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뇌 - 뇌과학으로 풀어낸 음악과 인체의 신비
후루야 신이치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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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연주할때, 음악을 들을 때, 심지어 수학을 계산하거나 언어를 이해할 때까지 피아니스트의 뇌가 어떻게 동작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친절한 그림과 함께 다룬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11살 이전의 연습량은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운동 기능을 담당하는 수초의 발달과 관계가 있지만, 그 나이 이후의 연습량은 수초의 발달과 크게 관계가 없다. 살짝 아쉬운 점은 이러한 지식의 전달이 아주 개략적이고 간략한 전달에서 끝난다. 자세히 써 봤자 독자들이 뭐 이해나 하려나 라기 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려한 흔적이다. 친절한 그림들을 보면 그런 마음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들 하나 하나가 깊이가 없어서, 뭔가 오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한상에 골고루 차려진 요리를 조금씩 맛보다 보니, 뭔가 깊은 맛을 지닌 진짜 메인요리를 안먹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피아니스트라는 한정적 범위의 기술을 가진 사람의 뇌가 특별하다는 접근 보다는 일반적인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의 뇌 발달이 반드시 피아니스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뇌신경의 전반적 작동 및 발달 원리가 피아니스트에게 적용된 사례에 해당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뇌를 가지고 태어나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가져야할 여러가지 기술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음감이 발달하고, 해당 뇌 영역이 커지고, 일반인과 똑같이 손가락을 움직이더라도 에너지를 덜 사용하고, 왼손과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되는 거다. 이것은 비단 피아니스트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반복적으로 꾸준한 연마를 하면 따라오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승리이다.


피아노를 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왼손 오른손 부분이다. 초보 시절에야 멜로디를 담당하는 오른손에 맞춰 왼손은 뚱땅 뚱땅 박자나 화음을 맞춰주는 선에서 얌전히 물러나 있는게 왼손인데, 어느 시점을 지나가면 왼손이 오른손과 함께 화합하고 대결하고 때로 독립적인 멜로디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된다. 그럴 시점이 되면 오른손에 비해 왼손이 제대로 안움직여질 뿐만 아니라, 다음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데, 그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왼손은 오른쪽 뇌가 오른손은 왼쪽뇌가 움직이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뇌의 왼쪽과 오른쪽이 신체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교차되어 있으니 뇌량이라는 다리를 건너 반대편 신체로 가야 한다. 이 때, 손가락을 너무 빨리 움직여야 하다 보니 다리에서 신호가 샌다는 거다. 오른쪽으로 가야 할 강한 왼쪽 뇌의 신호는 왼쪽으로 보내져서 왼손아 나 좀 따라다니지 말고 너는 너 할일이나 하렴 이라고 오른손이 아무리 핀잔을 줘도 같이가 같이가 하며 자기 일은 내던지고 오른손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다른 것도 다 그렇지만, 이미지 트레이닝은 특히 피아노 말고 일반적인 영역에서 활용할만한 좋은 뇌훈련인 것 같다. 예를 들어, 김연아가 시합전에 대기실에 앉아서 머리속으로 자신의 시합의 공연 모습을 그대로 그려본다면, 시합할 때와 똑같은 운동 피질이 활성화되고, 시합할 때와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책에는 당연히 피아니스트의 예를 들었다.



또한 피아니스트는 많은 단어를 떠올리는 실험을 했을 때, 시각 피질이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는 악기 연주와 같은 예술적 훈련에 의해 공감각 기능이 후천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음악을 연주하려면 듣는 것을 잘 해야 한다. 당연히 청각 피질도 일반인에 비해 훨씬 발달했고, 음과 음사이의 미묘한 음의 변화 박자의 변화 이런 것들을 잘 포착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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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진화하게 만들고, 지능이라는 저주를 내린 건 바로 우리야.



