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머에 따르면 세이건의 주장은 반증할 수 없는 대상을 지식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에 ‘반증 가능성’이 자연의 경험적 대상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증 가능성은 모순이 있거나 내적 일관성이 부족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인가? 셔머는 감응적 존재sentient being에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악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악이란 말은 더 깊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을 이야기할 수 있다. 전자는 자연재해나 질병 같은 것이며, 후자는 누군가의 나쁜 행동이 초래한 고통 또는 피해와 관련된다. 셔머와 나는 토네이도 같은 대상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재해에 따른 파괴와 죽음은 악이다(비록 셔머는 도덕의 문제를 위하여 ‘악’이라는 용어를 아껴두었지만 말이다.).
내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는 창조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도덕성은 창조의 속성이므로, 신은 도덕적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즉, 그는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신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그가 도덕적 유형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나는 신이 선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의 선함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이 특정한 행동의 결과라는 점을 거부한다.
물리학자에게 우주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여기서 철학적 논쟁을 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관측된다면 존재하는 것이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냥 자명하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철학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내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했다. 즉, 시공간은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좌표계에 상관없이 같다면(맥스웰 방정식이 옳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이 탄생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한 정지 좌표계에서 측정된 시간과 길이가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측정된 시간과 길이와 같지 않다. 이래야 전자기학의 법칙이 좌표계와 상관없이 성립한다
시공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리학은 답할 수 없다. 물리학이 답할 수 있는 것은 측정된 시간과 측정된 거리뿐이고,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시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거리가 변한다는 말 대신 시공간이 변형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좌표계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변하는 모든 좌표계를 대상으로 한다. 이런 좌표계를 가속 좌표계accelerating coordinate system라고 한다.
지능의 잃어버린 유전율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효과가 작거나 빈도가 낮은 지능과 연관된 변이들을 찾아낼 수 있는 통계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은 지능을 계측한 수십 만명의 유전체 정보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
지능에 대한 유전학의 새로운 발견은 우리에게 불편하면서도 복잡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지능은 ‘어느 정도’ 유전이 된다. 하지만 지능에 연관된 변이는 매우 많으며 각각의 효과는 대부분 아주 작다. 즉, 물려 받으면 무조건 높은 지능을 부여받는 그런 ‘천재 유전 변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선 지능의 유전율은 100%가 아니라 절반 정도이다. 즉,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더 중요한 점은 유전율과 유전 변이의 효과 또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현재 아는 생명체 탄생의 핵심 조건은 액체 상태인 물의 존재 여부다. 그 결과 물이 있는 행성이 얼마나 있느냐를 가늠하는 것이 n e 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n e 에서 말하는 별, 행성, 생명체 등의 의미가 계속 변하고 있다.
서양 학문의 전통에서 감각 경험은 이성에 비해 상당히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는데, 감각 중에서도 미각은 가장 원초적이고 저속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일반 원리를 찾기에 맛은 너무나도 주관적이어서 도저히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미각은 과학의 영역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지난 50년 동안 액상 과당high-fructose corn syrup은 전례 없을 정도로 음식에 스며들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옥수수 재배가 크게 늘어나는 농업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시기부터 미국인의 비만 및 대사 질환도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역학적 변화에는 액상 과당의 소비량 증가가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52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 몸이 다량의 과당에 노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과당을 처리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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