화시켜왔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사자와 서로 말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사자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 자신의 경험은 사자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과도 비슷하다. 사실상 인간이 다른 인간의 내면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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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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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길지도 않은데, 사자마자 읽기 시작했지만 어제밤에야 끝낼 수 있었던 건, 마음에 안드는 부분에서 덮어버린 후 잊었었기 때문이다. 사실 책 내용은 그림 빼면 굉장히 짧다. 그래도 그림이 간간히 있는 게 좋긴 한데, 망구엘의 명성에 비해 이런 종류의 인문학 책이 얇으면 상대적으로 내용도 빈약해 보일 수 있다. 종이책으로 192쪽인데 전자책에는 두께 개념이 없는지라, 읽으면서 긴지 짧은지를 대략적으로 느끼는데, 이 책은 갑자기 역자 후기가 나와서, 어디가 짤렸나  벌써 끝났나 의아했다. 



앞에서 마음에 안든 대목이 있어 읽다 내버려뒀었다고 말했는데, 그건 전자책에 대한 저자의 독단적인 견해였다. 내가 이 책을 전자책으로 읽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혹독하게 전자책 문화를 호도하다니, 알고 쓴 건가 그냥 적응하지 못함에 대한 불평을 지적으로 보이게 말한 건가. 내가 웬만하면 세계 최고의 독서가(출판사 소개)이자 대단한 지성인이 쓴 내용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프랑스의 전자공학 전공자가 한 논문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을 여행에 비교하여,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해안을 바라보며 항해하는데 전자책을 보는 독자는 우주 여행을 떠나 까마득히 먼 곳에서 지구를 한 눈에 바라본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를 반박하는데, 핵심은 이렇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하는데,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종이책을 들고 읽으면 물리적 특징과 물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으므로,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를 다른 페이지, 심지어 다른 책과도 연관시킬 수 있다. 둘째, 논점과 캐릭터를 마음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셋째, 광대한 정신 공간에서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연결할 수 있다. 반면 전자책을 읽을 때 우리는 대체로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프랑스 '전자공학'자들이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 저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기에, 저 인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의향은 조금도 없지만, 저자의 견해는 저렇게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납득할만한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한 예로, '전자책 같은 기술장치 사용법이 엄격하고 세부적으로 마련되어 있어,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수시로 제한을 받거나 불편을 겪'는다고 하는데 대체 뭘 말하는 건지, 파워를 켜고 끄고 손가락을 눌러 페이지를 누르는 일이 그토록 불편하고 제한을 받는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행자'라는 독자의 은유에서 여행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생각은 '은유가 된 독자'라는 주제를 다루는 인문적 성격의 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세계 최고의 독서가' 답게 자유분방하게, 시대와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많은 책들의 내용을 인용하며, 책을 읽는 독자에게 쓰인 은유를 탐구한다. 그 첫번째 비유가 앞에서 말했듯이 여행자로서의 독자다.  책을 읽는 일은 정말로 인생길의 여행과 딱 들어맞는 비유다. 망구엘은 이 '여행자' 은유의 기원을 <길가메시 서사시>와 <단테의 신곡>, <일리아스> 등에서 찾는다. 



오, 작은 배를 탄 그대여,    

내 이야기를 간절히 듣고 싶어    

풍악을 울리며 항해하는 내 배를 뒤따라왔구려.    

넓은 바다로 들어서지 말고    

고향의 해안으로 뱃머리를 돌리시오.    

자칫하면 나를 잃고 길도 잃을 수 있으니. (주 Dante Alighieri, Commedia, Paradiso II : 1-6)



독서가를 지칭하는 또다른 은유인 '상아탑'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긍정적인 이미지가 혼재해 있는데, 이 은유의 유래를 초기 기독교 인들의 은둔적 명상과 고립에서 찾고 있으며, 이러한 상아탑 속의 지식이 현실과 조화 혹은 불화를 이루는 여러 종류의 문학을 탐험한다. 특히, 세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 그 중에서도 햄릿을 비중있게 재해석한다. 상아탑적 이미지의 은유는 책벌레와 책바보라는 은유로 심화 분화되고 <돈키호테><마담 보봐리><안나 카레리나>로 이어지며, 책과 현실을 경계를 넘나든 주인공들의 심리를 재해석한다. 특히 플로베르의 엠마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보다도 더욱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돈키호테는 또렷한 직관을 이용하여 현실과 환상의 차이를 절충하며, 때로 판타지가 의식을 압도하는 바람에 개고생을 하지만 때로는 판타지 속에서도 정신 줄을 놓지 않는 반면, 엠마는 책에 나오는 낭만적 플롯을 자신이 욕망을 불태우는 세계와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즉, 돈키호테가 현실과 픽션을 구분할 줄 알았던 것에 비해, 엠마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이에 비해 안나 카레리나는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자신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책갈피를 연신 옮기며 독서에 열중한다.'