젤라즈니의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표제작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지만 맨 처음 실린 작품은 ≪12월의 열쇠≫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딱 첫장을 펼치자마자 작품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첫 장만 읽으면 작품이 내 취향과 맞는지 대략 알 수 있다. 과연 작품은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읽을수록 점점 더 흥미로와진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잉태되었지만 GMI 계약 옵션에 의거 한랭 행성종(얄료날 거주를 위해 개조된) Y7 고양이 형태로 개조된 쟈리 다크는 그에게 거처를 보증해주었던 이 우주 어느곴에서도 살아가기에 적합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축복으로 볼지 저주로 볼지는 당신을 자유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얄료냘 거주를 위한 한랭 행성종이니 고양이 형태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의 남발에 뭐야. 컬트적이고. 이 재치있고 천재적인 작가의 소설은 몇 쪽 읽기도 전에 푹 빠지고 말았다. 이런 신선한(SF에 일천한 내 기준에서) 작품을 만날 때마다 작가의 작품들은 속속 카트를 채운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첫 문장은 실제로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의 프리퀄에 해당되고 마지막 문장은 쟈리 자크의 선택에 대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어느 미래의 혹은 먼 과거의 사회. 우주 곳곳에 문명이 침투한 어느날 아이를 낳기로 한 쟈리의 부모는 출산 관리국의 조언에 따라 얄료날이라는 몹시 춥고 기압이 높은 행성에 알맞는 조건을 가진 고양이 형태로 아이의 형태를 차세대 후계자 DNA의 조합으로 결정한다. 유전자 조작이니 그런 말운 일언 방구도 없다.  뱃속에 털복숭이 고양이를  잉태하고 분만하거나 하는 자세한 설정들은 처음부터 빠져있다. 


행성의 환경을 자유자재로 바꿀 만큼, 은하계 사이를 마음대로 이동할만큼 과학 문명이 발달된 사회인데, 설마 뱃속으로 아이를 낳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람 모양의 아들을 낳지 않고 고양이 모양의 아들을 낳은 이유는 이렇다. 제너럴 광업 주식회사가 알료날이라는 행성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행성에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하자, 아예 행성에 적합한 모양으로 개조한 인간(DNA겠지만)을 만들어냈다.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50~60년대 시기로 사기꾼 멜서스 인구론이 잡아먹을 듯  활개를 치던 시대니까, 인구 통제국이라는 기관이 자연스레 등장하고, 제너럴 광물 주식회사는 인구 통제국과 딜을 한 모양이어서, 그런 고양이 아기를 낳으면 교육과 의료 직업 연금 그 모든 걸 책임져주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모양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도 자세히는 안나온다.  


영하 50도의 한냉 행성에서 거주할 변형 유전자 고양이 인간들을 대대적으로 뽑아 세계를 만들어놨는데, 그 알료날이라는 행성이 '신성폭발'로 사라져 버렸다.  졸지에 갈 데가 없어졌다. 직업과 교육 의료 등등 여러가지를 보증하는 계약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쟈크와 모든 고양이 형태들은 연금을 받으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다시 정리하면, 자원 굴착을 위해 행성을 하나 개척했는데, 너무 척박해서 살 생물이 없어 그 행성에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고양이 인간)로 개조시켜놨더니 행성이 폭발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고양이 형태들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행성이 어느 곳에도 없음을 안다. 


제너럴 광물 주식회사와의 계약 조건에 따라 쟈리를 비롯한 수만명의 고양이 형태들은 답답한 기온 기압 조절 장치속에서 약물에 의존해 삶을 유지시킨다. 그들의 삶을 유지 가능하게 하는 온도는 영하 50도다. 그들은 외부로 나오지 못하고 감옥 같은 제어 장치 속에서 수당을 받으며 생활한다. 쟈리는 돈버는 재주를 가진 덕에 큰 돈을 벌어 자신들과 같은 종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행성을 구입하여 환경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수만명의 고양이 형태들은 <12월클럽>이라는 공동체를 결성하고 이미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어떤 행성을 사들인다. 이 행성을 행성 개조 유닛을 통해 제2의 얄뇨날처럼 추운 곳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행성 개조 유닛이 풀 가동해도 행성이 영하 50도의 기온을 갖는 최적의 장소로 바뀌려면 3천년이 걸린다. 고양이 인간들은 사들인 행성 곳곳에 그 행성 개조 유닛을 세워두고 동굴에 들어가 냉동 수면 침대에서 잠을 잔다. 250년마다 3개월씩 당직을 서기 때문에 각자가 천 년당 1년씩의 개인적 시간을 투자한다. 


꿈도 없는 잠을 자고 깨어나면 3천년간의 시간의 변화는 3년으로로 압축된다. 하지만 자는 동안 행성은 행성 개조 유닛의 작동으로 끊임없이 변해간다. 쟈리는 약혼녀와 함께 2세기 반마다 깨어나 우주의 변화를 실감한다. 점점 추워지고 생명들은 멸종되거나 적응하기 위해 두터운 껍질을 두른다. 


