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히 많은 다중우주도 이와 비슷하다. 무한히 많은 우주에 당신과 꼭 닮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단지 당신보다 머리칼이 한 가닥 많거나, 키가 0.5mm 크거나, 혹은 다른 직업(그들의 환경과 성장 과정이 당신과 다르기 때문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갈 수 있는 당신의 분신은 어느 우주에도 없을 것이다.
인플레이션 팽창은 빛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간의 팽창은 물체가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거나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광속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들은 중간영역이 팽창함에 따라 꾸준히 멀어지고 있으며, 중간영역의 부피가 클수록 멀어지는 속도가 증가하여 빛보다 빠르게 멀어질 수도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과학문명을 갖고 있다 해도, 이런 식으로 분리된 우주를 연결할 방법은 없다. 즉, 인플레이션 다중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다른 우주를 방문하거나 통신을 교환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주가 여러 개라는 아이디어는 인플레이션 이론의 전유물이 아니다. 양자역학의 가장 오래된 역설 중 하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공존하다가 관측이 실행되는 순간 각자의 세계로 갈라져 나간다는 평행우주의 개념을 낳았고, 20세기 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끈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이 4차원이 아닌 10차원(또는 11차원)이며, 지극히 작은 영역에 여분차원(6, 또는 7차원)의 우주가 숨어 있다. 또한 우주 전체를 3차원의 막(3-브레인, 3-brane)으로 간주한 브레인세계 가설에 의하면 고차원 우주에는 동일한 브레인세계가 여러 개 존재할 수 있으며, 인플레이션 이론과 끈 이론을 결합하면 끈 이론의 여분차원들이 다양한 거품 우주를 양산한다. 이처럼 현대물리학과 우주론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다중우주가 자연스럽게 도입된다.
사실상 모든 종교는 과거의 유한한 어느 시점에 신이 우리 우주를 창조하였고, 그 중심에 인간을 두었다고 가르친다. 다중우주는 이런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데는 오컴의 면도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이란 몇 가지 가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가장 간단한 가설의 손을 들어주는 원리다.
신앙주의를 위한 변론 중 최고의 고전은 윌리엄 제임스의 《믿음에 대한 의지The Willto Believe》이다. 제임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만약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가지려는 강한 감정적 근거가 있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과학이나 논리적인 근거에 크게 반하지 않고 만족감을 충분히 제공한다면 이를 믿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이 맥주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와 같은 종류의 주제로, 논쟁할 수 없는 경우이므로 무신론자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내게는 전적으로 감정적인 문제다."
하지만 나는 절대선인 신을 믿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신은 전지전능하며 절대선인 것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 절대선이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신은 절대선일 수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의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쁜 일, 최악의 일도 신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신론자들이 여기서 중요한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신을 강력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 상상하고 있다. 즉 과학과 자연법칙에 지배되며,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논리, 비모순율lawofnon-contradiction등에 종속되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합리적인 신의 개념이 아니다. 초월적인 존재를 사실로 가정한다면 초월적 존재에 조금 못 미치는 존재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럴 경우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면서 신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시간과 공간, 자연, 논리를 초월하는 신의 개념이 더 합당 하다고 생각한다. 무신론자는 내가 존재의 제약에서 신을 제외시켰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를 창조했다면 신은 존재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논리다.
순수한 회의주의에는 더 심각한 결점이 하나 있다. 극단적으로 갈 경우, 이 입장은 그 자체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이런 예문이 나와 있다. "모든 회의주의에는 긍정적인 태도가 깃들어 있다. 회의주의적 논변에 인류의 모든 지식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전적인 확신 같은 것 말이다." 회의주의 그 자체는 지식을 긍정하고 있다. 따라서 회의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면 회의주의 자체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제 흄에 대한 마지막 비판을 보자. 이것은 설명은 간결할수록 더 타당하다는 ‘오컴의 면도칼’을 오용한 경우이다. 자연법칙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가장 간결한 설명은 ‘신이 하셨다’는 설명이라고 신자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간결하다기보다는 순진한 생각이다. 인간사에 흥미를 보이는 전능한 초자연적 실체에 대한 믿음을 간결하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임상적 사망이라는 용어는 과히 적절한 명칭은 아니다. 심장 박동과 호흡의 정지를 의미하는 임상적 사망은 그냥 ‘심장 박동 및 호흡 정지’로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심장 박동 정지 후 임상적으로 ‘사망한’ 환자도 15~20초 정도 더 의식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임상적 사망으로 오진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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