너무 많은 지식이 깊이 없이 나열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여러 작품들의 재해석 부분은 흥미를 느끼려고 할 때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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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6-07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돈키호테가 일을 하지 않는 자의 낭만이라고 생각했죠. 물론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요. 생각해보면 언급한 인물들이 독서에 탐닉하는 건 일을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죠..

전자책 좋아합니다. 얼마나 편한대요.. 물론 여전히 종이책을 더 좋아하지만, 전자책만의 매력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ㅎㅎ

서평 잘 봤습니다^^

CREBBP 2018-06-12 07:44   좋아요 1 | URL
답글이 늦어서 죄송해요. 워낙 조용한 곳이라, 이제야 봤지 뭐에요. 꼬마요정님. 돈키호테도 그렇고,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들 독서에 탐닉하죠. 독서를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해요. 방문 감사드려요.
 
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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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이 안그렇겠냐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은 대개 주제 의식이 뚜렸하다. 내가 소설을 통해 뭘 가르치려 드는 걸(왜 설명충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알겠다)  싫어하는 터라 히가시노 게이고와 잘 안맞는 경우도 많은데 이 소설은 그게 뒤늦게 드러나기 때문에 추리소설로서의 호기심과 긴장을 비교적 끝까지 유지시켰다. 한마디로 끝내주겨 잘읽히고 간간히 코믹한 요소와도 잘 배합을 했다. 더욱이 같이 공범이 되어 시체처리를 하고 시체 훼손을 한 순스케가 호숫가 오두막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을 추리하며 사건의 본질을 캐는 과정이 아이러닉한 게, 초반부터 그는 부부동반 모임에까지 내연녀를 끌어들이는 가장 비윤리적 인간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비윤리적인 인간이다.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와이프를 속이고 바람을 피울뿐 아니라 자기는 바람피우면서 아내를 의심하여 내연녀여게 아내의 뒤를 캐게하였으니 말이다.

여기 나오는 어른들은 부모의 재력으로 아오들을 사립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엄청난 정보력을 확보한 사람들이다. 호숫가 별장에 모인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주 친한 사람들의 평범한 부부모임 같지만 아이들의 과외 수업 그룹의 부모들로 아이들의 사립 중학교 입학을 위한 워크샵에 따라왔다. 아이들은 별채에서 과외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고 어른들은 몇기의 숙소에 나뉘어 헤쳐모여 하며 어른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때 순스케의 내연녀가 부탁한 서류를 가지고왔다는 핑계로 찾아오고 서둘러 내보냈지만 그룹의 다른 부부와 우연히 벤치에서 말을 섞다가 초대되어 다시 다소 모임에 들어온다. 난처해진 순스케는 서둘러 인근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제발 거길 떠나줄 것을 바라지만 약속 시간에 온갖 핑계를 대고 호텔 로비로 찾아갔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거짓말은 한 번 시작하면 계속 그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거짓말을 계속해야 한다. 바람맞은 채로 다시 또 거짓 핑계를 대고 숙소로 돌아가려 전화했더니 와이프가 아 왜 갔다가 다시오냐고 싫어하는 눈치다. 서둘러 숙소에 갔을 때는 아내에게 내연녀가 살해되었는데 그것을 목격한 부부가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자들이 살인사건에 연루되고 폐쇄적인 과외모임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곤란할 것을 염려해 살인사건을 눈감아주기로 했다고 그들과 함께 시체처리를 돕겠다고 한다.

내연녀가 죽었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증거를 없애고 입을 맞추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면서, 살인사건을 눈감아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협조적이고 모든 일의 처리를 제 일처럼 여기고 처리해주는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살해된 내연녀가 몰래 찍어둔 사진뭉텅이를 발견하는데 곳곳에서 이들 과외그룹의 부모들이 포착된다. 그는 이게 단순히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이 아님을 의심하게 되고 차곡차곡 쌓이는 단서들을 가지고 범인을 찾기 시작하는데, 드러나는 진실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인가. 어른들은 어른들의 시각으로 사건을 해석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립중학교 입학도 뭐도 아닌 아버지라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스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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