당직을 서던 중 그들은 직립 보행하는 짐승들 중 하나가 자신들이 대들랜드라고 부르는 그 춥고 황량한 곳에까지 죽은 짐승을 가지고 오는 걸 목격한다. 쟈리는 수 세기마다 한번씩 당직을 위해 깨어날 때마다 그 생명체들이 점점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몸집이 커져 털을 진화시켰는 줄 알았는데 짐승의 털을 두르고 다닌 거였고, 이마가 생기더니 손바닥을 마주보는 엄지가 생긴다. 그리고 알게되는 사실 하나 이 고양이 형태들을 신으로 알고 제물을 바치고 숭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차피 3천년이라는 시간동안 인위적으로 환경을 그토록 바꾼다면 그곳에 서식하던 대다수의 생명체들은 예고된 멸종에 직면할 것이다. 적응에 성공한 소수의 돌연변이의 조합이 탄생시킨 새로운 종류의 소수의 생명만이 남게 된다. 그래도 상관 없다. 적응하는 생명체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윤기나는 털을 다듬으며, 그르렁거리던 답답한 공간 속에서 나와 마음껏 뛰어오를 제 2의 얄료날 행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다른 생명체 따위는 안중에 없다. 


딜레마는 그 생명체들이 지적 종족이라는 데 있다. 지적 종족이라면 무엇이 다를까. 그와 약혼녀는 한갓 짐승에 불과했던 두발 다리의 그들이 빠른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지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고는 혼란스러워한다. 자신들의 행성 개조로 인해 이 지적 종족은 결국 멸종할 것이다. 


종의 멸종을 막으려면? 방법은 있다. 변화의 속도를 늦추어 종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거다. 하지만 그러려면 7천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 긴 시간을 냉동인간처럼 쭉 내리 자는 게 아나라 1천년당 1년씩의 개인 시간을 당직에 써야 하기 때문에 7년을 더 소비해야 하고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투표도 해야 한다. 그 적색형태라 이름붙인 지적 종족을 보호하고 싶은 사람은 쟈리 밖에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는 확고하다. 그는 그 지적 생명체들에게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이 분의 최고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 아니라는 게 더 놀랍다. 작품집의 모든 소설이 가장 창작의욕이 왕성했던 초기작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도 아껴 아껴 읽어야겠다. 테드 창의 소설들이 생각났는데 테드창 읽을 때는 먼가 유식하고 철학적인 소리들을 해대서 못알아먹는 게 많았는데(못알아먹어도 재밌게 못알아먹게 만드는 이상한 테드창) 이 책은 보다 유머러스하다. 



너무 감동스럽게 재밌어서 뒤에 가서 작품설명 읽었는데 더 모르겠더라는 뭐 신화적 원형에 뿌리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은 소설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데 엄청 어렵게 설명되어 있다.  암튼 과학 소설이란게 장르적 구분 같은 걸로 쓸모없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듯한 느낌. 그냥 읽으면 인간과 신의 그 태초의 관계적 탄생을 우화적으로 재탄생시키는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고양이 토템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나무니 곰이니 하는 토템의 뿌리를 이런 식으로 상상할수 있는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 새로운 소재 정말 좋다. 



지적 생명으로 나가는 진화의 시작점에 빙하기라는 극단의 추위가 압력으로 작용하고,  생물(유전)학적 메카니즘을 통해 그 극단적 추위에 적응하는 동안 , 진화된 인간의 정신은 신을 창조하고 숭배함으로써 결국 그 환경의 극적 변화에 제동을 거는 제법 개연성이 있는 상상을 신화의 탄생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표제작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SF 명예의전당 2편에 맨 마지막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토록 많은 책이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다. 파는 책보다 안파는 책이 더 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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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88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현 옮김 / 책세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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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부터 정치, 경제학, 그리고 혁명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휩쓸어 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이나 유물론 같이 한 때 한쪽 이념의 신봉자들이게는 성서이자 교과서였고 대립된 반대쪽에게는 불온서였던 책들 말고 유대인이라는 다소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는 사실이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크게 알려져있지 않은 듯하다. 


