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 존 설은 약속하는 행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행해야 하는 ‘당위’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어찌 됐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흄이 실제로 ‘존재’가 ‘당위’로 바뀔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떤 근거도 없이 이런 식의 추론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란 단지 진화적 적응일 뿐입니다. 자연현상에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 과학의 틀에서 도덕적 가치는 실재하는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들은 진화적 적응의 산물로 다른 인간의 특성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도덕이 생존에 이점을 제공하는 이유는 도덕을 통해 집단 안에서 평화와 협력이 이루어지면 개인들은 보호와 도움을 받아 삶을 유지할 수 있고, 그 결과 자신의 유전자를 미래 세대에 전달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도덕 감정이란 개인이 자신의 행복이나 이익이 걸려 있을 때,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공동체 규범의 인지적 표상cognitive representation과 연계된 감정입니다.

별의 수명은 태어날 때 별의 질량에 의해서 결정된다. 질량이 큰 별은 수명이 짧다. 태양보다 몇 배에서 몇십 배 큰 별은 고작 몇백만 년에서 몇천만 년 정도의 일생을 살고 죽는다. 길어야 수명이 1억 년 정도다.

한편 갈색왜성 같은 작고 어두운 별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거듭된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R*의 분자를 차지할 별의 수는 작고 어두운 별에 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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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인간을 비롯한 동물이 살면서 반복적으로 겪는 신체적, 생물학적, 사회적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적응을 선택한다. 인지 모듈cognitive module은 오랫동안 반복되는 문제에 대한 자극을 감지하고 그것들을 적절한 반응과 연결 짓도록 진화했다. 이런 적응적인 자극·반응 결합은 먹이 보상이 종소리처럼 관련 없는 자극과 짝지어지는 것과 같은 중립적 결합보다 빠르게 형성되고 제거하기 어렵다.

넓은 의미에서 유전자는 "무생물의 물질을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조직하기 위해" 환경과 정보를 교환한다. 이는 발생에서 종결에 이르는 모든 유기체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유전자와 환경의 교환은 생명의 본질이다.
상호작용은 통계적 용어로, 유전자들이 다른 환경에서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갖는지를 기술한다.

자폐증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결과를 보면,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표정 인식능력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진화 과정에서 선택된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측면으로 유전적이며, 신경생리학적 토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경험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현재 가설은 생물학적 비정상성이 초기 사회적 발달을 방해하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얼굴을 인식하고 반응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법에 대한 학습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자폐증은 치료할 수 없지만 개선할 수는 있다. 바로 여기서 학습심리학이 큰 역할을 한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계산주의 이론과 행동생태학이 결합하여 생겨난 학문으로서, 인간의 마음이 여러 종류의 수많은 적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유형의 ‘적응 문제’에 직면했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게끔 설계된 마음을 가진 개체만이 진화적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적응 문제(예를 들어, 적절한 음식 찾기, 짝을 찾거나 지키기, 상대방의 마음 읽기, 동맹 만들기 등)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대목이다(Barkow et al., 1992; Pinker, 1997; Buss, 2015).

여기서 ‘빈 서판the blank slate’의 의미는 마음은 타고난 특성이 없다는 뜻이고, ‘고상한 야만인’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타락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기계 속의 유령’은 우리 각자는 생물학적 제약 없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닌다는 뜻이다.

인간 본성 개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자인 핑커는 인간의 언어, 추론, 수리, 짝짓기 능력 등은 수렵채집기에 우리를 옥죄었던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계된 적응들이고, 종교, 예술, 창의성, 유머 등은 이런 적응들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찬란한 현대 문명 속에 있지만, 사실은 수렵채집기에 잘 적응된 몸과 마음을 장착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런 견해를 바탕으로 진화심리학적 인간관이 기존의 인간 본성론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이야기한다.

고통 감수 능력과 언어 능력마저도 인간 본성의 구성요소가 될 수 없다면 대체 어떤 능력(속성)들이 본성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다다르면 우리는 두 갈래의 갈림길을 만난다. 하나는 기존의 인간 본성 개념들이 지나치게 엄격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도킨스는 니치 구성론자들의 반론에 대해 그들이 니치 구성construction과 니치 변화change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니치 변화’란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개입으로 인해 생긴 부산물인 반면에, ‘니치 구성’은 부산물이 아니라 적응이다. 도킨스는 니치 구성을 환경에 대한 개체의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고 표현한다(Dawkins, 2004).

