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책, 문예, 펭귄 세 개 버전의 맥베스를 소장(혹은 대여)하고 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읽은 것이 펭귄 판본인데, 1623년 <이절판>이라고 불리던 셰익스피어 전집에 최초 등장한 판본을 사용한다. 어딘가 생략된 듯 너무 빠른 스피드가 전개 때문에 열책 버전으로 갈아탔는데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행의 디테일이 생략된 빠른 스피드 때문에 제임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라는 작품이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출판사 별로 번역 텍스트는 꽤 달랐지만, 내용상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큰 특징만 보면, 열책은 원어의 운문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운문적 형식을 그대로 채택했. 줄바꿈을 자주하기 때문에 열악한 이북 읽어주기 기능으로 듣기에 더 용이하다.  펭귄 버전의 특징으로 판본과 작품에 대한 설명이 텍스트보다 많을 정도로 풍부하다. 텍스트의 영문적, 학문적 분석을 요구하는 독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는 대충 읽다  너무 길고 지루해서 술렁술렁 넘겨버렸지만, 그중 유용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 텍스트의 유래에 대한 정보다. “셰익스피어는 라파엘 홀린즈헤드(Raphael Holinshed)의 『연대기』 제2권에서 맥베스와 덩컨 왕, 그리고 운명의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냈다.”[1] 이 때문에 레이위키 영문판이랑 두루두루 뒤졌지만, 이 서문보다 더 자세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이 홀린즈헤드 연대기에 맥베스의 덩컨왕 살해와 집권 후 10년에 걸친 집권기의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고, 셰익스피어는 그 평면적인 역사 서술서에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광기를 포착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열책 버전에서는 판본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펭귄 버전보다 텍스트가 조금 더 이해가 편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알고보니 대사 자체보다는 지문이 보다 상세하게 추가되어, 상황에 대한 이해가 쉬웠다고 할 수 있다. 맥베스가 왕으로 추대되어 잔치를 여는 동안, 자객들을 시켜 뱅쿠오를 살해했는데, 방금 전에 자객을 통해 뱅쿠오가 죽어 묻혔다는 보고를 받은 후인데,  그가 만찬장의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뱅쿠오의 유령을 본 맥베스의 반응은 두 버전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펭귄판에서 유령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처리된 것과 달리, 열책에서는 하오체로, 영주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듯이 보인다. 뱅쿠오의 유령은 맥베스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터라,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 해도 영주들에게는 말이 안되고, 독자들에게는 둘다 말이 된다. 나중에 다른 책의 버전에서도 확인해봐야겠다.


(펭귄)

맥베스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느냐?
귀족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맥베스    유령아, 내가 했다고 너는 말하지 못하리라. 피투성이가 된 너의 머리카락을 내 쪽으로 흔들지 말거라.



(열책)

영주들  무슨 짓 말씀이십니까, 폐하?
맥베스  내가 했다고는 말 못 하오.    그 피투성이 머리칼을 내게 흔들지 마라.  



맥베스 부인이 그의 정신분열적 행동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이가 원래 좀 이상한 데가 있다는 듯 둘러대는동안, 맥베스는 뱅쿠오의 유령과 귀족들을 번갈아 가며 무의식적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뭔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이 나온다. 기껏 죽였는데 살아서 돌아다닌다면 무덤은 솔개의 창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 솔개 위 창자가 우리의 무덤이 될 거라는 두 가지 다른 표현이 그것이다. 어쨌든, 시체가 돌아다니니 무섭다는 말인 거 같긴 한데, 불충분하긴 하지만 열책에는 설명이 붙어있다.



(열책)

맥베스  제발 저걸 보시오!    보라고! 보란 말이오! 봐! 저걸 어떻게 설명할 거요?    왜,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말도 해봐라. 납골당과 무덤들이 우리가 묻은 것들을   다시 내뱉는다면 앞으로 무덤들은 솔개의 창자로 만들어야 한다.(솔개가 시체를 다 먹어치우게 해야만 시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는 주석이 붙어있다.)



