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로 보인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no thing 또는 하나도 없는 것not a thing이니까. 하지만 그 ‘것thing’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최대한 포괄적인 의미로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무에 대한 몇 가지 다른 개념들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 혹은 다른 수준의 무를 구성하는 ‘것’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모순은 아니다. 이런 무를 구성하는 것들을 구분해 분석하는 것은 인식이 가능하고 실제로 존재했을지 모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무를 나누는 분류체계를 가능하게 해 무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분류체계는 모든 구체적인 대상의 부재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빼기 논증subtraction argument’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빼기 논증은 구체적 대상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일련의 세계를 상상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마지막 대상까지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5
이런 식으로 사고를 발전시켜보니 무에는 가장 단순한 무(무 1번)에서 가장 절대적인 무(무 9번)까지 아홉 단계의 무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우주 전체를 모형화하기 위해 현재 5가지의 끈 이론 모델들을 통합하고 11차원을 포함하는 끈 이론의 확장판인 ‘M이론’을 선택했다. 그들은 "M이론이 가장 보편적인 초대칭 중력이론이다."라면서, "이러한 이유로 우주에 대한 완전한 이론으로 M이론은 유일한 후보다.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우주가 유한하다면, M이론은 그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한 모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 위의 질문에 대한 유신론자의 답변은 신이 우주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창세기에 기술된 바와 같이 단 한 번의 창조를 통하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무에서ex nihilo) 우주가 생겨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주 ‘이전에’ 존재하던 창조자가 ‘이후에’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에는 시간적인 순서 개념이 함축되어있다. 신의 창조를 통해서든 빅뱅Big Bang 때문이든 간에 유대-기독교 전통(유대-기독교 시대보다 앞선 바빌로니아의 우주관도 마찬가지)과 과학적 세계관 모두에서 시간은 우주가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신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존재했어야 한다.

왜 아무것도 없는 대신에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무nothing’가 자연스러운 상태고 ‘유something’는 무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유’가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무’가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일 수도 있다.

점성술에 대한 믿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들을 중요도 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낮은 소득 - 젊은 나이 - 낮은 예배 참석률 - 기혼자 - 성경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음 - 백인 이외의 인종 - 여성. 즉 점성술에 대한 믿음에서 성별은 기여도가 가장 떨어지는 요인이다

이 글에서는 성차가 사람들의 믿음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적은지를 살펴본다. 그러면서 초자연적 현상을 믿는 사람들을 둘러싼 몇 가지 일반적이고 때로는 불편한 속설을 분석한다. 다음 주제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볼 예정이다. (1) 모든 인구 집단에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점, (2) 데이터와 관련된 문제들, (3) 인구통계학적 요인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 그리고 (4) 성차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두 가지 이론의 부적절성. 이 글의 결론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남성과 여성이 갖는 믿음의 차이가 아주 크지 않으며 필연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입면 악몽의 공포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REM 생리학과 영적인 존재에 관한 문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믿음, 수면마비의 조건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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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우리 필요에 맞게 사용하고 환상적인 정밀도로 그 각각을 측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이라는 물리량을 그 자체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간과 시간은 실재의 근본적인 배경을 형성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순환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개념들은 공간과 시간을 기준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공간과 시간은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최근 물리학에서 일반상대론과 양자역학을 통일하려는 시도(끈 이론, 루프 양자 중력, 다차원 브레인branes, 양자화된 시공간)는 결국 특이점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리는 특이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무를 만드는 것은 사실상 (필자는 결코 절대라고 말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 앞의 주장은 창조자의 존재를 분명하게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로부터 우주의 창조라는 유신론적 개념이 옹호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나다. 현대 물리학은 이 질문을 뒤집는다. 아마도 이런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우주에서 관찰되는 모든 물리적 과정은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물질과 에너지의 재배열이나 전환이다. 반면 우주의 창조는 지금까지 연구된 물리적 과정과는 다르며, 따라서 그것이 인과적 설명의 대상이라고 믿을 어떤 근거도 없다.

우주론적 논증에 따라 유신론적 신을 도입하는 일은 단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합리주의자는 유신론자의 ‘신’을 선험적 의도나 인격이 아닌 ‘물리학의 원리’로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크레이그의 논증은 우주의 창조 과정에 신이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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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에 관한 보고는 외계 우주선이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초해서 평가해야 한다. 이는 편협하게 닫힌 마음이 아니라 시간, 항성 간 거리 그리고 가용한 에너지가 항성 간 우주여행에 부과하는 제한조건의 현실성을 직시하는 것이다.

