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신 선생은 고려청자에서 나온 산화철의 함량이 평균 1.8퍼센트로 송나라 청자의 3퍼센트보다 적다는 걸 분석해냈습니다. 그리고 고려청자의 색이 송나라 것보다 더 회색빛이 나는 까닭이 망간(은백색 광택이 나는 중금속 원소)의 함량이 더 높기 때문이란 것도 밝혀냈습니다. 이러한 성분 분석만으로는 결코 고려청자를 재현해내지 못합니다. 도자기는 재료, 유약의 종류, 굽는 온도에 따라 결과물이 크게 달라지거든요.

조선백자는 결코 고려청자보다 못한 도자기가 아닙니다. 사실 백자는 청자만큼이나 만들기가 힘듭니다. 보통 흙에는 산화철이 들어 있어서 불을 만나면 푸르게 변합니다. 이 때문에 백자를 만들려면 산화철이 없는 자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열을 받으면 푸른빛을 내는 요소가 유약 속에도 들어 있기 때문에 유약을 더 정제하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그러니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기술의 우열로 가리기보다 취향의 차이로 봐야 합니다.

목판본은 새길 때 공이 많이 들지만 인쇄 분량이 많을 때는 효율적입니다. 반면 금속활자는 조립과 해체가 쉽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책을 조금씩 찍을 때 목판본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하죠. 중국은 인구가 어마어마한 만큼 책을 값싸게 공급할 때는 목판본 인쇄가 금속활자 인쇄보다 더 유리했겠죠? 그에 비해 고려나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대체로 다품종 소량 인쇄에 적합한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나 조선이 중국에 비해 금속활자 기술 개발에 훨씬 적극적이었던 겁니다.

질긴 한지의 비밀은 찧고 두드리는 과정에 있습니다. 나무의 섬유 조직은 많이 찧고 두드릴수록 세게 뭉치면서 광택이 있고 희고 두꺼운 종이가 되거든요.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이런 전통을 줄곧 유지했습니다.

화차는 놀라운 발명품입니다. 바퀴를 달아 이동성을 높였고, 각도 조절의 폭을 넓혀 훨씬 먼 곳까지 신기전을 쏠 수 있는 장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신기전이나 화차 같은 무기가 19세기 초에나 등장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한 것도 신기전과 화차 덕분이었습니다. 화차 3백 대가 있었기에 3만 명에 달하는 왜군을 불과 2300명의 병사로 무찌를 수 있었던 겁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은 빼어난 아름다움과 과학적 설계를 자랑하는 건축물입니다. 옛 성들이 단순히 적을 막는다는 개념으로 지어진 반면, 화성은 공격과 방어를 위한 각종 설치물이 세심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그런 설치물들이 눈에 띌 겁니다. 대충 지나치지 말고 주의해서 보기 바랍니다

온돌의 효율은 어떻게 높일까요? 온돌의 핵심 기술은 구들장이 오랫동안 식지 않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구들장으로 쓰는 돌이 중요합니다. 운모, 편마암, 화강암 등 열의 보존과 전도가 잘되는 것을 구들장에 쓰는 이유죠. 다음으로, 열기를 오래 붙잡아둬야 합니다. 구들장이 채 달궈지기 전에, 또는 달궈지고 나서도 열기가 금세 빠져나가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개자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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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법은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 쓰던 검역 방식과 크게 달랐습니다. 검역은 돌림병이 도는 곳에 사람과 교통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돌림병이 도는 지역에서 오는 사람과 물건은 빠짐없이 조사해서 40일 동안 격리시킨 다음 별 문제가 없으면 출입을 시켰습니다. 피난이나 검역 모두 돌림병을 막기 위한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피난은 나만 살겠다는 소극적 방법입니다. 검역은 지역 공동체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일이었죠. 또 검역을 하면서 돌림병에 대한 지식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뜻을 모아 계를 만들었습니다. 돈을 내서 약재를 사 오고,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그 약을 쓰는 식으로 운영한 것이죠. 이처럼 계는 비싼 비용을 들여 약국을 차리지 않고도 약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민간에서 약재의 소비가 많아지자 약계는 더욱 발전하여 가게처럼 되었는데 그게 바로 한약방이었습니다. 약계는 1603년에 만들어진 강릉 지역의 약계가 잘 알려져 있고, 이후 24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 의학의 역사에서 최대 사건은 뭘까요? 저는 다시 한 번 서슴지 않고 한의원과 한약방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뿌리내린 것을 꼽겠습니다. 《동의보감》 같은 뛰어난 의서가 있어도 왕족과 양반, 그리고 서울 사람만 혜택을 누린다면, 백성들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겠죠? 17세기 후반부터 이후 2백여 년 동안 ‘한의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지방에도 의원이 생기고 한약방도 생겨났죠. 한의학이 널리 퍼져서 보통 사람들과 지방 사람들도 이용하게 된 겁니다.