(펭귄)

맥베스 제발, 저기를 좀 보시오! 저것! 바로 저것! 저것 좀 보시오!─자, 어떻소? 뭐야, 무서울 것 없다. 네가 머리를 끄덕일 수 있거든, 말도 좀 해보거라. 만약 납골당이나 무덤이 우리가 한번 매장했던 것들을 다시 돌려보낸다면, 솔개의 위 창자가 장차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맥베스⟫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맥베스가 왕을 시해하는 장면이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맥베스⟫는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심리 중심이다. 왕의 시해와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암살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문학으로 따지면 장르문학보다는 오히려 순수문학에 가깝다고나 할까. 나는 이 두 장르의 분류를 전에 김연수의 책에서 읽은 대로, ‘어떻게’와 ‘왜’의 차이로 생각해 보았다. 즉, 사건을 모의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정확한 디테일들은 거의 모두 생략되어 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가 누군가를 죽였고, 그 일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의 심리 변화에 보다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극이 집중하는 것은 죽인 사람, 죽음을 모의한 사람, 그리고  희생자와 목격자들의 마음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다. 


극중에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주석에 따르면 시해된 덩컨왕과 맥베스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형제 사이이고, 덩컨왕이 죽으면 덩컨왕의 아들 맬컴을 제치고 왕좌의 1순위가 맥베스였던 모양이다. 읽을 때는 주석을 생략하고 읽어서 세습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왕을 죽인다고 왕이 된다고 생각하는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주석을 보니, 예언을 인위적으로 실행하려는 맥베스와 그의 부인의 음모 정황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 계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동시에 두 사람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실행된다. 맥베스 부인은, 남편이 숲에서 만난 그 기이한 예언에 대한 사건에 대해 쓴 편지를 읽으면서 동시에 시해 음모로 비약된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더니 편지에는 마녀들이 나를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라고 인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그녀의 머리속은 왕의 시해 계획이 이미 착수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남편의 이중적 가치관이다. 


“당신의 성정이 걱정입니다. 지름길을 택하기에는 너무 인정이 많으시지요. 당신은 위대해지고 싶어 하십니다. 야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야망에 따르는 사악함이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시지만 고상한 방법으로 그리되길 원하십니다.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아 하면서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위대하신 글램즈 영주여 ”[2]


이 때까지 맥베스는 무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덩컨왕이 가장 신뢰하고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인정많고, 착한 심성을 드러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야망을 꿰뚫어보는 것은 그의 부인 뿐이다.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으나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하는’ 맥베스의 '등떠밀려 살인'은 몇 번이나 주저되고 머뭇거려진다. 왕이 글램즈 영지에 묵기로 한 날이 바로 모든 사건이 일어난 그 날 당일임에도,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아차리고  빠른 결단과 과감한 실행력, 그리고 집요한 설득으로 맥베스를 설득시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맥베스의 아내다. 아내가 없었다면 맥베스 혼자서는 그런 일을 계획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한다. 


왕의 시해라는 거대한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심리는 서서히 전환을 맞는다. 유령을 보고 정신 착란적인 증세를 보일만큼 두려움과 후회와 불안에 떨던 맥베스는 그 불안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더욱 사악한 광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맥베스가 불안에 떨 때마다 부끄러운 줄 알라며 그래도 사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나무라던 맥베스 부인은 반대로 점점 자신의 손끝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피냄새를 지우고 싶어한다. 강했던 마음은 잠재된 두려움에 의해 본성을 드러내고, 반대로 약했던 마음은 살인의 행위에 가속이 붙으며 점점 냉혈한으로 바뀌어간다. 이제 그들은 마음 편했던 옛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남편은 아내 없이도 음모를 꾸미고 왕좌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만한 요소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아내 역시 남편이 저지르는 수많은 광기의 살인을 느끼며, 더욱 더 진해지는 손끝에서 나는 피냄새에 매일 밤마다 촛불을 들고 다니며 손을 씻는다.


