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계몽에 관한 논문들 세미나리움 총서 23
칼 포퍼 지음, 송대현 외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현대 물리학과 수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적어도 세 가지 항구적인 성취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그는 논증과 관련하여 연역적 방법의 발명가였고, 간접적이기는 했지만 현재 가설 연역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의 발명가였다. (2) 변하지 않는 것 혹은 불변하는 것은 자기-설명적이라고 간주된다는 것을, 그리고 설명하는 데에 이것이 출발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강조한 것은 옳았다. (3) 파르메니데스 이론은 이른바 물질의 연속성 이론의, 그리고 이것과 함께 우주론적인 자연학 학파의 시초였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223


 칼 포퍼 (Karl Riamund Popper, 1902 ~ 1994)는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The World of Parmenides>를 통해 자신의 과학철학의 얼개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E 546 ~ 501)적이며, 스스로가 파르메니데스주의자임을 고백한다. 더 나아가 모든 과학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파르메니데스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포퍼는 파르메니데스의 시(詩)에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발견하고 있다. 


 모든 것은 두 세계, 실재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보이는 파르메니데스적 대립에 의해서 완전히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1) 실재 세계는 물론 참다운 세계인 반면, 현상의 세계는 완전히 거짓이다. 이것은 무이며, 아무것도 아니고, 기껏 해봐야 그림자 연극일 뿐이기 때문이다. (2) 실재 세계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나타남의 세계에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설명은, 이 세계는 완전히 거짓이고 완전히 환상인 까닭에, 현상의 세계와 관련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158


 파르메니데스의 두 길의 근저에 있는 하나의 이론은 전통적인 관점이다. 오직 신들만이 알고 있고, 우리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단지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의견의 오류가능성에 관한 이론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놀라운 것은 실재에 관한 신적인 지식이 합리적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충실한 반면, 현상에 관한 인간적 의견은 신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잘못되게 우리를 인도하는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184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와 허상의 세계로 나뉜다. 실재의 세계는 불멸과 신 그리고 참된 세계인 반면, 가상의 세계는 필멸과 인간 그리고 감각의 세계다. 유한한 인간은 절대진리의 세계를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기껏해야 최대한 그것에 가깝게 수렴할 뿐이지만, 결코 진리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필멸, 유한의 한계성으로 인간은 결코 이를 넘어설 수 없다. 포퍼는 이러한 파르메니데스-플라톤적인 구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구도 위에서 포퍼는 비로소 자신의 과학철학에 대한 접근 방법 '추측과 논박'에 대해 언급한다. 감각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기껏해야 추측을 통해 가설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은 모두 가설이며, 언제라도 논파되어 폐기될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서 포퍼는 열린 가능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새롭게 제기된 이론들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검증가능성'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진리를 알고 발견하려는 시도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개선을 위해 열려 있다는 것과 우리의 지식이나 학설이 추측이라는 것, 우리의 지식이나 학설이 결정적이고 확살한 진리보다는 오히려 추측이나 가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비판과 비판적인 논의가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그러한 전통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p61)...  관찰과 실험은 과학의 발전에서는 비판적인 논증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관찰과 실험은 다른 것, 즉 비관찰적인 논증과 더불어 이러한 역할을 행한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62


 우리가 새로운 가설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가설은 그 이전 가설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그것들이 해결했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2) 새로운 가설은 더 오래된 이론에서 따라 나오지 않는 예측들의 연역을 허용해야 한다. 오히려 옛날 이론과 모순된 예측들, 다시 말해서 결정적인 실험들을 허용해야 한다... 요점 (1)은 필연적인 요구 사항이며 보수적인 요구 사항이다. 그것은 퇴행을 막는다. 요점 (2)는 선택적이며 바람직하다. 그것은 혁신적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369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서는 감각적인 현실세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감각의 세계에서는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한 '추측과 논박', 그리고 이를 위한 '검증가능성'이라는 포퍼의 과학철학의 큰 바탕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바로 '반(反) 파르메니데스'적인 사상가들이 있는데, 이데아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합리주의자 포퍼는 이 책에서 대표적으로 3명의 사상가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E 544 ~ 4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 ~ 322) 그리고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 ~ 1996)가 그들이다.