만파식적을 형상화했다는 설은 신라 범종, 더 나아가 그것을 계승한 우리나라 종의 특색을 잘 설명해줍니다. 신라 범종이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고유한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범종에 보이는 쌍룡을 한 마리 용(단룡)으로 바꾸고 대나무 모양의 음통을 만드는 기술 전통을 만들어나간 겁니다. 또 단룡과 만파식적의 모양을 갖추면서 좌우로 약간 비대칭이 생기고, 그로 인해 맥놀이 현상이 극대화되었습니다. 음통이 음의 고주파 영역대 소리를 빨리 사라지게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석굴암은 석굴 안에 본존불을 모신,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 되는 유적입니다. 게다가 유일한 인공 석굴로 석굴 안에 반구형으로 된 천장, 다시 말해 돔을 만든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습니다. 여기에 수학적 비밀까지 담겨 있으니 정말 놀라운 유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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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차가 유행하지 않은 까닭이 풍토 때문은 아닐까요? 중국과 일본에는 차가 잘 자라는 습한 기후의 산지가 널려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차가 자라는 지역이 적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찻값이 담뱃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던 겁니다. 우리 농민들은 음식 먹고 텁텁한 걸 숭늉으로 풀었고, 다도茶道를 즐길 만한 계층이 중국과 일본보다 턱없이 적었습니다.

문익점이 목화를 도입한 공은 씨앗 몇 개를 가져온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씨앗을 심어 목화를 얻어낸 농업 기술입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씨앗으로부터 목화를 길러냈고, 또 그걸 죽이지 않고 더 많은 씨앗을 얻어냈습니다. 목화 재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해낸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둘째는 하얀 솜털 같은 열매로부터 실을 얻어내는 기술을 확보한 것입니다. 열매 안에 있는 목화씨를 빼내야 솜으로 쓰는데 그 기술을 알아냈고, 목화 솜뭉치에서 실을 뽑는 특별한 기술도 배웠습니다.

목화는 전국으로 퍼져 재배되었고, 목화로 짠 무명은 삼베를 밀어냈습니다. 무명이 옷감의 질이 좋고, 겨울을 날 솜을 제공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삼베 천을 제작할 때보다 힘이 다섯 배나 덜 들었거든요. 한마디로 경사 난 거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후 조선은 재배 기술이 없는 일본에 무명을 팔아 엄청난 은을 벌어들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전까지 의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의방유취》를 출간하면서 단숨에 의학 강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건 마치 천문학 분야에서 중국의 역법과 이슬람 역법에 통달해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한 포부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도 비슷합니다. 1444년에 《칠정산》 내·외편이 간행되고, 4년 뒤인 1448년에 《의방유취》 초고 편찬이 완료되었으니까요.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은 한 분야 전체를 통째로 이해하고 최고의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나라만의 과학을 이루었다는 데 있습니다. 조선은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중국과 맞먹는 새로운 제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계의학사에서 《동의보감》과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이슬람의 아비센나Avicenna(이븐시나, 980~1037)가 지은 《의학정전》을 들 수 있습니다. 아비센나가 이슬람권이라는 다른 지역에서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와 로마의 갈렌의 의학을 종합한 체계를 세웠듯, 허준의 《동의보감》도 중국과 다른 지역에서 《황제내경》, 《상한론》 등의 전통에서 비롯한 고금의 의학 전통을 멋지게 종합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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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레지스트 위에 투사된 빛은 화학 구조를 변화시켜 포토레지스트와 함께 게르마늄도 씻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아주 작은 사각형 홈이었다. 그 어떤 왁스 덩이로도 만들 수 없었던 아주 작고, 게다가 정확한 형태의 사각형이 만들어졌다.

집적회로는 전자 부품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연결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반도체는 여러 나라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소련마저 실리콘밸리의 제품을 베끼면서 스스로 그 네트워크의 일부로 편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일본은 자국의 비즈니스 엘리트와 미국 정부의 협조를 통해 의도적으로 미국 반도체 산업에 통합되었다.

초소형 전자공학의 핵심은 복잡성을 줄이는 데 있다. 납땜 된 부위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그만큼 장비의 신뢰도는 위험에 노출된다. 전자 장치가 단순할수록 시스템은 더 신뢰도가 높고 전력 효율도 높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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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학자들도 고추를 넣는 것을 우리나라 김치의 가장 큰 특성으로 꼽습니다. 고추는 비타민 C가 사과의 50배, 귤의 2배에 이를 정도로 풍부합니다.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과 비타민 E는 비타민 C를 싱싱하게 유지해줍니다. 우리 조상들은 겨우내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C를 김치를 통해 섭취했던 겁니다.

밭에서 인삼을 재배하게 되면서 인삼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졌습니다. 인삼을 재배함으로써 수확량을 조절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삼이 흔하지 않은 건, 아무 데서나 자라지 않고, 담배나 감자처럼 1년짜리 작물이 아니라 최소한 4년에서 6년은 길러야 하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삼 농사는 개성 사람들이 적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사해서 번 돈을 인삼에 투자했고 재배 기술을 발달시켜 인삼 농사를 성공시켰습니다. 고려가 망한 후 개성 사람들은 벼슬을 도모하지 않고 거의 다 상인의 길로 나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타고난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인삼은 개성상인이 주도한 조선 최대의 ‘벤처 산업’이었습니다. 인삼의 역사를 연구한 이철성 선생은 인삼을 "조선 경제를 유지해준 조선판 반도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인삼은 세계 전체 인삼 수요의 수십 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 품질이 가장 좋은 고려 인삼이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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