두 사람의 계획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마녀들이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을 예언했을 뿐 아니라 동행했던 뱅코우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것도 함께 예언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의 시해를 계획할 때만 해도, 맥베스 부부의 관심은 맥베스가 왕이 되는 예언을 스스로의 음모로 실행시키는 것에만 있지, 마녀들이 함께 예언한 것 즉, 뱅코우의 자녀들이 왕위를 이어간다는 예언에는 생각이 도달하지 못했다. 자식이 없는 맥베스 부부에게 그들의 왕조 건설의 야망은 공허하다. “열매 없는 왕관”을 쓰고 “헛된 왕홀”을 손에 쥐고 있다(3막 1장)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가 받고 있던 존경과 찬사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헛된 왕권과 광기에 쌓여 계속되는 폭압, 그리고 지속적인 반란과 진압 뿐이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뱅코우의 자손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위를 찬탈한 중간 매개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광기를 체념적 무모함으로 이끈다. 


제임스 서버(Thurber)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를 읽다가 등장 인물의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아 맥베스를 다시 읽었다. 전에도 어떤 책에서 맥베스 부인의 손닦는 부분의 심리가 굉장히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어서 읽었는데, 이번 서버의 책에서는 맥베스의 살인 그 자체를 추리 소설 독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내용이어서 누가 범인이니 아니니 하며 따지는 내용이라 좀 더 주의 깊게 읽었다. 과연, 살해하는 장면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리라. 원래 계획은 서버의 단편 맥베스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리뷰하면서 맥베스 줄거리를 한단락만 추가할 계획이었는데, 마음대로 안되었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는 워낙 흥미로와 별도 리뷰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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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럴 칠링턴, 러터, 맥베스 탄생의 배경과 그 숨겨진 의미, 멕베스,  펭귄클래식코리아 서문 (1쇄 발행일 2010년)
[2]  맥베스, 1막 5장,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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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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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꾸로 돌려 물리적인 나 자신과 만나야 한다는 조건을 뺀다면, 누구나 과거와 만날 수 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둘은 닮은 듯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나는 어느날 수십년 전에 함께 기숙사에서 반년을 지냈던 대학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애가 기억하는 나, 그 애가 묘사하는 어떤 순간 그애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긴 시간동안 친구의 기억 속에 저장되며 변형된 이미지와 묘사를 통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낯설었다. 오랜 시간동안 변해온 지금의 나와 연결되고 결국은 어떤 본질이 그 안에도 지금의 내 안에도 있을 것이다. 


엠마누웰 카레르의 이 소설, 한달 내내 읽게되는 <왕국>의 초반 ⅓ 분량을 읽을 당시의 마음이 그랬다.  바오로와 루카가 등장한 이후 수도 없이 밑줄을 그었지만, 결국 내 얘기로 돌아와서 서두를 시작했다. 카레르처럼 나도 그러고 있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어떨까. SF 작가 필립 K 딕의 뒷담화를 나누다가 한 말이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지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처럼 말도 안되는 것을, 그리스 신화나 도깨비들이 나오는 동화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때, 그러니까 기독교 탄생 초기에는 과학도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오늘날에 만일 어떤 신들이 백조로 변신한다던가 두꺼비에 키스하면 백마탄 왕자로 변신하는 스토리를 믿는다면 미친놈이라고 할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믿고 있어도, 미친놈으로 여겨지지 않고, 설사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대해주는 일들이 참으로 희한한 일들이라고 썼다. 


그는 이 책을 기획했고, 그러기 위해 그 희한한 기독교 세계의 믿음에 관해 취재하기 위해, 기독교 커뮤니티들과 함께 하는 크루즈 여행에 신청했다가 취소한다.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시전하시는데,  알고보니 작가 자신이 20여년 전에 열혈 기독교 신자였던 것. 그는 믿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대신 20년 전의 자기 자신을 찾는다. 자신이 수년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암기하고 메모했던 수십권에 걸치는 자신의 노트와 대면한다. 믿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믿지 않는 현재의 자기 자신이 충돌한다. 그가 만나는 과거의 노트에는 훗날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그 날과 같이 종교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현재 그는 그때 바랐던 그 상태가 아니다. 그 점에 안도한다. 


