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탄생 우리 시대의 고전 6
자크 르 고프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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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 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 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20


 자크 르 고프 (Jacques Le Goff, 1924 ~ 2014)는 <연옥의 탄생 La Naissance du purgatoire>에서 '천국-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사후세계에서 '연옥'이라는 제3의 공간의 중세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를 중세철학사상과 문학작품을 통해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현대인과는 전혀 다른 중세적 사고틀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원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연옥'의 개념이 사도 바오로(Paulus, CE 5 ? ~ 64 ?)의 <코린토 1서>의 내용을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 암브로시오스(Aurelius Ambrosius, 330 ~ 397) 등 교부들의 해석 과정을 거쳐 큰 틀이 만들어졌고, 틀 안의 세부 내용이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조금씩 바뀌다가 최종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바울의 텍스트는 "어떤 가벼운 죄과들에 대해서는 심판 이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로 말하자면, 만일 사람이 철이나 청동이나 납으로 집을 지으면, 즉 "중대한 죄들"을 짓는다면 이 죄들은 불에 타 없어질 수 없을 것이지만,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즉 "미미하고 가벼운 죄들"을 짓는다면 이 죄들은 불에 타서 없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죄들이 죽은 뒤 불에 타 없어지기 위해서는 생전에 선행으로써 그럴말한 덕을 쌓아야 한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88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고대 종교의 공통된 틀이다.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선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는 구도는 기독교만의 것은 아니지만, 연옥의 등장은 이전 고대 종교와는 분명 구분되는 새로운 변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육체의 심판 이후 영혼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교리와 영혼에 대한 심판 이후에도 가벼운 죄에 대한 구원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이 전제되어야 했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이었다. 


 오리게네스의 개념들은 보다 세밀하고 광범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전적으로 무죄한 인간은 없으므로 의인들까지도 불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와 결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영혼은 더럽혀진 것이다. 의인들에게는 이 불의 통과가 세례이다. 불은 영혼을 무겁게 하던 납을 녹여내어 정금으로 만든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27


 암브로시우스는 오리게네스보다는 바울의 영향에 이끌려 모든 죄인들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졌을 터이므로 불을 통해 구원되리라고 생각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죽은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산 자들의 기도에 효력이 있을 수 있음을, 형벌의 완화를 위한 대도의 가치를 분명히 긍정하였다(p130)... 암브로시우스는 형제를 위해 기도한다. 그것은 저승에서의 가족적 구명망(救命網)이다. 그것은 중세에 그리고 연옥이라는 시각에서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특시 사튀로스가 구한 자들의 대도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회적 현상을 본다. 즉 로마의 클리엔트 clientele가 기독교적 차원으로 환치되는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39


 교회의 초대 교부들인 오리게네스, 암브로시우스 등에 의해 제기된 사후 심판에 대한 논의는 바로 교회권한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죄를 지은, 언젠가 천국으로 가야할 영혼은 언제 어떻게 구원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이러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연결시켜주며, 생전 선행을 장려하면서 세속에서의 권한을 팽창시켜나갔다. 이런 면에서 바로 연옥의 존재는 중세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옥'이라는 제3의 세계가 중세 이후 본격적으로 부상하게 되는 제3계급 부르주아(bourgeois)와의 연계성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도시의 발달을 통해 새롭게 부상하는 도시 중간층의 등장이 중세 사회의 '팽창'이라면, 연옥은 사후 세계의 '팽창'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연옥을 통한 교회의 팽창과 도시 발전을 통한 제3신분의 팽창, 성지 탈환을 위한 군사적 팽창. 이런 면에서 '팽창'은 12세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연옥에 대한 간섭은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관련된다. 분명 이 새로운 영역은 전적으로 교회에 의해 병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중간적 상황 때문에 신과 교회의 공통의 사법권에 속한다. 봉권제가 이 시대에 발전시킨 공동 사법에 견주어, 신과 교회가 연옥에 대한 파리아주(pariage, 공동 영주권)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권세를 얼마나 확대하는 일인가!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482