1844년에 발표한 두 편의 글은 당대 헤겔 철학파 부르노 바우어가 쓴 두 편의 유대인 비평에 관한 비평글과 우리말 번역자의 상세한 해제를 묶은 비교적 짧은 책이다. 짧다고 무슨 책이든 금방 읽히는 건 아니다. 특히 철학서란 내게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용어의 추상성으로 인해 1차적으로 힘들고 특유의 번역체 때문에 한번 더 힘들다. 때로 이게 무슨 셀프 고문인가 싶은 짓이 철학책 읽기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기도 하고 안그렇기도 하다.


내가 약 10프로 정도나 이해했을까 그나마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해됐다고 믿는 부분만 요악하면 이렇다. 바우어가 말하기를, '유대인이 기독교 국가(독일)에서 유대교의 종교적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적 특권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어리석다. 기독교를 믿어라.' 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마르크스가 그의 논리를 반박하며 '유대인을 유대인이게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 반대다. 국가의 종교적 탄압이 그들에게 종교를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통채로 인용되는바우어의 문장을 보면 당대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르크스가 바우어의 글을 반박한다고 해서 유대인 편들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해제에서 밝혔듯이 한 때 이 글이 마르크스의 반유대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는데 당연히 그의 유대인에 대한 적나라한 비평은 과연 칼 마르크스가 이런 사람이구나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알고보니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었다. 알고보면 유대인이었구나 하는 사람 참 많다. 



“화폐는 이스라엘의 질투 많은 신이다. 그 앞에서는 다른 어떤 신도 존립해서는 안 된다. 화폐는 인간의 모든 신들을 낮추어서 그 신들을 상품으로 변화시킨다.화폐는 보편적인, 그 자체로 구성된 모든 사물의 가치이다. 때문에 화폐는 세계 전체에서,인간 세계 및 자연에서 그들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강탈했다. 화폐는 인간에게 낯선 인간 노동의 본질이자, 인간에게 낯선 인간 현존의 본질이다. 이 낯선 본질이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은 그것을 숭배한다.(46/110)”


당대 유럽에서 유대인은 참징권도 없고 사회 경져적 전반에 걸쳐 예외 대상이었는데 이 책의 흐름으로 짐작컨대 당대 유디인 해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동시에 반유대적 정서가 널리 퍼져있는 듯한데 그 원인을 바우어는 1차원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사회적 규율과 관습에 어긋나는 그들만의 종교에 집착하는 것이라 믿는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더 진보되고 우월한 종교이니 그걸 믿어야 그들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마르크스는 그러한 논리 뒤에 숨어있는 자본이라는, 시장이라는, 종교적 현상을 캐치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읽어보면 당대 유대인이 얼마나 악착같이 부에 집착했는지 또 사회적으로 유대인에게 부가 쏠리고 있는 현상을 비유대인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신랄하게 비판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유대교의 폐기가 아닌 종교 전반의 폐기, 종교는 사적인 영역으로 개인에게 맡기고 국가가 기독교를 믿던 유대교를 믿던 귀신을 믿던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듯하다.


서문에서도 말했듯 현재 이슬람교의 폭력의 근원을 이슬람교라는 종교 그 자체로 보고 히잡을 금지한다거나 하는 단편적 조치를 취하는 바보같은 짓을 할 게 아니다. 그것은 이제 지난 세기의 유대인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가 이 모든 원인이이니까 종교를 버려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유대인의 비밀을 그들의 종교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의 비밀을 현실의 유대인에게서 찾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마르크스는 '유대교의 세속적 근거를 사욕'에서 '유대인의 세속적 제의를 악덕상행위'에서 '유대인의 세속적 신을 화폐'에서 찾는다. 따라서 악덕상행위를 뿌리 뽑히도록 사회를 조직하면 유대인이 존립 불가능해지며 유대인의 종교적 의식은 현실적 삶의 공기속으로 사라잘 것이라는 거다. 당대 유대인의 경제적 지배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훗날 나치에 의한 학살이 당대의 일부(?) 국민들에게 지지받게 될만큼 유대인은 사회의 모든 부를  빨아들이며 이를 유대교라는 종교에 의해 선택받은 민족적 특권으로 치환하여 이해한 것이 모순이었다는 뜻으러 이해할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받는 차별되고 핍박을 받는 압박을 종교적 특권을 포기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바우어의 견해에 대치되는 마르크스의 이런 주장은 이미 화폐가 세계의 힘이 되었기에 화폐를 지배한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방되었다는 것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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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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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쓴 글을 누군가가 붉은 펜으로 문장의 앞뒤를 바꾸고, 조사를 빼거나 바꾸는 등 많은 수정을 가하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 후의 원고가 수정 전의 원고와 비교했을 때, 뜻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읽기 편하다면 잠시의 불쾌함 보다는 원고를 수정한 당사자에게 고마워할 듯 하다. 아울러, 고친 부분의 문장을 들여다 보면서 내 문장의 어디가 무슨 이유로 수정되었는지 검토해서, 다음 번 글쓰기에는 좀 더 매끈한 문장을 쓰게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장을 수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소설가 김훈은 은는 과 이가의 선택에도 심혈을 기울이는데,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다듬은 문장이 저자가 애초에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희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함인주라고 하는 사람이 이러한 불쾌감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책에서 이상한 문장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것만을 가르치지 않고, 교열자와 원작자 간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긴장감과 불쾌감을 소설적 형식으로 포함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두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함인주와 화자의 서신 교환으로 교정과 문장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이 교환되며 동시에 또 한 갈래는 실제로 글쓰기 사례에서 빈번하게 잘못 혹은 어색하게 사용되고 있는 부분을 예를 통해 제시한다.