나는 카레르가 글을 쓰는 방식이 첫번째는 솔직해서 좋다. 이 솔직함은 자기 자신을 후벼 파고 구멍을 뚫어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오랜 시간 단어를 조합해야 표현 가능한 지적인 솔직함이다.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자아에 대한 자부심과 환멸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슬퍼 허무해 쓸쓸해 기분나뻐 이런 식의 빈약한 몇 개의 미리 만들어놓은 진부한 형용사 조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발가 벗어 헤쳐보고 들이다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리하여 그가 기획한 바오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은 과거의 종교적 체험과 현재 그것을 반추하는 시간들을 인내심있게 읽어내야 하는 130쪽이 이후에야 시작하는데,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관련된 생각, 그리고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결국은 이것이 역사책이냐, 유사 역사책이냐, 혹은 개인적 체험을 담은 에세이냐, 혹은 바오로와 루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냐 라고 그보다 더 많은 쟝르의 특징들을 말해도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카레르식의 저작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범주화하기를 좋아하고, 제목을 붙이기 좋아하고, 뭔가 정의하기를 좋아하니, 내식대로 이 책을 다시 정리해본다면 역사의 재구성 혹은 역사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 역시 틀렸다. 핵심은 이 책 속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역사적 탐구 이외에도 기록의 빈틈을 빼곡히 메운 무한 상상력이 레고 블럭처럼 촘촘히 기록의 틈새와,논리의 헛점을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오로의 자취와 루카의 자취를 따라간다. 고대 로마의 역사, 유대의 역사 속에서 네 개의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쓰여지고, 유대교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어떻게 유대인만 제외하고 전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는지에 대해 유추한다. 상상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인지 유추인지 이런 것은 내가 논할 문제가 못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종교에 대해,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를 대해 늘 의문을 품었던 여러가지 주워들은 사실의 기원에 대해 풍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성경과 성경이 쓰여진 당대 역사와 언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거기에 충만한 종교적 체험까지 갖춘 저자가 분석한 텍스트를 통해 궁금했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주는 것은 물론, 종교의 탄생이라는 근본적인 과정까지 흥미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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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murderbot diaries>가 국내 번역 소식이 있나 해서 SF 신간을 둘러보다 국내 작품들이 눈에 띄어 관심을 가져본다. 국내 SF 작품들은 내가 추측컨데, 웹소설로 뜨거나 공모전 등을 통해 데뷰하는 경우가 대부분일텐데, <기억거래소>의 작가 김상곤 교수는 컴퓨터 인지 과학(?) 박사고, Springer에서 낸 영어로 된 책도 냈다고 소개되어 있다.  기억 상품을 만들어 내고 거래하는 어떤 미래 사회를 그렸다고 하는데, 뇌를 완전히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경험이나 기억 마저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그리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온전히 그 기억 거래의 산업을 조명하고 있다면 내용이 보다 구체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른 형태로 독자의 평가를 받았는지 안받았는지는 모르겠기에,  과학 박사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는 선입견이 선뜻 책읽기(우선 돈 주고 사야 하니까)를 망설이게 한다. 소설 작품적 가치보다 과학적 통찰을 더 우선시하다보면 하염없이 재미없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탈리콜> 원작인 필립K딕의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폴라북스의 단편집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 포함되어 있다. 아 필립 K 딕의 작품은 영화화가 안된 걸 찾기가 더 어렵겠구나. 













<삼사라>와 <구미베어 살인사건> 모두 아작에서 새로 출간된 국내 SF 소설이다. 삼사라는 'SF 어워드 4회 본상 수상에 빛나는'  김창규 작가의 '본격' 하드 SF 작가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하드 SF는 하드 SF라고 하면 온통 못알아들을 jargon으로 버무려 내가 지금 소설책을 읽는지, 논문을 읽는 지를 못알아먹게 쓴 게 아니라, 과학적 마인드가 바탕에 깔려 있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싶다. 현재에 있는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성한 기술이 어떤 사회적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생길만한 일들을 상상한 하나의 사고 실험 같은 거. 이 책은 출판사 리뷰도 다소 지적이고 흥미롭다. 

