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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가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광욕 같은 건 좀더 느긋한 기분으로 하면 좋으련만 이 사람들(대개 북유럽에서 일부러 그리스의 햇살을 찾아온 사람들로 추측된다)은 햇빛에 관해서는 매우 진지하다. 마치 태양 전지식 전기면도기가 한곳에 모여 충전을 겸한 신앙 고백 집회라도 열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해변에서 수영복의 윗부분을 벗고 유방을 홀딱-또는 날름이랄까 낼름, 어쨌든 이 행위에 관해서는 나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드러내놓고 있어도 관광객들끼리는 서로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지 않는다.

내가 결혼생활에서 배운 인생의 비결은 이런 것이다. 아직 모르는 분은 잘 기억해 두기 바란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화내고 싶을 때 제대로 화를 내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된다.

그 토요일 아침, 환전 때문에 일어난 우리의 말다툼도(사실 말다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ㅐ턴대로 진행되었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차이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거기에는 이미 몇 천 대의 불도저를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숙명적인 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서 그리스 비극의 합창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노래를 부르고, 아내 뒤의 합창대는 '아니오, 숙명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오'라고 노래 부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내 합창대가 아내의 합창대에 비해서 얼마쯤 소리도 작고 열의도 부족하다.

"저 말이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먹고 떠들고 여자 꼬시는 일을 제외하면 열심히 하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어떤 몰타 사람이 가르쳐주었다. "몰타를 폭격했을 때도 고도를 낮추면 고사포에 맞을까봐 두려워서, 아주 높은 곳에서 폭탄을 우수수 떨어뜨리고는 그냥 돌아갔어요."

낮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대담하게 나라의 구조를 바꾸는 데 성공한 유일한 정치가였어." 우비 씨는 말한다. "그는 국민들이 찍소리 못하게 만들었지. 그 정도로 강하게 나오지 않으면 이탈리아 사람을 상대로 정치하기 힘들어. 무솔리니는 마피아까지 꼼짝 못하게 했지. 다만 그의 유일한 실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전쟁 능력을 과대평가한 점이야. 이탈리아 사람에게 전쟁을 시켰다가는 끝장이라는 걸 몰랐거든."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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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이탈리아 여행기 <먼 북소리>가 다시 나왔다. 예전에 나왔던 것은 김난주 씨가 번역한 중앙 M&B판. 이번에 나온 판은 윤성원 씨가 옮겼고, 하루키의 대부분의 책이 나왔던 문학사상사. 예전 책디자인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문학사상사의 북디자인 감각은 참 클래식하다.(뉘앙스는 알아서 판단할 것.) 판형은 <해변의 카프카>의 판형과 같고, 사진은 중앙M&B에 실린 것과 동일하다. 다만, 중앙M&B의 것이 판형이 커서 사진도 크다.

번역도 대부분 동일하다.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다만, 지명과 인명이 약간 수정되었다. 김난주 씨는 일본어식으로 표기된 외국어를 그대로 번역했고, 윤성원 씨는 방겔리스를 '반젤리스'라고 고친 것처럼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려 한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식 지명이 눈에 띈다.

윤성원 씨는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핀볼>, <태엽감는 새> 등을 번역했고, 김난주 씨도 하루키의 대표작들을 대부분 번역했지만, 역시 번역의 맛은 김난주 씨가 더 있다. 윤성원 씨와 김난주 씨 번역의 차이는 아내와 마누라의 차이다. 윤성원 씨는 꼬박꼬박 아내로 번역하고, 김난주 씨는 문맥에 따라 재치있게 '아내'와 '마누라'를 번갈아 쓰고 있다.

예전에, 김난주 씨가 번역한 하루키 수필 3부작을 읽었을 때 느꼈던 것이지만, 다른 것은 몰랃 김난주 씨가 번역한 하루키를 읽노라면 그의 유머감각을 최대한 우리말로 바꿔서 살려놓는 듯한 느낌을 든다. 거기에 비해 윤성원 씨의 번역은 너무 정중하다고 할까?