 요약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는 동안 사물들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역설을 사물들에 대한 이론에 의해 해결한다. 그 이론은 사물들을 종종 가시적인 과정들의 현상들을 오해하거나 오역한 것으로 설명한다. 과정들 특히 세계 과정들은 자기-동일적인 변화들인데, 그 변화들은 따라서 동시에 반대되면서 동일한 대립자들을 포함하고 있다(p363)...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대립자들을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정확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다루고 있다. 더구나 그는 즉각 이런 대립자들은 적어도 동일하지 않다는 자신의 고유한 근거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논박하고 있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365


 포퍼에 의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 - 자기 안의 대립자와 동일성 - 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보다 더 세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논박당하는 이론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쿤에 대한 비판점은 조금 결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인(귀납적인) 방법을 통해 검증가능성이라는 기본을 해친 파르메니데스적 전통을 끊으려 한 서양과학사의 암(癌)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고, 토머스 쿤에 대한 비판은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검증가능성에 의한 새로운 가설의 대두가 정상과학에서의 연속적인 발전을 의미한다면, 쿤은 이러한 연속성 대신 불연속성을 강조하며 검증가능성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포퍼의 눈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로 비췄으리라.


 플라톤은 분명히 그가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닌 기껏해야 '진리 비슷한 것(truthlike)'뿐이라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비슷한 것이다. 이 말은 통상 '개연적인'으로 번역된다... 플라톤이 사용한 말은 실제로 '닮음'이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진리와 닮음'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그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된다. 그는 그가 안다고 믿었는데, 그 자신이 인식, 즉 증명가능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플라톤에게 과학적 가설이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지식, 증명 가능한 지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래로 지금까지 여전히 서양의 대다수 인식론자들에게 남아있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25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론안의) 포괄적인 탐구 계획의 기능은 어떤 면에선 토머스 쿤(Thomas Kuhn)이 부당하게 '패러다임들'이라 말했던 지배적인 과학 이론들에 귀속시켰던 기능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은 그것이 지배적인 것이 되면 과학적 연구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연구 프로그램들은 쿤의 지배적인 이론들이 행해지는 방식으로 과학의 부분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성격상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이며 방법론적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285


 이처럼 칼 포퍼의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된 주제로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포퍼 자신의 과학관과 현대 과학이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사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책이다. 처음에 접하기에는 다로 어려운 감이 있지만, 논문 안의 주제가 동일 주제를 반복하여 다루기에 끝까지 읽다보면 개념들이 친숙해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포퍼의 다른 책 <추측과 논박>,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나아간다면 큰 무리없이 포퍼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나 우리의 추측을 그 결론들을 조사함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가정을 결코 확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가정은 직관적으로 우리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 할 것이다. 직관은 중요하기는 하나 (이 방법 안에서는)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 내 의견으로는 추측이나 가정의 벙법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두 번째 방법이 본질의 직관적 파악 방법이다. 여기서 '직관'(이성 : nous, 지적인 직관)은 틀릴 수 없는 통찰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진리를 보장한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거나 파악하는 것은 본질 자체이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405


 다만, 포퍼의 과학철학을 접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 등은 현대 주류 과학이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보다 탄탄한 물리이론을 학습한 후 자신의 입장을 정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면 좋겠지만, 일반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감각세계의 유한성에 다름아닐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이론의 확률적 성격을 우리의 무지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먼저 인과성의 몰락에 대한 원인적 설명을 했는데,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며 관찰자들인 웅리가 물리적 대상들을 측정하는 동안에 우리가 물리적 대상들에 개입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에 의해서 그 대상들의 실제 상태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그것들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것은 만약 어떤 간섭하는 물리학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세계는 당연히 파르메니데스적인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파동다발의 감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인 길의 붕괴에 따라서 인과성의 몰락에 실제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와 우리의 무지,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잘못된 의견들임을 함축하고 있다. _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 p345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제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사상가들은 모두 지식, 실제적 지식, 확실한 진리(saphes, aletheia, episteme)와 의견(doxa)를 날카롭게 구분했다. 확실한 진리는 신적인 것이며 신들에게도 잘 알 수 있는 것이고, 의견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크세노파스가 개선될 수 있는 추측으로 해석한 것이다. - P23

변화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과연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와 제논(Zeno)에 의해 거의 논리적인 문제로 바뀐다.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물은 그것의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동일한 것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것의 동일성을 상실한다면, 변한 것은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니다. - P44

진리는 객관적이다. 내가 말한 것의 진리나 거짓됨은 사실들에만 의존한다. 게다가 이 시행들은 객관적 질리와 주관적인 확실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어떤 실마리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크세노파네스는 내가 가장 완전한 진리를 말했다 하더라도, 내가 확실하게 이것을 알 수는 없으며 나는 단지 그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다‘는 말의 가설적 의미에서 진리를 알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도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류 불가능한 진리의 기준은 없다. - P105