<구미베어 살인사건> 역시 중단편집인 듯한데. 아작 출판사의 리뷰쓰시는 분 글 참 잘쓰신다. 책도 안 읽었고, 내가 더 보탤 말이 없다. 조금만 퍼온다.





김창규의 다소 보수적인 소재 선택은 예상 밖의 기발함을 만나는 즐거움은 덜하지만, 검증된 장치들을 이야기 속에 삽입해 원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외계 탐험보다는 새 기계를 만들고 그게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공학도적인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순박한 기쁨이랄까요. 표제작 「삼사라」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존재 방식대로 외계 종족을 이해하려 드는 재미있는 순간은 김창규 스타일의 상상력이 가장 멋지게 발휘된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기발한 순간들은 우리 인간을 프로그래밍 코드의 측면에서 재조명했을 때입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공학도의 복잡한 심경이랄지…. 인간의 사고 시스템이란 논리적으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이러한 담백한 시선은 김창규의 단편들 속 내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복잡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설집 『삼사라』의 각 단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주인공은 과학과 상식을 믿고 보편적인 박애 정신을 보유하고 있으며 맹목적인 믿음을 싫어하는 건전한 회의주의자입니다. 이상적인 과학자상이라고 할까요. 역시 아시모프와 클라크를 필두로 황금기 SF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뉴웨이브 SF의 반(反) 영웅적인 인물이나 많은 현대 SF의 덕목(?) 중 하나인 반(半) 영웅적인 복잡한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죠. 향수를 느끼게 하는 선한 인물들입니다. 이러한 과학자상에서 벗어난 인물들조차 그 성격은 선하고 믿음직한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언제나 승리합니다. 비극적인 이야기에서조차 선한 인물들은 최소한 자기 뜻을 관철시키고 이야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 출처 <삼사라> 책소개 페이지>



이 이야기들을 좀 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 수입된 1세대 라이트노벨을 자연스럽게 접한 분들이실 겁니다. 부기팝이나 풀메탈패닉, 이리야의 하늘 같은 수작들이 일본 아니메가 성취한 감수성을 활자 매체로 성공적으로 이식했었죠.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PC 통신에서 데뷔한 뛰어난 창작 작가군이 있었고, 일본 아니메는 세기말의 멋진 성과들을 보여주고 있었고, 일본 문화 수입 제한이 풀렸고, 고속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그 수혜를 받으면서 장르소설 및 영상물에 입문한 세대에게는 dcdc의 스타일이 익숙하게 느껴질 겁니다. - 출처 <구미베어 살인사건> 책소개