  우리는 11세기초에 정의되어 12세기에 확충된 기도하는 자들 oraotres, 전투하는 자들 bellatores,  일하는 자들 laboratores의 삼분적 사회 체제를 볼 수 있다. 요컨대 사회의 비약적 발전이 새로운 표상 체계에 의해 인준된 것이라 하겠다. 12세기의 발전은 지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팽창이기도 하며, 12세기는 십자군 운동의 대세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역사에 있어 영적이고 지적인 시기였으니, 샤르트르 Chartres, 프로몽트레 Premontres, 시토 Citeaux 등의 수도원 부흥이 일어나는가 하면, 동시에 도시 학교들에서는 지식의 새로운 개념 및 새로운 지적 방법들, 즉 스콜라주의가 태어난다. 연옥은 사회적 상상 세계, 저승 지리, 종교적 확신 등에 있어서 이 같은 팽창의 한 요소이며, 그러한 체제의 일부로서, 12세기가 정복한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262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은 12세기 팽창을 상징하는 '연옥'의 개념이 13세기에 뿌리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에서 묘사된 연옥의 모습은 12세기와 13세기 전통의 완성이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12세기 신학의 '천국의 예비소'와 13세기 신학의 '가장 가벼운 징벌의 장소' 사이에서 방황하던 연옥의 위치는 이로써 확고하게 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3세기에 연옥은 신학에서나 교의적 차원에서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존재는 확실한 것이었고, 연옥이란 신앙과 교회의 진리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건 다소간에 추상적인 의미에서건, 그것은 하나의 장소로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공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죽은 자들을 위한 대도라는 기독교의 아주 오래된 관행에 온전한 의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교회 조직은 그것을 통제하고 그것이 신자들의 상상 가운데 멋대로 자라나지 않게끔 제한하였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551


<연옥의 탄생>에서 독자들은 '연옥'이라는 제3의 사후세계를 통해 중세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바늘 끝에 얼마나 많은 천사가 매달릴 수 있는가'하는 문제마저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을 오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연옥의 탄생>을 통해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성(聖)과 속(俗)을 연결시키려는 당대 신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면, 중세인들의 시각에 가깝게 당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연옥의 탄생>은 이처럼 독자들을 중세의 세계관으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현대와 중세를 잇는 고전이라 생각된다... 


 단테는 연옥을 저승의 중개적 처소로 만드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히 성공했으며, 그럼으로써 13세기 교회가 지옥화했던 연옥을 제 위치에 돌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지옥과 천국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천국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지는 정통적 연옥의 논리에 보다 충실했던 단테는 연옥을 희망의 장소, 희락이 시작되며 빛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장소로 그려놓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단테가 스콜라 학자들을 넘어 연옥의 근거를 참회에 두었던 12세기 신학자들의 위대한 전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657


논리적 ·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된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 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게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 P32

연옥은, 다른 많은 신앙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는 지성인들의 사색과 집단의 압력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소극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과의 투쟁에서도 태어났다. 이 투쟁은 연옥이 당시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마 교회가 연옥 교의를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이단들, 13~14세기의 그리스인들, 16~17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에 맞서서였다. 공식 로마 교회의 적수들은 끈질기게 연옥을 공격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저승에서의 인간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공덕과 하나님의 뜻에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332

연옥은 그보다는 덜 장엄한 심판, 죽음 직후의 개인적 심판에 달려 있으니, 중세 기독교는 그것을 망자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선한 천사들과, 고유한 의미에서의 천사들과 마귀들간의 싸움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낸다. 연옥의 영혼들은 종국에는 구원될 선택된 영혼들이므로 천사들에게 속하나 복잡한 사법적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들은 사실 형(刑)의 유예나 가석방을 누릴 수도 있으며, 이는 그들 자신의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외적인 개입 즉 대도 덕분이다. - P411