게다가, 의도적으로 '부사어'를 빼먹은 구절도 몇군데 보인다. 예를 들면, 하루키가 방겔리스에서 풍로를 빌려, 생선을 굽는 장면에서 방겔리스가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은 생선먹는 법을 몰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김난주 씨는 원서에 있는 '득의'(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 모른다)를 '우쭐해 하며'로 번역했는데, 윤성원 씨는 이 부분을 생략했다. 이런 대목이 몇군데 발견된다.

또 사소한 부분에서도 조금씩 틀리다. 윤성원 씨가 최대한 매끄럽고 우리말로 의역을 했다면 김난주 씨는 약간 거칠다는 느낌이 드는 직역스타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너무 다듬었다는 느낌이 드는 윤성원 씨의 글보다는 생생한 느낌이 살아 있는 김난주 씨의 글이 좋다. 이것은 어디까지 취향의 문제이니 깔끔하게 다듬하진 의역스타일의 글이 좋다면 윤성원 씨 번역을 읽으면 되고, 원문의 단어를 직역스타일로 옮긴(김난주 씨는 거의 단어 배열도 원본과 동일할 때가 많다.) 것이 좋다면 김난주 씨 것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문학사상사 본을 보면서 조금 눈에 거슬렸던 것 하나. 책 초기에 하루키가 살 집을 지도로 그려서 보여주는 '양송이' 그림이 있는데, 페이지 문제인지, 그림이 원래 있을 자리보다 몇 줄 밑에 들어가 있었다. 차라리 몇칸을 비우더라도 원래 있을 자리에 지도를 넣어주는 것이 독서에 훨씬 좋은데 말이다. 있던 자리에 그림이 없어서 꽤 당황했다.

PS. 그런데 예전에 김난주 씨가 번역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페다 치즈'가 도대체 뭘까? 체다 치즈는 알겠는데... 그냥 치즈의 한 종류인가? 일본어 원어로도 페다 치즈라고 표시가 되어 있던데...

PS. 오스트리아의 '굿 다이'..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아마도 오스트레일리아의 '굿 다이'의 오기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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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9-1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다 치즈처럼 치즈의 한 종류래요. ^^

12) 페다(Feta) - 시큼하고 강한 맛과 짠맛을 가지고 있으며 -1∼1℃로 3개월 장기보관 가능하고, 얼리지 않는 것이 좋다. 손으로도 잘 부서지므로 패스츄리나 빵 반죽에 넣어 함께 굽거나 고기스튜 야채수프에 넣기도 하고 계란과 함께 섞어 요리하기도 한다.

panda78 2004-09-1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페타 레인보우 피자니 뭐니 그런 것들 많이 보이던데, 그 페타가 페다 치즈인 것 같네요. ^^;;

 

 


 


yukineco 2004-09-1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그렇군요. 판다 님 감사 ^^
 