8월에 출간한 책인데, 이미 리뷰도 6건이나 올라와 있다. 책소개와 출판사 리뷰는 평이하고, '한국형 SF', '과학적 지식과 감수성이 어우러진' '하드 SF'등의 키워드 정도만 참조하면 되겠다. 카드리뷰가 있어서 대략적 내용 파악이 가능하다.  작가 해도연의 직업이 국가기상위성센터라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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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을 검색하면 국내문학에서만 134권이 나온다. 전집만도 을유출판사와 루쉰번역위원회 두 군데서 나와있다. 세계문학 세트에 포함된 대표작들은 <아큐정전>과 <광인일기>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라고 한다. 루쉰 소설 전집을 출간한 을유문화사의 목차를 보면 3권에 걸쳐 총 33편을 출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Q정전>은 열린책들로 읽었는데, <방황>은 문예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다. 번역에 대해서는 개뿔 모르고, 옛스러운 문체가 작품과 잘 어울렸다. <축복>은 문예출판사 <방황>의 맨 처음에 수록된 단편으로 1924년 상하이에서 발간되던 <동방잡지>에서 최초로 발간되다고 적혀있다. 루쉰의 소설에선 만연된 폭력이 그림자처럼 사회 곳곳에 드리웠던 암울한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방황은 루쉰의 눈에 비친 사회 소외된 여성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을까.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다만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을 뿐, 게다가 자해를 하면서까지 죽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려고 애를 썼던, 당대의 그 쓰레기같은 정절 관습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여성이지만, 결국의 사회와 관습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번에 걸쳐 인생을 후려친 잔인한 운명 앞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그녀의 그 비극적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의 비극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축복(祝福)은 '중국 강남 지방의 풍습으로, 매년 섣달그믐에 신령에게 제사를 올려 지난해와 내년 한 해의 풍년과 평안을 비는 의식 (주6 에서).'이다  이 지역의 축복은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사람들은 상서롭지 못한 일을 입에 올리거나 해서는 안되며,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샹린 아줌마는 남자 못지 않게 힘이 세고 부지런하여 몇 사람의 몫을 했던 하녀로 화자는 축복을 지내기 위해 방문한 네째 아저씨 집에서 그녀에 대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에서 복신을 맞기 위해 온갖 정성과 예를 갖추고 한 해의 운수가 대통하기를 기원하며,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며 한껏 세밑 풍경에 동화되던 화자에게 우연히 마주친 샹린 아줌마와의 우연한 만남은 이제까지의 기분을 싹 잡치게 만드는 불편한 것이다. 한 때는 인부 몇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아주머니에게도 큰 힘이 되었던 샹린아줌마는 지금 거지꼴이 되어 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자 구걸을 할 걸로 알았던 그에게 거지꼴의 샹린 아줌마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사람이 죽고나면 도대체 영혼이 있나요?" 그는 당황한다. 화자와, 저자에게 귀신을 믿고 복을 빌고 하는 이런 풍습들은 척결해야 할 미개한 풍습이다. 당시 개화된 지식인들에겐 사회 구석구석 퍼져있는 척결의 대상은 귀신, 악습, 봉건 등의 추악한 것들이다. 화자는 축복이라는 대형 제사도 그러한 악습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 마을에서 그런 전통에 거스른 언행을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꺼려하고 내치는 쓰레기같은 존재가 된 샹린 아줌마의 이 물음에 화자는 당황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믿고 매달리는 귀신의 존재, 영의 존재에 대해 유일하게 의심을 품고 있는 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던중 다음날 넷째 아저씨가 화내는 소리에 듣는데, 나중에 아저씨가 화낸 이유가 샹린 아줌마가 죽었어서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사람들은 샹린 아줌마 개인의 삶과 죽음 그 자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하다. 심지어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도 그야 뭐 굶어죽었겠지 라고 하고, 언제 죽었냐 물어도 그야 뭐 어제 밤이 아니면 오늘이겠지 라며 그야말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죽은 것만큼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데 아저씨가 화가 난 이유는 '그 요망한 것이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바로 이 때', 축복을 위해 준비하는 이 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 때, 죽음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는 이 어처구니 없는 역설보다는 수 년을 집에서 일하던 하녀의 죽음을 대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비정함이다.


그리고 나서 샹린 아줌마의 인생 사연이 펼쳐진다. 처음에 동네 사람 소개로 이집 하녀로 들어왔을 때에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매사에 열심히 하고 잘해서 제사 준비도 직접 하고, 집안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는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와 그녀가 집에서 도망갔다며, 몇년치 월급을 챙겨 강제로 끌고 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샹린 아주머니의 남편이 죽고 난 후 시어머니는 그녀를 산골의 어느 총각한테 큰 돈을 주고 팔아먹기로 한 모양이다. 개화기 중국의 풍속으 잘 모르겠지만, 역사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여성에게 굉장히 불합리한 관습이 자리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밖에 잘 모르니, 그 때와 비슷하다고 친다면 남편이 죽으면 당연히 죽이되던 밥이되던 시집에서 먹고 살면 되었던 전근대적인 풍속과 달리 시집에서 죽은 아들의 아내가 정절을 지킬 가치마저 없는 그저 물건 같은 소유물이었을까. 아무튼 힘도 세고 몸집도 되는 샹린 아주머니는 세상 떠들썩하게 반항을 하며 산골짜기로 팔려 온갖 폭력 속에 강제 '시집'을 가고, 머리를 짓찧어 깨져 나가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상한 정절의 저항의 나날이 끝난 후, 아들을 낳고 행복한 몇 해를 지내지만, 남편은 장티푸스로 죽고, 아들은 늑대에 물려가 죽고 만다. 그렇게 혼자가 된 여자에게 죽은 남편의 큰아버지가 찾아와 집까지 빼앗아 갈 곳조차 없어진 처지가 되고 만다.