종말론적 시간과 지상적 시간 사이의 결합은 시간에 대한 13세기의 새로운 태도들의 특징이다. 지상적 시간은 점점 더 선조성을 띠게 되며 점점 더 시간 속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의해 구획되기 시작한다(p555)...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이론적인 답변에 의하면 참회는 이생에서만 가능하고 죽은 뒤에는 징벌만이 있다. 그러므로 연옥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망자 개개인에게 연옥의 시간이 반드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전기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십중팔구 심판 이전에 구원될 것이며, 그 구원의 시기는 정화되어야 할 죄의 성질과 분량에 따라, 그리고 산 자들이 드리는 대도의 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의 시간은 가변적이고 측량 가능하며 심지어 조정 가능한 것이 된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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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는 미칠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두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소리, 신도의 신음소리는 두 귀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그만해 주시오, 중지해 주시오.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혀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꼐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3/159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 ~ 1996)의 <침묵 沈默>과 박완서(1931 ~2011)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모두 '신(神)의 침묵'을 주제로 한다. 죄 없이 죽어가는 일본 가톨릭 신자들을 방관하는 무정한 신, 촉망받는 예비 의사 아들을 너무도 빨리 데려간 야속한 신, 하느님은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한테나 응석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요.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8/184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침묵은 부재(不在)로 다가왔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이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한 명은 배교(背敎)로, 또 다른 한 명은 더 깊은 신앙으로.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6/159


 마침내 가슴에 걸린 빗장이 부러지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오면서 점심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다. 복통이 없어지자 내 존재도 소멸한 것 같았다. 완벽한 평화였다. 고통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변기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무릎 꿇은 자세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134/184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재에 대해 마치 겟세마니에서 피땀이 떨어지는 예수의 기도와 같이 처절하게 기도했다. 이러한 간절함에 대해 내린 서로 다른 두 길. 어느 길이 올바른 좁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도했지.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어. 하지만 기도도 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지는 못했지. 저 사람들의 귀 뒤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 나오지, 그 고통을 나는 내 몸으로 맛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어. 기도는 결코 그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해.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4/159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담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예수는 당신이나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지, 왜 수많은 예수쟁이들까지 줄줄이 그의 못박히고 피맺힌 팔다리에 매달리게 하는가. 그래서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손톱 발톱까지 나눠 갖게 하는가.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70/184


  그들의 선택 또는 깨달음에 대한 판단을 선뜻 내리기는 쉽지 않다.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자신의 슬픔을 피정을 통해 치유하는 과정이 주는 의미는 분명 읽는 이들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기에. 다만 신의 침묵에 대한 이들의 응답은 시간(時間)속에서의 응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원한 절대적인 신의 시간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상황은 순간의 비극(悲劇)이라는. 결국, 로드리고의 배교도, 박완서 작가의 회심(回心)도 큰 틀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 상황적 선택은 아니었을까...


  종교인들은 지옥문이나 불운한 지상의 모든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구원받는다는 느낌과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신의 존재는 영원히 보존될 이상적 질서의 담보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듯이, 이 세상은 사실 언젠가 불타버리거나 얼어붙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세상이 신의 질서의 일부라면, 옛 이상들은 다른 세상에 가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비극은 임시적이고 부분적일 뿐이며, 파멸과 해체는 절대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_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p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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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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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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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 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 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 P20

연옥의 존재는 또한 죽은 자들의 심판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여러 종교에 널리 유포되어 있으나, "이 심판의 양상들은 문명에 따라 매우 달랐다. 연옥의 존재를 상정하는 심판이란 매우 특이한 것으로, 그것은 실상 이중적 심판 즉 죽음의 순간에 첫번째 심판을, 세상의 종말에 두번째 심판을 맞게 된다는신앙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심판의 중간에 다양한 요인들에 따른 형벌의 완화 내지 단축이라는 복잡한 심리과정을 둔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도화된 정의 관념 및 형벌 체계의 투영을 전제로 한다. - P29

연옥은 또한 개인적 책임 및 자유 의지라는 관념 즉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성(性)을 타고나지만 그렇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 책임하에 지은 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 중간적 저승인 연옥은 성인들이나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의 무함과 범죄한 자들의 용서할 수 없는 죄성 사이에 있는 중간적 죄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 P29