물리학은 속도, 가속도, 힘, 질량, 시간과 같이 기본적으로 관측 가능한 양들에서 유도된다. 이들은 일work의 정의로 결합되고 거기에서 운동에너지 및 위치에너지라는 용어가 나온다. 물리학자는 총에너지 방정식을 세움으로써 물리계를 기술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서 나온 빛이 결코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것을 ‘과거의 지평선past horiz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멀리 떨어진 물체의 한계선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나온 빛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계선도 존재한다. 이것을 ‘미래의 지평선future horizon’이라고 한다. 과거의 지평선과 미래의 지평선 사이에 갇혀 있는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주의 한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주에는 우리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아주 먼 곳에서 우리 지구 대기의 스펙트럼을 측정해보면 아마도 화학적 비평형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지구 대기에는 산소와 오존이 메탄과 함께 존재하며, 수증기가 이 혼합물에 윤활 작용을 해준다. 죽은 행성에서는 분자 상태의 산소와 완전히 환원된 탄소(메탄처럼)가 공존할 가능성이 낮다. 이것은 생명의 존재를 말해주는 생명지표다. 생명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과정인 호흡과 생장을 위한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이런 성분들을 대기 중에 고농도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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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뭐가 되었든 청년 튜링이 정의한 네 가지 부품만으로 만든 것이다. 미리 정해진 부품들이다. 따라서 기계를 글로 표현할 때, 정해진 형식으로 제한된 단어만 사용해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계를 입력으로 받아서 그 기계가 하는 일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기계. 이런 특이한 기계를 그래서 청년 튜링은 ‘보편만능의 기계universal machine’라고 이름 붙인다. 임의의 기계를 입력으로 받아서 그 기계가 할 일을 그대로 해주는 기계기 때문이다.
바로 이 보편만능의 기계가 컴퓨터의 원천 설계도다. 기계(소프트웨어)를 글로 표현해서 넣어주면 그 기계가 하는 일을 따라 해 주는 기계(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넣어주면 그 소프트웨어대로 일을 하는 도구. 바로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라고 부르는 도구다.

따라서 비록 자유론적 자유의지(비물질적이고 의식을 갖춘 통제자에게 부여되는 자유의지론의 자유)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결정이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외부의 힘에 의하여 통제되지 않고 정상적인 의사결정 능력(정신질환이나 뇌질환이 없는)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결정’이다.

사회가 형법 체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을 재조명하고 우리에게 자유론적 자유의지가 없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밝힌 새로운 과학적 결론에 기초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기초해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 응보주의 형벌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범죄 행동에 대한 기존 형벌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강화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게임이론(사기꾼과 무임승차자의 처벌이 부정행위와 무임승차를 줄인다)적 분석에 의거한 결과다.

보어의 설명은 다소 철학적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배타적인 특성이 상보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은 상보적이다. 전자는 입자이며 파동이다. 하지만 실험을 하면 이 둘 중에 하나의 성질만 확인할 수 있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 되는 실험은 절대 할 수 없다. 입자에 대한 실험을 하면 입자를 보게 되고, 파동에 대한 질문을 하면 파동을 보게 된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무엇을 물어보느냐가 답을 결정한다는 거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측정은 그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대상을 교란한다. 측정을 통해 얻어낸 결과는 전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질이 아니다. 그 결과는 측정 중 교란을 통해 얻은 불확실성을 반드시 포함한다. 전자가 원래 가진 성질을 절대 알 수 없다면 원래의 성질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걸까? 블랙홀 내부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SM: Flying Spaghetti Monster’i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걸까? 누구도 블랙홀 안을 볼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전자는 실재가 아닌 거다. 훗날 보어는 이런 말을 했다.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물리학의 임무가 아니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로스웰 음모론의 진짜 핵심을 종종 잊어버리거나 간과한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로스웰에서 일어난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도. 이 사건은 30년간 UFO 신봉자들의 연구 대상에 끼지도 못했고 SF 소설이나 타블로이드 신문 오락면의 소재로도 환영받지 못했다. UFO 관련 문헌의 각주에라도 소개되면 다행이었다. 교묘하게 은폐되어서가 아니라 형편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웰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빈틈하게 조사됐으며, UFO 주장의 실체를 가장 철저히 밝힌 사건이다. UFO 연구자들이 그 사건의 허구성을 인정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외계 생명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은 외계인들이 어디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외계인이 정말 어딘가에 있다면 지구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우주공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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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에 집착하는 것은 개인의 삶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우리 자신보다 큰 존재의 일부가 되는 셈이니까. 그것은 영원한 삶과 같다. 그리고 옛날로 돌아가 전통을 되살리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일 수 있다.

힘든 시기에는 에덴동산 같은 낙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편안하고 안전했던 어머니의 자궁으로. 모든 것이 순수하고 단순했던 시절로. 어린 시절로. 그때는 지금보다 좋았으니까. 우리에게는 자취를 더듬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존재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진심으로 ‘리셋 버튼’을 원한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종교가 자연적 재해를 종말의 전조로 해석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근, 지진, 병충해, 생물다양성의 상실, 폭염, 산사태, 산성비 같은 재해는 일부 종교에서는 종말의 조짐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전 세계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충분한 기후변화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신념을 강화시킬 수 있다.

요점은 우리가 인류의 멸망 가능성이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인과 종말론자들은 새로운 구원이 도래하길 기다릴 뿐 멸망의 가능성은 배제한다. 인류에게 멸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GNR 기술을 특별히 우려스럽게 만드는 또 다른 특성은 이런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GNR 기술들은 미래의 인간들로 하여금 점점 더 심원한 방법으로 물질계를 조작하고 바꿀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예컨대 합성생물학 분야에서는 병원성을 가질 수도 있는 전적으로 새로운 미생물의 설계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종말론적 테러가 21세기 말까지 인류문명에 가장 심각한 위협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강력한 역사적, 인구통계학적, 기술적 증거가 있음을 밝힐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이유들 때문에 이는 실제 현존하는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인류의 멸망이나 미래 세대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믿음에 기반을 둔 종교적 사고방식의 위험성과 그것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대재앙의 가능성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수준까지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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