읽다 보면 함인주라는 사람의 집요한 따지기가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자신의 문장이 난도질 당하는 느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본문과 함께 병행 진행되는 스토리지만 나름 소설적 형식을 갖춰서 나중에 두 사람의 관계에 반전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도 주요 내용은 문장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란 별 보태는 뜻도 없이 습관적으로 혹은 중독적으로 사용되는 흔한 예로, ‘OO적, OO의, OO하는 것, OO들’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접미사 ‘–적’的과 조사 ‘–의’ 그리고 의존 명사 ‘’, 접미사 ‘–들’이 문장 안에 습관적으로 쓰일 때가 많으니 주의해서 잡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들’을 반복해서 쓴 원고를 ‘재봉틀 원고’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모든’ 이 붙은 명사에는 ‘들’을 붙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의 예는 대략 이렇다.

 
•선수들은 소속 팀에서의 활약 여부에 따라 올스타에 뽑힐 수 있다.=> 팀에서 보이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 => 있다는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느낀 분노의 강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컸는지
•실패한다는 것은 단지 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란 , 못한 것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 부르는 게, 말하기는


이 문장들은 얼핏 내가 보기에 크게 어색한 게 없어보이지만 이렇게 바꾼 정답지(?)를 보고 나니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다. 특히 세번째 문장 처럼 ~것을 주어로 하지 말고 우리를 주어로 바꾸면 문장이 놀랍도록 쉬운 문장으로 바뀐다.

 

굳이 있다고 쓰지 않아도 어차피 ‘있는’ 역시 습관적으로 붙이는 표현 중의 하나인데, 잘못쓰는 세 가지 경우를 소개한다. 1)  진행될 수 없는 동사에 ‘있다’를 붙이는 경우(예 ‘출발하고 있다' 는 ‘출발했다’가 맞음). 2)술어에 별 의미 없는 ‘있었다’를 쓰는 경우  3)  반복적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표현 ‘–관계에 있다’, ‘–에(게) 있어’, ‘–하는 데 있어’, ‘–함에 있어’, ‘–있음(함)에 틀림없다’가 그것으로 다음 예를 보면 우리가(아니 내가) 얼마나 이렇게 안이하게 글을 쓰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멸치는 바싹 말라 있는 상태였다. => 마른
•눈으로 덮여 있는 마을 => 덮인
•도시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기념비 => 잡은
•길 끝으로 작은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이어졌다.
회원들로부터 정기 모임 날짜를 당기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당기라고, 요청했다.(2번째 경우)
•그 제안에 대한 검토가 있을 예정이다.=>‘그 제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런던에서 있었던 사고 때문에 귀국이 늦어졌다.=>‘런던에서 생긴(겪은, 터진, 맞닥뜨린) 사고 때문에 귀국이 늦어졌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에게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 비용이다.=> 다룰 때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으로 1) –에 대한(대해), 2) -–들 중 한 사람, 3)–들 중(가운데) 하나, 4)–들 중 어떤 을 제시한다. 많은 예를 통해 일단 대충 읽으면 지적으로 보이나 꼼꼼이 따져보면 단어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고 대충 ‘대한’이라는 말로 얼버무린 것을 알겠다. ‘사랑에 대한 배신’,  ‘노력에 대한 대가 ‘ 등 저자는 이러한 표현이 ‘대한’을 활용한 문장이라기보다 ‘대한’이라는 붙박이 단어를 중심으로 나머지 단어를 배치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이렇게 대한을 자주 쓰는 이유는 표현을 '더 정확히 하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아 정말 맞는 말이다.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은 사랑을 저버리는 일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 사랑에 등 돌리는 짓 등이 있고 두번째는 노력에 걸맞은 대가 또는 노력에 합당한 대가 또는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 등 정확한 표현이 얼마든지 있다.