한편 샹린 아줌마가 척척 잘 해내던 일들을 새로 들인 하녀들이 제대로 못하고 밥만 축내자, 샹린 아주머니를 그리워하던 넷째 아주머니는 다시 수소문을 해서 그녀를 데려오지만, 눈빛도 전만 못하고,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다.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샹린 아주머니가 자신의 사연을 그러니까 그 박복한 운명의 이야기를 스스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 세상 천하에 아무도 없는 외토리인 그녀가 그토록 모진 시간을 보낸 것에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에 위안을 삽고, 자신의 입지를 넓혀간다.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와 그 이야기 그러니까 강제로 시집간 이야기부터 아들이 죽기까지의 그 비극을 듣지만,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싫증이 났고, 더이상 그녀를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이 며칠에 걸쳐, 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곱씹혔다는 사실과, 진작부터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 이제는 싫증과 멸시의 대상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첫날밤을 저항하다 이마에 난 흉에 대해 말하고 다시 그것으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하지만 이내, 죽어 저승에 가면 두 남자 귀신이 자신 때문에 다툴텐데 그러면 누구에게로 갈 거냐, 두 조각으로 나뉘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이웃의 말을 듣고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더럽혀진 여자이므로 제사때 쓸 물건을 손에 댈 수도 없는 처지임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미풍양속을 어지럽힌 여자이므로 도움은 받되 절대로 제사에는 손을 담그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그래서 제사상에 올리는 모든 음식은 직접 해야지 안 그러면 정결하지 못해 조상께서 흠향(歆饗)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기에, 전근대적인 사회일수록, 그리고 작은 규모의 마을일수록 어려운 이웃을 돕고 이웃공동체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환상을 품기 쉬운데,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작은 사회에서도 인간의 비정함은 도시적 삶과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보다 큰 도시에서라면 그저 작은 편견의 파편들로 흩어졌을 미신들과 함께 삶을 옥죄고 감옥을 만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 소설,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지켜보는 냉정한 시선만큼은 살인자의 시선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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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단편집에 있는 단편 모두가 짜릿하고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자극적이고도 믿을 수 없는 단편이 <어둠 속의 두 사람>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들을 엮은 책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몇년도 개별 작품이 각각 몇 년도에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었고, 작품집의 copyright이 1990, 1994로 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그 이전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도 없이 많은 작품을 쓰고 번역되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어 엄청난 수의 작품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신 장편을 몇몇 개 읽다보면 다작을 하는 작가들 특유의 안이함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작품집의 단편들은 머리 속에서 펼쳐지는 그 많은 이야기의 향연들을 아낌없이 짧은 소설에 압축하여 넣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 그의 장편에서는 쓸데없이 장황하고 복잡한 서사로 논점을 흐리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서사에 사회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로 허술함을 메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그야말로 아 이 짧은 소설에도 이토록 강력한 미스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거란 걸 실력으로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중학교 교사가 학생의 전화를 받는다. 3개월된 자기 동생이 살해되어 학교에 결석한다는 소식이다. 일본에선 1990년대 쯤이면 학생이 결석하면 교사가 방문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교사는 이 일로 결석하는 아이를 세 번 이나 방문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아이의 가정 환경과 심리를 더욱 친밀하게 관찰하는 화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로서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사회와 문화적 코드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추행의 일상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일본 문화에서 느껴지는 추행의 일상화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었을 때에서도 드러난다. 잘 모르는 아저씨가 밤에 젊은 여성의 가슴을 주물럭 거리고 그것 때문에 몸싸움이 한동안 벌어지는 데도 이 재치 발랄한 아가씨는 별 문제 삼지 않으며, 후에 그 런 성추행범과 오히려 친구가 되고 감싼다. 여기서도 그런 장면이 비슷하다. 아이의 집에 방문 중, 아이는 난데없이 <야간비행>이라는 향수를 한 번 발라보라고 부탁한다. 여선생이 마지못해 바르고 나니, 또 냄새 맡아봐도 되냐고 묻고, 그러고 나서는 덮친다. 이게 그냥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그러니까 강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성폭력의 시작 단계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온 것인데, 선생은 이 일을 문제삼지 않을 뿐더러, 아이에 대한 교사로서의 관심, 보살핌 이런 심정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동범죄법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중학생도 이미 체력적으로는 성인과 맞먹을 정도의 체력을 가진 아이들도 많고, 그런 상태에서 (힘이 약한) 어른을 성폭력했다면, 법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는 어떤 책임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그런 것도 궁금하다. 어쨌든, 사건 초반에 드러나는 것은 학생의 엄마가 계모라는 사실이고, 그 계모를 학생은 엄마로서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으로 칭하며 내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인데, 이후 그 계모에게는 친부가 출장 중일 때마다 방문하는 아버지 회사의 부하 직원인 정부가 있었고, 그날 3개월된 아기가 목졸려 살해되던 밤에도 그 사람이 방문했던 것이 밝혀진다. 게다가 부하직원이 계모를 방문하는 통로는 아기가 있는 방의 유리창을 통해서인데, 그 날 유리창이 잠겨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출장가기로 했던 아버지가 마침 출장이 취소되어 집에 있었던 사실까지 밝혀진다.