인간은 언어의 도움으로 행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사태를 기술하는 것이다. 인간 언어는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상황과, 그리고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사실을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단순한 사실에 관한 가장 단순한 언어적 기술조차도 이를 단순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질서의 성취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상력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상상력은 자극을 받는다. 이것이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 만들기로 이끈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비판적인 검토가 과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와 다른 경우 이것은 전형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고 설명력이 있는 이야기나 신화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P199

간단히 말해 현상의 세계를 기만으로 설명하거나 문자 그대로 그 세계를 기만으로 해명함으로써, 현상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를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단언하건데, 이것은 증거가 박약하다는 징후이다. 어떤 변론이 요청됨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기만의 세계에는 보이는 것 이상이 있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 P265

나의 생각에는 과학철학자가 말해야 할 것은 그러한 어떤 변명도 파르메니데스적인 프로그램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데모크리토스학파의 이론의 몰락과 함께 파르메니데스적인 프로그램이 합리적인 과학에 했던 막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그램은 너무 협소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는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최근의 발전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합리주의의 틀을 넓히기 위해 애써야 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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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정보 통제와 가짜 정보의 지속적인 유통에서 보는 것과 유사하게 언어가 통제된다. 오웰이 창조한 당Party은 뉴스피크Newspeak(대안적 사실)라 불리는 새로운 언어를 보급하는 데 힘을 쏟는다. 뉴스피크는 정치적 저항과 관련된 단어를 모두 제거하거나, 모순적인 생각들을 동시에 유지시키는 이중 사고를 통해 반대 세력을 막으려고 시도한다. 오웰의 디스토피아dystopia에서는 저항에 대한 생각조차도 불법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물리적이라기보다 구조적이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 즉 우리의 경제 및 사회적 상호작용이 대부분 디지털 플랫폼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 플렛폼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떤 형태든 감시와 불가분의 관계다.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는 부패란 권력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싶다.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엄격한 법률을 시행하고 범법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2018년의 〈뉴욕타임스The Newyork Times〉의 보도에 따르면2, 2020년 중국에서 3억 대가 넘는 카메라가 운영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시민 다섯 명당 카메라 한 대에 해당하는 숫자다. 중국은 단지 권위뿐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열기가 없는 불을 내뿜는 무형의 보이지 않는 용이 있다는 말과 ‘애당초 용이 없다’는 말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장을 반증할 방법이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실험도 소용이 없다면, 용이 존재한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설을 반증할 수 없다는 말은 그 가설을 참으로 증명했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중세의 마녀 화형은 소수를 죽여서 다수를 구하는 것이 낫다는 공리주의적 판단에 많은 부분 기반하고 있다. 물론 희생양 찾기, 개인적 원한의 청산, 적에 대한 복수, 재산의 몰수,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의 제거, 여성 혐오와 성 정치학 같은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인과관계를 잘못 이해한, 이미 확립된 시스템의 부수적 결과였다.

철학이 모든 과학의 기반이 되는 토대를 제공하고 과학자가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법을 철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실증적 증거, 확고한 사례, 그리고 검증할 수 있는 가설을 필요로 합니다. 위대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이를 추측과 반박conjecture and refutation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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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사회적 원자라는 방법론을 이용해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든 물체는 자유낙하 한다."라는 가정에 기반해 역학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와 닮았다고 본다. 자유낙하로 가정해 푼 문제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면 가정을 다듬어 더 정교하게 하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을 단순한 사회적 원자로 가정해 얻은 결과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면 가정을 수정해 더 정교한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적 원자는 물리학의 방법으로 사회 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출발점일 뿐이다.

연구에서 관심을 둔 질문은 바로 "만약 구조의 최상층이 잘못된 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체 투표자가 활발한 의사소통을 통해 최상층의 의견과 다른 의견으로 합의할 수 있을까?"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의견이 그릇된 의견이고 어떤 의견이 올바른 의견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량적 모형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을 직접 물리학의 투표자 모형에 구현하기는 어려워 다른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