미래의 선택된 자들을 위한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천국 쪽에 가까우며, 따라서 위쪽으로 따라 올라간 중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연옥이란 봉건적 사고의 특징인 중심이 치우친 균형 체제, 동시대의 봉신제도나 결혼 제도의 유형에서 보듯 대등한 관계이면서도 봉신은 영주에게 예속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되는 평등 속의 불평등 체제의 일환이다. - P32

논리적 ·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된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 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게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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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의 예수 - 예수의 민중운동, 개정2판
안병무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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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 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20


 안병무(安炳茂, 1922 ~ 1996)의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를 민중(民衆)의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갈릴래아의 예수>안의 예수는 다른 예수 평전에 그려진 나자렛 목수 예수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결코 영광으로 가득한 승리의 왕(王)이 아니다. 예수는 민중 그 자체다.


 우리는 이 두 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 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 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 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3


 저자 안병무는 예수를 바오로(Paul, 5 ~ 64)가 강조한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이라는 관념과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 ~ 1976)이 강조한 케리그마(Kerygma)와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로 바라보길 거부한다. 대신, 민중의 구체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망의 현실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상에서 일별한 예수 연구사에서 주목할 것은, 저들이 그리스도교의 도그마에서 예수를 해방시키려고 한 반면 저들에게는 사건보다 관념이 먼저라는 전제가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도 그리고 기적이야기도 관념의 산물이다. 불트만도 이 계보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다. 그에게는 관념의 자리에 케리그마가 대치된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52


 이것은 하느님이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모세의 소명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민족의 비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응수했던 대답을 모세와 연결시킨다면, 예수는 모세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의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자로서의 소명은 정치·경제적인 맥락(context)에서만 이해될 수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90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저자는 예수운동을 투쟁적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는 갈릴래아의 비옥한 토지를 둘러싼 '부재지주-소작농', '도시-농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로마와 유대협력자-민중'의 격렬한 대립형태 안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서 선 메시아로서 자리매김된다. 마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 ~ 1900)의 <행복한 왕자 The Happy Prince>에서 왕자 동상이 높은 곳에 서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것을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스스로 초라해져 갔듯이, 말씀(word)은 온전하게 인간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하강하고 거기에 머무른다.


 갈릴래아 민중의 처지는 다음과 같은 네 겹의 억압 밑에 있었다. 첫째는 점령세력인 로마제국의 군사적 횡포와 경제적 착취, 둘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폭정, 셋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인들의 차별주의, 특히 성전제도에 의한 경제적 압박, 그리고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의한 토지독점과 그에 따른 노동력 착취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47


 갈릴래아에 세워진 도시들은 애초부터 침략한 외세에 아첨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특히 로마시대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도시들은 노예노동에 의해서 팽배해진 그레꼬 로마적 사회인 데 반하여, 농촌은 고대 이스라엘 당시의 체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이른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이며 저들은 비옥한 토지,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민으로서 착취를 당하고, 그의 앞잡이인 헤로데 왕가에 의해 그리고 더 나아가 침략세력과 야합하여 생산품의 징수권을 가진 종교귀족들에 의해서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는 저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또한 예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4


  아래에 내려온 말씀은 마치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같이 기존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파괴는 '우리 편을 남기고 적을 쳐 없애는' 구약의 실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뒤집어 없애는 파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는 그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그의 적들은 단결했고, 그의 편들은 자신들을 챙기지 않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돌아섰으며 이로 인해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죽음의 순간 예수는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심지어는 신(神)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어린 양(Agnus Dei). 그렇다면, 그의 비참한 죽음은 부활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02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의 부활을 예수의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인식전환으로 해석한다. 철저하게 버림받은 비참함에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그와 일체를 이루는 순간, 버림받은 그와 민중은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발견한다.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패배요 약함이었다. 그러므로 실망하고 체념하여 도망한다. 그러나 그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고난을 보았고,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보는 순간 바로 예수와의 새로운 연대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죽음은 인식을 바꿀 수 있으며 예수는 메시아라는 그리스도론에까지 발전할 수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83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메시아 예수의 모습 대신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민중의 열망을 담은 정신으로서의 예수. 개인적으로는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을 통해 기복 신앙(祈福信仰)을 넘어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초대 교회 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정신이 예수 운동의 대척점에 있던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부분이 다르게 변화되었지만. <갈릴래아의 예수>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부분과 회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짚어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진] 전남 화순 운주사 와불 [출처 : 법보신문]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에는 누워있는 불상, 와불(臥佛)이 있다. 누워있던 불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담긴 운주사 불상. 아마 이 불상을 만들었던 어느 누군가의 마음이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갈릴래아 민중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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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2-08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먹는 일, 나누어 먹는 일을 빼고 생각된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이다. 민중의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왔으면 무엇하며, 온다고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나와같다면 2023-02-08 0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벌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 않을터이니까.