하지만 진화론은 그러한 류의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서로 다른 조건들이 만족될 때이다(Darwin, 1859; Lewontin, 1970).
어떤 개체군 내의 유기체들은 다양하다(변이 조건). 어떤 변이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 부과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다른 개체들보다 더 적합할 것이다(차별적 적합도 조건). 그러면, 이 변이들은 다른 변이들에 비해 번식기까지 더 많이 생존하거나 더 많은 자손을 남길 것이다. 만일 생존과 번식에 차이를 낳는 그런 특성들이 부분적으로 대물림 가능하면(대물림 조건), 다음 세대의 개체군에서는 그런 이로운 형질들이 더 많아질 것이고 결국 개체군 내의 형질들의 분포는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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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의 정리, 특히 무한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다루는 정리는 수학적 결과지만, 특정 물리계에서 이러한 정리를 만족하는 표본공간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경험적 주장이다. 확률에 근거하고 있는 예측에 대한 확신은 관찰과 검증을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이 예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률론적 결과에 근거해서 실제 세계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팽창의 예측이든,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이든 이해하기 힘든 점은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우주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을 잉태한 우리 우주의 전체 역사가 무한한 수의 다른 우주에서 동일하게 펼쳐져 있다는 주장이다. 뒷받침할 실험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무한에 대한 확률 논증에 근거한 이러한 주장은 팽창 이론의 결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테그마크의 주장은 기껏해야 도박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존재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다. 우울증, 동성애, 지능, 언어, 난혼, 난독증, 거식증 등과 관련된 유전의 역할에 관한 연구 소식을 접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인간의 두뇌 피질이 가진 무한에 가까운 유연성 때문에 학습은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우리가 학습하는 행동 중에는 말하기, 읽기, 쓰기, 계산, 논리적 생각, 사회적 상호작용, 운동, 악기 다루기 등이 있다. 심지어 서기, 걷기, 손 내밀기와 움켜잡기, 지각 능력과 같이 표면상으로는 닫힌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도 상당한 학습의 요소가 있다.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학습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이론가들에게 학습이란 구체적이지 않고 수동적인 과정으로, 그들이 인간 행동의 핵심이라 여기는 유전자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뿐인 골칫거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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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漢 왕조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했던 낙랑군을 근대적 시각에 입각해 식민지로 규정하고, 이를 타율성론他律性論의 정립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였던 것은 바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다. 2,000여 년 전 중국왕조의 일시적인 영역 확장이 우리 ‘민족’의 기원을 부정하고 한국사의 시초를 식민지로 만든다는 발상은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유사역사학자들의 행태는 학문과 교육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전체주의로 몰아갈 위험이 크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지성’을 유지하고 국가권력과 쇼비니스트chauvinist들의 결탁을 통한 역사왜곡 사태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민들 각자의 보다 성숙한 역사인식과 경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탈실증주의는 과학이 지식을 얻는 특권적 방식이 아니며, 그저 서구 문화의 창조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해체주의를 비롯해 수많은 ‘주의’가 이 시기 동안 발생하게 되었다.

종교를 이유로 과학에 반대하는 창조론자들을 강력히 비난한 굴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이유로 과학에 반대했다. 덧붙이자면 굴드가 비판한 창조론자들은 여전히 과학계에서 진화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라며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굴드의 공격을 언급하곤 한다.

정치적 의제를 알리는 데 관심이 있는 급진적 좌파들이 학계로 진출하면서 학문의 가치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급진적 좌파들이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학자들하고만 연대하며 예술과 인문학이 늪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후 급진적 좌파는 사회과학 분야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과학적 방법론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 분야를 공략했다. 철학, 정치학, 사회학, 심지어 심리학과 인류학까지 전쟁터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관성을 강조한 결과, 급진적 좌파들에 의해 기이한 주장들이 제안되었다. 그 예로 서구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훔쳐온 것이라는 아프리카 중심주의,39 수많은 반증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생태학적으로 조화롭고, 이웃과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는 주장,40 인도-유럽 문명 이전에 여성들이 이끄는 평화로운 페미니스트 신이교neopagan 문명이 존재했다는 주장41을 들 수 있다.

쿤은 패러다임이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패러다임을 대체한다고 믿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의 이론이 틀렸다고 인정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쿤이 하버드대학교에서 뉴턴의 운동법칙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놀라운 주장이다.2 사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지 대체한 것이 아니다.