먼저 상명하복의 계층 구조와 의사소통 채널이 다양한 민주적인 구조는 각기 일장일단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상명하복 구조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계층 구조의 최상층의 의견이 아주 빠르게 전체의 구석구석으로 전달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체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의 수가 N일 때, 최상층의 의견이 모두에게 전달되는 시간은 N의 로그값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의사소통이 활발한 민주적인 소통 구조는 달랐다. 사람들이 충분히 활발하게 의견을 소통한다면(p값이 1에 가까운 경우), 비록 최상층의 의견이 -1이더라도, 활발한 소통을 통해 전체 중 다수가 +1의 의견에 합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명확히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가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더 나은 의견에 합의할 가능성이 크지만, 합의에 이를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네트워크 사회학자들은 관계를 측정하고, 이 관계의 차이가 매우 다른 사회적 결과들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 사회적 결과들은 경제적 소득, 생물학적 수명, 정치적 성공, 문화적 영향력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개인이 보유하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의 양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불렀다. 관계는 자본처럼 축적할 수 있고, 다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쓸 수도cash-in 있다는 의미에서다

같은 이유로 공동체community를 이상화하는 고전 사회학자들은 하나같이 공동체성의 핵심을 관계의 양이 균일하게 분포된 것에서 찾았다. 관계의 평등은 집단 내 개인들에게 물적 자원이 고루 나누어지는 것의 선결 조건이다.

"사회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뒤르켐Durkheim, 마르크스Marx, 짐멜Simmel)"는 사회학의 근본적 질문들 중 하나다. 사회학sociology의 본뜻이 ‘집단에 대한 연구study of group’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인간은 왜, 어떻게 집단생활을 영위하는가(스펜서Spencer, 헤겔Hegel)", "집단의 질서란 어떻게 가능한가(홉스Hobbes, 밀Mill, 루소Rousseau)", "촌락과 같은 작은 사회가 어떻게 국가와 같은 큰 사회로 성장하였는가(말리노프스키Malinowski,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등도 사실상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집단생활의 효용과 기능(래드클리프 브라운Radcliffe-Brown, 파슨스Parsons), 집단생활을 촉진시키는 특정 문화와 제도의 역사적 경쟁력(베버Weber, 머튼Merton) 등이 중요한 대답들로 제시되었다.

인간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 중에 하나는 인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혈족만으로 구성된 일부 생물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집단 규모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대형 유인원인 침팬지와 보노보의 평균 집단 규모는 각각 46마리와 23마리로 인간보다 훨씬 적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협동을 이끌어내는 규범으로 인해 이타주의자뿐만 아니라 규범을 잘 따르는 이기주의자 또한 번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최근의 경제 실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조건부 이타주의자다.

요약하자면, 인간의 마음 및 행동에 대한 진화론적 연구는 진화론 학계 내부 및 외부에서 공격을 받는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행동 연구를 하는 학자는 여러 편견에 맞서서 싸우지 않으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수 없다.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내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도덕 관념의 시작이다. 거울뉴런은 타인의 감정과 고통이 어떻게 내 것처럼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통찰을 준다. 도덕 관념이 문화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보일 수 있으나 기본적인 도덕 법칙들은 보편적이며,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타인의 감정 및 고통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능이 마키아벨리적이라는 것일까? 영장류 사회는 변화무쌍한 동맹 관계로 유지된다. 따라서 다른 개체를 이용하고 기만하는 행위 또는 보다 큰 이득을 위해 상대방과 손을 잡는 행위 등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를 높일 수 있다. 이렇게 권모술수에 능하려면 무엇보다 다른 개체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 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힘들을 제어하고 공감의 반경을 넓혀서 여기까지 문명을 끌고 온 원동력은 주로 이성의 힘이었다. 그동안 인류는 인지적 공감과 공리주의적 발상 등을 발휘하여 점점 더 큰 조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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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러한 관찰에 근거하여 마음과 몸이 분리된 실체라는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을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이 뇌 속에 있는 송과선pineal gland을 통해 연결되고, 영혼이 ‘몸의 조종사’라고 생각했다.