이쯤되면, 답은 거의 나온 듯하다. 계모와 불륜 관계에 있던 부하직원이 아기방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다가, 남편이 있는 사실을 알게 되고, 때마침 아기가 울어 남편을 깨우게 될까봐 죽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대로 흘러가면 미스터리가 아니지. 불륜 사실이 밝혀지고 자취를 감추었던 계모는 당시 상황을 곰곰히 생각하다 어떤 충격적인 결론을 도출하고는 그 불륜남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주러 돌아온다. 이 단계에서 계모는 사건의 전모를 확신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계모는 다시 아이를 방문한 선생에게 '오늘은 할 일 이 있다'며 내보낸다. 이 때 소름끼치는 느낌으로 선생은 휘청하고, 잠복 혹은 뒤따라 방문하던 형사들은 다같이 뛰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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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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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국으로서의 일본의 면모를 이토록 점잖고 우아한 미스터리로 승화시킨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하면 야동, 야동 하면 일본이 생각나지만 그것은 서버 컬쳐일 뿐이고, 내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본의 문화는 얌전하고 드러내지 않고, 내성적인 느낌이 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점잖은 작가의 작품에서 야동의 하나의 쟝르일 수도 있는 패륜적 성행위는 그 자체로서 대단한 충격이고 자극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단 한줄도 없다. 하지만, 성행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욕망에서 비롯되고, 욕망은 가지지 못함 혹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에서 더욱 커져간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가장 비윤리적이고 가장 파렴치한 사람은 계모다. 하지만 계모의 불륜은, 형사들마저도, 그 왕성한 나이에 한 사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을 테지 하며 이해하는 분위기다. 이것도 일본적 정서로 이해할 만하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그렇다고 나오지는 않지만 그럴 듯)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전처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매사에 반항적이고, 한 가정에서 엄마로서의 자기의 지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아이야 말로 생리적으로는 가장 왕성하고 가장 호기심 강한 성적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계모가 그 매력을 이용하여 단 한번의 유혹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천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천재성은 거기까지였다. 처음 발견한 아이의 성적 세계에서 생성된 욕망의 방정식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인류가 섹스의 즐거움에 빠져서 종종 까먹곤 하는 원초적 목적, 새생명과 DNA의 전달이라는 그 엄청난 재앙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성적 판단은 욕망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으며, 생명의 무작위성은 가장 불필요한 인연을 야기하기에, 비극이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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