귀납-연역적 추론과 반대로, 가설-연역적 추론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세운다. 우리는 가설과 초기 조건을 바탕으로 전제를 세우고 이로부터 특정한 의미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방법으로 연역된 내용에는 새로운 예측도 있을 수 있다. 창의적 과학에서 가설-연역적 추론은 상상력과 비판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탐구의 대화다. 가설을 수립하는 데 상상력이 동원된다 해서 이 과정이 비논리적illogical인 것은 아니다. 대신 ‘논리적 과정이 아닌 방식non-logical’으로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가설이 수립되고 나면 이 가설은 비판의 칼날 아래 놓인다.9

아직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지만 DNA 내에 단백질 정보를 담지 못한 부분에 그 열쇠가 있는 것 같다. DNA의 거의 90% 가까이는 단백질 만드는 것과 상관없는 염기서열이다. 중심원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부분은 있으나 마나 한 부분이다. 아마도 교차돌연변이에나 쓸모 있는 쓰레기장 같은 거다. 그래서 정크 DNAjunk DNA라 부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부분이 DNA에서 발현의 결정에 관여한다.

생명은 자신을 복제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DNA에 저장해두고 이것을 복제한다. 복제의 전 과정은 물리적이다. DNA로부터 자신을 만드는 과정 또한 물리적이다. 과정에 참여하는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열운동을 할 뿐이다. 모든 과정은 양자역학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생명이 왜 자신을 복제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생명은 왜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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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어떤 동물도 현존하는 다른 동물에서 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대신 현존 동물들은 지질학적 역사의 (원리적으로는 식별 가능한) 특정 순간에 살았던 공통조상을 갖는다.

추세선이 보여주는 경향은 명확하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종교는 쇠퇴하고 비종교인의 수가 늘고 있다. 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1928~1945년 출생)는 11퍼센트,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 출생)는 17퍼센트, X 세대(1965~1980년 출생)는 23퍼센트, 전기 밀레니얼 세대(1981~1989년 출생)는 34퍼센트, 후기 밀레니얼 세대(1990~1996년 출생)는 36퍼센트로 감소 폭은 깊고도 넓다.

하느님이 글을 통해 인간에게 직접 뜻을 전했다는 믿음이 약해지는 현상은 개인과 사회의 책임을 중시하게 된 분위기를 반영하는 또 하나의 지표다. 더 나은 세상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도덕을 실천하는 일은 기도와 간청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는 하늘의 천국이 아닌 지구 위에서 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기독교에 열정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종교가 허황되다는 확신을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종교가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교에 무관심해졌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일컫는 단어가 바로 ‘무관심apathy’과 ‘유신론theism’을 합성한 ‘유신론에 대한 무관심apatheism’이다.

장기적 추세는 역시 종교와 멀어지고 세속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지금껏 삶의 의미를 제시하던 전통적인 토대가 완전히 사라지면, 우리는 앞으로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한동안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은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은 닫힌 논리 구조 속에 있다. ‘우리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오래되어야 하고, 공간적으로 거대해야 한다. 세계인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위대한 역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역사는 식민사학이요, 매국사학이 된다.’ 이렇게 유사역사학은 건조하게 사실 관계를 따져야 할 역사 연구에 이데올로기적 당위와 윤리성을 뿌려 섞어버린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불가능하다.
학문의 목적은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지, 쇼비니즘적 욕망과 환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강한 충성심이 담보되어야 하는데, 이 강한 충성심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위대한 국가가 있어야 그에 대한 강한 충성심이 따라오는 것이다. 유사역사를 만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교육에 있다. 세계사적 흐름에 따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가족사를 보듯이 한국사를 살피면서 아프게 느껴지는 역사적 순간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축적하게 된다.

뜻밖에도 이렇게 한국사를 위조하고 비하하려는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에 그 뿌리가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식민지 조선을 열등하고 무능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우승열패의 세계에서 조선은 열등했기 때문에 우등한 일제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해방 후에도 조선은 열등한 나라라는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열등하지 않았다면 식민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명쾌한 논리가 있었다. 조선은 무려 500년을 존속한 나라임에도 말기의 혼란과 무능을 전 조선에 뒤집어 씌워도 무방했다. 이런 시각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60~70년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였다

박정희에게 한국사는 "남에게 밀리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온 역사"이고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옳은 것"이었다. 박정희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었다. 타율성론, 당파론, 만선사관(지리적 결정론)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외피는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역사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고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과거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게끔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유사역사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변화라고 빈정거리거나 무시한다.

역사가들은 이런 복잡성을 이해하고 있다. 그 덕분에 역사가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하지 못하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애매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반면에 유사역사가들은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단 한 가지 증거만 가져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진화의 증거가 되는 화석 하나만 가져와라."라고 말하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증거 하나만 대보라."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런 방법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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