겨울호랑이 2023-02-08 08:02   좋아요 1 | URL
나와같다면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기독교가 보편종교, 세계종교가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을 넘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동감에 바탕을 둔 행위를 강조한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안녕만을 바라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일부의 모습은 분명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생각합니다...
 

헤로데가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로마 정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철저히 반민중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 민중의 뜻을 고려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민의 뿌리가 없는 자들을 그들의 앞잡이로 골랐던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자들의 통치수단은 횡포밖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 P53

이 무렵 맨처음의 복음서 마르코복음이 씌어진다. 마르코복음에는유다전쟁 특히 예루살렘의 운명이 반영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예수와 더불어 몰려다니는 그 민중이 바로 그 시대 이스라엘 민전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유다전쟁이 있기 전에 쓰여진 바울로의 편지들 (50-60년)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 P60

여기에서 엘리야의 기본 자세가 잘 표명되었다. 그는 권력자의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눌린 자의 편에 서서 누르는 자에 대항했던 예언자였다. 엘리야에 대한 그러한 전승들은 이스라엘 민중이 엘리야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지니게 했는지를 잘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 운동을 엘리야와 연결시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많은 뜻을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예수의 변모설화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등장하는데, 그는예언자의 대표로서 나타난다. - P71

이것은 하느님이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모세의 소명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민족의 비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응수했던 대답을 모세와 연결시킨다면, 예수는 모세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의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자로서의 소명은 정치·경제적인 맥락(context)에서만 이해될 수있다. - P90

놀라운 것은 갈릴래아의 농촌과 그 주민들이 너무나도 이스라엘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외래 문화에 물들지 않았다. 그 농촌은 헬레니즘에 포위된 섬 같았다. 해안지대에는 모두 헬레니즘 도시가 서고 안티오쿠스 이래 특히 헤로데 시대에 세워진 도시들은 헬레니즘화되었다. 그러나 농촌은 전혀 그것에 물들지 않았다.  동시에 저들이 갈망하는것은 하느님의 주권만이 확립된 세상이었다. 그것은 젤롯당의 본거지가 갈릴래아였으며, 바로 저들이 그것을 위해 완전히 산화될 때까지 싸운 것을 회상하면 될 것이다.  - P94

묵시문학은 민중의 글이다. ‘에녹서‘, ‘모세의 묵시‘, ‘제4에즈라‘,
‘열두 족장의 유언‘ 등이 그렇다. 그것은 상징언어를 많이 쓰고, 그리고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이것은 바로 박해 중에 쓴 것이고 구전적 비어(語)의 성격을 띠는데, 이것이 민중언어의 특징이다. - P110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12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인들과 나누는 행위가 문제다. 배고픈 자들과의 나눔에서 민중의연대의식을 결속하며 그것을 그 나라 도래의 축제행위로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금식하는 당시의 습성을 거부하면서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마르 2,19/ 병행)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바로 더불어 나누어 먹는 새 시대를 이룰 민중운동의 일환이다. - P123

이런 관심은 역사의 예수를 좀더 가까이 알기 위해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추구와는 길을 달리한다. 현재까지 서구에서 주도된 신학은 예수가 그리스도(예배의 대상)로 된 것에 그 관심을 총집중했다. 그것은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보는 전제와 이와 관련해서 이른바 케리그마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과 함수관계에 있다. 이른바 말씀이나 케리그마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이다. 사실 (사건)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고정화해 버리면 도그마가 되고 만다. - P126

우리는 이 두 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 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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