•종말에 대한 동경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능가했다.=> 을 향한, 을 바라는
•과대망상에 대한 증거를 찾았다. =>을 증명해 줄(밝혀 줄) ]

  

이 밖에도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는 표현중에는,

1) -같은 경우
    •나 같은 경우, 그 같은 경우, 중국과 같은 경우는 ⇒ 내 경우, 그 경우, 중국의 경우 =>나, 그, 중국)

2) -에 의한, -으로 인한
    •시스템 고장에 의한 동작 오류로 인해 발생한 사고=>에 따른, 때문에
    •실수에 의한 피해를 복구하다.=>로 빚어진
    •지배 계급의 손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들 => 손에

 

 등이 있다.


‘–에’와 ‘–으로’는 혼동해 써서는 안 되는 조사라며  ‘용언의 어간에 붙는 건 어미고, 체언에 붙는 건 조사다.’는 설명이 앞서는데 아 진짜, 용언이며 어간 어미 체언 이런 어려운 말들은 쥐약같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새겨들을 말이 많아, 네이버에 찾아봤다. 체언은 주어같은 몸말이고, 용언은 문장에서 서술어의 기능을 하는 동사, 형용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대충 알겠다.. 그러고보니, 에와 으로 뿐만 아니라 에서 으로부터 이런 게 총체적으로 다 헷갈리는데, 설명과 특히 예문이 알기 쉽게 잘 나와있다. 에’는 처소나 방향 등을 나타내고, ‘을(를)’은 목적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격 조사.

 

•자식이 명문대 가는 게 꿈인 부모들=>에
•학원 보낸다고 성적이 오르는 건 아닙니다.=>에

조사 ‘–에’는 무생물에, ‘–에게’는 생물에 붙친다. ‘–에게서’는 ‘–에게’와 ‘–에서’가 합쳐진 조사인데 쓰임에 따라 표현이 어색해질 수 있으니 가려 써야 한다. 이건 진짜 몰랐다.

 

•적국에게 선전 포고를 하다. =>적국에
•우리 정부는 미국에게 바뀐 정책에 대해 설명했다.=>미국에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적발되다.=>에게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그들은 내게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O)

 

번역체에서 자주 쓰이는 ‘으로부터’ 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문법적으로보면, ‘‘–로’는 체언이 움직여 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조사인 반면 ‘–부터’는 출발점을 뜻하는 조사다. 그러니 ‘–로부터’라고 쓰면 방향이 서로 어긋나는 셈이다.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에게
•부모로부터의 이별    => 와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    =>과
•서울로부터 온 사람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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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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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처럼 흩어지고 사라지고 변하는 생각을 언어로 바꿀 때 이리저리 흩어져 가던 생각들은 잠시 자리를 잡고 고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혹은 자주 생각을 언어로 한다. 선택하고 표현하는 언어 속에 생각이 스밀 때, 모양도 형체도 없이 자유자재로 흩어지던 생각의 한 자락은 언어 속에 잠시 고정된다. 그 언어가 글씨가 되면 생각은 남겨진다.


글쓰기는 그 남겨지는 생각의 한 자락이다. 남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글을 잘 쓰고 싶어진다. 학창 시절  일기가 방학 숙제의 피날레였을 적, 일기 조차 일기는 (때로? 언제나?) 선생님이라는 독자를 고려하고 작성했다. 책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인데, 일기장의 끝에는 결말이 필요했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으로 착한일을 많이 하겠다고 생각했다 등등 마음에 없는 말이지만 글쓰기의 한  형식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생각을 만들어냈다. 전혀 즐겁지 않았던 어린이날의 긴 줄서기와 만원버스의 시달림의 시간이 끝나고 일기장에 그 즐거운 하루였다는 말을 쓰는 동안, 생각과 기억은 하루 중 잠시 머물렀던 즐거움의 조각을 붙들어 글씨 속에 붙여 놓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고, ‘나’와 ‘나를 바라보는 나’가 대화하는 일이므로 ‘나를 바라보는 나’가 존재하는 순간, 누군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