처음에서 중간까지는 영화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한적한 노르웨이의 바닷가 마을, 엄격한 청교도적 윤리 하에 회색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곳에서 정말 행복해하며 살고 있다. 아토스 섬에 사는 남자 수도사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두 자매에게 다가오는 각각의 첫사랑. 그 첫사랑은 이야기의 주요한 동인이다. 바베트가 오게 된 것이 동생의 첫사랑 때문이었고, 이야기를 한결 윤기있게 하는 장군은 언니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바베트. 그녀는 진정한 예술가의 힘으로 다툼과 갈등이 심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영화와는 크게 다른 점은 바베트라는 인물이 전혀 다른 느낌었다는 것. 영화 속의 바베트는 다소곳한 느낌의 부인으로 보다 금욕적이었다면 책 속의 바베트는 화려한 원색의 느낌이다. 불꽃같이 타오르고 진정한 예술을 알아보는 능력과 타인을 이해하는 포용력, 거기다 인내심까지 갖춘 한상궁같은 인물이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 예술가는 가난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들은 범인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복권으로 당첨된 만프랑을 아낌없이 만찬에 쏟아부은 바베트는 자신을 동정하는 자매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바베트의 홍조 띤 얼굴. 그리고 그 자신감 넘치는 몸가짐. 정말 너무 매력적이다. 나도 이렇게 절도있고 열정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베트의 만찬은 기독교의 성찬식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즐겁게 마시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성스러웠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영달만을 쫓아왔던 장군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했던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때로 한 끼의 식사란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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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리는 없겠지만, 출판사에서 꼭 짜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주제의 책이 한꺼번에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올 하반기에는 교실문제를 다룬 책이 4권이나 나왔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동화 2편과 비롯하여, <있잖아요, 민들레 선생님>, 그리고 이 책까지. 하이타니 겐지로는 한국에도 워낙 유명한 사람이지만, 이 책을 쓴 고토 류지나 <있잖아요..>를 쓴 미야가아 히로도 모두 일본에서 교육관련 동화나 글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 책은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인터뷰해서 쓴 책답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교실 문제를 풀어간다. 모범생, 공부에만 관심이 있는 아이, 집안 문제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 선생님을 쫓아낸 아이. 오늘 날 우리 교실의 모습을 보는 듯 생생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면,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교육에 관한 한 나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긍정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 위의 이야기 속에서는 단 한 명의 선생님이 교실을 구한다. 그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는 '불가사리'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애들은 운좋게 썰물인 해변에서 바다로 되돌려진 불가사리들이다. 많은 아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감동'은 하겠지만 자신의 현실에는 별도움이 못된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경쟁하도록, 누군가를 낙오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성적이 없는 학교가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사회가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물론 이것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가 되지 않으면 -뭐 인디언 사회같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교실의 문제를 인격자인 선생님에게 모두 다 짊어지우는 것도 너무 말이 안된다. 선생님도 인간이고, 봉급 생활자다. 결국은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한 교육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열두 살의 전설>에 등장하는 릴라 선생님이나, <너는 닥스 선생님이 싫으냐>에 등장하는 닥스 선생님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 긴긴 학창시절을 회고해 보아도 그다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없다. 그래서 싫다는 것이 아니다. 별로 기억에 안남는다는 것은 무난한 선생님들과 하루하루를 보냈다는 거니까.

교실동화의 한계는 바로 교실의 문제를 모두 '선생님과 아이들의 힘'으로 풀려고 하는 데에 있다. 물론,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잘되었다는 이야기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좋은 선생님들이 가뭄에 콩나듯 있긴 하다. 하지만, 교실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전쟁은 좋은 선생님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미 곪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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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가치를 전복성이라 한다면, 이 책을 쓴 나피시 교수가 처한 처지는 정말 절묘하기 그지없다. 회교원리주의자에 의해, 여성들에게 다시 차도르가 씌워지고, '사과를 유혹적으로 베어물었다'는 이유로 여대생들을 억압하는 테헤란의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 그리고 나피시 교수가 모여앉아 금지된 소설들을 읽는다.

소설을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들은 작품을 완성한 순간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버린다. 작품은 결코 작가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다. 평론가들과 같은 전문적인 분석가들에 의한 공인된 해석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교과서에 실리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리그이며, 그들만의 세계이다.

한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잡혀 읽히는 순간 그 책은 읽는 사람의 경험 체계 속에서 재의미화된다. 이 책은 단순히 독후감이 아니다. 억압적이고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작품은 제각기 또다른 의미를 독자에게 제공하고, 삶의 조건들을 반성하고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이 책의 제목에 테헤란과 롤리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이 워싱턴이나 뉴욕 혹은 런던과 파리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면 그저 평범한 감흥 정도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제목부터 얼마나 전복적인가. 테헤란과 롤리타. 후세인과 미국만큼이나 안맞는 궁합이다. 차도르를 벗고 그들만의 안식처에서 여자들을 롤리타를 읽으면서, 험버트가 소녀 롤리타를 자신의 환상에 끼워맞추려고 했던 것은,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여성들을 그들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것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모두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부서진 과거를 애처롭게 끼워맞추려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여성들은 롤리타와 험버트의 관계를 통해 그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남성적 권력의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롤리타>,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까지 모조리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절망적이라면 끝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소설을 읽었던 이유는 뭘까 생각하면서. 예술은 무엇가 대항할 대상이 있을 때 더욱더 강하게 타오르는 것 같다. 창작을 하는 사람도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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