심리학이 가능해졌고,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 즉 마음이란 고장이 날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은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견해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각에 대한 뇌인지 연구는 무의식적으로 지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감각 역시 의식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였다. 감각과 지각은 더 이상 예전처럼 구분되지 않고, 의식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또 어떻게 정의해야 되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통계물리학을 공부하다보면 가장 먼저 배우는 주제는 상호작용이 없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상호작용이 없다면 전체의 특성은 구성 요소 하나의 특성으로부터 모두 결정된다. 이 경우 하나를 알면 전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물질의 거시적인 상이 변하는 것이 상전이phase transition다. 정확히 같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상호작용의 꼴도 온도에 따라 전혀 달라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물질의 특성이 급격히 변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현상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물리계는 입자 하나를 이해한다고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전체를 부분의 합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상호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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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자 쿠엔틴 스미스Quentin Smith는 쿤에게 ‘무’를 마치 ‘무언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지적했다. 즉 "무가 있을지도 모른다There might have been nothing"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 존재가 가능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쿤은 스미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있음There is’은 ‘무언가가 있음something is’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가 있다there is nothing’는 것은 ‘무언가가 무다something is nothing’라는 의미가 되어 논리적 모순이 된다. 그는 ‘무’라는 용어를 제거하고 ‘무언가가 아님not something’ 또는 ‘아무것도 아님not anything’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모든 논증은 설명이 필요한 무언가의 존재를 가정한다. 무nothing가 아니라 무언가something가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논거는 다른 모든 논증의 기저를 이루는, 인지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존재자는 자기자신(내세에 대한 믿음의 인지적 토대가 되는)뿐만 아니라 애당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t existing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에는 진정한 진보가 존재한다. 과학의 진보를 팽창하는 지식의 구sphere라고 생각해보라. 알려진 지식의 구가 미지의 영역에서 팽창할 때면 지식의 구를 덮고 있는 무지ignorance의 면적도 늘어난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구의 비유로 돌아가, 구의 반경이 증가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생각해보라. 표면적의 증가는 반경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에 비하여 부피의 증가는 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즉, 과학적 지식의 구가 팽창하면 무지의 면적은 제곱의 속도로 증가하는 것에 비해 알려진 지식의 부피는 세제곱의 속도로 늘어난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넓은 무지의 영역이 앎의 영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의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지식과 무지 사이의 경계 지역에서 일어난다.

달리 말해 순유전학의 핵심 과제가 DNA라는 블랙박스 안에 들어 있는 유전자를 찾아내는 데에 있었다면, 포스트 게놈 시대의 주요 과제는 DNA의 서열이 밝혀지면서 등장하게 된 기능과 역할이 불분명한 수많은 유전자에 대한 주석달기annotation가 되었다. 이러한 역유전학을 수행하려면 표적 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보존에는 돈이 든다. 물리적으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구상 생명체는 양성자(H+) 농도 차로 ATP를 생산하여 에너지로 사용한다. 막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양성자를 농축시켜 두었다가 댐이 수문을 열 듯 양성자 흐름의 물꼬를 터서 그 동력으로 ATP를 합성한다

21억 년 전 어느 날 원핵생물 하나가 또 다른 원핵생물인 미토콘드리아d를 집어삼켰다. 이유는 모르지만 미토콘드리아는 소화되지 않고 원핵생물 내에 살아남았다. 미토콘드리아 입장에서 보면 원핵생물 내부에 있는 것이 안전했다. 원핵생물 입장에서도 내부의 미토콘드리아는 유용했다. 당시 산소 농도가 증가하고 있었는데 산소는 반응성이 강한 원자다. 쉽게 말해 독毒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산소호흡으로 에너지를 생산한다. 내부의 미토콘드리아가 산소도 제거해주고 에너지도 만들어주니 일석이조라 할 만하다.

공생설의 중요한 증거 중 하나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 모두 고유의 DNA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한때는 자체적으로 복제를 했던 존재라는 증거다. 진핵세포 내부에서 공생하는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가 죽었을 때, 그 DNA가 진핵세포 내에 흩어졌을 것이다. 이런 쓰레기 DNA와 숙주의 DNA가 한동안 뒤섞였다는 증거가 진핵세포의 DNA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결국 숙주가 자신의 DNA를 지키기 위해 핵막을 진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핵막으로 둘러싸인 핵은 진핵세포와 원핵세포를 구분 짓는 특성으로 세포 내에서 DNA를 격리해 보관하는 특별창고다.

대기 중 산소의 농도가 높아졌을 때 다세포생물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산소는 독이다. 산소의 독성을 피해 단세포생물들이 떼 지어 뭉치는 바람에 다세포생물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집단을 이루면 표면의 세포들만 산소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 산소를 상대하는 것은 허파다. 몸 안으로 들어온 산소는 적혈구라는 특별 호송 열차에 실려 몸의 각 부분으로 조심스럽게 이동된다. 이래저래 산소가 핵심이다.

"이 세계관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다. 생명의 힘은 애초에 단 하나의 생물에 불어넣어졌을 것이다. 지구가 단순하고 변하지 않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질학적 순환을 하는 동안, 생명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체들이 무수히 진화했고 또 진화해가고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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