멀티 미디어의 시대에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대고 움직이고 말하고 동영상과 사진과 음성 파일이 대세인 오늘날이지만, 텍스트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오늘날이지만, 오히려 직접 보고 말하는 커뮤니케이션보다는 더 많이 글자에 의존하게 되었다. 오늘날 간단한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 신호음을 기다리거나 집중하고 있던 일을 잠시 멈추는 일은 드물다. 개인과 친교 집단간에는 문자와 카톡이, 취미집단간에는 카페와 SNS 등으로 얼굴을 보지 않고도 말을 하지 않고도 글을 매개로 의사전달이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에 미괄식과 두괄식 타입 중 하나를 선호하는 사람들 얘기가 나온다. 학교 때를 돌이켜 보면, 요란하게 교실문을 들어오면서 대단한 소식을 전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떤 아이는 애들아 대박 옆반 선생님이 결혼한대 이렇게 빵 하고 터뜨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아침에 집을 나와 길을 건너는데 저 앞에 자전거가 한대 오는 거야. 로 아주 평범하게 시작하면서 점점 긴장을 끌어오다가 끝에가서 빵 터뜨리는 아이가 있다. (김중혁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풍성할 수록 글쓰기에 뜯어먹을 풀밭이 풍요로와진다는 얘기를 하는데, 나도 진짜 많이 뜯어먹고 산다. 어린 시절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또 아빠와 할머니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작가가 한 얘기를 조금 바꾼건데, 소설에서도 그렇고, 모든 글에서 미괄식과 두괄식의 경우로 나누어볼 수 있을텐데, 그걸 누가 갈켜 줘서 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 생각이 산만하다 보니 결론을 먼저 내버리고 그것을 서포트하는 글을 써나가기가 어렵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언어로 바꿔나가다보면 조금씩 정리가 되어 결론을 향해 가기도 하고, 그냥 두서없이 생각만 적다가 끝나기도 하고 하는데, 작가는 반드시 결론이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마음에 든다. 생각없이 생각을 글로 적다보면 한참 길어지고, 그러다보면, 아 너무 길다. 끝내자. 하고 중간에 끝내는 경우도 많다. 예전엔 TV 쇼가 끝날 때 구구절절 안녕히 계시라 시청해 줘서 감사하다 이런 뻔한 인사의 말이 길었는데, 요즘은 막 말하다가 시간되면 중간에 네 마치겠습니다. 하고 끝내는 경우도 많다. 




김중혁 작가가 신뢰하지 못하는 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건  교훈이나 반성으로 끝나는 글이다.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반복하거나 한 문장에 똑같은 단어가 서너개 있을 때에도 신뢰하지 못한다고(이말은 백번쯤 들은듯). 화가 폴 가드너의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곳에서 멈출 뿐이다.”를 인용하며 원고지 14매 정도의 산문을 잘쓰는 방법은 “글을 쓰기 시작하여 원고지 14매가 되면 멈춘다.”라고 자신의 버전을 만들 만큼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의 말에는 어느정도 공감하지만 한 권의 책을 묶는 것과 짧은 글 한 편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 책은 좀 두서없다. 시집도 아닌데 책의 텍스트 자체가 빈곤한 것은 출판시장의 전략인듯 싶지만, 기존에 발표한 글들을 대충 엮은 듯하게 일관성이 없다. 앞부분은 문구류 소개 중간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경험, 뒷부분은 인용문 빈칸 퀴즈맞추기 이런 식인데, 따로따로 놓고 보면 괜찮은데, 한 권 묶이기에는 좀 따로 논다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잘 살아보세’라는 간단한 문장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같은 고등학교 교실의 급훈은 세상 그 어느 문장보다도 폭력적이다. 어떤 문장은 칼이나 총보다 폭력적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얼까. 작가는 두 가지 중 하나로 본다.    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문장을 만났을 때    ②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았을 때.  전자는 새로운 것과 신비한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고 후자는 익숙함과 공감, 위안을 준다. 하지만 ① 은 쉽게 지칠 수 있으며 ② 만으로 점철된 책은 민망하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일종의 평행 우주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실재하는 현실과 무척 닮아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종이 위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고, 가보지 못한 길을 상상할 수 있다. 픽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 우리는 글 속에다 새로운 우리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글을 통해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더 현명하거나 더 세련된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그럴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글쓰기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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