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중국인 지주네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중이다. 외출하고 돌아온 지주에게서 여인은 아들의 처형 장면 소식을 들었다. 지주는 자기의 아이까지 밴 여인과의 관계에 혐오를 느끼며 여인을 내쫓아 버린다. 지주가 본 공산주의자 처형 장면은 이 아주 공들여 묘사되고 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지주, 그리고 그 묘사를 읽는 나, 를 생각하다가 수전 손택을 떠올렸다.

 

친구와 교외에 나갔다가 공산당을 죽인다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뒤를 따라가서 들여다보니 벌써 십여 명의 공산당을 죽이고 꼭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좀더 빨리 왔더라면 하고 후회하면서 사람들의 틈을 삐개고 들어갔다. 마침 경비대에게 끌리어 한가운데로 나앉은 공산당은 봉식이가 아니었느냐!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나 눈을 비빈 후에 보았으나 똑똑한 봉식이었다. 전보다 얼굴이 검어지고 거칠게 보이나마 봉식이었다. 그는 기침을 칵 하며 봉식이가 들으리만큼 욕을 하였다. 그리고 행여 봉식이가 돈을 벌어가지고 어미를 찾아오면 자기의 생색도 나고 다소 생각함이 있으리라고 하였던 것이 절망이 되었다. 

누런 군복을 입은 경비대원 한 사람은 시퍼런 칼날에 물을 드르르 부었다. 그러니 물방울이 진주같이 흐른 후에 칼날은 무서우리만큼 빛났다. 경비대원은 칼날을 들여다보며 슴벅 웃는다. 그리고 봉식이를 바라보았다. 봉식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도 기운 있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입 모습에는 비웃음을 가득히 띠고 있다. 팡둥은 그 웃음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공산당에게 위협을 당하던 그 순간을 얼핏 연상하며 봉식이가 확실히 공산당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자 칼날이 번쩍할 때 봉식이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느새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선혈이 솨 하고 공중으로 뻗칠 때 사람들은 냉수를 잔등에 느기며 흠칫 물러섰다. (334-335)

 

책을 읽다가 끔찍한 처형 장면에 책장을 덮고, 한참을 찜찜해 한 적은 역시 최근의 위화의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중국의 그 유명한 처벌을 내리고 있었다. 아, 기억만 떠올려도 손가락이 저릿하게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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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00. 소금 (강경애)

 

질기고 질긴 생명력으로 가족들의 죽음을 겪어내는 이 여인, "그"의 "배고픔"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배고팠던 고향에서도 넉넉했던 소금이, 만주에서는 너무나 비싸서 된장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이념 투쟁에, 중국과 일본, 지주에 치여서 남편과 장남도 잃고 마는데 그들의 죽음이 그저 휙, 한 줄로, 마치 날이 선 칼처럼, 아니면 거짓말처럼 이 여인 "그"를 베고 지나간다. 죽고 싶다고 말을 해대지만 그는 간이 맞는 장을, 냉면을,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미역국을 먹고 싶다. 그리고 생명의 밑간을 맞추는 소금을 지고 강을 건너서 왔는데, 아, 식구들이 다 죽어버린 이 마당에 불현듯 그에게도 무슨 깨달음이 절실한 배고픔 만큼이나 올까. 처절한 그녀의 삶에서 자꾸 최서해의 소설을 떠올렸는데, 황석영 선생님도 그러셨다니 으쓱, 하고 고개에 힘이 간다.

 

그는 무심히 만져지는 소금덩이를 입에 넣으니 어느덧 입안에는 군물이 스르르 돌며 밥이라도 한술 먹었으면 싶게 입맛이 버쩍 당긴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침을 두어 번 삼킬 때 소금이란 맛을 나게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나 소금이 들지 않으면 맛이 없다. 그렇다 하였다. 그때 그는 문득 남편과 아들딸이 생각나며 그들이 있으면 이 소금으로 장을 담가서 반찬해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그러나 그들을 잃은 오늘에 와서 장을 담글 생각인들 할 수가 있으랴! 그저 죽지 못해 먹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하니 자신은 소금 들지 않은 음식과 같이 심심한 생활을 한다. 아니 괴로운 생활을 한다. 이렇게 괴로운...... 하며 그는 머리를 슬슬 어루만졌다. 머리는 얼마나 이그러지고 부어올랐는지 만질 수도 없이 아프고 쓰리었다.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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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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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1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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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25 12:25   좋아요 0 | URL
그럼 잘 됐네요!!! 막내에겐 미안하지만 우리 만나서 실컷 책 얘기 사는 얘기 하자구요~~~~^^*
보슬비님도 유부만두님 글 읽고 함께 만나고 싶다시네요~~~^^* 그럼 12일로 해서 장소는 두분이 결정해도 좋고 아니면 보슬비님이 결정하는 곳에서 만나도 좋을 것 같아요~~^^*

2015-02-25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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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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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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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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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7 0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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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7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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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00. 골목 안 (박태원)

분명 식민지 시대의 서울 모습일텐데, 언뜻 오발탄과 난쏘공, 그리고 현대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후원회 모임에서 자식들 이야기를 풀어내는 노인의 모습에 마음이 헛헛하다.
황석영 선생님의 해설에서 작가 박태원의 두 기둥, 근대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비를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박태원의 대표작 구보씨의 일일, 도 고작 식민지의 어항 속을 헤엄치는 모습이라니, 이 비유와 더불어 병마에 지친 그의 말년이 더욱 슬프다. 그가 남한에 두고 간 아들에게 북에서 박태원의 처가 된 권영희가 쓴 편지는 매우 서글프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이태준도 그러했지만 박태원 역시 근대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지 근대를 비판, 고통받는 당대의 민족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는 모더니스트로 출발하여 리얼리스트로 마친 자기모순이었으나, 어쩌면 이 땅에서 글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운명이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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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12)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122)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문학은 자유이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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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00.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여태껏 발췌문 정도만 읽었던 수전 손택, 자유와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매서운 발언을 하는 그녀. 그녀의 사망후 여러 권의 책이 더 나왔지만, 나에겐 이번이 처음.

팟캐스트 방송에서 "쉽습니다. 겁내지 마세요" 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수전 손택은 처음부터 주장하는 바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걸어간다. 그리고 그녀가 인용하는 이론서 내용들은 괜한 말장난이 아니라 내용을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진을 통해보는 타인의 고통, 그 고통을 즐기는 혹은 멀리 떨어뜨려서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우리'에 대한 부분도 좋았지만, (사실, 손택의 '우리'는 미국 백인 지식인층에서 그다지 넓혀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우리말 번역본으로 읽었다하더라도 손택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은건가, 하는 속좁은 생각도 든다)  "부록"에 실린 911이후 그녀가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발언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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